접시꽃 그리움
오월 끝자락 주중 목요일이다. 날이 밝아와 자연학교 등교는 여전히 아침 이른 시각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이웃 동 언덕에 한 노인이 가꾸는 수국은 며칠 전부터 개화를 시작했다. 밤새 꽃송이가 어제보다 더 벙글어 화사해져 간다. 수국 동산 건너편 뜰에서 꽃을 가꾸는 꽃대감 친구를 비롯한 밀양댁 안 씨 할머니와 두 아주머니 수고 덕분 다른 주민들은 눈이 호사를 누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난 버스 정류소에서 창원역을 거쳐 가는 102번 타고 가다가 소답동에서 내려 2번 마을버스로 갈아탔다. 6시 반 창원역을 출발한 첫차로 교외의 소규모 회사나 비닐하우스에 일을 나가는 이들과 섞여 갔다. 도중에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은 근교 들녘에 소재한 고교생이었다. 나도 구분 짓자면 자연학교 학생 신분으로 배낭 속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두 권 들었다.
도계동 만남의 광장에서 동읍 행정복지센터를 지나기까지 미니버스에는 빈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 승객이 서넛 되었다. 나는 창원역에서 가까운 정류소에서 탄 우선권으로 앉아 가게 되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하루를 고단하게 보낼 회사원이나 하우스 일꾼들은 나와 견주어 노동의 강도가 더 센 현장 근무이거나 어린 학생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학생으로서는 같은 처지였다.
버스가 주남저수지를 비켜 간 판신마을을 지날 때 내렸다. 거기는 들녘 가운데 마을이라 평소 승객이 내리는 이가 드문 정류소에 내렸으니 기사나 타고 간 승객들은 금세 하차한 이를 궁금하게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논밭이 펼쳐진 들녘에서 동판저수지 둑길로 올라섰다. 저수지 바닥에서부터 둥치가 물에 잠겨 자라는 갯버들은 잎사귀가 무성해 남방의 밀림을 연상하게 했다.
지난번 동판지 둑길을 걸을 지날 때는 길섶은 자라던 잡초는 예초기로 정리하고 제초제를 뿌려 말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었다. 무점마을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으로 꽤 길고 긴 둑길의 길섶은 해마다 코스모스를 키워 가을이면 꽃이 만발했다. 오래전 초기 몇 해는 현지 주민 한 사람이 정성껏 돌보던 코스모스 꽃길이 외부로 알려졌는데 근년에 와서는 행정 당국 지원이 따르는 듯했다.
지난봄 한 번은 동읍 행정복지센터에서 무점마을을 지나 동판지 둑길을 걸어 주천강 강둑을 따라 가술까지도 걸었다. 꽤 먼 동선으로 서너 시간 걸려 가술에 닿으니 점심나절이었다. 이후 판신마을에서 동판지 둑길로 올라 주천강 둑으로 두어 번 더 걸었다. 이번에도 배수장 수문에서 진영으로 흘러가는 주천강 둑으로 걸었다. 둑길은 봄부터 산책로를 정비 중인데 마무리 단계였다.
둑에서 내려다보인 냇바닥에는 어리연이 작은 잎을 펼쳐 자랐다. 넓은 들녘 일부 구역 경작된 보리는 수확을 마쳤고 비닐하우스는 철골을 뽑아 모를 내려고 무논으로 다려졌다. 이앙기가 굴러가면서 어린 모가 줄지어 심어진 논배미도 보였다. 천변을 따라 몇몇 농가와 창고가 들어선 남포마을에서 들녘을 가로질러 상등마을로 갔다. 멀리 주남저수지 둑과 백월산 봉우리가 아스라했다.
대산면 소재지 가술에 이르니 9시가 되지 않은 때라 국도변 카페에 들어 커피를 시켜 잔을 비우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뒤 카페에서 나와 건너편 노인대학을 겸한 마을도서관으로 향했다. 열람실로 들어 서가에서 몇 권 책을 골라 의자에 놀러 앉아 서너 시간 독서삼매에 들었다. 이전에도 그와 유사한 책을 몇 차례 읽은 바 있는 우리나라 여러 사찰을 순례하고 남긴 답사기였다.
때가 되어 열람실을 나와 식당을 찾아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과제를 수행했다. 국도변 외딴 농가 뜰에 접시꽃이 만발했다. “첫해는 싹을 틔워 더디게 자라더니 / 이듬해 가닥 늘려 잎줄기 세를 불린 / 아욱과 두해살이는 부용 근화 닮았다 // 꽃잎이 펼쳐 감싼 화심에 암수 꽃술 / 그리움 채우려나 옴팍한 접시에다 / 뙤약볕 뜨거울수록 벌나비를 부른다” ‘접시꽃 그리움’을 남겼다. 24.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