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아니 먹고 간에 내 '먹었노라' 아뢰었으면 자네 감히 다른 말을 할까 싶은가, 물러가소"
- 한중록 중에서 -
<1차 자살시도>
나주 벽서 사건이 진정되고 천의소감이 완성된 11월.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 병이 들었다. 생모가 병이 들었으니 아들인 사도세자로서는 당연히 생모를 뵈러 가야했다. 그런 까닭에 사도세자는 선희궁이 살고 있던 창경궁의 집복헌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마침 화완옹주(1)도 집복헌에 와 있었다. 그리고 영조 역시 선희궁의 상태를 보러 집복헌으로 왔다. 그리고 대노했다.
영조에게 편집증이 있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이미 그 전의 글에서 말했지만 그런 편집증 때문에 영조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영조가 본 광경이 자기가 옹주들 중에서 가장 아끼던 화완옹주와 이미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사도세자가 가까이 있는 광경이었으니 영조의 평소 상태 상 진노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며 세자에게 "빨리 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놀랍고 당황한데다 두려웠던 세자는 높은 창을 넘어 자신의 처소로 달아났다. 왕의 진노 때문에 일국의 세자가 창문을 넘어 도망친 것이었다!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영조는 세자에게 동궁 밖을 벗어나 청휘문 안으로 들어오지 말고 서경의 태갑(2)편이나 읽고 있으라고 말했다. 이쯤 되자 사도세자는 서럽고 원통할 수 밖에 없었다. 단지 어머니 병환 뵈러 갔고 거기서 우연히 화완옹주와 가까이 있게 된 것인데 그것 때문에 꾸중을 제대로 듣고 창문을 넘어야 했으니... 결국 사도세자는 "자결하겠노라!", " 약을 먹겠노라!" 하였지만 어떻게 겨우 진정되었다. 하지만 이미 부자간의 사이가 파국에 가까웠다는 것은 확실해보였다.
-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는 이미 파국으로 치달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에 따라 사도세자의 울분도 커져갔다. -
<2차 자살시도>
부자 간의 관계가 험악해진 것은 분명해보였다. 1756년 1월 1일. 즉 설날에 영조는 신하들로부터 '체천건극성공신화'라는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애초에 영조에 불길한 자리에나 참석해야 될 존재로 여겨진 사도세자는 이 길한 자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이렇게 험악해진 부자관계. 그리고 불같이 꾸중하는 아버지 영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세자의 병은 점점 심해졌다. 세자 수업인 서연을 드물게 받는 것은 그렇다 칠 수도 있다. 애초에 사도세자 자신이 그렇게 공부를 좋아한 것도 아니었고 이미 1754년즈음 부터 서연은 열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물론 이 때도 이미 부자관계는 좋지 않았을 뿐더러 광증 역시 존재했었다고 봐야 될 시기이다.)
그런데 이쯤 들어 세자는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즈음에 취선당에 음식을 만드는 밧소주방이 있는데 그 중 한 집이 깊고 고요하다며 그 곳에 많이 머물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쯔음 되면 사도세자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5월 1일 사고가 터졌다.(3) 영조가 마침 사도세자가 있던 낙선당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 때 사도세자는 하필 막 자다가 겨우 일어나기라도 했는지 세수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고 옷 입은 것도 단정하지 않았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이런 몰골을 보고 사도세자가 술을 마셨다고 단정지었다. 그것도 자신이 내린 금주령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영조는 즉위 후 금주령을 내린 이래 영조 5년에 잠시 풀었다가 7년에 다시 시행한 이래, 금주령을 해지하지 않았다. 단지 1755년에 제사, 연례, 호궤(4), 농주(5)만은 허락한다는 명을 내린 상태였다. 그리고 이 경우를 제외한 음주는 엄히 금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영조는 바로 사도세자를 뜰에 세워놓고 누가 술을 들였는지 추궁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으니 사도세자는 술을 안 마신 상태였다.
그렇지만 세자가 뭐라고 하던지 간에 영조는 이미 사도세자가 술을 마셨다고 확신했다. 세자는 영조가 두려워 변명도 못하다가 결국 거짓 자백을 하며 '밧소주방 큰내인 해정이가 주더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사도세자가 아기일 때 부터 돌보던 최상궁이 황당하여 영조에게 술냄새가 나는지 맡아보라며 항변하였다. 그 때 하도 원통해서 그랬는지 세자는 내가 먹었다고 아뢰면 자네 감히 다른 말을 할까 싶은가 하면서 물러가라고 하였다. 한편 어쨌든 자백(이라 쓰고 거짓 자백이라고 읽는다.)을 받아낸 영조는 거제도로 해정을 유배하고 춘방 관원들로 하여금 세자에게 훈계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억울해 하던 세자는 춘방 관원들을 보자 폭발하고 말았다. 이전까지 세자는 광증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알지 못했는데 이 일로 조정이 알게 될 정도였으니 그 때 얼마나 폭발했는지 알 만 했다. 세자는 춘방 관원들에게 부자 사이를 화목하게는 못하고 억울한 말을 들어도 한 마디도 아뢰지 않았다며 쫓아냈는데(6) 하필 그 과정에서 촛대가 쓰러지며 낙선당에 불이 났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불이 난 것도 개의치 않고 마침 덕성합 근처에서 마주친 대신들에게도 "너희들이 부자 사이는 좋게 못하고, 녹봉만 먹고 간언은 하지 않으며, 그러고도 입시를 하러 가니, 너희 같은 놈들을 무엇에 쓰리." 라며 호통을 쳤다. 불이 나자 혜경궁은 아들인 정조가 불이 난 낙선당과 가까운 관의합에 머물러 있기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세자의 광기가 이 순간에 폭발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폭발한 사람은 사도세자만이 아니었다. 영조 역시 폭발해버렸다. 낙선당에서 불이 났다는 것을 안 영조는 세자가 일부러 불을 지른 줄 알고 함인정에 여러 신하들을 모은 후 세자에게 니가 불한당이냐며 엄청나게 꾸짖었다. 결국 안되겠다 싶었는지 세자는 저승전 앞뜰에 있던 우물에서 스스로 떨어져 자살하려고 하였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이에 가까스로 구해내어 사도세자를 덕성합에 데려다놓았다.(7)
- 창덕궁 낙선재 우물. 정병설 교수에 의하면 저승전 우물이 여기라고 한다. 출처는 네이버 백과사전 -
이 사건 이후 사도세자는 점점 울화가 쌓였는지 광증이 더 심해졌다. 조정 신하들이 보는 가운데서도 과한 행동을 하고, 서연도 더 드물게 받고, 차대 때 신하들에게 정무 보고를 받을때나 몸을 겨우 움직였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영조가 거둥이라도 나가면 그 틈에 창덕궁 후원에서 활을 쏘며, 말 달리고 깃발, 창검을 가지고 내인을 데리고 놀면서 내관들이 군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이렇게 정사등에 흥미를 잃고 놀이에 빠진 것은 울적함을 달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그나마 좋은 일. 능행>
1756년 7월. 숙종의 왕비였고 이때는 왕실의 웃어른이었던 인원왕후가 칠순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영조는 늙은 선비들만 응시하는 기로과를 베풀며 후원에 잔치를 열었는데 무슨 일인지 사도세자로 하여금 잔치에 참석하게 하였다.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사실 이즈음은 세자에게 꽤 좋았던 시기였다. 영조가 꾸중을 잘 안 하는 것이었다. 영조가 의외로 조용했던 이유는 아마도 인원왕후의 칠순인데다가 화완옹주가 딸을 낳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에게 진정으로 기쁜 일은 따로 있었다. 8월 1일. 영조는 숙종의 무덤인 명릉에 거둥하게 되었는데 사도세자가 이를 수행하게 된 것이었다. 사도세자가 처음으로 능행에 따라가게 된 것이었다!
좀 황당한 이야기겠지만 사도세자는 사실 그 동안 영조의 능행에 한번도 참가하지 못했다. 간혹 종묘에나 가보았지, 밖을 나가보지 못한 것이었다.(8) 이에 예조에서 번번히 상소를 올려 능행에 따라갈 수 있게 하라고 상소를 올렸었다. 세자는 이때마다 매번 기대했으나 영조는 번번히 거절했고 세자는 슬퍼하는 일이 무슨 패턴물마냥 반복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에 안되겠다 싶은 선희궁이 영조가 가장 아끼던 화완옹주에게 영조에게 세자도 능행에 따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라고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사도세자는 처음으로 능행에 따라가게 되었다.
이에 크게 기뻐한 세자는 목욕재계를 하며 묘소에 참배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명릉으로의 능행은 거리상 하루치기 당일 거둥이었는데 기쁨으로 인해 화증이 내린 것인지 이 때는 전혀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것이라면 할머니 인원왕후, 왕비인 정성왕후, 생모인 선희궁, 그리고 자기 자식들에게도 거둥 와중에 편지를 보낸 것인데 이는 거둥을 나가도 궁궐의 안부를 확인하는 임금의 관행을 그대로 따라한 것으로 보인다. 즉 별 것 아니었던 것이다.
-능행에 처음 따라간 기쁨 탓인지 세자는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1) 한중록에서는 보통 정처로 표기되는데 정병설역 한중록의 오기인지는 몰라도 이 부분에 한정해서 정처가 아닌 화완옹주라고 표기되어있다.
(2) 태갑 : 상나라의 5대 임금으로 포악한 성격 탓에 개국공신 이윤에 의해 쫓겨났다가 3년간 반성한 후 이윤의 용서를 받아 다시 복위한 임금이다. 서경의 태갑편은 이 부분을 다룬 것이다.
(3) 한중록에서는 정확한 날짜 없이 5월이라고만 되어있으나 실록에는 낙선당의 화재와 해정의 유배가 5월 1일 기사에 기록되어있다.
(4) 호궤 : 병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는 것
(5) 농주 : 농사일을 할 때 일꾼 대접용으로 내놓는 술.
(6) 한중록에 의하면 관원 2명이 무엇이라고 아뢰며 썩 나가지 않아 세자가 화를 냈다고 한다. 관원 2명 중 한 명은 원인손이고 한명은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정병설 교수의 추측에 의하면 정조의 장인이자 자기 딸을 홍낙윤과 결혼시킨 김시묵이라고 한다.
(7) 실록에는 단지 낙상이라고만 기록되어있다.
(8) 이 종묘를 태묘라고도 하는데 이 문제로 정병설 교수와 이덕일이 논쟁을 벌인바 있다.
첫댓글 아 이거 볼수록 사도세자 짤이 가카를 닮은 것 같군요...ㅋ
에잉. 너무하십니다 그려. 저 상상화 가카보다는 더 나아요.
잠깐. 근데 이제 활동 재개하시는건가요?
롱기누스//ㅇㅇ
감히 가카의 서면상....아니아니 용안을 사도세자따위에 비교하다니!
아... 사도세자 엄청 불쌍하네;; ㅠ_ㅠ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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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나중에 뒤주에서 박차고 나올테니깐요.
안미치는게 이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