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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생가와 매봉교회 입구 -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청주 육거리 시장에서 증평시장을 거쳐 병천으로 가는 길에는 늘 이곳 유관순 생가 앞을 지나게 된다
3월로 접어드는 계절이라고는 하지만 깜짝눈이 내린데다가 용두리의 허허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한 겨울의 칼바람을 방불케 했다
병천면 용두리는 조병옥 박사 생가와 유관순 열사 생가가 있는 마을이기도 한데
해방후 내무장관을 지냈던 조병옥 박사와 3.1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 열사는
이 마을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조병옥 박사의 부친 조인원과 유관순 열사의 부친 유중권은 3.1운동 당시에도
이 용두리 마을 유관순 집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거사를 논의했던것으로 알려졌다
매봉교회와 유관순 열사 생가 -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매봉교회와 유관순 열사 생가
3.1절이 이틀 앞으로 바짝 다가오는 날이었지만 깜짝눈이 내리고 들판 바람이 제법 매섭게 불어오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용두리 마을은 한산하다 못해 깊은 적막속에 빠져 들고 있었다
저 매봉교회 왼쪽으로는 유관순의 동생인 유인석씨가 생가지를 관리하며 살았었다는 고택이 있는데
우선 그곳으로 발길을 돌려 봤다
유관순 열사 생가 관리사 (柳寬順 烈士 生家 館理舍)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05
1919년 4월 1일 아우내독립만세운동 이후 유관순 열사의 가족은 거처할 곳이 없이 생활하던 중
정부에서 1977년 본 건물을 한옥으로 건축하여 열사의 가족에게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를 관리하면서
거처 하도록 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남동생인 유인석씨의 가족이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비어 있다.
- 이상 유관순 생가 안내문판에서 옮겨 온 내용 -
맨 처음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불길처럼 번져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을 무렵, 이곳 병천 아우내장터에서는 한달 후인 4.1일날 3천여명의 군중들이 장터에 모여 만세운동을 했었다그때 몇몇은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죽고 일부는 재판받고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그 당시
일제는 이곳 병천면 용두리에 있던 매봉교회와 유관순 가택에 불을 질러 버렸다
군중들이 독립운동을 거사하기 위해 매봉교회에 몰려들었고 또 유관순의 집에서는
태극기를 그려 비밀리에 유포시켰다는 이유 때문이였다
그리고 일본 헌병들도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같은 운동권 사람들로 취급하여
특별관리를 받는등,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이 감시 당하며 모든 매사에 불이익을 당하는 수모를
격었다
유관순의 남은 가족들은 살던집이 일본 헌병들에 위하여 불태워지고 매봉교회마져 불에타
없어지자 거처할곳이 마땅치 않아 떠돌며 생활을 했었다. 그러던중 1977년 위의 건물을
한옥으로 건축하여 유관순의 남동생인 유인석씨 가족을 이곳에서 사택을 관리하며 살게 하였다
유관순 열사 생가지 (柳寬順烈士 生家址)
사적 제 230호
소재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38 - 1
이곳은 1902년 12월 16일 유관순열사가 태어난 곳이다. 열사는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만세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 후 고향으로 내려와 1919년 4월 1일 3천여 군중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경성복심법원 최종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중에서도 끊임없는 만세시위를 하다가 갖은 폭행과 고문에 못 이겨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고
열사의 애국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1991년 옛 집터에 생가를 복원 정비 하였다.
생가 옆에는 기념비와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 이상 유관순 생가 안내문판에서 옮겨온 글 -
유관순 생가 대청마루
건넌방에서 태극기를 그리고 있는 사촌언니와 남동생들
태극기는 1919년 당시의 태극기이며 유관순이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고 기록된
경성복심법원 재판 기록문에 근거하여 연출된 형상들이라고 함
왼쪽부터 유관식(유관순의 남동생), 유예도(유관순의 사촌언니), 유관순, 유인석(유관순의 남동생)
1919년 3.1운동 당시의 태극기 (가운데)
중앙에 있는 태극기는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사용한 태극기이며 지방마다 모양이 다르게
그려졌다고 하는데 이유는 태극기 제작 기준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부는 1949년 10월 15일에 국기 제작법을 제정하여 현재의 태극기로 확정하였다.(오른쪽 태극기)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 사람들 - 병천면 용두리 유관순 생가
이승만 통치시절 야당인 민주당 당수였던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은
3.1 만세운동 당시에 유관순 부친인 유중권과 머리를 맞대고 거사를 논의 했었던것으로 알려졌다
왼쪽 부터 이소재(유관순의 모친), 유중무(유관순의 숙부), 김구웅(교사)
조인원(마을유지), 유중권(유관순의 부친)
오른쪽 머리를 숙이고 있는 사람이 조병옥 박사 부친인 조인원이고
오른쪽 앞 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이다
병천면 용두리 유관순집에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 사람들
유관순 생가 사립문 앞으로 넓게 펼쳐진 용두리 들판
유관순 생가 앞으로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나 있는데 왼쪽 방향으로 약 2Km정도만 가면
유관순 가묘가 있는 유관순 사당이 나오고 그곳에서 다시 1Km 정도만 가면
3.1운동 당시 만세 운동을 했었던 병천 아우내 장터가 나온다
유관순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와 유관순열사 생가터의 외양간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7일 이곳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나
집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던 매봉교회와 어린시절부터 인연을 맺었었다
매봉교회를 통해 당시 기독교 계열의 학교였던 이화학당에 입학 하였는데
이화학당 재학중인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중심으로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유관순 열사는 서울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에 가담 했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일 만세 운동이 전국적 시위로 확산되자 일제는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은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와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 했었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시작된지 한 달 뒤인 4.1일,
유관순은 사람이 많이 몰리는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 되었다
그리고는 곧 바로 공주 감옥을 거쳐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중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또 다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숨졌다
유관순 열사 생가터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는 매봉교회
유관순은 매봉교회에 모인 어른들 앞에 독립선언서를 내놓고 서울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에 대한
일들을 전하며 만세운동을 촉구 했었다. 그 결과 고향인 용두리 매봉교회는 전 교인이 만세운동에
참여 하기로 하였고 거사장소와 날자는 병천 아우내장터의 장날이었다
유관순은 병천면내 교회와 학교등을 찾아 다니며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 하도록 설득하였고
밤이면 집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그렸다
병천장이 서는 아우내 장터 중앙의 병천슈퍼 - 충남 천안시 병천면
드디어 1919년 4월 1일 병천장날 (지금 현재도 끝자리가 1일과 6일날은 병천장이 꼬박 섬)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장터는 만세 소리를 외치는 사람들로
넓은 장터를 가득 메웠고 일본헌병 병천분소에서 헌병 몇몇이 달려왔었지만
3천여명이나 되는 만세 행렬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처음엔 평화적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운동이 총칼로 무장한 일본 헌병의 발포에 몇몇이 죽어 나가자
시위군중들은 흥분하여 폭력적으로 변해 버렸다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몇몇 지도자들이 또 일본 헌병의 총칼에 쓰러지자 아우내장터의 시위군중들은
흥분이 극에 달했으며 일부 군중들은 무장한 일본 헌병을 결박하고 병천 헌병분소를 점령 하였다
그때 병천 헌병분소에 있던 헌병들은 천안 삼거리에 주둔하고 있는 천안 헌병본부에
다급하게 지원을 요청, 천안 헌병본부의 헌병들은 중무장을 하고 몇대의 트럭에 나누어 탔다
그리고는 곧바로 병천 아우내 장터에 도착하여 닥치는대로 총과 칼을 휘둘러
수 많은 사람들이 일본 헌병의 총칼에 무참하게 쓰러져 갔다
일본 헌병에 위하여 불태워 졌던 당시의 매봉교회 -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매봉교회는 1919년 독립 만세운동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불태워졌으나,
해방뒤 다시 재건하여 유관순 기념교회로 지정돼 지금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 매봉교회 지하에는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에 다니던 시절부터 독립만세운동 주동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생활 하던때 까지의 관련 자료 몇 점이 전시되어 있다
3.1만세 운동 당시인 1919년 서울 충무로 거리 일본인 상가들 - 병천 매봉교회 소장 사진
1919년 서울 종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시민들 - 병천 매봉교회 소장 사진
1923년 9월 1일, 관동 대지진때 한국인들을 학살하는 장면들 - 병천 매봉교회 소장 사진
3.1운동이 지난 4년뒤인 1923년 도쿄 부근의 간토지방은 대지진으로 궤멸적 피해를 입고
혼란스러워지면서 내무성 계엄령이 내려졌다
그리고는 한국인이 습격했다고 오보하여 일본들이 한국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게 하였다
한국인 습격설에 흥분한 일본인들은 죽창, 몽둥이, 일본도 등을 들고
닥치는대로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 하였다
1919년 당시 신동아 일보에 게재 되었던 유관순 수감 장면 - 병천 매봉교회 소장 사진 병천 헌병분소에서 지원 연락을 받은 천안 헌병본부 헌병들은 총 칼로 중무장을 하고
속속 병천 아우내 장터로 집결, 총을 쏘아대며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 아비규환속에 약 50명 정도가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죽었는데 그 죽은 사람들중엔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과 유관순의 모친인 이소재도 섞여 있었다
유관순이 죽은 아버지 어머니의 시신을 끌어앉고 오열하고 있을때
일본 헌병들은 유관순을 천안 헌병 분소로 끌고 갔다
유관순은 천안 헌병본부로 끌려가면서도 길에서 사람만 만나면 독립만세를 외쳤다
공주로 압송되는 중에도 여전히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때마다 모진 매를 맞았으나 굽힐줄 모르고 독립만세을 불렀다
그때 나이 17살이었던 유관순은 아버지 어머니가 일본 헌병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을때부터
이미 자신의 생도 포기한체 일본 헌병들에 맞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공주 검사국에 기소되어 공주 지방법원으로 넘어가 재판을 받고 있던 17살 유관순은
재판도중에도 투쟁을 계속 하였다
이 재판에서 검사국은 7년형을 구형 했었는데 법원은 의외로 3년의 징역형을 선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검사에 위하여 항고가 되었지만 당시 경성 복심법원은 원심대로 징역 3년을 확정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가 일본 헌병들의 총탄에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17살 유관순은
재판때마다 번번히 재판을 거부 하였다. 아마 자신도 이미 생을 포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관순 수형 기록표 - 병천 매봉교회 소장 사진
일본 재판정에서 재판관들이 재판을 거부하는 까닭을 묻자 유관순은 이렇게 말했다
"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그 백성을 잡아다 재판하는것은 부당한 행위이며
나는 우리 조국의 독립을 외쳤을 뿐이니 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수 없다 "
이 말에 일본 재판정은 법정 모독죄를 가중하여 다시 징역 7년을 선고 하였다
유관순이 수감 생활을 했었던 당시의 서대문 형무소 - 병천 매봉교회 소장 사진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우내 장터에서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지켜본 17살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틈만 나면 독립만세를 외치다 가혹한 형벌을 받아 온 몸은 망신창이가 되곤 했었다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감옥에서 유관순이 사망했음을 알리는 조선총독부 관보
(병천 매봉교회 소장 사진)
유관순 시신을 담았던 당시의 석유상자 - 병천 매봉교회 소장 사진
유관순의 오빠가 먼저 옥중에서 풀려 집에 와 있었는데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체 인수 통지가 날라왔다
처음에 일제는 유관순 시신을 인도하는것도 거부 하다가 나중에 외국인 월터 학당장이
전 세계에 이같은 일본의 비 인도적인 만행을 호소하자
일제는 마지못해 유관순 시신을 석유상자에 담아 보냈던 것이다
이때 유관순의 오빠는 석유상자를 열어보고는 너무 놀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석유상자속엔 자신의 여동생인 유관순의 시신이 토막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중이었는데 과연 어떤 형벌을 받았었기에
시신이 저토록 토막나 있었을까 ?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에게 어떤 형벌을 가했는지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다
유관순이 다녔던 이화학당 - 병천 매봉교회 소장 사진
서대문 형무소 수감생활 1년 6개월째로 접어들 무렵, 유관순의 나이는 18세였다. 유관순 열사의
시신이 담겨져 있는 석유상자는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스승들과 동문들에 의하여 영결 되었다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동창생들이 태극기를 씌워주고 정동 예배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리고는 이태원의 어느 공동묘지에 안장을 시켰는데 얼마후, 동창생들이 묘지에 찾아와 보니
묘지는 흔적도 없이 파헤쳐져 있었고 시체는 그 행방이 묘연한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지금 현재까지도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누가 파헤쳐 갔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유관순 열사를 추모 하러 오는 사람들로 인하여
제 2의, 제 3의 3.1독립운동으로 다시 확산되는것을 두려워 했었던 사람들의 소행이라는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병천면 소재 유관순 묘지는
시신이 없는 묘와 묘비만 세워져 있는 것이다
재학시절 이화학당에서 찍은 유관순 사진 - 병천 매봉교회 소장 사진
하루해가 저물어 가는 유관순 생가와 매봉교회 -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1919년 4월 1일 병천 장날, 유관순 열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아우내 장터
1919년 4월 1일 병천 장날, 유관순 열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아우내 장터
(충남 천안시 병천면 소재)
가곡바이올린2 - V.A. - 옛 동산에 올라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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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물밖으로 뛰어오른 망둥이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나먹통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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