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1,1-19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15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고, 보시니 좋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마을에 들어가시기만 하면 병자들은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복음).
☆☆☆☆☆☆☆☆☆☆☆☆☆☆☆☆☆☆☆☆☆☆☆☆☆☆☆☆☆☆☆☆☆☆☆☆
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빛과 어둠, 하늘과 땅과 바다, 풀과 나무,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이르시자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간청하는데,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는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부터 교회는 한 주 동안 제1독서에서 창세기의 말씀들을 들려줄 것입니다. 창세기 첫 장은 글자 그대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첫 장이 그리는 세상은 한마디로 조화롭고 균형 잡힌, 잘 정돈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첫째 이유는 창세기 첫 장에 단 한 번도 부정의 낱말(‘아니오’)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에 맞서시는 하느님께서는 한 번도 부정의 말을 하시지 않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창조 이야기의 세상이 잘 정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두 번째 이유는 이 이야기 속에 후렴구처럼 이어지는 반복 구문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날”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가 대표적이고, 또 구약의 십계명이 열 가지 말씀인 것처럼 정확히 열 번 되풀이되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라는 반복 구절도 그러합니다. 열 번(완전 수)의 창조 말씀으로 세상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를 읽는 사람은 창조주 하느님의 평온함에 놀라고 우리가 그분의 유순함과 평온함을 본받도록 초대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학자들 사이에 완전히 의견 일치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1장 1절부터 3절을 하나로 묶어,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알리는 위대한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첫 절을 시간절로(종속절), 2절은 당시의 정황을 설명하는 삽입구로, 그리고 3절을 주절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 땅은 ‘토후’와 ‘보후’였다(땅은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다).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있어라(생겨라).” 이렇게 되면 창세기의 첫 세 구절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시작되었고,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가 “빛이 있어라(생겨라).”라는 첫 말씀으로 이루어졌음을 더욱더 강조하는 구절로 읽힙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를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을 비추는 참빛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입시다. 그분 말씀의 빛으로 하루를 더 온유하고 평온하게 살아 봅시다. “주님, 당신이 저의 등불 밝히시나이다. 하느님이 저의 어둠 밝혀 주시나이다”(시편 18[17],29).(정용진 요셉 신부)
☆☆☆☆☆☆☆☆☆☆☆☆☆☆☆☆☆☆☆☆☆☆☆☆☆☆☆☆☆☆☆☆☆☆☆☆
하느님 말씀이 담긴 성경. 그 성경의 첫 시작을 우리는 오늘 만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나온 세상과 인류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비교하자면 조금은 황당하고 비이성적으로 다가오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의 저자가 세상이 창조되는 그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록하거나,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증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신앙의 언어로 기록한 신앙 고백문입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의 정점에는 ‘창조’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힘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느님께서만이 ‘창조하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힘은 ‘말씀’으로 실현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는 것이지요. 창조의 재료는 오로지 ‘말씀’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말씀이 지닌 힘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첫 장면부터 하느님 창조의 힘과 그분 말씀의 힘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창조하신 이 세상에 대하여 하느님 당신께서 보시니 좋으셨다고 평가하십니다. 창조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 창조한 ‘세상’과 세상을 창조한 ‘말씀’을 마주합니다. 말씀이 창조한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말씀은 우리를 좋은 세상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화답송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신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보시니 좋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세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박형순 바오로 신부)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시자 사람들이 그 지방의 모든 병자를 그분께 데려다 놓았고,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병자들을 고쳐 주시라고 청하였으며,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 주신 기적은,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실 분, 곧 그리스도이시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말씀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따라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신 것은, 하느님 아드님으로서 하신 구원 행위이면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는 계시였습니다.
병자들을 포함해서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분께서 치유 능력을 지니셨음을 알고 있었기에 병자들을 고쳐 주시라고 청하였고, 병자들도 그분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댄 병자들은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활을 요약하는 오늘의 이야기 어디에도 그들의 믿음이나 신앙 고백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 바로 주님을 찾고 도움을 청하면서도, 그 순간이 지나면 주님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해 주셨는지 금방 잊어버리는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일상에서 우리에게 풍부한 은총을 내리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감사드리며,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
‘말’이 많은 세상입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정반대로 말 한마디가 사람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일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언어는 이토록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역사가 말해 주듯이, 독재자의 한마디가 수많은 민중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고, 정치인의 잘못된 판단과 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이 실직하고, 노동 인권이 무시되기도 하며, 개발 욕망에 물든 재력가들의 말 한마디에 아름다운 산야가 훼손되고, 부당하게 땅을 잃는 이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절대 악’이 판을 치는 세상일수록 약자들의 목소리는 공허해지고, 그들의 말은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기도 합니다.
유스티노 성인(+165년)은 그리스어의 ‘로고스(logos)’가 인간과 신을 매개해 주는 신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여, 그리스도를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 곧 로고스의 육화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언어에 담긴 폭력성을 넘어 ‘진리와 생명’을 담은 ‘신의 언어’를 목말라하는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창세기의 첫 장에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는 표현은 하느님 말씀이 지닌 창조의 힘에 대한 고백입니다. 말씀은 행위를 낳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선과 악을 낳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보시니 좋았다.”는 원초적인 생명을 창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생명의 말씀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보고, 치유받으려고 예수님께 달려간 이들은, 그분의 말씀 속에서 하느님의 치유와 생명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병든 자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치유를 청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하는 말들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분열시키며, 혼란을 가져온다면, 나는 치유를 청할 줄도 모르는 영혼이 병든 사람은 아닌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하느님의 사랑이 물상으로 드러난 것이 자연이고 내 목숨이다. 창조성과 건강성이 빛났으니 보시니 좋았다. 그러나 악마의 부추김으로 형제를 죽이고 이기와 탐욕으로 갈라져 싸우며 질서를 벗어났으니 질병의 고통이 왔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의 사랑인 창조성이 왜곡되고 타락된 현상이다.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은 변함없어 고통에 빠진 생명을 구조한다. 지상에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손길이 그것이다. 창조성을 일그러뜨린 악령을 추방하고 병마를 무상으로 치유하시는 행위가 사랑이고 구원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사상의 요약이다.
예수님의 구마(악령 추방)와 치유 현상은 지상에 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본디의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창조성과 건강성이 꽃피고 관철되어 완전하고 행복한 생명의 상태를 이른다. 내 삶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본디 주어진 창조성이 악령의 포박과 질환 중에 있음을 뜻한다. 그 상처를 예수님께 보이는 것이 회개이며 자비를 얻는 길이다.
그래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이 겐네사렛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와 치유를 간청했다. 멀리서 소리치며 간청하는 이, 몰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는 이,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을 동원해 부탁하는 이 ……. 그 방법은 각자 삶의 궁리에 따른다. 그들마다 구원을 받았다. 치유의 길은 자신이 병자라는 점을 아는 것이 첫째이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둘째이며, 셋째는 상처를 보이고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병든 것조차 모른다는 데 있다.
☆☆☆☆☆☆☆☆☆☆☆☆☆☆☆☆☆☆☆☆☆☆☆☆☆☆☆☆☆☆☆☆☆☆☆☆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등장에 따른 군중의 반응만을 보고서도 우리 자신을 깊이 반성할 수 있습니다. 군중의 행동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예수님을 알아보다. ②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다. ③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병든 이들을 데려오다. ④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다.
군중의 네 가지 행동을 보면 얼마나 필사적이며 간절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지난주 수요일의 복음에서 보았던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등장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지만, 우리 스스로가 간절함과 무덤덤함,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그 열매를 맺을 수도,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드러난 군중의 네 가지 행동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일상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 어떤 반응을 보이며 여기저기 분주히 다니고 있습니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손을 잡아 주고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갑니까?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일 가운데 과연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
오늘 복음은 마치 전쟁터에서 군의관이 도착하자 병사들이 수많은 부상병을 데리고 오는 영화 장면 같아 보입니다. 마을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만 하면 사람들은 난리라도 난 듯,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한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손을 얹어 치유해 주십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무엇보다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자들을 데려오는 봉사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봉사자들의 사랑의 마음과 부지런한 손과 발이 있었기에, 이 수많은 병자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곁에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의 따뜻한 시선이,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이 되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두루 뛰어다니며’ 우리가 삶으로 주님의 강생의 신비를 살아야 합니다.
☆☆☆☆☆☆☆☆☆☆☆☆☆☆☆☆☆☆☆☆☆☆☆☆☆☆☆☆☆☆☆☆☆☆☆☆
오늘은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축일입니다. 수도 생활의 초석을 놓은 성 베네딕토 아빠스(대수도원장)의 누이동생인 성녀 역시 고귀한 봉헌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녀가 남긴 일화 중 특히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오빠 베네딕토 성인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미 수도원을 세워 수도 생활을 하던 베네딕토는 일 년에 한 차례 정도 방문하는 스콜라스티카를 수도원 동료들과 함께 수도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만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스콜라스티카가 오라버니에게 조금 더 함께 머물며 대화하자고 청했지만 베네딕토는 수도원 규칙에 어긋난다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때 성녀가 하느님께 기도드리자 갑자기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비가 밤새도록 퍼부었습니다. 베네딕토와 그의 동료들은 어쩔 수 없이 수도원에 돌아가지 못한 채 스콜라스티카와 밤을 지새우며 영적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 느님께서 성녀를 ‘편드신’ 이 일화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그의 『대화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누이동생이 오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한 성인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콜라스티카가 선종하였을 때 베네딕토는 여동생의 유해를 자신을 위해 준비해 놓은 묘지에 안장하였는데, 이로써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말하듯, “한마음이 되어 하느님 안에서 일치되었던 이들 오누이는 그 육신도 함께 묻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의 깊은 형제애와 영적 친교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고 미소 짓게 합니다. 사람 사이의, 혈육의 정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통해 얼마나 더 아름답고 온전해지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성녀의 삶을 요약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마음속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은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대보름 아침, 동네 어르신이 어린 저에게 더위를 판다고 이름 부르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연을 직접 만들어 연 놀이를 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해가 질 무렵, 연줄을 끊고 연을 날려 보내면서 아쉬워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오곡밥을 짓고 갖가지 나물들을 무쳐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서 따스한 정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진 정월 대보름날의 아름다웠던 풍속이 그립습니다. 오늘 대보름에는 지난해에 농사지어 말려 놓은 무시래기를 이웃과 나누어 먹어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이 장면은 마치 종합 병원 응급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빠른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마음은 발을 동동 구를 만큼 애절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의 이 간절한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구원으로 이끈 것입니다.
기적의 힘은 분명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이웃 사람들의 우정이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에 대한 깊은 믿음과 사람 사이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은 갈망,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 그리고 함께 사는 사람 사이의 인정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사람들은 동네방네 소문을 냅니다. 어떤 병도 고쳐 주시는 ‘그분’께서 오셨다고 외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병든 이를 들것에 눕혀 그분께 데려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렇듯 민중과 예수님의 만남은 치유를 통한 접촉이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병을 낫게 하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청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면 ‘예수님의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체 앞에서 삶의 아픔을 말씀드리면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기에 하지 못합니다. 기적을 어마어마한 무엇으로 여기기에 ‘못 느끼고’ 있습니다.
기적은 따뜻함입니다.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훈훈함입니다. 주님께서는 병든 이를 선뜻 낫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을 열게 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하느님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열었기에 그들은 뜨거움을 느꼈고,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체를 모시면 ‘복음의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됩니다. 치유를 베푸셨던 ‘기적의 그분’을 만나는 것이 됩니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면 돌아봐야 합니다. 습관적인 영성체가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가끔은 애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힘’을 모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문득 영혼의 힘과 생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
겐네사렛 호수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습니다. 호수 뒤로 기노사르(Ginnosar) 평야가 펼쳐져 있기에 ‘겐네사렛’이란 이름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행정적인 이름은 ‘갈릴래아’입니다. 그러기에 ‘갈릴래아 호수’가 정답입니다. 인근에는 ‘티베리아스’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헤로데 임금이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도시입니다. 그래서 훗날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는 호수 이름을 ‘티베리아 호수’라고 더 많이 불렀습니다.
이 지역은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곳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곳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펼치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많았기에 그분께서 직접 다가가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도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환자들을 들것에 눕혀 자꾸만 데리고 옵니다. 그들은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간절함이 배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던 것입니다. 병이 나아 돌아온 이웃들을 눈으로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우리의 모습’도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예수님의 기적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긍정심리학에서는 행복의 정의를 타고난 ‘고정요인’과 ‘삶의 상황’, 그리고 ‘의지적 활동’의 종합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고정요인’은 유전적으로 정해진 개인의 특성을 가리키고, ‘삶의 상황’은 나이, 성별, 교육 수준은, 수입 등 외부적 요건을 일컫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지적 활동’이란 개인의 동기와 의지에 의한 자발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행복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개인의 ‘고정요인’은 자그마치 50%를 가리킵니다. 2등은 외부적인 요인인 ‘삶의 상황’ 같지만, 이는 10%의 영향만 미칠 뿐이라고 합니다. 40%의 영향을 미치는 2등은 개인의 ‘의지적 활동’이었습니다.
사실 행복에 있어서 60%의 조건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60%에 따라서 행복이 무조건 결정될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40%를 통해 우리는 얼마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10%의 외부적 요인인 ‘삶의 상황’이 행복을 결정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0%의 ‘의지적 활동’을 간과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의 의지를 깎아내려서 불행의 길로 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세우는 의지가 나의 행복을 결정할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많은 사람이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언제 어디로 데려오라고 하셨을까요? 배를 타고서 언제 도착할 테니 배가 도착할 때 맞춰서 오라고 하셨을까요? 치유를 위해서 어떤 약을 준비하라고 하셨나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세워서 예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워낙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의 치유를 위해 자신의 의지를 내세워서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개 해 주십시오.’라는 청도 합니다. 그 결과는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고정요인’만을 찾고 있었다면, 또 ‘삶의 상황’만을 따지고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놀라운 구원의 결과를 얻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무조건 우리의 의지대로 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지적 활동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할 일이란 얼마나 작은 것인가(아모스 오즈).
비폭력대화
사소한 것으로 말다툼을 하던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살 거면 이혼하자.”
이 말을 들은 아내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뭐? 당신 말 다 했어? 그래 이혼해!!”
사실 말다툼하게 될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폭력적인 말이 툭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비폭력 대화로 바꿔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관찰, 느낌 표현, 욕구 전달, 부탁의 4단계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관찰: 당신이 “내가 미쳤지. 저런 인간과 결혼하다니” 하면서 내 옷을 던졌을 때.
느낌: 나는 서운했어.
욕구: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고마워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는데.
부탁: 당신이 뭐가 힘든지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이렇게 4단계의 비폭력 대화를 하면 완전히 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요? 나의 대화 모습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까요?
병들고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치료제이자 야전 응급병원으로서의 교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자 마자 그분임을 알아본 사람들이 즉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마을 이장님께서는 마이크 크게 틀고목이 터져라 외쳤겠지요.
“아아! 이장입니다. 오늘 우리 마을에 아주 기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최근 전국민적 대 스타로 떠오르신 분, 손만 대면 불치병을 낳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우리 마을을 방문하셨습니다. 불치병 환자들 모시고 계시는 가정에서는 단 한분도 빠지지 말고, 지금 당장 환자를 모시고 마을 회관 앞으로 모시고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기회는 다시 없습니다. 지금 당장 마을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을 들은 가족들은 급한 마음에 대충 얼기설기 만든 들것에 환자를 눕혀 초스피드로 예수님을 향해 달려왔을 것입니다. 그날 갈릴래아 호수가에는 그야말로 진풍경 펼쳐졌을 것입니다.
사방에서 몰려온 환자들과 가족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 몰려온 군중들, 기적을 보기 위해 몰려온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구름처럼 몰려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제자들은 덩달아 신명이 났을 것입니다. 무질서하게 몰려온 환자와 가족들들에게 대기표를 나눠주며, 질서 유지에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 한명 한명을 환한 얼굴로 기쁘게 환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래 그간 얼마나 고생 많았냐?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며’격려해주셨을 것입니다. 정성껏 기도하고 위로하며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병마에 사로잡혀 있던 환자와 가족들은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평생 소원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광경에 눈물을 흘리며 환호하고 박수를 쳤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샘솟듯이 흘러나왔겠지요. 예수님의 치유활동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입에서는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찬미하고 흠숭하는 탄성이 터져나왔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순식간에 야전 응급병원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마치도 그 옛날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가 그랬듯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세상 사람들, 상처입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야전 응급병원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 사회를 이끄는 지배적인 논리는 세상을 치유시키고 생명을 주는 논리라고 볼수 없을 듯 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듯 합니다.
천박한 자본주의, 비인간적인 경제지상주의에 기초한 부의 극단적 불균등은 이 시대 수많은 청년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미처 노후준비에 여력이 없었던 수많은 노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 출세지상주의, 그리고 저출산 풍조는 갓난아기들의 반가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만들고, 이 세상에서 새 생명이 주는 생기와 그로 인한 기쁨을 거두어가고 있습니다.
성공지상주의,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와 떼놓을 수 없는 입시위주의 교육은 이 땅의 새싹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의 문화가 이 땅 위에 팽배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이러한 암담한 현실을 좌시하지 않는 파수꾼으로 거듭 나야겠습니다. 병들고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치료제로서의 교회로 재탄생해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대로 ‘야전병원’같은 교회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 자신도 공동체의 힘을 모른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께 데려오는 모든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병자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옵니다. 이 장면은 다시 네 명의 친구가 한 명의 중풍 병자를 데려와 치유를 받고 죄의 용서를 받는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았던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 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가라앉히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은 아직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 안에 어떤 힘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니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할 때,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라고 주시는 빵이 있습니다. 빵은 에너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아올 힘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그들이 먹을 빵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언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결단하는 것도 큰 에너지가 소비되는데 그 결단을 따를 에너지는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에서만 주어집니다. 인간은 생존 본능과 그것과 반대되는 율법 간의 선택 사이에서 이미 지쳐있습니다.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1998년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 참여자를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똑같은 비디오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룹 ‘A’에게는 동영상을 보고 난 후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하게 했고, 그룹 ‘B’에게는 자신의 정서를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들의 악력을 측정했는데, 자기감정을 억눌렀던 그룹 ‘B’의 사람들이 악력이 더 약해진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룹 ‘B’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서를 억누르기 위해 이미 의지력이 소모되었다는 뜻입니다.
초콜릿을 이용한 또 다른 실험도 있습니다. 대학생 한 그룹에는 초콜릿을 다른 그룹에는 무를 주어 그 맛을 기록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를 먹는 그룹은 초콜릿을 먹는 그룹을 보며 먹고 싶은 의지를 억눌러야 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를 내거나 어려운 퍼즐을 맞추라고 했을 때 초콜릿을 먹은 그룹이 훨씬 오래 인내심을 발휘해 문제를 풀었다는 것입니다. 무를 먹는 그룹은 그것을 먹는 동안 의지력을 많이 소진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판단을 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는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소진되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같은 옷과 신발만을 입고 신습니다. 판단을 위해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것은 분명 인간은 자유의지로 이것과 저것 중 하나를 판단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지쳐있으면서도 지친 줄 모릅니다.
헤로데와 같이 아예 결정을 자신을 섬기는 것으로 내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 공동체는 주저하는 누구에게나 결단의 힘을 줄 빵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옷자락 술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힘을 얻은 이들의 공동체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와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마르코는 이미 5장에서 예수님께 에너지가 나와 악령을 몰아내고 하혈병 걸린 여인을 치유하며 죽은 야이로의 딸까지 살리신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에너지가 솟구친다는 것을 믿었다면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코에게 예수님은 에너지의 근원이고 그 힘이 주는 결과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에 모든 이들에게 나눠줄 빵을 지녔습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할 때, 저의 어릴 적 두 친구가 신학교 먼저 들어가 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저와 두 친구가 성당에 다녔는데, 그중 처음 한 친구가 들어갈 때는 아주 잠깐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친구마저 들어가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셋 중 둘만 한쪽으로 가도 그쪽으로 갈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을 전하는 이들이 의지력이 약해진 이들, 그래서 좋은 것을 선택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힘입니다. 좋은 것을 선택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그 선택을 할 힘이 없어서 못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를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초콜릿을 먹고 싶어도 자신들의 선택을 넘어설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써 에너지가 충만합니다. 초콜릿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를 일깨우기 위해 당신이 물 위를 걸어 배 위에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모신 공동체로서 그 자체로 가진 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누구든 들것에 들고 주님께로 데려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처음으로 찍었던 사진을 2장 기억합니다. 4살 때입니다. 형들과 함께 장화를 신고 집 뒤뜰에서 나란히 앉아 찍었던 사진입니다. 6살 때입니다. 여동생과 집 앞에서 기르던 고양이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어머니는 그 두 장의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셨습니다. 의미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1990년 부제서품 때의 사진과 1991년 사제서품 때의 사진입니다.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큰 형님이 앨범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앨범도 자주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사제가 되어서는 가는 본당마다 사진을 찍으면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 폰으로 사진을 찍기에 사진을 인화해서 앨범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진이 너무 많아서 정리하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 장의 사진은 역사의 기록이고, 인생의 기억이 됩니다.
사진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 젊은이가 미국에서 사진을 공부하였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사진을 공부합니까?” 사진으로 돈을 벌수도 있습니다. 사진으로 예술을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은 역사의 기록입니다. 교수님의 말을 들었던 젊은이는 한 가지 결심을 하였습니다. 6.25 참전국의 군인들을 만나서 사진을 찍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참전국을 찾아다니면서 참전용사와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참전용사들은 모두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싸웠던 젊은 날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사진을 인화해서 액자로 만들어 드렸다고 합니다. 사진을 주제로 달력을 만들어 드렸다고 합니다. 모든 비용은 본인이 벌어서 부담했다고 합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꿈속에서 쓰러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는 기차 안에서 부르심 속에 부르심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평생 가난한 이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이 아니라 가난과 정결의 사랑탑을 쌓았습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요한 신부님은 버려진 아이,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잠잘 곳을 마련해 주었고, 치료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 기도드리면서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두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것도, 길을 물어오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는 것도, 길을 먼저 건너도록 양보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들을 하고도,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업적과 명예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잘못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잘못들은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 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 갰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가쁜 숨 몰아쉬며
한걸음에 찾아간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간절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예수님께 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어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청한 것은
자신을 위한
무엇이 아니라
예수님이 간절한 벗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달라는
것이었어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참으로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었어
임마누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오늘 복음(마르6,53-56)에서 ‘임마누엘’을 본다. 예수님께서 숱한 병자들과 함께 하신다. 오늘 ‘임마누엘’은 누구를 통해 이루어질까?
설날 밑에 신자 분들이 발동이 걸렸다. 이웃 성당은 성탄 구유예물과 헌금을 모아 성당구역 독거노인을 찾았다. 세대당 과일 상자와 현금 40만원씩 7천2백만원을 전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를 전달하라는 본당신부님의 부탁을 받은 신자 분들이 발에 시동을 걸고 성금과 과일을 독거노인 분들에게 전달했고,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독거노인을 손잡으며 ‘임마누엘’의 뜻을 살았다고 기뻐한다.
독거노인 분들에게 이웃이 되어준 신자 분들은 작은 나눔을 통해 ‘임마누엘’의 뜻을 체험했다며 싱글벙글이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봉사를 마치고 돌아온 교우 분들의 말아다. 세상은 온통 병자들로 넘치는 겟네사렛의 현장이다. 분명한 것은 이웃이 병자들을 장터로 대려오고, 병자들은 예수님을 만지려 하고 손이 함께 닿는다. 문제해결의 훈훈한 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우리들 안에 분명히 있다. 답을 찾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당도하자 수없이 병자들이 모여들었고, 옷자락 술이라도 만져 나음을 받으려는 환자들로 장터는 넘쳐났다. 그들이 옷자락의 술을 만지자 병이 낳았다. 이들 모습에서 제자들은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느님, 살아계신 하느님, 구세주를 예수님에게서 볼 것이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6).
즐거운 설 명절 되세요.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5주간 월요일>(2021. 2. 8. 월)(마르 6,53-56)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3-56).”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순서대로 생각하면,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서 병이 나았다는(마르 5,25-29) 소문이 널리 퍼졌을 것이고,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들을 데려왔을 것입니다. 여기서 ‘두루 뛰어다니며’ 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서로 전하면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의 ‘믿음의 수준’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병을 잘 고치시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그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고, 그들은 그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두루 뛰어다녔습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고, 그들 자신들의 마음이 움직여서 한 일입니다. (‘기쁜 소식’은 그렇게 전파됩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있는 병자들은 자기 발로 걸어서 예수님께 왔겠지만, 그럴 수 없는 병자들은 사람들이 들것에 눕혀서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라는 말은, 병자들과 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믿은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뜻입니다.
옷자락 술을 만질 수 없을 정도로 중병에 걸린 사람들, 즉 손도 못 움직이는 병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병자들도 모두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옷자락 술을 만지는 행위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예수님께 간절하게 청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은 ‘병이 나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병이 나음으로써 ‘구원의 은총’을 체험했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병이 나은 일 자체가 구원은 아니지만, 치유의 은총을 받음으로써 구원을 체험하게 되고, 희망하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치유됨으로써 “나는 구원을 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치유의 은총’은 ‘구원의 시작’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의 완성’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사도 19,11-12).”
이 일에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이 말씀에서 ‘더 큰 일’이라는 말은 ‘더 위대한 일’이라는 뜻은 아니고, ‘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더 많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또 기적의 힘이 바오로 사도에게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1) 성경은 ‘옛날이야기 책’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 이야기들은, 특히 ‘치유의 은총’에 관한 이야기들은 전설 같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나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치유의 은총’이 내리는 일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지금의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을 갖고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내가 행복과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옷자락 술’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우리에게 내리는 통로, 또는 도구일 뿐입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처음에는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다가, 병이 나은 다음에는 자기를 치료해 준 의사에게만 고마워하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은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의사가 나를 고쳐 주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사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 주실 때 사용하는 통로, 또는 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은 주님이시지 의사가 아닙니다.>
3) 복음서의 이야기에 나오는 병자들은 예수님께 간청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가 좋은 예입니다(마르 5,26).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의학과 의술이 어느 정도는 발전한 시대에 살고 있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일 외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즉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병에 걸렸다면 병원에 가는 것은 당연히 할 일입니다.
수술을 하든지 투약을 하든지 간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치병에 걸렸을 때에만 기도하고, 의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경우에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는 어떤 경우에도 중단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때에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마태 7,11)”이라는 믿음을 버리면 안 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인생 전부와 목숨까지도 주님께 맡긴 사람입니다.>
인간진화 끝 지점인 예수님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낫는다는 건 실은 큰 사건이었죠.
아마도 지금은 더 큰 사건에 더 대소동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병원의사 실직 난리 뭐 약국 의료계는 굶어 죽을 판 불 보듯 빤해요.
가톨릭은 인간진화 끝 지점을 예수님이시라고 신학적 해설 강합니다.
그러면 인간퇴화의 끝 지점은 마귀가 되어버린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10년이면 강산 변한다는데 100년 한 세기의 인간진화 대단하잖아요.
천국영복 향 진화냐 지옥 마귀떼 속으로 들기 위한 퇴화냐 문제지요.
물질인 지구의 종말 올 때 물질인 몸은 소멸 영은 진화상태대로겠죠.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고 많은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고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전 성령기도회 대표신부로 있을 때 철야미사를 하면서 마지막 성체강복과 거동을 할 때 많은 신자 분들이 가까이 다가오셔서 사제의 제의에 손을 대고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의 경우는 정말 절박한 상황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사제의 제의를 잡고 열심히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에 손을 댑니다. 때로는 만지면 안 되는 것들까지도 욕심으로 인해 만지게 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댈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언제나 주님께 손을 내밀고 그분과 함께 모든 일들을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과 늘 함께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늘 함께하는 가장 좋은 방법들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와 성사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약함이 아니라 강함 때문에 겪으시는 고통
-암브로시우스-
눈먼 이에게 빛을 주시고, 굽은 이를 펴 주시고, 죽은 이를 일으켜 주시고(마태 11,5 참조), 우리의 바람에 맞갖은 약을 주시고, 간청하는 이를 옷자락의 술로 고쳐 주시고(마르 6,56 참조), 손을 댄 이를 낫게 해 주신 권능의 주님께서 나약했다는 말입니까? 불경한 그대들은 그분의 상처를 보고 그것이 하느님의 약함이라 여기는 것입니까? 그 육신의 상처는(참조: 마태 27,35; 마르 15,24; 루카 23,33; 요한 19,18.3-37) 약함이 아니라 강함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이의 생명이신 그분의 상처에서 모든 이에게 생명이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本鄕이자 안식처安息處 -그리스도 예수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14년 안식년 때 오랜 동안 정주해 오던 요셉 수도원을 떠나 생활할 때가 생각납니다. 특히 산티아고 순례중 들렸던 성전마다 꼭 고향집에 온 듯한 편안했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향집을 찾듯이 끊임없이 주님의 집,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작년 11월에 써놓은 고백시가 생각납니다.
-“가고 싶으나/갈 곳이 없네
보고 싶으나/볼 분이 없네
가고 싶은 곳/오늘 지금 여기 '주님의 집' 성전
보고 싶은 분/오늘 지금 여기 계신 '주님'뿐이네”-
바로 오늘 여기 주님이 계신 성전이 영원한 본향집이란 고백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혼돈의 세상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고향집 같은 세상으로 만드십니다. 언젠가 인용했던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란 괴테의 말도 생각납니다. 경계가 없는 혼돈과 무질서의 자리가, 한계없는 탐욕의 자리 거기가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혼돈과 무질서의 세상을 경계를 지으며 각기 고유의 영역으로 나누시며 조화와 질서의 본향집 같은 안식처로 준비시켜 줍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명령따라 살기 좋은 고향집 같은 세상으로 변모되는 세상입니다. 말씀을 통한 창조입니다. 오늘 창세기 마지막 절은 낮과 밤, 빛과 어둠을 나누어 경계 지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창세기 창조설화는 영원히 열려 있는 이야기이자 늘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됩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단히 회개에로 이끕니다. 창세기 창조설화중 매번 후렴처럼 반복되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모든 판단의 잣대는 하느님의 눈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인지, 참 좋은 나의 삶인지 자주 판단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 보시기 참 좋은 공존공생의 균형과 조화, 평화와 질서의 세상이요 삶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보시기 참 아름다운 지구가, 세상이, 인간의 탐욕으로 얼마나 많이 망가져가고 있는지요! 날로 늘어나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입니다. 참으로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삶이 잘 사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창세기 장면은 흡사 하느님 중심으로 질서있게 조성되는 균형과 조화의 참 좋은 세상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 창조와 구원은 하나입니다. 단 한 번에 끝난 창조가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창조하심으로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장면은 그대로 무질서의 혼돈중의 사람들이 삶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되고 구원됨으로 새롭게 질서 잡혀가는 창조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길을 잃고 집을 잃고 두려움과 불안중에 미아처럼 병고중에 방황하는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복음은 우리의 길이자 본향집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의 창조가 새롭게 이뤄지는 신바람 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나 치유 구원됨으로 새롭게 펼쳐지는 질서와 조화의 삶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떠날 때 온갖 병고에 어둠과 혼돈의 지옥이며, 주님과 함께 할 때 빛과 생명, 질서와 조화, 치유와 구원의 천국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치유와 구원이, 평화와 기쁨이 주어지는 영원한 본향집은, 안식처는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끊임없이 이뤄지는 창조와 구원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치유, 구원하시어 당신 중심의 질서와 조화, 빛과 생명,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당신의 '아늑하고 편안한 본향집같은, 안식처같은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마르 6,54)
예수님 일행이 배를 타고 겐넷사렛 땅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봅니다. 알아본다는 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분을 체험했다는 뜻이지요. 자신이 치유를 받은 당사지거나, 기적의 현장을 목도한 이들이겠지요. 지인이나 친척을 통해 전해 전해 듣기도 했을 거고요.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 6,55)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의 행동이 놀랍지요!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자기가 아는 병자와 허약한 이들,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 계신 곳에 데려옵니다. 누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구원에 협력하는 보람과 기쁨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들이야말로 기쁜 소식, 복음을 듣고 보고 체험하여 변화된 이들입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마르 6,56)
그들이 병자들을 데려다 눕혀 놓은 장터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장면을 관상합니다. 하느님께서 빛이 생기라고 명하시자, 빛이 생겨나 어둠을 가르고 스며드는 오늘 제1독서의 장면이 떠오르지요.
"어둠을 심연이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2-3)
장터에 가득한 병자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 위에 짙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한줄기 빛이 관통합니다. 그 빛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사실 위생이 중요한 환자를 장터까지 데려왔다는 묘사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절박한 상태였나를 짐작하고도 남지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이 그들을 휘감고 있던 어둠 사이로 희망의 빛이 새어든 것입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6,56)
그분을 직접 만지지 못해도, 그분 옷자락 술 끝에라도 닿고자 손을 뻗는 이들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이 얼마나 간절한 겸손인지요! 얼마나 단순한 믿음인지요! 그분과 버젓이 독대하거나 잠시라도 그분을 차지할 유력자 신분이 못되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힘껏 손을 뻗습니다. 그분께 닿음이 곧 치유이고 구원입니다.
빛을 향해 활짝 연 마음, 빛을 갈망하는 마음 안으로 빛이 들어옵니다. 하느님께서 "빛과 어둠을 가르"신 것처럼 믿는 이와, 냉소하는 무심한 이의 구원이 갈립니다. 자기 존재에 빛이 스며들길 바라는 이들에게 주님은 스스로 빛이 되어 주십니다.
창조의 넷째 날까지 보여 준 제1독서의 창세기 대목 안에는 생명의 기운이 넘실거립니다. 마치 오늘 복음 속 장터와도 같지요. 치유받고, 마귀가 떨어져 나가 온전해지고, 그토록 바라던 건강을 회복한 이들의 기쁨, 그들을 데려오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들의 보람, 긴긴 돌봄으로 지친 가족의 경탄과 감사, 그들의 기쁨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행복, 제자들의 뿌듯함... 창조 때 하느님께서 이렇게 흡족하고 기쁘셨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새창조 앞에 섭니다. 주님은 묵은 우리를 늘 새롭게 해 주는 분이시지요. 우리가 지고 있는 영육의 병고와 결핍, 상처와 고통은 창조의 말씀과 빛을 기다리는 어둠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덥썩 안을 수는 없어도, 손을 힘껏 뻗어 그분 옷자락의 술만이라고 건드릴 수 있다면, 그런 간절한 열망과 바람이 있다면 빛은 담박에 우리를 뚫고 들어와 가득 채워줄 것입니다. 치유하시고 구원하실 겁니다.
우리 삶의 장터를 가르며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 계속 서 있을지, 빛 한가운데로 나아올지는 우리의 선택이고 응답이 되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빛이신 주님을 만지고, 큰 빛 안에 스며들어 함께 빛이 되어 보시지 않을래요?
"과연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르 6,56 참조)
새 창조의 말씀에 온 존재를 내어맡긴 벗님을 축복합니다.
간절함
양성일 시메온 신부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 때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갖게 되는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장면입니다. 세상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교회라는 담장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도움의 손길이 간절한 이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문 밖에 있는 거지 라자로를 만나기 위해서는 일단 문 밖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코로나로 경제적, 심리적 , 영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이들에게 교회가 그 지푸라기가 되어줄 수는 없을까요? 우리 신앙인이 그 간절함의 손을 잡아줄 수는 없을까요? 어려움의 시기에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은 바로 지푸라기가 되어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지푸라기는 희망입니다.
몸의 움직임은 선과 악의 표현이다< 마르코 6/53-56>2/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그중 눈길, 순길 발길의 표현이 가장 분명하게 선과 악을 나타내며 감정 전달이 됩니다. 손의 표현은 사링의 손길 자비의 송길이 있어 편손으로 손을 잡고 편손으로 내것을 나누어주고 편손길로 사랑을 고백하고 오게히고 끊어안고등 손길은 사랑과 선의 표현이지만 손 사래르하고 손을 뿌리치고 손으로 자기것을 감추고 내치는 손은 악의 손길입니다. 오늘 복음으 구원의손길을 찾는 사람들 주님의 선길이 닿은 곳에 기작이 일어나고 구원이 일우어지는 아름다운 전걍 주님을 늘 주먹을 쥔 손이 아니라 펴고 강복을 주거나 안수를 하시거나 아름다운 손길을 보여 주십니다. 나의손길은 어떤지 스스로 일이보고 늘 편손 길을 보내며 살아갑시다.
우리는 사람을 욱체과 영혼의 혼합이라 하지만 좀더 깊이 보면 몸은 죽음 몸을 시체라 하고 영의 죽음은 악영이라 합니다. 육신 하면 살아있는 몸을 말하고 영혼하면 영원히 살 영을 말합니다. 육신하면 혼과 연결되어 살아 움직이며 영혼도 일치되였을 때 마음 생각 말하고 연결된 것을 뜻합니다. 육신과 영혼이 결합된 인간은 선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몸가짐을 가지고 살아아야 합니다. 외적 표현이 눈길 손길 발길로 표현됩니다. 굘정적 표현은 말입니다.
“손은 댄 사람은 구원받았다“ 란 말은 선한 몸짖 하나가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 공동미사 때 주례사제와 달리 공동집전 사제들은 빵이 주님의 몸으로 포도주가 주님의 필로 변화되는 순간 모두 손을 향하여 기적의 손길을 펴는 것같이 사제의 손길은 세상을 선으로 변화시키는 손갈이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이의 손길은 자비의 손길 사랑의 손길 즉 섬김과 봉사의 손길, 나눔과 베품의 손길. 친교와 사랑의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손은 힝상 펴고 살아야 합니다. 주먹은 쥔 손은 폭력을 가하기 위하여 화가 났을 때이며 주먹을 쥔손은 움겨잡고 남에게 내어주지 않은 손이며 남의 것을 빼앗으려 드는손이며 주먹을 쥔 손으로 너와 나의 친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상대으 손을 내치는 손입니다.
이같이 몸 하나하나 의 표시가 인간의 깊은 감정 감성 뜻을 나타내고 있으니 손의 작용을 잘 살피어야 합니다.
눈길도 발길도 같은 맹락에서 사랑의 눈길 자비의 누길 즉 웃는 얼굴로 표현합니다. 발길도 반황하는 발길 복적을 잃은 발길이 아니라 선을 행하려고 다려가는 발길이여야 하고 가난한 사람 찾아가고 병든이 찾아가고 감옥에 가친이 찾아가고 나를 필요로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발길이여야 합니다. 나는 오늘 내 몸짖을 어떻게 히고 살아야 할 까요? 악으로 향하여 갈가요 선으로 향하여 갈까요? 그결정은 자유를 가진 나 지신의 결정입니다. 양심이 가르카는대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행동을 몸으로 표현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힙니다. 손을 합창하고 절하는 것. 사랑합니다. 손으로 하트를 그리는 것. 기도합니다. 손을 합창하고 하늘을 보는 것. 행복 하게요.손으로 큰 원을 그리는 것. 성공하세요. 손가락을 두 개를 펴든는 것. 모두가 오늘 러분들에게 일어나도록 기도합니다. 다른 이에게 전달 해주며 살아갑시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옛 말에 근묵자흑(近墨者黑)과 근주자적(近朱者赤)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어지고, 붉은 색을 가까이 하면 붉어진다는 말로서, 좋은 친구를 사귀거나 좋은 환경에서 생활을 하면 좋은 영향을 받고, 나쁜 친구들을 사귀거나 나쁜 환경에서 생활하면 좋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배를 대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5-56) 라고 합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예수님 주변에는 늘 아픈 사람, 참과 진리에 목마른 사람, 삶에 지치고 약해진 사람,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사람, 세상에 각광받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업신당하고 무시당해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을 하나하나 다 거절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고 치유해주시고 돌봐주시는 주님의 모습이 따뜻하고 푸근하며 감사의 정이 새록새록 담깁니다.
오늘의 나를 성찰해 봅니다.
나는 현세에서 누구를 따라다니고 어떤 부류의 누구와 어울리는지?
내 주변에는 누가 나를 따라다니고 나와 함께하려고 하는지?
이우진 신부님
찬미예수님. 과거 신부로 서품받고 첫미사 다니던 때가 좀 생각이 납니다. 첫미사를 열심히 다닐 때, 제의는 항상 서품제의를 입게 됩니다. 하루에 2대에서 3대씩 돌아다니면서 미사를 하는데, 제의는 가방에 막 가지고 다니니, 약간 꾀죄죄하기도 하고, 때론 때가 타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은 바로 우리 자매님들의 립스틱이지요. 왜 립스틱이 묻을까요? 네, 아마 오늘 복음에서 주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려 했던 사람의 마음이겠지요. 기도하면서 제의를 붙잡으시고, 머리를 가까이 대시는 분들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물론 다른 때가 아니라, 안수를 드릴 때 말이지요. 여기서 이제 약간 변형도 있습니다. 단순하게 잡는 것에서 나아가, 안기려는 분부터 제의자락을 잡고 안 놓으시는 분들까지... 다양합니다. 물론 저도 묻지 않게 조심하지만, 무엇보다 그분들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얼마나 간절하면 그리하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사실 길을 다니면서, 주님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아마 항상 구름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니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안에서 옷을 스치는 분들이 무척이나 많겠지요. 하지만 그들 모두가 치유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나아간 이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지요. 간절하게 말이지요.
우리 교우여러분들, 먼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것이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 주위에 머물면서 단순히 옷깃만 스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안에서 참으로 주님을 믿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옷자락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 간절함, 깊은 믿음,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간절합니까? 이 세상 안에서 살면서 얼마나 주님을 찾고, 주님을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도 참으로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으로
시작되는
오늘이다.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은
내리사랑이다.
구원과 은총은
우리에게
내려지는
매순간의
선물이다.
어르고 달래며
여기까지
우리를
업고 왔다.
눈물겨운
사랑이다.
은총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향하는
치유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다.
각자에게
맞는 은총을
주신다.
영혼을
살리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구원의
계획안에
너와 내가
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과
은총이다.
그래서
사랑은
복음이다.
구원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다시 주님
사랑으로
시작한다.
사랑이
시작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치유의 날이다.
한 도시에서 소방관이 투입되는 상황에 대해 조사한 결과, 화재의 피해는 매번 투입되는 소방관들의 숫자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즉, 소방관들이 더 많이 투입될수록 방화의 피해가 더욱더 커졌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 도시의 시장이라면 이 보고서를 받고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제로 이 도시의 시장은 즉시 소방관의 정원을 줄였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한 것일까요? 당연히 올바른 판단이 아닌 어리석은 판단을 한 것입니다. 화재가 크면 클수록 방화의 피해는 클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소방관 투입도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를 많은 소방관 투입으로 방화의 피해가 컸다고 생각했으니 인과관계를 잘못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잘못된 인과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당에 다니고 나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졌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번 승진을 위해서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승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자녀의 공무원 시험 합격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기도도 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이번에도 불합격을 했다고 너무 주님이 원망스럽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단 한 번도 돈 많이 벌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즉, 우리의 요구가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잘못된 원인이 마치 주님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왜일까요? 잘못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반드시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서 계속해서 청하는 모습이 필요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습니다. 이 모습을 깊이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냥 말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청원만을 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보였습니다. 주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행동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것이 마치 주님께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여기에 맞는 나의 행동이 있어야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주님께 불평불만을 던지는 잘못된 인과관계를 나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늘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 또한 청하면서도 나 스스로는 어떤 노력도 않았던 모습들이 바로 우리들의 문제는 아니었을까요?
내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다(마하트마 간디).
너무 자주하는 7가지 오해
1.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유로울 수 있다.
순간만 가능하다. 지속가능한 자유는 없다.
2. 나의 실수를 상대방이 오래 기억할 것이다.
내 이웃의 실수 10가지를 기억해보라.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3. ‘항상’ 행복하게 살라.
꿈을 물어보면 대부분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순간적이고 작은 행복이 많아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항상, 큰 행복이란 없다.
4. 조직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울 것이다.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조직 안에서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나의 보호막이다.
5. 나만 힘들다.
SNS 등의 인터넷 공간에서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느낀다.
6. 좋아하는 일을 하는게 당연하다.
좋아하는 일도 지겨운 일이 될 수 있다. 좋아하는 일만 아니라 싫은 일도 함께 해야 힘을 낼 수 있다.
7. 공부하면 무조건 이해하고 성장한다.
어느 순간 한계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오해들을 가지고 있어서일까요? 우리는 주님께 대해서도 늘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느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최근 선친(先親)을 비롯한 형제들, 수녀님들, 지인들을 줄줄이 떠나보내면서 느낀점 한 가지가 있습니다. 평소 살아오신 모습 그대로 세상을 떠나시는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평소 살아오신 모습이 병실에서,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도 재현되더군요.
살아 생전 언제나 이웃들에게 친절과 배려, 감사와 기도의 삶을 살아오신 분들은, 떠나시는 모습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두렵고 떨릴만도 한데, 본인보다는 이웃들을 생각하시더군요.
평소 살아오신 모습이 병실에서도, 임종 직전에도 그대로 재현되더군요. 기도와 감사 배려의 삶을 산 사람들은, 병상에서도, 죽음의 길에서도 주변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던군요. 일찌감치 남은 가족들에게 털끝만큼의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연명 치료 거부 사전 의향서’를 작성하시더군요.
일찌감치 ‘장기 및 시신 기증 각서’에 사인을 하시더군요. 뿐만 아니라 미리미리 품격 있는 유언서도 작성하시더군요. 그렇게 사전에 소박하고 품위있는 떠남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름하여 ‘착한 죽음의 연습’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모습도 드물지 않습니다. 분노와 원망, 거부와 짜증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겹게 만듭니다. 전혀 정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꽤 많은 시간을 병실에서 지내면서 느낀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환우들은 이제 기력도 쇠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줄 알았더니, 결코 그게 아니더군. 그분들도 행할 수 있는 사도직이 분명 있더군요. 이름하여 ‘병실 사도직’입니다.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 그 고통을 나 혼자 겪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함께 견뎌내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기꺼이 참아내면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에 조금이라도 참여한다는 마음으로 견디는 것입니다.
병원 침상에 누워있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것입니다. 의료인들, 간병인들, 가족들에게 틈만 나면 고맙다, 감사하다, 기도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보다 더 힘겨워하는 환우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전하는 일, 이보다 더 큰 사도직이 다시 또 있을까요? 바로 병실 사도직입니다.
오늘 루르드의 복되신 동저 마리아 기념일인 동시에 세계 병자의 날을 지내면서, 고통 중에 있는 환우들을 기억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 얼마나 극심한지 잘 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그 큰 고통 눈여겨보시며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극심한 고통, 이 참혹한 통증, 평생 지속될 것 같지만, 주님 은총에 힘입어 다 지나간다는 사실,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겪고 감내해야만 하는 이런 저런 고통들, 수많은 실패들, 끝도 없이 반복되는 바닥 체험들 앞에서 너무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바닥 체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기 떄문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인간의 끝에서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은?
전삼용 요셉 신부님
화가 이중섭이 하루는 병을 앓고 있는 친구의 문병을 갔습니다. 친구가 아픈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문병이었기에 그는 늦게 찾아온 것을 미안해하며 친구에게 작은 도화지를 건넸습니다.
“자네 주려고 가지고 왔네. 이걸 가지고 오느라 늦었네. 자네가 좋아하는 복숭아라네.”
그는 친구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사다 줄 돈이 없어 직접 그림을 그려 선물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선물을 줍니다. 선물로 내가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줍니다. 그 선물이 받아들여지면 그 선물을 주는 사람도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일반대학교 다닐 때 어떤 자매가 저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마음’이라고 대답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여자가 마음을 준다는 것은 다 준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찾을 것이고 그것을 선물하려 할 것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려 하는 바로 그것이 내가 가장 귀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에서 성탄 선물로 과자와 커다란 사과 하나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사과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서 혼자 먹기가 아까웠습니다. 갑자기 부모님이 생각났습니다. 성당과 사는 집의 거리는 아이 발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성탄 선물 꾸러미를 한 시간 넘게 집으로 가져오면서 추위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부모님이 그 큰 사과를 보고 좋아하시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착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은 “왜 먹지 않고 가져왔느냐?”고 하셨지만, 내심 감동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먹을 것을 부모님께 드린 이유는 어떤 중요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소속되고 싶은 욕구’입니다. 부모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과자와 사과를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소속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을 제물로 바쳐야합니다. 사람에게 먹는 욕구가 매우 중요한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만날 때 내가 선물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웃과 잘 지내며 그런 소속감을 통해 오는 행복을 느끼도록 우리에게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셨습니다.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만큼 큰 선물은 없습니다. 모두에게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도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지 않는다면 그건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두 농부는 무 농사를 졌고 모두 좋은 무를 생산했습니다. 한 농부는 이 모든 것이 원님 덕분이라며 가장 큰 무 하나를 원님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농부는 그 무가 원님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며 아무 것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큰 무를 선물로 받은 원님은 감동하여 그 농부에게만 답례로 황소 한 마리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줄 것이 있다고 합니다. 찾으려하지 않을 뿐입니다. 신앙인으로서는 내 안에 모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웃이 돈이나 주면 좋아하지 예수님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 선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무 취급하는 것입니다. 일단 내가 귀하다 여기면 선물하고 보아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치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선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알았던 사람들은 빨리 그분에게 병자들을 데려오기 위해 그 분을 쫓아서 ‘뛰어다녔다’고 합니다. 걸어 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또 어디로 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뛰어다닌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을 여유가 없습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샘물을 발견했는데, 어찌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뛰어다니며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예수님이 이웃에게 전해줄 가장 귀한 선물이 안 될 때 나도 예수님의 가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농사를 잘 짓고도 바치지 않은 무로 만들어선 안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한다고 합니다. 베트남은 남한, 북한, 미국과 깊은 관련이 있는 나라입니다. 남한과는 두 번째로 큰 무역 국가입니다. 남한의 많은 상품이 베트남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남한의 많은 기업이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을 하였지만, 베트남은 미국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미국과 베트남은 국교 정상화를 이루었고,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북한은 미국의 공격을 막아낸 베트남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루고 있는 베트남의 모델을 배우려고 합니다.
이념과 사상이 주도하였던 냉전의 시대는 가고, 대화와 협력을 통한 평화의 시대가 오면 좋겠습니다. 미국이 베트남과 좋은 관계를 회복하였듯이 북한과도 좋은 관계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은 핵 개발을 포기하고, 경제 발전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북한에 대한 대북 제재가 완화되면 남한은 북한의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분단과 전쟁의 아픔이 있지만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같은 글을 쓰며, 같은 역사를 가진 민족입니다.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은 평화의 상징이 되면 좋겠습니다. 남한의 KTX가 북한의 철길을 따라 중국, 러시아, 유럽까지 달리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창조의 순간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창조’를 이루셨습니다. 빛, 하늘, 땅, 물, 해, 달, 별을 만드셨습니다. 생명을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신비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아기의 해 맑은 웃음에서, 작은 들풀에서, 흘러가는 구름에서,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소경, 앉은뱅이, 나병 환자,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죽었던 사람까지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의 나라가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나의 차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유한 사람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건강한 사람에게나, 아픈 사람에게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모두에게 하루라는 시간을 주십니다. 하루라는 시간을 채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고마운 나의 사람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9. 02. 11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세계 병자의 날, 마르코 6,53-56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멀리서도 나를 알아보고
한걸음에 달려오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내 겉모습만을 훑지 않고
내 속마음을 정성스레 헤아리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나와 있고픈 선한 욕심 버리고
나와 있어야 할 벗 뒤로 물러서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스스로 나에게 올 수 없는
나에게 와야만 하는 벗을 이끄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내가 품고픈 벗에게
나보다 한걸음 먼저 다가가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벗에게
나보다 앞서 내가 되어주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나와 벗을 이어주고
슬며시 뒷자리로 물러서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나와 벗을 사랑하기에
둘만을 남겨놓고 사라지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언제 어디서나
나와 벗 사이에 없어도 있을
고마운 나의 사람아
나에게 또 하나의 벗이 되고
벗에게 또 하나의 내가 되는
고마운 나의 사람아.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 어디든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병자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던 이웃들을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병자들을 데려오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이웃의 고통을 지나치지 않고 함께하려는 이웃 사랑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 대단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많이 하지만 사실 이웃 사랑은 어쩌면 자신의 이웃의 어려움, 슬픔, 고통을 보고 지나치지 않고 ‘그저 당연히 함께’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가면서 저마다 자신만의 안위를 추구하면서 ‘그저 당연히 함께’하는 이웃사랑의 모습을 보기 힘든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교회의 사람이라면 ‘그저 당연히 함께’ 이웃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곧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하신 말씀처럼 이웃을 위한 아낌없는 사랑을 삶을 함께 이루어가길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참 좋은 주님의 가정 공동체 -중심, 질서, 건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공동체를 떠나선 살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알게 모르게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의 원형이 가정 공동체입니다. 가정공동체가 건강해야 몸담고 있는 개인도 건강하고 나라도 건강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참 좋은 가정 공동체의 건설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참 좋은 주님의 가정 공동체-중심, 질서, 건강’입니다. 가정 공동체의 중심에 반드시, 필히 주님께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중심이 될 때 가정 공동체는 질서가 잡히고 가정의 형제자매들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창세기와 복음 말씀은 주님을 중심으로 한 이상적 가정 공동체의 형성 과정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서두 말씀은 도저히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혼돈 상태의 세상을 보여 줍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
이런 혼돈 상태에서 우리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의 창조가 시작됩니다. 참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인류 가정 공동체의 품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질서있게 시작되는 창조의 이야기가 나흘 간에 걸쳐 전개됩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자 그대로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혼돈의 상태에서 질서있게 창조될 때마다 후렴처럼 꼭 되풀이 되는 말씀이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입니다. 새삼 우리의 모든 행위의 분별의 잣대는 ‘하느님 보시기 좋은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오직 하느님 한분만이 계시고, 그분은 전적으로 좋은 분이시며, 그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이시며, 그분이 창조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은 좋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혼돈의 세상을 질서있는 창조의 과정을 통해 지구를 인간이 살 수 있는 참 좋은 보금 자리 가정의 품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질서있는 가정 공동체가 참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건강한 가정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는 온 세상이 하나의 가정 공동체입니다. 지구는 ‘하나의 집이자 가정’이요 모든 인류는 한 가족이 됩니다. 이런 깊고 넓은 하느님의 시야와 비전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사실 주님의 집이자 가정인 교회나 수도원은 외롭고 가난한 이들은 물론 온 인류의 집이자 가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런 시야의 모범입니다.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은 없는 세상이라 합니다. 가정은 커녕 ‘가정도 집도 없는 사람homeless’도 참 많습니다. 가정이라 해도 1인가구가 30%에 육박하는 세상이니 가정이라 일컫기도 거북합니다. 또 함께 산다해도 불안하고 위태한 가정은 얼마나 많은지요. 결손 가정의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니 대부분 사람들이 건강도 좋지 않습니다.
참 좋은 가정 공동체의 형성을 위해서는 가정 공동체의 중심에 주님이 자리잡고 있어야 하며, 치유와 더불어 질서가 잡힐 때 비로소 건강한 개인이요 가정 공동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말그대로 참 좋은 주님의 가정 공동체를 위해서는 주님 중심에 질서가 잡힌 건강한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중심-질서-건강이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반대로 중심이 없으면 무질서의 혼돈에 저절로 심신心身도 병들어 건강을 잃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창조하시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혼돈 상태의 세상에 예수님이 중심이 되시어 질서있는 건강한 이들의 가정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흡사 복음의 장면이 예수님 중심으로 병든 인류가 새롭게 질서잡힌 건강한 가정공동체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장면인지 복음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대로 혼돈의 세상을 질서있는 인류가정공동체로 창조하시는 창세기의 하느님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 봅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인간현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온갖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지요. 특히 노년에는 병마病魔와의 싸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 지요.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라는 희랍어 말마디 ‘에소존토esozonto’란 뜻이 심오합니다. 육신의 치유이상으로 초대 교회에서는 온전한 영육의 전인적 구원체험을 뜻했습니다. 단지 ‘좋아짐wellness’만이 아닌 ‘온전해짐wholeness’을 뜻했으니 다른 말로 하면 ‘가정으로의 귀환coming home’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가정공동체로의 귀환에 온전한 치유의 구원임을 말해 줍니다.
하여 이 거룩한 미사가 그리도 고맙고 귀한 것입니다. 복음과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 중심의 질서있는 건강한 가정 공동체로 건설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성혈을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됨으로 주님의 한 가족이 되고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선물받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수도원을 명실상부한 주님의 집이자 주님의 참 좋은 가정 공동체로 만들어 줍니다. 참 좋은 주님 중심의 가정 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수도가정공동체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세상의 오아시스같은 참 넓은 품의 환대와 치유의 주님의 수도가정 공동체입니다.
제가 보기에 여기 거주하는 수도형제들뿐 아니라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들이 주님의 수도가정공동체에 속해 있다 봅니다. 수도원을 찾는 많은 분들은 고향집에 온 것 같이, 친정집에 온 것 같이 편안하다 고백합니다. 피정오는 분들 역시 주님의 한 가정공동체를 체험케 해주는 환대와 치유의 수도가정공동체입니다.
사막같은 세상에 이런 오아시스 같은 주님의 집이자 주님의 가정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의 기적인지요. 이런 수도원 같은 주님 중심의 환대와 치유의 공동체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지요. 바로 하늘나라 수도가정 공동체, 하느님이 세상에 주신 참 좋은 선물이자 수도원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우리 수도원을 세상에 활짝 열린 당신 중심의 환대와 치유의 하늘나라 오아시스 가정공동체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표현을 예수님께서 영이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셨다고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많은 병자가 와서 치유를 받고 돌아갑니다. 알렐루야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마태 4,23 참조)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독서가 창세기 1장의 첫 부분 천지창조 이야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병고에 시달리는 순간은 악의 구렁텅이 속에 잡혀 있는 순간이요. 치유되는 순간은 주님 창조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와 있고, 또 돌아갈 곳이 있고 또 돌아가야 한다면 어디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손과 사랑< 마르코 6, 53-5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이 손끝을 통해 전달되고 손은 사랑의 본질인 생명을 더 풍요롭게 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손으로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하고, 하느님 생명의 손으로 유지되고 보존합니다. 오늘 아침 기도 역대기 상 29, 10-13. “주님 영원에서 영원까지 찬미 받으소서. 하늘과 땅 당신 것이오며....”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 합니다.
천지 창조 그림을 그린 화가는 인간의 손과 하느님의 손이 맞닿은 곳에 생명이 살아난 것을 표현하며 손의 중요성을 나타냅니다.
이같이 우리가 사랑을 완성하고 살아가기 위해 손의 동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합니다. 손이 없으면 성호경을 몸으로 표현하기에 힘이 듭니다. 일어나 앉으려니 손이 나를 지탱해주고, 일어나 물 한잔을 마시려니 손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주님, 손을 주셔서 주님을 찾고 일어나고 걷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시작했습니다. 성당에 가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 함께 오늘 제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성모님 손을 잡고 함께 갑시다.” 하며 성당으로 가서 두 손을 합장하고, 성체 앞에 인사드리고, 주님의 소리를 듣고, 오늘 일을 명령받고 대화를 시작합니다.
손은 따뜻한 손, 차가운 손, 부드러운 손, 거친 손, 고운 손, 미운 손이 있습니다.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손은 주먹을 쥔 손이 아니라 펴고 사는 손입니다. 남녀가 사랑을 시작할 때 눈과 눈이 맞고 증명은 손을 잡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의식을 잃은 환자가 깨어난다는 표시는 손가락 끝에서 움직임을 보고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말 못 하는 사람에게 손은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민 손을 잡고 사랑을 고백하고, 실천하고,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주님은 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을 대신하는 손은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물에 빠져 구원을 청하는 손, 먹을 것이 없어 먹을 것을 청하는 손, 친교를 위해 내민 손, 화해를 위하여 내민 손, 사랑받기 위해 내민 손, 그와 생명과 사랑을 위해 서로 내민 손을 거부하지 말고 서로 잡아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 모두가 행복의 길로 나가도록 기도합니다.
'병자들의 바램'(마르코 6장 53~56)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병든이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낫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방에서 몰려들고 예수님께서 말씀의 힘으로 그들을 건강하게 해주십니다.
낫기만 한다면, 나을수만 있다면 하는 병자들의 바램은 건강하게 살때 전혀 소중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을 깨닫게 되고 고통이 자연스럽게 스승이 됩니다.
입원을 하면 피뽑고 링겔 꼿고 검사하고 ‥
수술을 하면 기본적으로 두개의 링겔이 추가되어 양쪽 팔을 쓰지 못하게 되니 세수나 양치질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누군가의 손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
그 누구도 건강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병자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숨만 좀 편히 쉬기를'
'내 손으로 세수할 수 있기를'
'발자국을 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램들, 병자들의 바램이 작으면 작을 수록 그가 겪어온 고통의 시간이 오래였기에 그저 예수님 옷 자락만이라도 만지길 원합니다.
실낯같은 희망이 현실이 되길 바라며,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전 세계에서 루르드 성모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오늘 수 많은 병자들이 낫는 은총이 주어지기를!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의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 56)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2월 11일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발현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지요. 세계 병자의 날이 있게 된 것은 바로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마리아 기념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1858년 프랑스 남쪽 루르드에 성모님이 발현하시던 곳에 물이 흘러나와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기적적으로 병을 나았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이처럼 기적적으로 병이 낫게 해 주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마르 6, 53~56)에서는 어느 마을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 56)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가지 질병에 노출되어 있고 감염되어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런 병 중에는 오래 고생하는 병도 있고 사람의 힘으로는 나을 수 없는 병들도 있지요.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면 이보다 더 큰 구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병을 앓아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기쁨을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겠지요.
병이 낫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어떠한 경우도 치유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해서,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기도드리고 치유의 은총을 얻기를 기도드립니다. 비록 치유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순간만큼은 하느님과 병자의 절실한 믿음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또한 치유는 마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가져야 될 겸손과 믿음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오늘 모든 병자들이 주님의 은혜로 치유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병을 앓고 있을 때, 하느님께 간절한 믿음으로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치유된 경험이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세계 병자의 날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교회는 해마다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고 있다. 이는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에서 비롯되었다. 성모님께서는 1858년 2월 11일부터 루르드에 여러 차례 나타나셨는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다. 이날 교회는 병자들의 빠른 쾌유를 위하여 기도한다. 또한 병자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도 함께 기억하며 병자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책임감을 다지도록 기도한다.
‘루르드’ 성모님 발현성지는 날마다 수많은 병자들로 북적인다. 순례자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모아진다. 병자들을 위한 기도와 희생은 치유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런 마음으로 마음모아 기도한다면 병자들은 치유되고 그들을 담았던 흴체어, 목발은 기적의 표로 남겨진다. 이런 모습을 보면 기도가 요긴하다는 것과 병자들이 건강하게 고향으로 돌아같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병자들이 생겨날 때마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병자들의 목록을 주님 앞에 데려다 놓고 기도한다면 구원이 이루어지리라 확신한다.
병자들의 은총?
곽승룡 비오 신부님
2월 13일 수요일, 병자들을 찾아가 주님의 성체를 모시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 안에서 병들어 계신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6,54)
병이란? 약함이란? 무엇일까. 병은 아픔이고 고통이면서도 하느님 은총의 길을 걷는 데 필요한 것을 확인하는 위대한 설교가 같다. 그래서일까 병이란 구원과 건강에 나쁘지 않는 선물과 같은 것일 수 있는데,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병자는 기능적으로 이미 삶에서 종교인이고 수도자 같은 모습을 산다고 말했다.
한편 병에 걸렸을 때 누가 찾아주는가. 누가 친구인가를 드러내는 사회적인 기능도 있는 듯이 보인다. 신학교에 오랜동안 같이 지내시다 2017년 7월 6일 주님 품에 기신 서봉세신부님은 투병하시며 "내가 아프지 않을 땐, 나에게 아픈 사람이 오더니, 내가 아프니까 안아픈 사람들이 많이 오네!"하셨다. 그래서인지 사람은 사회적이고 공동체적 존재이다. 다른 이 없는 삶 상상할 수 없다.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요즘 혼자 있는 게 외로운 건 싫어서, 함께 하니 더욱 괴로운 자들이 많아 보인다. 주님께 안내해보자...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6, 56)
성지순례를 하면 순례자들은 성지에 모셔져 있는 성인들의 상(像)을 손으로 만진다. 로마 성 베드로 성당의 청동상으로 빚은 베드로 성인의 발가락이 하얗게 바랬다. 순례자들이 매일 성인의 발을 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순례자들은 성인의 상을 만질까.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그것을 접촉하는 자체보다 그렇게 하는 믿음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듯싶다.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참 가치, 곧 마음과 생각 그리고 믿음에 그 접촉하는 행위의 가치가 들어가 있는 듯싶다. 그러니 종교생활은 매사에 맞느냐 아니냐 보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마음을 알고 이해해주는 삶이 먼저 인듯싶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6)
우리의 약함을 하느님 앞에 병과 함께 봉헌하는 것도 은혜를 크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약함을 알아차리는 것은 살려는 원의이면서 동시에 일어나려는 용기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제거하거나 막지 말아야 한다. 병의 문제는 육체만이 아니라 그 깊은 곳에서 과연 살 수 있을까 없을까라는 희망과 절망 사이이고, 분명 살고자하는 의지가 들어가 있다. 마치 산에서 길을 잃으면 앞이 캄캄해지고 걸을 수 없게 되어 힘이 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집에 갈 힘이 생기듯이... 주님!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당신께 손을 대는 자(대한민국)에게 당신의 은총 가득하게 주소서!
"과연 그것에 손을 대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들은 모두 병이 나았다. 우리의 몸을 보면 항상 한 방향으로 근육을 많이 사용한다. 무리하면 근육통이 온다. 우리 삶도 항상 한 방향으로만 가려고 한다. 예수님의 초대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다른 역방향이다. 근육통이 오면 우리가 사용한 반대 방향으로 근육을 풀어 주면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긴장을 풀어 준다는 것이다. 매일 삶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긴장안에서 살고 있다. 이 긴장을 풀려면 예수님의 방향으로 향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긴장이 풀리고 삶의 균형을 맞출 수가 있다. 바로 예수님의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열망이 옷자락을 잡고자 하는 심정이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방향 우리가 가고자하는 역방향으로 삶의 키를 틀어 보자! 그러면 잔잔한 새벽의 언어를 알아 듣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성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성 보나벤투라 주교의 담화에서(Prologus: Opera omnia 5,201-202)
성서의 기원은 인간의 탐구에 있지 않고 신적 계시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의 근원이신 빛의 아버지”에게서 흘러 나옵니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흘러내리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뜻에 따라 각 개인에게 은혜를 분배해 주시는 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신앙을 얻으며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거처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으로 부터 모든 성서에 담겨 있는 진리의 확실성과 이해가 샘물처럼 흘러 나옵니다. 모든 성서 말씀의 문이고 기초이며 등불인, 우리 마음에 부어진 그리스도의 신앙을 먼저 가지지 않고서는 누구라 할지라도 성서의 말씀 안에 들어가 그것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순례하는 동안 모든 초자연적인 조명의 굳건한 기초이고 우리가 가는 길을 인도해 주는 등불이며 하늘에 들어가게 해주는 문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도록” 하느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정도에 따라 당신의 지혜를 내려 주십니다.
성서의 목적과 열매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의 충만을 얻는 것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그것을 믿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마련된 것이므로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쓰여진 책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보고 사랑하며 또 우리의 온갖 갈망이 충족될 것입니다.
그때에만 우리가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사도가 앞에서 우리에게 말해준 대로 성서는 우리를 이 충만함에 들어가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목적과 지향으로 성서를 연구하고 듣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올바른 길을 따라 진보함으로써 이 열매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시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즉 단순한 신앙으로 빛의 아버지께 접근하여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과 더불어 사랑을 베풀어 주시도록 무릎을 꿇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분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즉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성서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성도들의 갈망이 향하고 온갖 진리와 선의 완성이신 지극히 복되신 삼위 일체께 대한 충만한 지식과 넘치는 사랑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 생긴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일까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하시기 위해 내려오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무릎마저 꿇고 우리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은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마르 6,54-56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접속되지 않으면 한갓 끊어져 있는 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 있습니다.
사랑의 접속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접속되고 저희에게 당신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 인간은 '생로병사' 하게 운명지워져 있습니다. 태어나서 늙고 죽는 것까지는 다 받아들이고 수긍하겠는데, 왜 꼭 병이 들어야만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갈수록 의술이 좋아져 평균수명이 많이 길어졌지만 병원마다 왠 환자들이 그리 많은지요. 뭐 기계도 오래 쓰면 고장이 생기고 부속을 새로 갈아끼워 넣어야 하듯이 오랜 세월 잘 사용했으니 고장날 만도 하지요. 이런 노화를 겪으면서 여기저기 고장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병원신세를 지는 아이들, 아직 한참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린 사람들, 우울증과 조현증, 치매와 신종 바이러스에 걸려 삶이 파괴되고 있는 사람들...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시고나서 "보시니 좋더라"(창세 1, 10.12.18)고 하신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도록 허락하시는 걸까요?
아무튼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전구와 도움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환자들이 모두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아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보다 "사람들"(마르 6,54)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부각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눕혀", "데려다 놓고", 치유를 "청"합니다.
복음의 다른 치유 기적사화들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손을 대어 치유해 주시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좀 특이하게도 사람들이 데려다 놓은 병자들이 직접 팔을 뻗어 "옷자락 술"(마르 6,56)에 손을 대고 치유를 받습니다.
독서는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의 창조 설화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창세 1,2) 세상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빛, 하늘, 땅과 바다와 푸른 싹, 빛물체들'이 나흘 동안 차례로 생겨나지요.
시편 저자는 세상 만물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이 모든 창조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주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귀하십니까! ...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시편 2,4)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압니다. 이 '하느님의 손'이나 '손가락'은 하느님께서 친히 이루신 위엄과 권능의 업적임을 드러낼 때 성경 저자들이 즐겨 썼던 표현이지요.
그런데 복음에서는 전혀 다른 손들이 등장합니다. 자기 일처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병자들을 챙겨 데리고 온 손들, 그리고 치유의 일념으로 가득 차 장터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향해 힘껏 내뻗은 병자들의 손들. 누구에게 손을 대려고 팔을 뻗는 것은 아무 의미없이 그냥 해보는 행동이 아닐 겁니다. 의도와 방향성과 목표를 지닌 신념의 표출이지요.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첫번째 창조가 하느님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자리에서는 병자들을 도와주는 이들의 손과, 믿음에 차 내뻗은 병자들 스스로의 손을 통해 재창조가 이루어집니다.
첫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잠언 8,22-31 참조) 새 창조의 현장에도 예수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저마다 부족하고 약한 인간을 통해 오늘도 세상의 혼돈과 어둠을 헤치고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시는 하느님의 업적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혹 여러분은 병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까? 주위에 그런 분이 계시지요? 이 고통스런 병이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사업에 기여하기 위한 봉헌이라면 무의미하지는 않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가치있는 고통이겠지요.
오늘 생로병사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거쳐야만하는 병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 봉헌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함께 아파하시며 그 고통을 축복하고 계심을 굳게 믿으시길 청합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서 당신의 기적수로 원죄의 업보로 얻게 된 이 병까지도 깨끗하게 치유시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시어 모든 병자들을 고통에서 치유시켜 주소서. 아멘.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시작도 마침도
절박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절박함 속에서
봄꽃이 피어납니다.
절박함으로
손을 내밀고
절박함으로
손을 대어야 할
절박한 때가 있습니다.
절박한 때가
우리의 믿음을
깨어나게합니다
절박함으로
다시 열리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절박함입니다.
절박함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마다의 십자가도
절박함입니다.
아플수록
절박해집니다.
절박함이 있기에
우리의 믿음은
부패되지 않습니다.
간절하게
치유를 갈망하는
아프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을 향해
가게 만드는
우리의 절박함입니다.
절박함과 구원은
사람과 주님의
마음임을 믿습니다.
우리나라에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서는 직원 전원이 로봇인 호텔이 생겼다고 합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처우 개선이나 연봉 인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육아 휴직이나 병가 등을 내지 않을 테니 훨씬 매력적일 것 같습니다. 더욱이 작년에 있었던 구글 딥마인드라는 ‘알파고’와 인간의 바둑 대결로 인해서 로봇 역시 높은 지능으로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그래서 인간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직업의 3분의 1일을 로봇에게 빼앗기고 심지어 전문 일자리까지 잠식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편리함과 생산성 그리고 유용성까지 주는 로봇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이 모든 인간들에게 반드시 필요할까요? 우선 인간의 일자리를 잠식함으로 인해 이 안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경영자 몇몇의 만족을 위해서 대다수가 아픔과 상처를 받는다면 분명 필요한 상황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조건 편리함과 생산성, 그리고 유용성 등의 쉽고 편안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 옳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삶 안에서 쉽고 편안한 것을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노력도 없이 쉽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며, 특별한 운이 자신에게만 계속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누군가가 아픔과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면 분명한 잘못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오셨던 그 상황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왜 굳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냥 알아서 해주시면 당신도 편하고, 우리도 편하지 않을까요? 왜 힘든 길을 직접 선택하셔서 하느님께서 인간으로부터 죽음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어쩌면 편하고 쉬운 길만을 선택하지 말라는 주님의 직접적인 모범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 한 번에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 그냥 알아서 나에게 좋은 것은 다 달라는 마음 등을 통해서는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느낄 수도 없으며, 이러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소외되는 그 누군가가 분명히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습니다. 그런데 그냥 쫓는 것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전해줍니다. 그들의 간절함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간절함 없이 예수님을 쫓았던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정적인 모습만을 바라보면서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만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의 간절한 노력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은 뒤 깨닫는다. 이 깨달음이 모여 인생의 지도를 만든다. 인생이란 지금 발을 내디딘 현실에 맞게 머릿속 지도를 수정해 가는 과정이다(고든 리빙스턴).
엄마의 한마디(최천호)
어느 가족이 주말에 야외로 나갔다. 아들이 자동차를 보더니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아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첫 번째. 연료가 연소하면서 발생하는 열에너지를 기계적 에너지로 바꾸어 자동차가 움직이는데...'
아무래도 이건 아들에게 답해주기 좀 어려운 것 같았다.
'두 번째. 우리가 밥을 먹어야 막 뛰어놀 수 있듯이 자동차도 엔진이라는 곳에 기름이라는 밥을 주면 움직인다.'
이건 자상한 아빠의 대답인 것 같은데 뭐가 좀 허전한 것 같았다. 궁리만 하는 아빠가 답답했는지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자 엄마는 단 한마디로 끝내 버렸다.
"빙글빙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는 어머니의 대답이 어쩌면 주님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나의 이웃들에게 이렇게 눈높이를 맞추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도 정성을 들여서 만든 도자기를 보면 그런 마음이 들것입니다. ‘아 좋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성당 앞에 작은 동산이 있었습니다. 태풍이 불어서 토사가 밀렸고, 아파트와 마주한 옹벽이 조금 무너졌습니다. 서울시와 구청에서 관계자가 성당을 찾아왔고, 앞으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동산을 6미터 정도 낮추기로 했습니다. 트럭으로 1200대 가량의 흙을 파냈습니다. 성당 앞에는 1000여 평의 마당이 생겼습니다. 철쭉, 장미, 과일 나무를 심었고, 잔디를 심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름다운 정원이 생겼습니다. 그곳에서 ‘성모의 밤’도 하였고, 정월 보름에 ‘윷놀이’도 하였습니다. ‘정말 보니 좋았습니다.’ 선한 마음과 정성이 함께하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들은 ‘보기에 좋은 것’들이 될 것입니다.
욕심과 교만이 가득하면 우리가 하는 일들이 겉으로는 보기 좋을지 몰라도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자칫 대형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 성수대교의 붕괴’입니다. 자신은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유통시키기도 하고, 남의 노력과 혼이 깃든 명품을 짝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보기에 추하고, 버려야 할 것입니다.
지난 3일에는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새 사제를 보는 것은 언제나 기쁨입니다. 사제서품식이 끝나고, 추기경님께서 새 사제들에게 첫 부임지에 대한 임명장을 주셨습니다. 새 사제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임명장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도 26년 동안 11번 자리를 옮겼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는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적성과 시흥5동에서는 본당신부로 지냈습니다. 사목국에서는 교육담당 업무를 담당했고, 캐나다에서는 연수를 했습니다. 중견사제 연수를 마치고 용문 청소년 수련장에 있었고, 성소국에서는 5년째 일을 하고 있습니다. 26년 동안 본당에서만 사목을 했던 동창 신부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참 여러 곳을 다양하게 옮겨 다녔다!’ 제가 지나온 그 길들이 보기에 좋기 보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낯선 곳의 긴장도 쉽게 풀어주고, 새로운 만남을 곧 친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열심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전문가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식견을 받아들이고, 그분들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분들에게는 물질적인 보상보다는 그분들을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이 더 소중합니다. 사실 그분들 대 부분은 저 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사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필요해서 만나는 사람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더 자주 찾아뵙고 만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시는 신부님들, 사제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사목현장으로 가시는 신부님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분들이 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그런 일들이면 좋겠습니다. 그분들 모두가 주님의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 중에 함께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참 좋은 가장(家長)이자 최고의 디자이너. -하느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퍼뜩 떠오른 주제는 ‘우리의 참 좋은 가장-하느님’이었습니다. 세상 창조때부터 지금까지는 물론 세상 종말까지 참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 애쓰시는 우리의 참 좋은 가장 하느님이십니다. 교회의 순교사를 봐도 이런저런 우여곡절의 과정을 통해 참 좋은 영원한 가장이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 서서히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은 일본 순교성인들인 성 바오로 미끼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느날 일본을 생각하면 참으로 각별한 느낌이 듭니다. 성 바오로 미끼는 약 450년전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시기에 예수님과 똑같은 나이인 33세 짧은 나이에 순교한 예수회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교토에서 동료 신자들과 체포되어 나가사키까지 무려 1000km 600마일, 2500리 길을 교회의 찬미감사가인 테데움(Te Deum)을 부르며 걸어가 동료 신자들 25명과 함께 1597년 2월5일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처럼 십자가위에서 박해자들의 용서를 청하는 기도의 강론으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때 바오로 미키와 순교한 25명은 사제 22명과 예수회 일본 수사 3명이었습니다. 참으로 혼돈스러운 세상도 이런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서서히 인류가정으로 형성됨을 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회의 순교역사입니다.
오늘부터 제1독서는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첫 절을 보면 창조 이전의 혼돈스러운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참으로 어둡고 무의미(無意味)하고 무질서(無秩序)한 무(無)의 심연(深淵)같은 장면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영원한 가장이신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살 수 있는 가정의 터전으로 만들어 가시는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하느님의 디자인 솜씨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디자이너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은 '우리의 참 좋은 가장이자 최고의 디자이너-하느님-'으로 정했습니다.
창조과정을 통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면서 가장인 하느님을 중심으로 가정(家庭)이 형성되는 모습입니다. 흡사 균형과 조화가 갖춰지고 질서가 잡혀가는 아름다운 세계 가정같습니다. 오늘은 넷째 날까지 창조과정을 보여줍니다. 각자의 영역과 한계가 분명해집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라는 예전의 강론 주제가 생각납니다. 창조전의 혼돈스러운 모습이 바로 그러합니다. 창조과정을 통해 분명한 한계가 설정되고 하느님 중심의 균형과 조화, 질서가 잡혀가니 “천국에는 한계가 있다.”라는 말이 그대로 통합니다.
창조과정 중에 후렴처럼 되풀이 되는 말마디가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입니다.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가장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고, 그분은 좋으시며 그분이 하신 모든 것은 정말 좋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좋은 세상이 악과 고통이 범람하는 세상으로 변했는지에 대한 답은 앞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창조 과정의 넷째 날까지 매번 후렴처럼 도합 4회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말마디가 참 기분이 좋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수도원 세상을 꾸미려 노력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우리의 영원한 참 좋으신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입니다. 어제의 신선한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바로 수도원 화장실과 샤워실 빈 마루바닥 공간을 원장수사가 말끔히 정리, 정돈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네요!”
“정리의 천재같네요!”
“인테리어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것 같네요!”
진심에서 우러난 청담(淸談)을 나눴습니다. 창세기의 혼돈스러운 모습이 창조과정을 거치면서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운 질서있는 모습으로 변한 것과 흡사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꼬 복음 사가가 예수님의 활약상을 요약한 집약문으로, 우리의 참 좋은 영원한 가장이신 하느님의 외아드님 예수님께서 참 좋은 가정을 만들기에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대로 창세기의 창조과정을 보는 듯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말이 딱 드러맞는 광경입니다. 이들 삶의 중심에 자리잡으신 예수님을 텃치하여 연결, 소통하는 순간 병고의 혼돈스런 모습들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치유, 회복되는 모습들 모두가 예수님 가정의 한 식구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마디의 뜻을 나누고 싶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희랍어 ‘에스존토(eszonto)’의 뜻은 육체의 치유 그 이상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그말마디의 뜻은 ‘육신의 좋은 상태(wellness)’만이 아니라 ‘온전한 상태(wholeness)’를, ‘가정에의 복귀(coming home)를 뜻했습니다. 그야말로 고향집에 돌아 와 우리의 영원한 가장이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텃치하여 만남으로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고향집에 돌아온 우리 모두에게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시고, 이어 당신을 중심으로 한 균형과 조화, 질서가 잡힌, 당신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복음서는 맥락으로 읽어야
윤경재 요셉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6,54~56)
오늘 복음 부분을 읽다보면 무언가 평소와 다른 맛이 느껴집니다. 왠지 밋밋하고 담담하다는 느낌이 들죠. 병자를 고쳐주시는 게 주제라면 마르코복음서가 보여 주는 전형적인 요소가 다 생략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구체적 인물, 주변 사람들의 반응,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등에서 다른 부분과 차이가 납니다.
가장 큰 차이는 문장의 주어가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동사도 5가지가 나오는데 ‘사람들이 알아보고, 뛰어다니며, 눕혀, 데려오기, 청하였다’입니다. 예수께서 한 일은 전혀 없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저 이 마을 저 마을로 들어가신 것만 나옵니다.
왜 다른 부분과 차이가 나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복음서를 문자적으로 읽다보면 이런 지점에서는 수박겉핥기가 되기 십상입니다.
마르코복음 6장30절부터 7장23절까지를 문단 나누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파견한 사도들이 돌아오자 외딴곳에 보내심
2.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
3.제자들은 벳사이다로, 예수님은 산으로 헤어짐
4.호수 한가운데 갇힌 제자들과 호수 위를 걸어가시는 예수님
5.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6.겐네사렛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임
7.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 논쟁하심
8.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9.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비유설명
아홉 개 부분 중에서 가운데인 5.‘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가 소주제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사도들과 제자들,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집쟁이들 등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저자는 이 세 부류 모두 예수님께서 가리켜 보이고자 하신 의도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 단어가 ‘완고함’입니다.
사람들은 피상적으로 자기 필요에 의해 예수님께 모여들었으며 많은 병자들이 구원을 받았지만, 근본적 변화와 회개에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유다인은 사람이 세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그것입니다. 신약성경도 이 세 분류에 충실히 따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세 부류 즉 사도들과 제자들은 영을 대표하고, 사람들은 육체를, 고집쟁이들은 정신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영과 육체와 정신이 모두 한 결 같이 회개하고 바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제대로 하늘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 저자도 이 가르침을 어떻게 하면 충실하게 우리에게 전달할지 고심하였습니다. 그 흔적이 오늘 복음 대목입니다. 그래서 다른 치유기적 이야기와 확연히 차이 나도록 기술하여 우리가 눈치 채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막연히 비슷한 치유기적이겠거니 하고 넘긴다면 우리는 복음말씀의 진수를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영과 육체와 정신이 모두 바뀌어야 전인적 변화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영만 바뀌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몸과 정신이 따라와 주지 않으면 그 변화의 힘이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몸까지 바뀌는 걸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산위에서 예수님 모습이 바뀌는 장면을 설명하며 변모(metamorphethe)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글자 그대로 형태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22,37)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태22,29)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정신은 생각을 좌우합니다. 정신이 바뀌면 생각도 바뀝니다.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은 바로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고 사람의 일은 배제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저지른 짓을 반복해서 따라하는 잘못입니다.
복음서를 맥락으로 읽을 때 오는 참맛은 참으로 깊고 오묘합니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는 맥락적 구조가 철저합니다. 마치 건축가가 세밀한 설계도를 그려놓고서 집을 짓는 것 같은 치밀함이 보입니다. 초보 입문자를 위한 복음서라는 느낌 탓에 소홀히 여길 수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매력은 굳건한 바위 위에 훌륭한 건축물을 짓는 장인이 되어서 내게 전해져 온 설계도면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데 있습니다. 저자의 숨소리 하나 땀방울 하나를 공유한다면 저자가 체험했던 주님의 모습이 우리 앞에 생생하게 살아날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완고함에서 벗어나 영과 육체와 정신을 모두 바꾸려는 각오로 예수님께 달려가고 있는지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 삼아 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 환영 받지 못 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 받겠습니까? 옛날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새로워진 사실을, 구원 받은 사실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 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 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 마다 구원을 받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5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제1독서>에서 우리가 들어오던 <히브리서>는 이제 끝나고,오늘부터 <창세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인 오늘 <독서>는 ‘창조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겐네사렛 땅에서 생긴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새롭게 창조된 사람일까?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곧 믿음을 행위로 드러낸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새로 창조된 이 인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이인가?
지금 나의 손이 무엇에 가 있는가? 내 손이 지금 무엇을 만지작거리고 있는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그 무엇인가?
사실, 마음이 있는 곳에 손과 발이 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손을 댄 것은 우리지만, 사실 만진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우리는 손을 댔을 뿐, 사실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우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려오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무릎마저 꿇고 우리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은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마다 데려왔습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마르 6,54-56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한편에는 예수님께 간청하는 이들이 있고, 또 한편에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고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접속되지 않으면 한갓 끄나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 있습니다. 사랑의 접속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 항상 당신과 접속되어 있게 하소서.
또한, 형제와 이웃을 위하여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창조질서를 깨는 인간의 구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카오스(Chaos)를 사전에서는 무질서, 혼란, 창조이전의 혼돈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는 ‘태초 신’ 중 하나로 '텅 빈 공간' 또는 '대 공허', 무(無) 또는 절대공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같은 단어가 어떻게 보면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뜻을 깊이 음미하면 사실은 맥락을 같이 합니다. 무질서, 혼돈이란 모든 것이 한 데 섞여 있는 것, 또는 얽혀 있는 겁니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천체물리학의 빅뱅 이론에서도 우주는 빅뱅이라는 대폭발로 한 점이 팽창하면서 거기서 모든 것들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는데 그 한 점에 모든 것이 한 데 섞여 있었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까 제식대로 추측합니다.
동양의 과학철학인 주역에서 “역(易)에 태극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 : 음양)를 낳는다.”고 한 말에서부터 우주의 시작과 관련한 여러 주장이 나왔는데 그 중에 태극을 원기(元氣), 천지가 나누어지기 이전에 혼돈 상태로 있는 원기라고 주장하는 학파도 있습니다. 이 원기인 태극에서부터 음양이 나오고 음과 양이 작용해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하는 거지요.
제가 우주의 기원과 관련한 여러 주장들을 얘기한 것은 이 주장들이 오늘 창세기와 어떤 유사성이 있다는 것과 이런 맥락안에서 오늘 창세기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창세기 1장 1절의 비어있음 또는 아무것도 없음은 모든 것이 그 안에 있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나오는 그런 비어있음과 아무 것도 없음이고 그래서 이를 일컬어 ‘대공허大空虛’요 ‘절대무絶對無’라고 하지요.
없는 것 같지만 실은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그 어떤 것’이란 표현을 썼지요.
그러니까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은 그 어떤 구별도 하기 전의 것이며, 구별하고 나면 그때 해, 달, 별과 같은 그 어떤 것들이 생겨나는 것이고, 그 어떤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아무 것도 없는 그곳에서 모든 것이 생겨난다는 얘기이며 생겨난다는 것은 구별작업이라는 얘깁니다.
창조 이전에는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었고, 창조 이전에는 낮과 밤의 구별이 없었으며, 창조 이전에는 선과 악의 구별이 없었지요.
구별된 하늘과 땅이 없었는데 하느님께서 구별하시자 하늘땅이 생기고 빛이 생기라 하시자 낮과 밤, 밝음과 어둠의 구별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오늘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번역은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라고 하는데 전의 공동 번역과 개신교 성서는 나누시는 것으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으로 표현하든, 다시 말해서 나누든 가르든 그것은 무엇과 무엇을 구별하는 것인데 창세기는 이 가르는 것, 구별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거로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께서 가르신 것을 창조질서, 곧 질서 있게 창조하신 거라고 하는데 나중(3장)에 볼 수 있듯이 하지 말라는 선악의 구별을 인간이 하면서부터 이 창조질서가 깨지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이 창조질서를 인간이 깨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창세기의 가르침이고 요즘 생태신학의 가르침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행복을 찾고 행복 안에 머무는 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바라는 구원은 주님 안에서의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거저 주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행복이란 잠자코 나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만 딴 데 눈길을 돌려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지요. 오늘 복음은 어떻게 행복을 찾고 그 안에 머물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시는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에서 내리는 예수님을 ‘곧 알아봅니다.’(6,54). 예수님을 알아봤다는 것은 행복의 원천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추상적 지식을 습득한 것이 아니라 ‘알아본’ 것이지요. 그러나 알지 못한다면 당연히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다가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찾아 나섰고’, 계속 따라다니며 '보고, 받아들이고 믿었기에' 알아본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머무르려고 시간을 내서 함께 했고,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그분께 집중함으로써 체험적 앎과 깨달음이 있었으니 알아본 것입니다. 행복은 그렇게 거저 주어지는 법이 없지요.
예수님을 알아본 그들은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합니다(6,55). 믿는 이들이 찾아가는 행복은 언제나 ‘함께하는 행복’이며, ‘함께 나누는 행복’이며, 하느님의 선(善) 안에서 서로를 이롭게 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해지는 보편적인 행복입니다. 멈춤 없이 주변으로 밀려난 형제자매들을 행복의 샘이신 예수님께 데려가는 것이 우리의 몸짓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다가가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 안에 머무르려면 한걸음 더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요한 15,12)이 마땅한 도리이겠지요.
예수님처럼 억울함과 절망과 고통과 온갖 아픔을 안고 다가오는 이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거짓과 불의, 차별과 불평등, 온갖 반생명적인 실재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는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마르 6,56). 자기중심성과 애착에서 벗어나 늘 마음과 영혼의 눈길이 다른 이들의 아픔에로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항구한 사랑의 눈길과 연민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신해야 합니다. 조건 없이 서로의 아픔과 불의와 어둠을 받아들여 선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사랑과 의로움과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는 이들의 갈증을 채워주기 위해 남김없이 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시간을 쓰고 공을 들여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그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더불어’ 그분께 다가가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 행복, 영원한 생명을 향해 떠나는 가슴 벅찬 순간을 이어가길 희망합니다. 고정관념과 왜곡된 신념, 이기심을 치우고 하느님 친히 ‘보시기에 좋은’(창세 1장) 행복한 나라가 펼쳐지도록 준비했으면 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창세기 저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深淵) 덮고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빛이 생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 한마디로 푸른 싹을 돋게 하시고 씨를 맺는 풀과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 한 마디로 궁창에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을 만들어 놓으십니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보시니 좋았다.’(1,4.10.12)라고 하십니다.
고대 근동 문헌 중에 바빌론, 앗수르파니팔(Ashurbanipal B.C. 668-630)왕의 궁중 도서관에 보존되었던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라는 서사시 토판(대략 B.C. 1700)에서 구약성경의 천지창조의 이야기와 흡사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모두 일곱 개의 토판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창조 되기 전에 원시 대양인 압수(Apsu; 단물)와 그이 아내 티아맛(Tiamat; 짠물) 그리고 그들의 아들 뭄무(Mummu)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압수와 티아맛은 이어서 안사르(Ansar), 키샤르(Kishar), 아누(Anu), 엔키-에아(Enki-Ea)를 낳습니다. 그러나 압수와 티아맛은 자식들이 성장하며 소음을 일으키는데 분노하여 자식들을 멸망시키려 하지요.
그러나 이를 알아차림 엔키-에아가 먼저 주술을 외워 압수를 잠들게 하고 그를 죽입니다.
남편 압수를 잃은 티아맛은 그녀의 측근인 킹구(Kingu)와 짜고 에아를 죽이려 합니다. 에아는 담키나(Damkina)와 결합하여 마르둑(Marduk)을 낳습니다.
에아는 자신을 죽이려는 티아맛을 대항하여 마르둑을 앞세워 격렬한 싸움을 벌입니다.
결국 에아가 승리하지요. 신들의 우두머리가 된 마르둑은 창조의 신이 되어 우주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마르둑은 티아맛의 죽은 몸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하늘을 만들고 다른 쪽은 땅을 만들지요.
그리고 이어서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듭니다. 마르둑은 다시 티아맛의 추종자였던 킹구를 죽여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흙과 결합하여 인간을 만듭니다.
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은 성경의 창조의 이야기와 에누마 엘리쉬의 창조 순서와 표현이 비숫하여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가 궁창의 창조, 광명체 창조, 인간의 창조의 순으로 이어지고 창조 이전에 어둠과 흑암이 있었다는 점과 궁창 위의 물과 아랫물의 구분하는 것 등입니다.
학자들 일부에서는 창세기 저자가 시대적으로 앞서는 에누마 엘리쉬의 신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바빌론 유배를 통해 창세기 저자는 그곳 신화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인간의 모습을 투사한 신들의 가족 투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와 초월자이신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줄거리에 따라 전개되는 창조의 이야기와 유일하신 하느님의 의도를 담은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이야기와는 그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창조 이야기를 덧붙여서 설명하는 것은 학계에서 문제 되고 있는 점을 알려드리고 하느님 창조 이야기를 좀 더 이해시키시 위한 것입니다.
마르코는 주님의 구원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창조 때에는 인간은 조화롭고 선한 존재 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와 죽음의 그늘에서 그들은 병들고 욕심의 끝길인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죄이든 죽음이든 인간의 조화롭고 선한 모습을 파괴시키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에게 구원을 펴십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조화를 깨트리고 생명을 잃은 사람을 본래의 온전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든 이들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옷자락의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놀라운 것은 옷에 손을 댄 사람으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때론 욕심에 눈이 어두워 하느님 가르침에 반대로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주님께로 돌아 설 수 있고 그분의 옷자락 만이라도 만질 수 있으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하는 기도의 시간을 마련해야 하지요. 그래야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시들지 않는 희망을 간직하면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도 팔을 걷어 부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다 ‘보시기에 좋듯’ 우리 주님 옷 자락에 닿는 모든 것은 다 선으로 바뀌고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병자들이 자기의 병을 치유 받기 위해서 모여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얻으려고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들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인간의 절박한 요구, 사람이 줄 수 없는 무엇을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그러한 은혜를 받고도 결국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동조한 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이 군중들 중에는 예수님을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분으로 이용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와 같이 수많은 군중들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인 모습이 아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인가? 또 친구와 친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이용하고 또 도움만 받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나 않는지?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해서는 어떤가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찾으면서도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한다. 세상이 변화된다는 것은 먼저 나 자신의 조그마한 것이라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내 울타리’에 갇혀
‘또 다른 나’를 보지 못하는 이들을
‘지금’의 무게에 짓눌려
‘내일’의 기쁨을 품지 못하는 이들을
‘더 가짐’에 눈에 어두워
‘참 있음’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그리하여
정녕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신 그분께
다가갈 수 없는 이들을
그분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옷자락이라도 내어주시려는 예수님 …
모든 것 내어놓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
아픈 사람들 그러나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 …
그리고 이들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사람들 …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요.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요.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 5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병든 우리들에게
간절한 것은
우리자신의
구원입니다.
삶이 있듯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이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바탕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구원은
나란히 걸어갑니다.
구원을 청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구원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자신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향합니다.
구원의 시작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자매님들이 형제님들로부터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뽑는다면 첫 번째가 축구 이야기, 둘째가 군대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최고로 싫은 이야기는 군대 가서 축구한 이야기라고 하지요. 아마 군대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일이 축구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많이 말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군대에서 이 축구 때문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한 번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군대에 가서 자대배치를 받은 뒤에 군기가 가득 들어있는 상태에서 동기들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데 선임 병들이 다가와서 저희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 축구 잘 하냐?”
차례로 이야기하는데, 동기들은 “잘 못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역시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축구는 잘 못합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한 선임 병이 저에게 “그러면 뭘 잘하는데?”라고 묻는 것입니다. 다른 친구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게만 그런 질문이 던져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큰 소리로 “농구도 잘하고, 탁구도 잘합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가능성을 가진 대답 그 자체가 그 뒤로 계속해서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요. 그때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못한다는 생각보다는 가능성과 함께 언제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어떤 일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가능성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커다란 사랑과 은총의 힘을 쏟아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가를 보십시오. 자기는 할 수 없다고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그 가능성에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 손을 댄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해주시는 사랑가득하신 분이니까요.
잃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잃지 않으면 얻을 수 있다(다이 허우잉).
마음껏 가져가시오(‘따뜻한 하루’ 중에서)
시골에서 상경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들은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집 모퉁이에 자그마한 자투리땅이 있었는데, 밤만 되면 이웃 주민들이 몰래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호소도 해 보고, 경고문구도 써 붙여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호미를 하나 사다가 문제의 자투리땅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그럴싸한 텃밭으로 변하였고 그곳에 상추와 고추를 심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아버지! 쓰레기가 보이질 않아요!”
날이 가도 달이 가도 쓰레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어 상추와 고추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푯말을 만들어 붙였습니다.
‘상추가 필요하신 분은 마음껏 가져가시오’ ‘고추도 원하신다면 양껏 가져가시오.’
파릇파릇 돋아난 고추와 상추 잎은 온 동네 주민들의 인기였습니다. 아버지는 해가 지나도 텃밭을 일구어, 싱싱한 상추와 고추를 재배하였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셔 달라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커다란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작은 행동, 배려하는 작은 말 하나를 통해서 너무나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변화를 주님께서 진심으로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치유되기 위하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기저기 아파보면서 얻게 된 깨달음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질병, 예를 들면 피부병이라든지 타박상, 찰과상이라든지 골절상 같은 병은 꾸준히 치료하면 대체로 빨리 낫습니다. 빠르게는 한두 주일, 길게면 한 달 두 달 길어봐야 6개월, 1년입니다.
그런데 치료하기가 더 어려운 질병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질병입니다. 위장이나 대장 질환, 간이나 혈관질환 등등. 우선 잘 보이지 않기에 치료도 복잡하고 힘들뿐 아니라 질병이 만성질환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내부의 질병보다 더 치료가 어려운 질병이 있습니다. 마음이나 정신의 질환, 영혼의 질병입니다. 이 질병이 무서운 것이 사람에 따라서 자각증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질병의 상태가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본인이 잘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자는 자신 겪고 있는 영혼의 질환이 마치도 ‘말기 암 증상’과도 같은 데도 불구하고 우선 살아 숨쉬기에 그걸 깨닫지 못하기도 합니다. 치료를 위해서는 현재 병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진단 그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질병의 심각성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간 몰랐었는데 강렬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빛으로 인해 자신들의 어두움, 자신들이 앓고 있는 질병의 심각성을 낱낱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만사 제쳐두고 치유자이신 예수님께로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코 6장 54~55절)
예수님 앞으로 달려온 환자들은 앞 다투어 자신들의 깊은 상처를 가감 없이 그분께 보여드렸습니다. 마치 놀다가 다친 어린아이가 울면서 엄마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가 기적적인 치유의 은총이었습니다.
기적적 치유에 이르기까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스스로 심각한 환자임을 솔직히 고백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환부를 예수님께 보여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자비하신 분, 우리를 향한 무한한 측은지심을 지니고 계신 분, 그래서 우리를 죽음의 질병에서 구원해주실 전지전능한 메시아임을 고백하는 굳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런 저런 내과적 질환, 외과적 질환, 정신과적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은 아무래도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이 최상책이겠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질병, 영혼의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우리 마음과 영혼의 주치의이신 예수님께로 달려가셔야겠습니다. 영혼의 질병을 가장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보물인 성경을 손에 드셔야겠습니다.
창조의 협력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발을 판매하는 회사가 새로운 판매처를 찾다가 아프리카로 두 명의 영업사원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곳에서 판매를 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사람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회사로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에 가니 그곳 원주민들은 신발을 전혀 신고 있지 않아서 신발을 팔수가 없습니다.”
사장은 곁에 있던 다른 사원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신발을 신으면 얼마나 좋고 편한지를 알려 준다면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의 고객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일한 곳을 탐방하고 왔지만 한 사람은 불가능을, 다른 한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신발은 누구를 통해 아프리카에 생겨나게 될까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신발을 신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믿는 누군가가 받아주어야만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창조 이야기가 나오는데, 자칫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냥’ 말씀으로 빛도, 공간도, 사람이 살 육지도 만드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자 혼자서 아기를 낳을 수 없기에 협조자인 여자를 만들어 주셨듯이, 하느님의 창조에도 항상 협조자가 존재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물!’이라고 외치면 물이 생깁니까? 아무 변화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옆에 있다가 물을 한 잔 가져다주면 내 앞에 없던 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하느님은 절대 혼자서 고독하게 창조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창조자를 ‘지혜(소피아)’라고 말합니다. 잠언에 의인화된 ‘지혜’가 창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읽어보면 흥미로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산들이 자리 잡기 전에,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그분께서 땅과 들을, 누리의 첫 흙을 만드시기 전이다.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그분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잠언 8,22-31)
따라서 오늘 독서에서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줄 첫 번째 피조물이신 온 천지만물과 인간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누군가의 협조 없이 절대 아무 것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여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들이 태어나도록 그 말씀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신 그 ‘지혜’의 단서가 바로 창세기 1장 2절에 등장합니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땅’은 성경에서 ‘여인’을 상징합니다. 그 여인과 관계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인 성령입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물’과 관계있습니다. 여인이 성령으로 가득하여, 그 성령의 열매인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일 때야만 말씀이 열매를 맺어 새로운 무엇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줄 성령으로 가득한 이 첫 번째 피조물인 ‘지혜’를 교회 학자들은 모두 ‘성모 마리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나중에 태어나셨지만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계신 분이신 것처럼, 그분을 낳으신 마리아 또한 시간을 초월하셔야 함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머니로부터 인성을 받으신 분인데, 어머니가 없이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부 에프렘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물이 불로 따듯해지는 것처럼, 또 암탉이 달걀을 따듯하게 품어야만 알에서 병아리가 탄생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신 어떤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통해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암브로시우스는 성령의 도움으로 씨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것이 창조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당신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30)
그리고 성경의 주보성인인 히에로니무스는 이 구절이 ‘세례’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참조: 교부들의 주해)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창조하실 때 성모님의 ‘믿음’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처럼, 창조는 하나의 ‘열매’입니다. ‘씨’(말씀)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땅’(어머니)이 있어야 하고 ‘물과 따듯함’(성령)도 있어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시는 것은, 말씀이신 당신을 받아들인 성모님을 통해 교회가 탄생, 즉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창조된 것들은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와 열매를 맺게 창조되었습니다. 빛과 공간과 땅이 창조되었다면, 그 안에 해와 달과 별, 새들과, 짐승들이 채워지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인간 또한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누군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스스로 완전하다고 참 주인이신 ‘말씀’이 들어와 열매 맺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아직 창조가 끝나지 않은 불량품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창조 당하고 창조에 협력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초의 창조의 협력자로서 그분의 깨끗함 덕분으로 성령님을 충만히 지니고 계셨던 성모님의 모델을 닮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창조의 협력자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병이 나은 다음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겨울 왕국 영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만지면 다 얼음으로 변하지요. 마디다스의 손이 닿으면 금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도 재미있고 뜻 깊지요. 결국 그래선 안 된다는 이야기들로 그저 자연스럽게 잘 살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허황한 이야기인데도 많은 이들은 오늘도 꿈꾸며 삽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되고 돈도 벌리는 그런 식도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병이 나은 다음은 마음대로 딴 욕심 부리며 살게 아닌가요.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코 6,56)”
귀향(歸鄕:coming home)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고향을 찾는 마음은 하느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참 고향이자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닿아있습니다. 사실 살아갈수록 '찾아갈 곳'은, '찾아갈 분'은 하느님 한분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영원한 그리움의 향수(鄕愁:homesick)'입니다. 하여 어쩔수 없이 사람은 누구나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여기가 고향이 아니라 하느님이 고향이자 본향임을 말해 줍니다.
"기쁨과 평화 넘치는 하느님 계신 곳, 언제나 마음속에 그리며 살리라. 우리의 모든 소망 이뤄지는 그곳, 영원한 천상 행복 누리게 하소서.“
믿는 이의 근원적 소망의 표현과도 같은 성가68장입니다. 세상에 이방인이요 나그네임을 말해 줍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심중을 반영하는 히브리서의 고백이 고맙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히브11,13-14).
참 은혜롭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고향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자 본향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40년 전, 초등학교 제자들이 선생님인 저를 발견하고 열광하며 찾는 마음도 바로 이런 향수의 발로입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삶에 옛 고향(故鄕) 같은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겁니다. 이 그리움의 뿌리는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새삼 '하느님의 향수(鄕愁)'를 불러 일으키는, '하느님의 이정표'가 되는, 사제가 정말 이상적 사제임을 깨닫습니다.
"선생님, 날씨가 너무 춥습니다. 친구들이 선생님 빨리 뵙고 싶어하는데 선생님이 정해 주세요. 아님 16일 저녁이 어떠세요?“
지난 밤에 도착한 제자의 카톡메시지입니다. 38년전엔 13살의 초등학교 6학년 제자들이었으나 지금은 51세의 본격적 중년을 넘어선 제자들입니다. 아무리 나이 들어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되어도 고향은 고향이며 선생님은 선생님이고, 어머니는 어머니이며 하느님은 하느님입니다. '천국 같은 교실' '행복한 교실'을 모토로 하여, 나 하나만이라도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집이 아닌 가정 같은 교실을 꾸미고자 열정을 다한 청년교사 시절이 그립고 아이들도 그런 고향 같은 선생님을 그리워 찾는 것입니다.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이 없는 오늘의 세태일수록 참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고향(故鄕), 향수(鄕愁), 본향(本鄕), 귀향(歸鄕)이란 한자 '향(鄕)'자가 들어가는 단어 들입니다. 저는 삶을 '귀향의 여정', 즉 우리의 본향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 칭합니다. 죽음을 향한 인생 여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향한 귀향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인 하느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자 본향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말고, 하느님을 믿으라.‘
정곡을 찌른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어디나 계시기에 바로 지금 여기가 고향이요 본향입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아도 약속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으니 약속이 아닌 하느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깊은 평화와 안정을 줍니다.
바로 뉴튼수도원에 가서도 실감한 사실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했고 행복했기에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없었습니다. 어디나 하느님의 집인 성당만 있어 그 안에 머물면 고향에 있는 듯 편안했습니다. 하여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아 성당을, 수도원을 찾는 것입니다. 요셉수도원을 찾는 많은 자매들의 이구동성의 말은 '친정집에 오는 것 같다'는 고백입니다. 수도원 고향집이 마치 친정아버지 같은 하느님이 계시기에 나온 자연스런 고백인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계신 본향집으로의 귀향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이지만 이미 여기 본향집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어디나 계시고 하느님 계신 곳이 참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정주서원을 통해 하느님 참 고향에 영원히 뿌리내리고 사는 분도수도자들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 창세기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어둠이 뒤덮고 있는 심연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주시는 과정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느님은 주도면밀하게 혼돈에서 안정과 평화의 아늑한 환경의 가정집 분위기로 만들어 주십니다. 창세기 저자의 고향을 상실한 혼돈의 세상을 반영합니다. 바로 성령의 감도하에 나온 '오래된 미래', 하느님의 집을 향한 향수의 원초적 갈망의 표현입니다. 똑같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 지금 여기서 본향을 앞당겨, 맛보며 살게 하십니다. 창세기에서 기본적인 창조과정의 도식은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입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대로 되어,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은 균형과 조화의 세상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바로 지금 여기 본향집에서의 삶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위력이 놀랍습니다. 똑같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한 창조는 오늘도 계속 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치유되는 사람들이 상징하는바 복원되는 본향집의 가정들입니다. 창세기의 창조가 재현됨으로 치유를 통한 새창조의 구원입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얼마나 신바람나는 장면인지요. 오늘 창세기의 똑같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창조활동을 하시니 사람들은 구원되어 혼돈(chaos)의 마을은 질서(cosmos)잡힌 건강한 사람들의 마을로, 고향들로 변합니다.
여기 '구원 받았다(were healed)'라는 희랍어 단어의 의미가 깊습니다. 희랍어 'eszonto'는 육신의 치유 그 이상을 함축합니다. 초대교회의 어휘로 보면 그 말마디는 '구원의 전적인 체험(the total experience of salvation)'의 묘사로 '심신이 모두 건강한 상태(wellness)'라기 보다는 '온전함(wholeness)', 다른 말로 '귀향(coming home)'을 뜻합니다. 바로 우리의 원고향인 주님을 만남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구원의 고향이요 동시에 온전해지고(whole) 거룩해지는(holy)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워낙 중요한 말마디들이라 이해를 깊게하기 위해 영어단어를 넣습니다. 주님은 귀향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잠시 천상의 본향집을 앞당겨 맛보게 함으로 온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으로 치유의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새삼 우리의 진정한 고향은, 성전미사가 거행되는 지금 여기 이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어 ‘Truth'는 ’진리, 진실, 진상‘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치라고 생각됩니다. 진실은 어떤 사건의 숨은 의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진상은 사건이 발생한 구체적인 상황을 이야기 합니다.
과학은 수와 법칙을 이용해서 벌어진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우리의 삶은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산업혁명은 과학이 있었기에 날개를 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시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하수 시설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과학은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으로 우주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으로 그 숨은 진실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문학과 철학은 인류가 문명과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도구입니다. 과학으로 종이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종이에 사랑, 만남, 이별, 꿈, 희망을 표현하는 것은 문학이라는 도구입니다. 과학으로 멋진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지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성입니다. ‘비유와 은유’는 인간이 가진 특징입니다. 비유와 은유로 우리는 세상을 아름답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와 소설은 비유와 은유가 없으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신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풀어주는 진리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고통은 왜 있는지, 죽음을 넘어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이 세상은 왜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어떻게’라는 주제를 다루기보다는 ‘왜’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진화의 과정은 ‘어떻게’라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신학은 그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과학, 문학, 신학은 세상을 서로 틀리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들을 하고도,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광개토왕비, 진흥왕 순수비’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명예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잘못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잘못들은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 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 갰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창세 1,1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하실 때 하나하나 만드시고 나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수차례에 걸쳐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사실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선입니다.
"Ens est bonum!"(존재는 선이다!)
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조물은 존재하는 한 선입니다.
살아있는 한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공로를 많이 쌓아야만 하느님 보시기에 예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리의 존재 자체, 있슴 자체가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선 자체이신 분이시고 모든 선이시며 홀로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선이 빚어낸 작품입니다.
그러니 내 죄 때문에도 못났다 여기지 말고 내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에 밉상이라 여기지 맙시다.
연예인처럼 잘 생기지 못하다고,
날씬하지 못하다고 잘 살지 못한다고 나를 웃기게 보며 평가절하 하지 맙시다.
우리는 존재자체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하느님의 작품이니까요.
오늘 만나는 모든 존재들에게 "너 참 예쁘구나!" 하며 인사를 건네 봅시다.
<한처음> 으로 돌아가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한 처음>은 시간의 처음이 아니다. <한 처음>은 시간이 있기 이전이다. <한 처음>은 그래서 시간이 없다. 빛이 생기라는 말씀을 꺼내기 전이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는데 그 첫날도 있기 전이다. <한 처음>은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공간도 없다. 시간이 있기 전일 뿐 아니라 궁창도 있기 전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는 <한 처음>은 영원이고, 공간이 없는 <한 처음>은 무한이며, 이런 <한 처음>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이다. <한 처음>은 시간과 공간만 없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외에 아무 것도 없다. 너도 없고, 나도 없으며 부모도 없고, 부모의 부모도 없다. 그러기에 <한 처음>은 무(無)다. 한 처음에는 존재만 하느님 외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당연히 행위도 하느님의 행위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느님의 뜻만 있고 나의 뜻은 없었으며, 하느님의 계획만 있고 나의 계획은 없었으며, 그러니 하느님의 행위만 있고 나의 행위는 없었다. “생겨라”는 말씀과 생긴 다음에 보시고 “좋다”는 말씀만 있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생겨난 모든 것 순종치 않은 것 아무 것도 없으니 오늘 우리 모두 <한 처음>으로 돌아가자. 하느님께서 다시 창조하시게 하자!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다 하시게 하자!
나를 떠나 주님께 데려가는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시는 예수님을 ‘곧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6,54). 사람들은 온전한 창조질서와 하느님의 선과 온갖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어둠으로부터의 해방을 그토록 갈망하였던 것이다. 더러운 영과 질병, 온갖 고통은 바로 하느님의 선을 거스름으로써 초래된 인간의 왜곡된 실상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고통과 무질서, 반생명적인 가치들을 양산(量産)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해방과 온전한 선을 갈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찾아오는 병자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신다.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6,56). 여기서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의 태도에 집중하여 우리가 살아야 길을 짚어보자. 어떻게 병든 이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의 눈길이 다른 이들의 아픔에로 향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에 대한 애착과 이기적인 중심성에서 벗어나야 다른 이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의 아픔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기 이탈’이야말로 영성생활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첫 단계임을 새겨야 하리라! 자신을 벗어나는 그만큼 다른 이들이 보이고 그때부터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병든 이들의 아픔에 눈길을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시켜주실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알았을 것이고,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이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그분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아니라 도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힘을 지니신 분이심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수동과 경청의 영성’인 듯하다. 무엇이든 먼저 내가 나서서 내 힘으로 해결해보려 하고, 듣기보다는 말하려고 한다. 내 뜻과 내 힘을 앞세우는 것이다. 이런 삶은 주객이 뒤바뀐 것으로 영성생활이 아니라 우상숭배라 아니 할 수 없다.
끝으로 사람들은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6,54) 나아가‘그들은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기만 하면,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였다.’(6,56) 그들은 병든 이들을 직접 예수님께 데리고 갔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아픔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하느님의 선과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가야 한다. 나아가 이 사회의 반생명적 문화와 창조질서의 파괴, 진실의 왜곡, 사회적 갈등과 부패, 경제 정의의 상실, 인간존엄성에 대한 무감각 등을 그리스도께로, 그분의 복음의 질서 안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자비와 선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있으며, 깨어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말씀과 성체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일상사를 통해서 살아계시는 주님 앞에 얼마나 깨어 있는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회복하도록 부르는 목소리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투신하고 있는가? 이제부터라도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힘쓰고, 또 그분께 ‘너와 나의 질병’, ‘이 사회의 질병’을 데리고 가는 사랑의 소명에 더 헌신적으로 응답하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를 무너뜨리는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다시 만납니다.
고통속에도
나아갈 방향이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고통을 통해
예수님과 더 가까워지는
우리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가장 큰 고통은
우리자신을 예수님안에서
받아들이는 고통입니다.
고통과 사랑은
언제나 함께가는
신비로운 동반자
관계입니다.
고통없는 사랑과
사랑없는 고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랑은
고통이라는 열매를 통해
깨어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고통을 껴안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삶을 배웁니다.
때론 고통이
새롭게 시작하고
새로이 나아갈 삶의 길을
보여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에서 다시 사랑과 감사를
배우게 하시는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고통이
주님의 고통임을
이제야 알게됩니다.
반갑고 고마운
그분의 옷자락 술에서
모두를 사랑하시는
넉넉한 구원의 의지를
만납니다
고통은 새로운
구원의 초대이며
새로운 구원의
시작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주님의 사랑이 언제나 가득한 진정한 행복을 간직할 수 있는 멋진 새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새해에는 이렇게 복을 빌어주는데요, 과연 어떤 복을 빌어야 할까요? 어제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한 교우가 묻습니다.
“신자는 세상 복을 구하면 안 됩니까?” “당연히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예.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안 구해도 주시니까요.”
안 구해도 주신다는 믿음. 이 믿음을 얼마나 내 안에 간직하며 살고 있을까요? 주님께 대한 웬만한 믿음 없이는 위와 같은 말을 절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많이 쓰고 있는 성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무엇을 성공이라 할 수 있을까요? 돈 많이 버는 것?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나 방송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도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체능계를 비롯한 각자의 자리에서 이름을 널리 알리는 사람들 역시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성공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과연 단순히 세속적인 기준만을 가지고서 성공을 정의할 수 있을까?
랠프 월도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를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그의 시는 성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 현명한 이에게서 존경을 받고 /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 건강한 아이를 낳든 /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진정한 성공은 정말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다른 이에게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야 말로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명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 가족, 그리고 내 이웃들과 함께 하는 삶의 자리에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성공인 것입니다. 결국 엉뚱한 곳에서 성공이라는 신기루에 속아서 살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도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모습을 따르라고, 이것이 바로 가장 잘 준비하는 삶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오늘 새롭게 맞이하는 새해. 올해는 진정으로 성공하는 사람, 주님의 마음에 꼭 드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당신이 변하고자 한다면 방식이 아니라 자세를 바꾸세요. 다만, 자세를 변화시키려면 실패 경험이 쌓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오구라 히로시).
남을 이해한다는 것.
어제 올해 안식년을 맞이한 제 동창신부와 만났습니다. 아직 계획하고 있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기에, 혼자 지내면서 요즘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난생 처음 식사 준비하고, 방청소, 빨래 등을 직접 하다 보니 자매님들이 정말로 존경스럽더라. 집 안 일은 끝이 없더라고. 10시 미사에 나오시는 자매님들은 정말 대단하신거야.”
본당에 있지 않다보니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지요. 그러면서 집안일의 어려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긴 저 역시 갑곶성지에서 그리고 본당신부로 살 때에 혼자서 집안일을 하면서 비로소 자매님들의 고충을 좀 알 수가 있었지요.
내가 해보지 않으면 남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남을 아무것도 해 보지 않았던 나의 잣대로 판단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오해가 나오고, 아픔과 상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올해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가 아니라, 어떻게든 이해하는 우리가 되어보면 어떨까요? 특히 나의 생각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했으면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나를 바꾸고, 내 주변을 바꾸며, 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치유할 수 없는 우리의 아픔을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십니다.
치유는 가까이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치유는 예수님께
우리의 아픔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 어떤 아픔도
모두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모든 치유와 구원에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중심에 서 계십니다.
치유할 수 없다고
거절할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께
데려가는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구체적인 구원은
이렇듯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건강한 삶의 시작은
예수님을 이제 찾고
예수님을 우리 일상에서
이제 알아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빠른 치유보다
더 시급한 것은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진정한 치유와
진정한 구원을
체험케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는 믿음의 하루 되십시오.
늘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님
주요한 신부님
날씨가 추워지면서 요즘 제가 다시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습니다. 바로 ‘감기’입니다. ‘감기는 약 먹으면 이주, 약 안 먹으면 보름간다.’라는 말이 있듯이 약을 먹었다고 감기가 근본적으로 낫기보다는 증상이 완화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동네마다 치과, 소아과, 이비인후과, 내과, 외과 등 다양하게 병원이 있어서 어디 몸이 불편하거나 아플 때 참 편리합니다. 만일 동네에 이런 병원들이 없다면 아픈 몸을 이끌고 멀리에 있는 큰 병원까지 찾아가야 되니 많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육적인 치유를 위해 동네마다 병원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치유를 위해서 동네마다 성당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성당에 찾아가서 기도도 하고, 미사에도 참례하고, 고해성사도 보면서 조금 더 쉽게 우리 영혼을 돌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겐네사렛 땅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병든 이들을 모두 다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 어떻게 해서든 아픈 몸을 보여 낫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지금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여기 계신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지금 미국에 계시다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가야 합니다. 로마에 계시다면 로마까지 가야 하겠죠.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계시다면 우리야 좋겠지만 외국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한국까지 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에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승천하셔서 저 멀리 하늘나라로 가서 우리와 떨어져 계신 게 아니라,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늘 우리 곁에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동네마다 성당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복음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 직접 치유를 받을 수는 없지만, 성당에서 그리고 성당에서 받는 성사들(성체성사, 고해성사 등)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느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눈에 비록 예수님이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늘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이 제게 갑곶성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라고, 또한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멋진 곳이라는 말씀도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있을 때에는 갑곶성지가 멋있다는 생각도 또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고단한 곳, 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곳이라는 생각뿐이었지요.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이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모른다고 말하지요.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사람들이 좋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갑곶성지이지만, 이 안에 계속 살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느끼는 것들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곶성지를 떠나 복잡한 도시 안에서 사목을 하다 보니,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좋은 곳에서 생활했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를 여행가서 그 장소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여행 중이니까, 그러니까 며칠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더 큰 것입니다. 만약 그 장소에서 30년을 산다면 그 아름답다는 장소에서 늘 그렇게 큰 감동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지금의 내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자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나의 자리보다는 남의 자리에, 내 것보다는 남의 것에 더 큰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 안에서 감동을 얻지 못하지요. 지금의 자리에서 커다란 안테나를 세워 내가 누리는 행복을 깨닫고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예수님께 대한 특별한 존경과 사랑을 표시합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 앞으로 데려오지요. 또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나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까지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굳은 믿음을 갖췄던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 모두 치유의 기적을, 즉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마을에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사람들의 모습과 우리들을 비교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으며, 또한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표시하고 있을까요?
이천년 전 당시와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이천년 전처럼 직접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이제 시공간을 뛰어넘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되었지요. 결국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나의 일상 삶 안에서 느끼십니까? 조용히 눈을 감고 나의 삶을 떠올려 보십시오. 과연 나 혼자서 다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주님의 손길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주님의 사랑이 내 곁에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루를 기억하지 않고, 순간을 기억한다. 삶의 풍요로움은 우리가 잃어버린 기억에 자리 잡고 있다(파베세).
지혜로운 사람의 선택
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목이 말랐지요. 그러던 차에 저 앞에 있는 자그마한 우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한걸음에 뛰어가서 우물물을 마시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 우물 옆에는 물을 떠서 마실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는 우물 옆에 떠 마실 수 있는 도구 하나 없다고 매우 화를 내면서 물을 찾아서 떠났지요.
잠시 뒤, 또 다른 사람이 이 작은 우물을 찾아왔습니다. 이 역시도 너무나도 목이 말랐지요. 그런데 이 우물 옆에 떠 마실만한 도구가 없음을 알게 되었지요. 이 순간 이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또 화를 내면서 우물을 떠났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물을 떠 마셨습니다.
방법은 있었습니다. 앞선 그 나그네 역시도 화를 내는 것을 조금만 참고 생각했더라면 이 나그네처럼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화내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화를 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침착하게 생각할 때 문제의 해결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먼저 화를 내는 길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아픔과 상처까지도 주면서 상태를 더욱 더 나쁘게 만들어 버립니다.
화를 내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화를 참고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구원이 체험되는 기적이어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복음 선포하신 것의 집약입니다. 주님께서는 호수 이편저편을 왔다 갔다 하시며 바쁘게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처음 가시는 곳마다 벌어지는 장면이 오늘의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자니 복음의 광경이 눈에 그려집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전에 봤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 하신 일들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어떤 분인지 보고 싶었고 언제 뵐 수 있을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비로소 보게 된 것이고, 보게 되니 들어 알던 분을 알아보게 된 겁니다.
그러니 내리자마자 사람들이 알아본 것은 예수님의 겉모습이 독특해서가 아니라 보고 싶어 하던 사람들의 마음속 간절함일 겁니다.
알아본 사람들은 이제 마음이 바빠집니다. 빨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닙니다. 바쁘신 주님을 만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주님도 바쁘고 사람들도 바쁩니다.
그렇게 바삐 사람들은 병자들을 데리고 주님께 몰려듭니다. 들것에 들린 환자들은 오랫동안 앓아온 그 긴 시간보다 주님을 만나고픈 마음에 기다리는 그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을 겁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기 때문인데 유명한 의사는 오래 기다리다 잠깐 만나듯 사람들은 주님을 오래 기다리다 만나지만 길게 차분히 만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기를 바라고 청합니다.
그런 간절함으로 옷에 손을 댄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표현이 마음에 새길만합니다.
“과연 구원을 받았다.”
병이 나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환자 자신에 의해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병이 나은 것임을 의미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병이 나은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구원을 받은 것임을 애기하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병이 나은 것은 여전히 이 세상 차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 세상에서 병고에서 구원되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가 닿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많은 것들이 그저 놀라운 이 세상 체험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이 체험이 되고 하느님 나라가 체험되는 것이 되게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법은 항상 우리 곁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병원에서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면 병 없는 사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는다니 사람들이 안 몰릴 수 없었지요.
병원의 치료법과 예수님의 치유법이 다른 점은 영적조건 때문입니다.
대 우주의 힘, 하늘이나 자연의 힘, 정신력 같은 에너지는 늘 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곁에 항상 함께 남아 있습니다.
세상을 넘는 영적조건이 성숙되면 이 에너지를 언제든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코 6,56)”
병든 이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업적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었는데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계셨는데, 하느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어두움과 빛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어두움을 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하느님께서 바다와 뭍을 창조하시고 뭍을 식물로 채우십니다. 그것들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좋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태양, 달, 별들을 창조하십니다. 그 역시 하느님께서 보시고 ‘좋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연질서는 조화를 이루지만 인간만이 그 조화를 역행하며 파괴하는 것입니다. 식물이나 동물은 본성대로 움직이는데 인간에게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으로 ‘지성’과 ‘자유’를 주셔서 우주를 다스리게 하셨는데, ‘과학’이라는 미명아래 많은 오염과 파괴를 일삼아 이상기후와 자연 재앙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 앞에 겸손하고 감사하기 보다는 ‘도전’이라는 교만을 내휘둘러 창세기의 바벨탑을 연상하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빛, 식물, 그리고 해, 달, 별들은 우리에게 자연의 신비, 아름다움, 조화를 인간에게 선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아름다운 인간의 조화를 깨트리는 병고에서 구원의 손길을 펴십니다. 게넷사렛 땅에 배를 대시자 사람들은 그 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즉시 알아봅니다. 그들은 뛰어다니며 그 지방의 병든 이들을 데려 옵니다.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마을, 고을, 촌락이든 주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달려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손이 펴시기 전에 이미 그분의 옷자락 술을 만져서라도 병을 낫게 해달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중요한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며 마무리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주님께서는 단지 인간의 병만을 고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으로 일그러진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치유도 해주시지만 바리사이 인들과의 시빗거리이지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육체의 병도 비참하지만 죽음의 그늘인 죄도 인간을 나락으로 빠지게 합니다. 병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듯이 ‘악’의 세력인 ‘죄와 죽음’도 인간에게는 엄청난 원수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을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픈 사람들을 모으며 다니는 복음의 사람들처럼 우리도 내 이웃에게 좋으신 주님을 전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병자의 날’인 오늘 특히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합시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님께서도 벨라뎃다 성녀에게 발현하시어 병자들을 걱정하신 그 마음으로 우리도 아픈 이웃을 기억합시다
'그분께서 계시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기위해서는
그와 내가 동등하다는 입장을 취해야합니다.
봉사의 기쁨이 구원의 기쁨입니다.
봉사를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창조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그자리에
우리의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봉사의 시작에는
보잘것없는 것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행위가
바로 봉사의 시작이며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소박한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가
그 누군가에게는 가장 큰 기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옷이 있어도
건강을 잃어버리면 그림의 떡입니다.
고정되어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옷자락이 술이 바람에 날리듯 지나가고
변화되어 갈 뿐입니다.
세상살이조차 이와같거늘
장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필요한 것은
매순간 주님을 향한 믿음뿐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한 모습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기쁨과 행복의 원천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 옷자락의 술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하는
창조의 하루, 치유의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자리를 찾아야합니다.
우리의 자리는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그 어떤 고통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든 이들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창조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구원의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평생을 성당에 다니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하느님이 어디 있나? 하느님이 눈에 보여?”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이 말에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의심을 하다 보니 급기야 하느님의 존재에까지도 의심을 품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 할아버지는 하느님에게 정말로 계시는지 그 증거를 요구하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이제부터는 예전과 다르게 기도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의 존재에 대해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 당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저에게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즉, 제가 1년 동안 최선을 다해 열심히 기도할 테니 1년 내에 제가 복권에 당첨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 할아버지는 하루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16시간을 열심히 기도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할아버지는 복권에 당첨되지 않아서 이렇게 불평과 원망의 말을 했답니다.
“하느님, 저는 평생 동안 하느님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더욱이 이번 1년 동안은 철저히 기도만 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게 아무런 응답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느님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할아버지의 원망과 불평이 맞는 것일까요? 사실 이 할아버지는 복권을 단 한 차례도 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기준만을 내세워 하느님 존재에 대해 부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을 우리 역시 취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즉, 말도 안 돼는 이유를 들어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않는다고, 내게 고통과 시련이 주어졌다는 이유로,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너무 적은 것을 얻었다고 우리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려 할 때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렇게 조건만을 앞세우는 믿음은 참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믿음,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믿음이야 말로 주님께서 진정으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데려 오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 옷자락 술에 병자들의 손이라도 닿게 되면 그만이라고 청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청을 갖고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말도 안 돼는 이유를 가지고 나아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필요한 것까지도 해결해주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순수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굳은 믿음. 그 믿음이 점점 없어지는 요즘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것을 만들거나 진실한 것을 발견할 때는 아무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윌리엄 잉).
불만이라는 선물(‘행복한 동행’ 중에서)
옛날, 한 나라의 국왕이 오랜 기다림 끝에 사랑스러운 왕자를 얻었다. 왕자가 세례를 받던 날에는 온 국민이 몰려와 축하를 전했고 옥황상제도 열두 선녀를 축하 사절로 배내 진귀한 선물을 선사했다. 선녀들은 국왕에게 지혜, 고귀함, 힘, 건강, 재력, 영민함, 지식 등의 선물을 차례로 바쳤다. 마지막 선녀의 차례가 되었을 때 딱히 내놓을 것이 없었던 그녀는 ‘불만’을 선물하기로 했다. 그러자 국왕은 “내 아들은 이미 선내들이 선사한 선물을 열한 개나 받았으니 살아가는 동안 그 어떤 불만도 품지 않을 것이오.”라며 기분 나쁜 마음을 숨기고 그 선물을 거절했다.
몇 년이 지난 뒤 무럭무럭 자라난 왕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영민하고 건강했으며 성정이 온화하고 박학다식했다. 게다가 마음속에는 그 어떤 불만도 없었다. 왕자는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안주했고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 국왕을 모시는 대신들 역시 현실에 안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의 나라는 오래지 않아 이웃 나라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불만은 때로 매우 좋은 선물이 되어 준다. 루쉰은 ‘불만은 진보의 수레’라고 말했다. 누구나 좋은 성과와 영예를 얻으면 더 이상 경쟁을 하거나 발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이야말로 성장과 초월의 동력이 되는 셈이다. 이 부단한 성장과 초월의 과정에서 사람의 잠재력은 무한히 솟아난다.
미국의 교도소에 가면 슈퍼마켓을 털다가 잡힌 강도들이 전국적으로 수만 명 정도가 수감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 연구기관에서는 이들 슈퍼마켓 강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먼저 “총과 칼로 무장하고 슈퍼마켓을 털 각오를 했지만 털 수 없었던 경우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약 95%의 강도가 종업원이 눈을 맞추며 인사할 때 도저히 양심상 총과 칼을 꺼낼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한마디로 웃는 얼굴을 보고 강도짓을 할 의도가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관심을 끄는 부분은 다음 질문입니다. “그럼 총과 칼로 종업원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살인까지 저지른 경우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90%의 강도들이 유사한 대답을 했습니다. 슈퍼마켓에 들어갔는데 점원이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을 때 흉악범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아는 체하지 않으면 무시하는 기분이 들어서 순식간에 상해나 살인까지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남을 무시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큰 해가 되어 되돌아올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이렇지만, 주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계시는데, 그에 반해 우리들은 혹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다가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심지어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할 정도로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또 실제로 손을 댄 사람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자신을 원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을 향해서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결코 내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무관심입니다. 우리의 무관심으로 인해서 다가오시는 주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이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것 모두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주님께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다가서야 할까요?
2천 년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였던 믿음,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만이라도 댈 수만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 믿음만이 나를 살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 사람보다는 그들에게 무엇을 빚졌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오해와 원한이 생기지 않는다.(엘리자베스 드 기조)
외국의 어느 골퍼이야기(‘좋은 글’ 중에서)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골프선수 로버트 드 빈센조가 어느 날 대회에서 우승해 상금을 받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뒤, 클럽 하우스로 가서 떠날 준비를 했다.
잠시 뒤, 그는 혼자서 주차장에 세워둔 자신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한 젊은 여성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승리를 축하한 뒤, 자신의 아이가 몹쓸 병에 걸려 거의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치료비가 없어 아이를 병원에 데려갈 수도 없노라고 덧붙였다.
드 빈센조는 그녀의 이야기에 마음 아파하며 조금 전에 우승 상금으로 받은 수표를 꺼내 서명을 한 뒤 그녀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아이를 위해 이 돈을 써 주오.”
더음 주, 그가 컨트리클럽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프로 골프 협회 직원이 다가와 말했다.
“주차장에서 놀던 아이들에게서 들었는데, 지난 주 선생께서 우승하신 뒤 우연히 젊은 여성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드 빈센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직원이 말했다.
“선생께 알려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녀에게는 병든 아이도 없고 결혼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당신을 속여 돈을 받아간 것입니다.”
드 빈센조가 물었다 .
“그러면 죽어 가는 아이가 없다는 말인가요?”
직원이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자 드 빈센조는 말했다.
“그거야말로 내가 이번 주에 들은 가장 좋은 소식이군요.”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고객 감동 서비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만년에 도달한 돈보스코 성인이 가끔씩 가까운 후배 살레시오 회원들 앞에서 이런 후회 비슷한 말씀을 하곤 하셨습니다.
“이보게. 이제 하느님 가까이 갈 때가 되니 한 가지 후회되는 일이 자꾸 마음에 걸리네. 그것은 미사 후 감사기도를 소홀히 한 것이라네.”
당시 훌륭한 사제들은 미사만 달랑 드리지 않았습니다. 세 과정을 거쳤습니다. 먼저 미사를 드리기 전에 성체 앞에 앉아 준비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또 다시 감실 앞으로 가서 오래도록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돈보스코 성인께서 감사의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되었을까요? 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집전하신 미사가 끝나기 무섭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제의방으로 찾아왔습니다.
고백성사를 보기 원하는 사람, 강복을 청하는 사람, 안수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는 사람, 치유기도를 청하는 사람, 뭔가 자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 그저 돈보스코 얼굴 한번 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사람...
돈보스코는 그 사람들의 간절한 눈망울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한 명 한 명, 그들의 말을 들어보고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셨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과도 같이 말입니다.
본격적으로 공생활에 접어드신 예수님, 하루 일과는 A급 연예인 못지않게 스케줄이 빡빡했습니다. 가시는 곳 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고 달려왔습니다. 특별히 환자들,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 인생의 막장까지 내몰린 사람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져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계속되는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이쪽 형편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사람들, 때로 무례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도 상하셨을 법한데, 조금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개별적인 요구에 일일이 응답하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꼬이고 꼬인 인생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고객 감동 서비스를 통해서 활짝 펴지게 만드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울적하다가, 우울하다가 우리 교회만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180도 전환되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뜨거운 난로 앞에 눈덩이를 갖다 대면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녹아버립니다. 한낮의 강렬한 태양 아래 단단한 얼음덩어리를 놓아두면 금방 녹아 자취를 감춥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사랑 앞에 우리 인간의 갖은 질병, 난관, 한계, 시련은 눈 녹듯이 녹아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 섰을 때, 우리가 깊은 슬픔에 잠겨 힘들어 할 때, 우리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 마다 최종적으로 찾아갈 곳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될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그곳은 모든 뒤틀린 인생길이 활짝 펴지는 곳, 굽은 등이 꼿꼿해지는 곳, 꺾인 가지에서도 새싹이 돋아나는 곳, 모든 만물이 제 색깔을 되찾는 곳...
주님의 옷자락을 잡자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형제님께서 고민이 있어 저에게 상담 메일을 보내오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몸에 아직까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있는데 가족들의 권유로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신부님들을 찾아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형제님은 이렇게 기적을 찾아다니시면서 마음이 편치 않으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다니기는 하시지만 아내에게는 다음부터 그런 곳에 가자고 재촉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 것도 자신을 성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치료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꾸준히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분은 병원에서 원인을 정확히 잡아내고 수술을 하여 고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정화시켜서 더 큰 사람으로 단련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있지만 또 언제 주님께서 치유해 주실지 몰라 답답하기도 합니다. 물론 빨리 치유해주시기를 원하시지만 다만 기적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는 것은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부모님과 아내의 뜻대로 치유기도를 받으러 다니는 것이 옳은 것인지 참고 기다리며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저의 의견을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복음묵상 내용과 일치하기에 이 기회를 빌려 답해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치유를 좀 더 받으러 다니시라고 권유해드리고 싶습니다.
부모님과 아내의 뜻을 따르는 것도 있고 또 기적을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가족을 이끌어가야 할 분이시기에 주님께 치유를 청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수많은 병자들이 찾아오고 그 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다 나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병이 낫지는 않았을 텐데 예수님은 누구나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는 누구도 병으로 고통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모두 치유해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멀리 떨어져서는 병이 고쳐질 수 없었고 예수님께 다가와 옷자락이라도 만진 사람들만 치유가 되었습니다. 그 분께 다가와 옷자락을 만지는 것 안에는 믿음과 겸손함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고도 치유 받지 못하면 동네 사람들에게 큰 창피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분께 달려올 수 있는 믿음과 겸손이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저도 귀가 좋지 않아 어떤 신자분들이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분을 전화로 연결시켜 주셔서 기도를 청해주실 때 굳이 거절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기도를 받는 것이 청하지 않고 참는 것보다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치유의 기도를 해 주실 때 굳게 믿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약속하신 것과는 달리 치유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주님의 뜻이겠지.’하며 더 이상 바라지 않았습니다. 물론 또 다른 기회가 온다면 역시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믿음이 약해서 고쳐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본래 믿음이 출중하지는 못하기에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듯이 주님께서 항상 치유를 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치유를 청하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주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도 지병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지병을 주님의 뜻이라고 하며 그냥 참아 받지는 않았습니다. 매번 들어주시지 않았음에도 세 번씩이나 강하게 주님께 치유를 청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자 바오로는 그냥 그 지병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지병이 있을 때 치유의 은사가 있는 사제나 교회가 승인한 어떤 분이 있다면 찾아가 치유를 청하십시오. 저희 외할머니도 치유를 받아 삼십 년이나 더 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마음속에서 그런 방법으로는 나의 병을 치유를 해 주시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드신다면 그 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시고 잘 받아들이십시오.
치유를 청하지만 치유가 안 되는 것은 내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 겸손해지는 기회도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정말 열심히 믿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가장 높은 영성은 항상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는 마음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간절한 믿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눈을 감고 오늘 복음의 정황을 상상해봅니다.
호수를 건너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하자 겐네사렛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술렁댑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예수님께서 자기 고장에 오셨다고 알립니다.
어떻게 알렸을까요?
“그분이 오셨다. 악령을 쫓아내신 분, 갖가지 병자를 낫게 하신 분 죽은 소녀를 되살리신 분 옷깃에 손을 대기만 했는데도 하혈하는 여인의 그 불치병을 낫게 하신 분이 오셨다.”
뭐 이렇게 알렸겠지요.
사람들은 환자를 들것에 눕혀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환자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된 치료, 정성스런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심사로 아니 만지기만 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옵니다.
저는 아직까지 건강합니다.
마라톤을 뛸 정도의 다리와 폐와 심장 등 신체의 근간이 되는 것들은 아직도 튼튼합니다.
그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빨이나 눈 같은 것이 시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근자에 전에 안 가던 병원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치과는 작은 병원이어서인지 꼼꼼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치료를 해 줍니다.
그래서 믿음이 갑니다.
그러나 안과는 유명한 곳이어선지 사람들이 많아서 병증이 가벼운 저에게는 대충 치료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두 번 치료받고 나니 웬만큼 됐다 싶어 더 오라고 하는데도 안 갑니다.
오늘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를 반성하였습니다.
병원 가는 것을 워낙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는 배가 부른 것입니다.
북한까지 자기 않아도 정말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은 병원 문턱에도 못가보고 그래서 왜 아픈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도 모르는 채 생으로 병을 앓고 있는 것에 비교할 때 얼마나 사치입니까?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가난하지 못함이 불신의 온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다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치료 수단이 전무하기에 간절함이 믿음을 키운 것입니다.
이에 비해 많은 치유 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것을 보면서 이것을 믿지 못하고 이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믿지 못합니다.
이것이 부유한 사람들의 믿지 못하는 불행입니다.
심지어 하느님께도 온전한 믿음을 둘 수 없습니다.
간절함이 다할 때
이은주 수녀님
작업하던 두 권의 책이 하루 이틀 간격으로 출판되던 날, 10년 동안 마음을 닦아가며 기다린 한 달 영신수련에 초대되었다. 목마름으로 쩍쩍 갈라진 내 영혼에 그분을 향한 간절함만 남아 있을 때였다. 그래서였을까? 피정에 들어가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나의 역사’도 단숨에 적고, 주변을 정리하고 피정을 시작한지 하루 반나절 만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은총의 시간을 통해 하느님의 섭리를 따라 예수님을 만나 그분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것은 차라리 목마른 영혼에게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편이 맞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는 시구가 떠올랐다.
오늘 복음에서도 기다림에 목마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기다림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그분을 만난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 6,54-55)
하늘나라, 그 먼 길을 가다 보면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같은 목적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걸음을 떼는 사람들은 서로 닮아가고, 그런 중에 해방된 영혼은 또 다른 상처 받은 사람을 보듬게 된다. 그러기에 올곧은 지향을 품고 항구하게 제 길을 걷는 스승이나 도반을 만나는 것은 삶의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길은 만남을 통해 깊어지고, 만남은 또 다른 창조를 이루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만남은 아무 때나 찾아오지 않는다. 간절함이 다할 때 문득 내 앞에 와 있는 것이다.
전연동 신부님
+ 찬미예수님
사제들 주위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들 하나같이 각자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다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각자 나름대로 ‘아픔’을 하나씩은 지니고 살아갑니다. 사제인 저도, 아마도 우리 수녀님들도, 또 부자는 부자대로 아픔을 지니고, 가난한 사람은 또 가난한 사람대로 아픔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픔을 지닌 사람들의 극복하는 방법이 각각 나름대로 입니다. 어떤 사람은 꼭꼭 숨기기만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애써 외면합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든 헤쳐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극복의 방법으로 돈에 의지하는 사람들, 명예나 권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 주위에도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아픔을 예수님께 맡기려 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솔직하게 예수님께 드러낸 것입니다.
이 시대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아픔을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세상에 공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픔을 드러낸 결과는 치유와 용서였고, 그들에게는 새 삶이 주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아픔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숨기겠습니까? 외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부질없는 물질적인 것에 의지해 보겠습니까?
저는 그저 부족하고 나약한.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제 아픔들을 겸허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맡겨 드리렵니다.
예수님께 몰려 가야합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치유해 주시고, 보듬어 주시고 새 삶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디다 우리들의 아픔을 맡겨야 하겠습니까?
각자의 선택입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주일 새벽 미사가 끝나면 미사를 참석한 남성 레지오 단원들과 아침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갑니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더군다나 한 끼 식사를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꼭 참석하려고 하고 있지요. 그런데 어제 있었던 일입니다. 이번에는 가까운 곳으로 식사를 하러 간다고 걸어가자는 것입니다. 사실 저희 성당 근처에는 식당이 없습니다. 차를 타고서 상당한 거리를 간 뒤에야 아침 해장국을 먹을 수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걸어가자고 하니까 저는 조금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지요.
도착한 곳은 정말로 저희 성당에서 걸어서 5분 이내의 장소였습니다. 물론 저도 아는 집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새벽에 그 집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새벽에 문을 열지 않는 곳이거든요. 그런데 어제는 이상하게도 그 새벽에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저는 물어보았지요.
“아니, 이곳은 새벽에 문을 열지 않잖아요?”
알고 보니, 레지오 단원 중의 한 명이 이 집 단골이었고 따라서 우리가 내일 새벽에 이곳에 올 테니 해장국을 좀 준비해달라고 미리 부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새벽에 문을 열지 않지만, 그 형제님의 부탁으로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 식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이야기했지요.
“형제님의 큰 빽 때문에 이곳에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어제 아침도 그랬지만, 다른 사람 덕택으로 혜택을 받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시는 분은 누구실까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살 수 있도록 해주시지요. 즉, 우리가 힘차게 그리고 기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바로 주님께서 그런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병으로 아파하는 이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손을 대는 사람들의 병을 모두 치유해 주시지요. 아주 작은 노력, 바로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는 노력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은 구원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애쓰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것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큰 빽이 저희를 지켜주시려고 하는데, 다른 곳에서 즉 세상의 것만을 좋아하고 그 길만을 쫓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을 더욱 더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큰 빽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깨달았으면 합니다. 그래야 더욱 더 기쁘고 행복한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침 식사를 꼭 합시다. 힘이 나요.
출발(박성철, '행복한 아침을 여는 101가지 이야기' 중에서)
유명한 사진작가에게 사진을 배우기 위해 찾아간 문하생이 있었습니다. 비록 나이가 많은 그였지만 최고의 사진작가가 되겠다는 푸른 꿈을 가지고 찾아갔기에 당장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처럼 사진을 잘 찍는 사진사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진작가 선생님은 아주 당연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대답보다 중요한 해답이었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사진기의 뚜껑을 열고 찍기 시작하는 것이지!"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출발은 아름답습니다.
비록 그것이 지극히 느리고 더딘 발걸음일지라도…….
기도
이정호 신부님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기대하고 바라며 간절히 기원하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바람을 들어주실 것이라 믿고 기도합니다. 이것을 주십시오, 혹은 저것을 주십시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늘어지고 싶은 애절한 마음을 우리도 똑같이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엇을 주시느냐 안 주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애절한 내 마음을 하느님은 듣고 알고 계신가 하는 것이 청원기도를 드리는 우리 마음의 관건인 듯합니다. 기도로 청하는 내용을 이루어주심으로써 내 간절한 마음을 하느님께서 듣고 계시며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을 가질 때 우리의 청하는 기도가 결실을 맺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심으로써 나를 기억하고 관심 있게 바라보시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아픈 상황을 알아주지 않을 때 간절한 나의 필요를 돌아보지 않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바라보시고 내 외침을 들으시고 내 빈 가슴을 채워 위로해주신다는 것을 믿으며 오늘도 우리는 일상의 필요한 기도를 간절하게 바칩시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여행 중에 있던 어떤 사람이 주일을 맞이했어요. 이 사람은 여행 중에 있더라도 신자의 의무인 주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성당을 찾기 위해 거리를 나섰지요. 하지만 낯선 곳이기에 성당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거리의 경찰에게 성당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경찰은 아주 친절하게 직접 안내를 해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약간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성당이라고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당에는 들어가지 않고 약간 떨어져 있는 성당으로 그를 안내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는 물었습니다.
“왜 가까운 성당을 놔두고 먼 교회를 소개하셨습니까?”
그 경찰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어느 성당이 좋은 성당인지는 가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단지 주일 아침마다 교통정리를 하다 보니, 그 성당에서 나오는 신자들의 표정이 가장 밝고 기뻐 보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그 성당을 안내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들은 과연 성당 밖으로 다시 나갈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를 떠올려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는데, 혹시 성당 밖으로 나서는 순간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성당에서만 신앙인답게 그리고 사회로 나오면 일반 사람과 똑같이 지내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성당에 가야 할 이유를 못 찾는 것은 아닐까요?
20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만나서 안달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그들의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었지요.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몰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보고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쁘게 살아간다면, 내가 정말로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서 주님께 대한 열정을 갖고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면서 오히려 부정적인 모습만을 보인다면 그 누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이 세상에 복음화율이 점점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떨어지는 이유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따름으로써 얻는 기쁨과 행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을 못 만나서 안달하던 사람들의 모습. 지금은 왜 그 모습을 보기가 힘든 것일까요? 바로 나 때문에 그 모습이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기쁘게 그리고 행복하게 하루를 보냅시다. 신앙인답게…….
인생역전 대박 이후('좋은 글' 중에서)
로또복권에 당첨되거나 또는 갑자기 막대한 토지보상을 받아서 순식간에 벼락부자가 되는분들이 우리 주변에 제법 있습니다.
이른바 '인생역전'의 주인공들인데 그렇다면 그들의 인생은 실제로 어떻게 변했을까요? 하현종 기자가 취재해봤습니다.
<기자> 3년 전 로또 당첨으로 30억대 부자가 된 김모 씨 부부. 비싼 차와 넓은 집이 생겼지만, 그 대가로 정상적인 생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김모 씨/40억대 로또 당첨 : 우리 아이는 학교에서 (이름 대신) 로또야 로또야 이러니까 굉장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요.] 한모 씨 부부는 170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된 뒤 집안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돈을 둘러싼 신경전으로 이혼까지 하게 됐고, 집안 사이에 소송까지 벌어졌습니다.
[한모 씨/전 아내가 170억 로또 당첨 : 처가집은 항상 같이 다니고 뭐도 사주고 그러는데, 나도 부모님이 계신데...(처가만 챙기는게) 눈에 보이니까 막 스트레스가 쌓이는 거예요.] 양모 씨 가족에게는 토지 보상금 120억원이 불행의 씨앗이었습니다.
부자가 됐으니 시골을 떠나자는 식구들과의 갈등 끝에 양씨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양모 씨/아버지가 토지보상금 120억 수령 : 동네 사람들 다 떠나가고... 나는 우리 아버님도 잃고..지금이 싫다니까요. 이전이 나아요.]한국 사회 문제심리학회가 월평균 수입별로 행복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돈이 있으면 전반적으로 더 행복하긴 했지만, 돈의 많고 적음이 행복의 크기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습니다.
[박영심 박사/한국사회심리 연구소 : 돈이 있으면 어느정도 행복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높은 상관관계는 아니기 때문에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는 벼락 부자의 꿈. 하지만 부자가 됐다고 해서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모 씨/아버지가 40억 로또 당첨 : 아버님은 택시 운전하시고 어머님은 이것저것 다 하셨는데 그때가 더 재미있게 살았던 것 같아요.. 힘들었지만 그때가 더...]
눈을 통해
윤인규 신부님
지선악수의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눈을 떴다. 그들이 느낀 부끄러움은 사람에 대하여 도덕적으로 깨닫게 하는 동시에 더 높은 경지로 인도한다. 그들의 부끄러움은 하느님과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게 한다. “너 어디 있느냐?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9-10). 원조의 부끄러움이 하느님과 말문을 트게 하고 마침내 구세주 강생까지 초래하였기에 부활찬송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표현을 빌려 ‘오, 복된 탓!’이라 노래한다.
들에 있던 목자들한테는 ‘구유’가, 동방박사들한테는 ‘별’이, 성전에 머물던 시메온과 한나한테는 ‘신앙’이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는 신표가 되었다. 그러나 겐네사렛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표지가 되었다.
사람은 처음엔 눈에 보이는 것을 알아보고, 다음엔 생각하는 것을 알아보고, 그 다음엔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행하는 것을 알아본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며 쫓아다닌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참조). 원조는 부끄러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였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하느님 앞으로 나서게 되었다. 먹음직스러운 과일을 본 눈을 통해 시작된 부끄러움은 성찰하고 통회할 줄 아는 사람,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한다.
박만춘 신부님
우리는 어제 연중 제 5 주일 복음에서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 베드로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부로써 일상에 지쳐있던 시몬 베드로에게 주님께서는, 더 깊은 데로 배를 저어 나가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는 우리는, ‘오늘’이라는 새로운 날에, 이제 더 깊은 데로 배를 저어 나가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더 깊은 데로 배를 저어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이면서, 동시에 깊은 곳에 그물을 치는 일이기도 한 것은, 바로 오늘 제 1독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그 모습, 바로 그 모습을 회복해 나가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 참 좋았던 이 세상은,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보시기 좋았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더 깊은 데로 배를 저어 나가야 하고 또 그곳에 그물을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자신의 주위에 병들어 있는 이웃들을 운반하고 인도하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았고, 그분의 부르심이 응답해 세상의 깊숙한 곳으로 배를 저어나가 사람을 낚는 새 사명을 성실히 수행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든 이들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함께 주님을 찬미하길 간절히 바라는 우리의 착한 이웃이며, 또한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은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성녀 아가타는 시칠리아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녀를 공경하는 이유는 로마 원로원의 의원의 유혹을 뿌리치고, 251년 순교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녀 아가타에 대해 자세한 삶은 전해지지 않지만, 6세기에 전해지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지방의 집정관이며 원로원 의원이었던 퀸타니오가 성녀를 탐하다가, 그녀를 소유하려는 계략으로 박해를 이용하였습니다. 성녀 아가타가 퀸타니오의 제안을 거절하자, 그는 온갖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여, 매음굴로 보냈으며, 또 앞가슴을 도려내는 잔인한 고문의 방법으로까지 성녀를 굴복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거절하자 그는 성녀를 석탄이 벌겋게 이글거리는 불 속에 던졌다고 합니다. 그 순간 지진이 도시를 강타하였고, 백성들의 소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그가 성녀를 감옥으로 돌려보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아가타 성녀가 앞가슴을 도려내는 고통 중에서도 “구세주님, 고통을 참아 받을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라고 주님께 간청하며 그 고통을 참아 이겨낸 것도, 퀸타니오의 병든 마음에 굴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참된 사랑의 마음, 주님 사랑의 마음에 병든 마음을 비추어 보여주고픈 마음이며, 목숨을 내어놓는 주님 사랑의 몸짓을 대신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란 호숫가에서 ‘오늘’이라는 새 날을 주님으로부터 선물로 받고, 깊은 곳으로 노를 저어 가는 시작에 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힘을 먼저 알아보는 은총을 선물로 받았기에, 이젠 버려지고 소외된 병든 이웃을 주님 앞에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것이 육체적 병이든, 또 오늘날 육체적 병보다 더 큰 아픔을 드러내는 영혼의 병이든,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을 주님께로 데려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제자 곧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명을 완수할 때, 주님께서 병든 이웃에게 당신의 말씀으로, 그리고 당신의 온 몸으로 치유하시는 모습을 통해 그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고, 우리의 신앙은 더 굳세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창조 때의 모습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계시는 곳마다 병자들을 데려 왔던 오늘 복음의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살아가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경치든, 음식이든, 그림이든, 분위기든, 아주 마음에 들어 더 이상 표현이 힘들 때 저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이 “참, 좋다!”입니다.
오늘 창세기 1장, 읽을 때 마다 새롭고 힘이 납니다. 하느님 창조의 힘찬 숨결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매일 미사 은총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혼돈에서 질서 잡힌 세상을 만들어갈 때 마다 창조의 아름다움을 관상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활동과 관상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질서 있는 세상이, 삶이 건강하고 좋습니다. 하늘과 땅의 영역과 역할이 다르고, 바다와 육지의 영역과 역할이 다릅니다.
장소, 시간, 공동체 형제들의 영역과 역할이 잘 분리되어 질서가 잡혀야 좋고도 아름답습니다. 조화와 균형의 아름다움입니다. 삶의 리듬이 깨지고 질서가 무너져 혼란해질 때 온갖 병이 스며듭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 그대로 혼돈의 아수라장 같습니다.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많은 병자들입니다. 병자들 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그들의 손이라도 대게해 주십사 청했고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창조의 힘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터치하므로 창조 본연의 영육의 질서를 회복하여 건강해진 병자들입니다.
하느님 보시니 참 좋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복된 미사시간, 말씀과 성체를 통해 하느님을 터치하므로 참 좋은 우리들로 회복되는 시간입니다. 하여 오늘도 하느님 보시니 참 좋은 하루를 살게 되었습니다. 아멘.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김병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절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마을이든 도시든, 촌락이든 예수께서 가시기만 하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주기를 청한다.
유명한 성지들을 방문할 때 우리는 절실히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을 본다. 무슨 일이 있길래 저렇게도 간절히 기도하는 걸까?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얼마나 절실한 상태에 있는지 말해준다. 곁에서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도 주님께서 그들의 청을 들어주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렇게 절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우리 체험이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진 후에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며, 그분의 참된 자녀로서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맹세를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어느새 일상이 주는 안온하고 평온한 분위기에 취해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는가! 그렇기에 어쩌면 일상 안에 작지만 절실한 그 무엇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크나큰 은총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진정 지혜로운 이들은 어쩌면 그런 것들을 주님께 청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주님께서 주신다는 믿음을 간직한 채.
장애우 영수 !!!
이찬홍 신부님
오늘 복음을 한 번 머리 속으로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지나 배에서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우르르 몰려듭니다. 온 지방을 뛰어다니면서 병자들을 요에다가 눕히기도 해서 예수님께로 데리고 옵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아주 극명하게 잘 묘사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를 알아보고, 그 근처 온 지방을 뛰어 다니면서 병자들을 요에 눕혀가지고 예수가 계시다는 곳을 찾아 그리로 데려왔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그들은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갖은 애를 씁니다. 실제로 그렇게 옷자락에 손을 댄 이들은 병을 낫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이 다 옷자락에 있습니다.
저 옷자락만 만지면 낫게 되리라는 희망과 간절함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대로 당신 사랑의 힘을, 치유의 힘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오직 낫는 데에만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안 믿고는 둘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오죽 그들이 절박했으면 예수님은 그대로 그들을 낫게 하셨겠습니까? 아마 예수님의 시선은 이들의 아픔에 놓여져 있던 것입니다.
그분은 예전에 나자렛 고향에 가셨을 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는 아무리 당신이 애를 쓰더라도 거의 대부분 병자들이 낫질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요셉의 아들”로만 알았고, 신비한 힘이 있다는데 한번 시험 삼아 나을 수 있을까 하는 정도로 예수님의 치유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절박함도, 애절함도 없었습니다.
그저 잘하면 횡재하는 것이고, 못해도 “역시 요셉의 아들, 평범한 이였구나.”하고 속 편히 생각하면 그만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신앙생활에 가장 필요한 것이... 우리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간절함이 아닐까 합니다. 봉성체를 다닐 때마다 느끼는 것은, 거의 모든 신자분들이 한달에 한 번 주님을 모시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집안을 정리하고 머리를 곱게 빗고 옷을 단정하게 입은 후에 예수님이 오심을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그 중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영수” 라는 청년은 더욱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 4번의 큰 사고를 겪으며 뇌가 많이 손상되어 정신지체 장애우가 되어 버려 혼자서는 생활할 수 없는 청년입니다. 1년 반 넘게 봉성체를 다니면서 “영수”에게 커다란 변화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별 느낌 없이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 같았는데, 언제부턴가 봉성체 날만 되면 부엌 창가를 통해 제가 오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딩동 하고 초인종을 누르면 바로 문을 열어 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방에 들어가 할머니 옆에 앉습니다.
성체를 영해주면, 잘 받아 모시고 혼자만의 기도 시간을 갖습니다.
집을 나설 때면, 올 때와 마찬가지로 부엌 창문을 통해 우리가 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아마도 그 모습에는 빨리 다음달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영수의 모습이 예수님의 몸을 모시면서, 더욱 더 예수님을 모시려는 마음의 표현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살다보니, 사람이 그리워 저와 수녀님, 봉성체 봉사자 분들을 만나려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생각도 좋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가는 저희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언제 올까? 궁금해 하며 창밖을 서성이다가 빨리 문을 열어 주고는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모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적어도 제게는 예수님을 모시려는... 정성을 다해 간절한 마음으로 모시려는 모습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복음에 옷자락에 머물렀던 수많은 병자들의 시선과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연민어린 시선을 떠올려 봅니다.
한달에 한 번 예수님을 모시기 위한 영수의 간절한 마음을 떠올리며, 나는... 우리는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지 되돌아봅니다.
기도할 때의 나의 시선은 어디에 머무는지... 진정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려 했는지를 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모습
정호 신부님
오늘 복음은 그냥 예사로 넘길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곳마다 병자들이 있고, 예수님은 당신께 다가오는 그들을 낳게 해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에 예수님의 칭송이 자자했고, 예수님은 어떤 곳에서나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사람들이 많았고 병자들이 많아서 많은 기적을 보게 되었지만 오늘 복음 속에 등장하는 병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발로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들을 요에 눕히든 어떻게 해서든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든 다가가시고 낳게 하셨지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한 행동은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내 달리는 사람들, 또 그렇게 수천년 자신들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렇게 바뀐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어떻게 해서도 자신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에 모든 것을 다하시는 에수님의 순수한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만을 알던 사람들이 서로를 챙길 수 있게 되었고, 죄인이라 불리던 병자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라운 능력을 지닌 그래서 함께 하면 좋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병자들을 낳게 해주는 순수한 사랑의 힘에 자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데려가 된 것입니다.
자신이 아닌 모두를 위해 살아가는 순수한 사랑을 지닌 예수님, 그분의 그 모습이 사람들을 변화시켰고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사랑이란 그 순수함을 지켜갈 수록 많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변화시켜 놓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세상을 바꿉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이 보여주는 이 작은 변화들은 결국 병자들을 데려오는 사람들 하나 하나 때문에 그 동네가 구원을 받고 행복을 누리게 되는 커다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천국처럼 되기를 기대하고 노력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를 이 세상에 이루기 위해 우리 역시 예수님이 사람들을 변화시키셨듯이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서부터 순수한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복음 속에 등장하는 예수님께 병자들을 데려가는 사랑이 넘치는 백성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통력이나 기적의 힘에 기대하며 주님 앞에 나가려하지 말고 내 이웃을 사랑하며 주님 앞에 나가도록 노력합시다.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 제가 드디어 아빠가 되었습니다.”
깜짝 놀라셨죠? 새벽부터 무슨 뚱딴진가 하셨을 것입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제가 키우는 강아지인 코카가 오늘 새벽 새끼를 낳았습니다. 강아지가 놀랄까봐 꺼내서 보지는 못했지만, 꽤 많은 새끼를 낳은 것 같습니다. 최소한 다섯 마리는 되는 것 같던데요…….
새끼를 낳을 것 같은 징조는 어제 아침부터 보였지요. 제 방의 구석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지 않나 또 바닥을 박박 긁기도 하고 숨소리도 좀 이상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니 오늘 아니면 내일쯤 새끼를 낳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강아지가 새끼를 낳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걱정이 되어서 인터넷을 검색하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만 주인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더군요. 탯줄도 잘라주어야 하고, 새끼 강아지의 몸을 싸고 있는 흰 막도 제거해주어야 한답니다. 또 숨을 못 쉬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인공호흡도 해주어야 한답니다. 그리고 주변을 따뜻하게 해주어야 하고, 따뜻한 물도 준비하랍니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과 따뜻한 물은 준비하기가 쉬운데, 탯줄을 어떻게 자르고 때로는 인공호흡도 시켜야 한다고 하니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걱정을 그래도 사라지게 하는 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웬만한 강아지들은 스스로 새끼 잘 낳고, 뒤처리까지 알아서 다 한다. 주인은 그저 기다리면 된다.”
사실 이 글은 성의 없어 보여서 그런지 지식 검색에서 뽑히지 않은 하나의 덧글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제게 가장 힘이 되는 말이었지요. 왜냐하면 웬만한 강아지라고 할 수 있는 코카를 믿고 주인은 저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요.
저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코카가 끙끙대는데도 나가보지도 않고, 가슴만 졸이고 있었습니다. 새끼를 낳은 듯, 처음 들어보는 끙끙 소리를 들어도 혹시 코카가 놀랄까봐 꾹 참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이제 다 낳았구나 라는 생각을 했고, 저는 미역국을 들고 코카 앞으로 갔지요.
역시 코카는 웬만한 강아지였습니다. 무지한 주인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지만, 코카는 알아서 척척 새끼를 낳았거든요.
아무튼 저는 인터넷의 지식 검색에서 가장 성의 없는 답변 때문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그 성의 없어 보이는 답변으로 인해 코카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더 큰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사실 옷을 만지는 것으로 인해서 어떤 효과를 볼 수 있을까요? 직접 손으로 어루 만져주는 것도 아니니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행동 하나를 통해서도 병의 치유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치유의 은총을 얻게 됩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너무나 큰 것만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작은 행동을 통해서도 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닌가요?
문제의 해결은 복잡하게 그리고 어떤 커다란 행동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작은 믿음 하나로도 족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친구밖에 더 있는가?(Johann Wolfgang vonGoethe)
『그대』품은 꿈을 믿으며,
『그대』가진 기쁨을 나누며,
『그대』흘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그대』에게 희망을 주며,
『그대』아픔을 싸매어주며,
『그대』에게 귀를 기울이며,
『그대』와 함께 웃으며,
『그대』에게 진실을 말하며,
『그대』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
★어느 누가 그대를 위해 이렇게 해줄 수 있겠는가.
친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을......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는 법이다♥
† 조건 없는 선물의 연속 †
박상대 신부님
오늘은 마르코복음 1장에서 6장까지에 따라,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활동장소와 활동내역을 요약하여 보도록 하자. 이 요약은 어디까지나 복음적 서술순서에 따른 장소와 활동내용이므로 실제와는 다를 수도 있다. 아무튼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여 이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실 때(10장)까지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머무르신 장소와 활동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자렛 -> 사해 북쪽 요르단강(예수님의 세례와 광야피정 40일: 1,9-13) -> 갈릴래아 지방(공생활시작: 1,14-15) -> 갈릴래아 북쪽 호숫가(제자소명사화: 2,16-20) -> 가파르나움회당(설교, 구마기적: 2,21-28) -> 시몬의 집(장모 및 병자치유: 2,29-34) -> 갈릴래아 여러 지역(전도여행 및 나병환자치유: 2,35-45) -> 가파르나움 시몬의 집(중풍병자치유: 2,1-12) -> 북쪽 호숫가 주변(레위소명, 단식논쟁, 안식일법논쟁: 2,13-28) -> 주변 회당(환자치유: 3,1-6) -> 북쪽 호숫가(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군집, 설교, 치유, 구마: 3,7-12) -> 북쪽 호수 주변 산(12제자 선발: 3,13-19) -> 가파르나움 시몬의 집(예수에 대한 오해, 새로운 가족: 3,20-35) -> 북쪽 호숫가(비유설교: 4,1-34) -> 북쪽 호수 가운데 선상(풍랑을 잠재운 기적: 4,35-41) -> 호수 동편 게라사(게르게사) 지방(구마기적, 돼지 떼죽음: 5,1-20) -> 북쪽 호숫가(하혈병 부인치유,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기적: 5,21-43) -> 나자렛(고향사람들의 푸대접: 6,1-6) -> 호수 북쪽 마을(12제자 파견과 복귀, 세례자 요한 수난사 보도: 6,7-31) -> 북쪽 호숫가(활동상집약, 5,000명을 먹이신 기적: 6,32-44) -> 호수 북동쪽 베싸이다(물위를 걸으신 기적: 6,45-52) -> 호수 북서쪽 겐네사렛 도착(병자치유: 6,53-56).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다'고 했는데, 예수께서는 이 많은 활동을 통하여 무엇을 얻으셨을까? 위에 열거한 여정과 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2제자와 다른 몇몇 제자들 외에는 크게 얻으신 것이 없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사건 다음에는 사람들의 찬사와 인정(認定)이 더러 따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예수님의 활약이 계속될수록 오히려 사람들의 현실적인 욕구와 욕망은 더 커져 감을 느낄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복음선포와 기적들을 통하여 바라시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신뢰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표면에만 머물고,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의 욕심뿐이다. 한번 받으면 돌려 줄줄 모르고 계속 받으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도 그 인간본성의 욕망은 계속된다.
배를 타고 베싸이다에서 호수 북서쪽 겐네사렛(구약에서는 긴네렛으로 불림) 마을에 도착, 닻을 내리신 예수님의 일행은 또 다시 본성의 욕망에 가득 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예수를 '기적장이'로만 보는 것인가? 한눈에 예수를 알아본 사람들은 그 근처 온 사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기적장이'가 마을에 다시 왔다고 알렸고, 온갖 병자들을 데려왔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사람들은 예수의 정체에 대하여 묻거나 믿음으로 보답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니신 기적의 힘만으로 오직 만족하는 것이다. 얼마 전 빵의 기적을 통하여 육신의 배고픔은 채웠고(6,35-44), 물위를 걷는 기적을 보았으나(6,45-51) 그 기적의 참 뜻은 군중도 제자들도 아무도 깨닫지 못하였다(6,52). 그래도 예수님은 주신다. 그분은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무슨 조건을 걸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자비, 믿음, 구원>(마르 6,53-56)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의료사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첫 번째로 간절하게 바란 것은 병을 고치는 일이었기 때문에 우선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일부터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도 그 일이 가장 급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았다는 말은, 물론 당연히 그 옷자락 술이 병을 고쳤다는 뜻은 아닙니다.
옷자락 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내용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예수님의 치유가 무차별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으셨고,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고, 병의 종류나 상태를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병자를 다 똑같이 대하셨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조건이 없다는 점입니다.
특히 "먼저 믿어야 한다." 라는 조건이 없습니다.(“먼저 사랑해야 한다.” 라는 조건도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적을 바란다면 먼저 믿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쪽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이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위한 조건은 아닙니다.(믿음이 기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믿음을 요구하신 적이 있긴 있는데(마르 5,36), 먼저 믿어야만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베풀어 주시는 자비를 받을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안 믿으면 안 준다."가 아니라 "줄 테니까 믿고 받아라."입니다.
또 "네가 받았으니 이제 나를 믿어라."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신 다음에도 병자들에게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르코복음 7장 31절-37절에 나오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시는 장면이나, 마르코복음 8장 22절-26절에 나오는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쳐 주시는 장면을 보면 장애자 자신의 '믿음'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안 믿었고, 만나서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된 뒤에도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졌던 병자들 경우에도 그들이 전부 다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만졌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막연한 기대감이나 희망만으로 만졌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반신반의 하면서 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병이 나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굶주림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빵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자비'란 무차별, 무조건입니다.
또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자비'입니다.
만일에 사람을 차별한다면, 또 뭔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비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신자들에게만 자비를 베풀고 비신자들을 외면한다면, 또는 비신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면서 신자가 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자비가 아닙니다.
자비는 신자, 비신자 가리지 말고 '그냥' 베풀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말 때문에 "그러면 안 믿어도 상관없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5,34)."라는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병의 치료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구원을 향해서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루카복음 17장 11절-19절에 나오는 열 명의 병자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명 모두를 고쳐 주셨는데, 예수님께 다시 돌아온 사람은 한 명뿐이었고, 그 사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라는 선언을 들었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몸만' 건강해진 채로 그냥 가버렸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끝내 믿음을 갖지 않아서 '몸만' 건강해진 채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들이 얻은 건강은 참으로 허망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과 상관없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지만, 궁극적인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자비'에는 조건이 없지만 우리가 받기를 바라는 '구원'에는 믿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마르 16,16).
제가 중학생 때쯤인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받았던 ‘암행어사’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암행어사가 초라한 행색으로 전국을 돌면서, 탐관오리들을 혼내주고 힘없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내용이었지요. 사실 주인공인 암행어사의 초라한 행색에 사람들은 힘없는 양반쯤으로 생각하고서 아주 우습게봅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렇게 우습게 보는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요. 심지어 아이들까지 거지가 왔다고 심하게 놀려대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임금님이 내려주신 암행어사 마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암행어사 출두요~~”라면서 마패를 보여주면 모두가 벌벌 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놀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마패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언제나 떳떳할 수 있습니다.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우리를 세상 안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진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부끄러워 할 이유도 또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절대로 위축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누가 놀려대도 ‘주님이 계시는데 뭐.’라면서 웃어넘길 수가 있습니다. 자신감이 넘치고, 불의에 대해서 큰 소리로 꾸짖을 수 있는 용기도 갖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 옷자락 술에라도 손을 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하려는 마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만 있다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이 세상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큰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을 보면 ‘더불어 함께’ 보다 ‘나 홀로’가 더 익숙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과 함께 하기보다는,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에 빠져 삽니다. 그러나 완벽한 인간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금방 깨닫게 되면서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자신을 위해서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기쁨 안에서 자신 있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고, 가족을 지키며 자식을 키우는 삶. 그것만으로 충분히 인생을 잘 살았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기타노 다케시).
‘나’ 와 ‘우리’ 의 갈림길
아마 이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서로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지요. 어느 날, 둘은 함께 여행을 합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길을 걷다가 땅에 떨어진 지갑을 발견해 주우면서 “야, 오늘은 나의 운수가 트인 날인데?”라고 말합니다. 다른 친구는 섭섭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지요.
“자네는 어떻게 ‘나’라는 말을 쓰나? 이럴 때는 ‘우리’라는 말을 쓰면 더 좋지 않나?”
하지만 지갑을 주운 친구는 “내가 지갑을 주운 것이지, 우리가 함께 주운 것이 아니지 않나?”라고 말하면서 지갑의 소유가 자기 혼자임을 강조합니다. 바로 그때 지갑을 잃어버린 남자가 나타나면서 다짜고짜 “이 도둑놈들!”라고 몰아붙입니다. 이에 지갑을 돌려주면서 말합니다.
“우리를 도둑으로 몰다니요. 우리는 그저 땅에 떨어져 있던 지갑을 주웠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기가 막힌 듯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조금 전 운수가 좋을 때는 ‘나’라고 하고, 궁지에 몰리자 ‘우리’를 찾고 있지 않나?”
욕심과 이기심은 함께 하지 못하게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 어렵고 힘든 순간에 ‘우리’임을 기억하면서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우리를 위한 삶. 바로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우리들이 따라야 할 삶입니다.
인도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한 마을에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현자와 부자이지만 어리석은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자가 지혜로운 현자를 사냥에 초대했지요. 그리고 사냥터까지 가는데 부자는 빠른 말을 타고 가고, 현자는 아주 느린 말을 타고 가도록 내주었습니다.
말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소나기 쏟아지는 것입니다. 부자는 말을 빨리 몰았지만 대피소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비로 인해 흠뻑 젖고 말았지요. 그런데 느린 말을 타고 온 현자는 비를 하나도 맞지 않은 것입니다. 부자는 이 모습을 보고서 무척 화가 났습니다.
다음 날, 부자는 다시 한 번 지혜로운 현자를 사냥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제와는 반대로 자신은 느린 말을 타고, 현자에게는 빠른 말을 주었지요. 다시 어제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자는 말이 너무 느려서 어제보다도 더 많이 비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현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비를 하나도 맞지 않은 것입니다. 부자는 화가 나서 이렇게 물었지요.
“어제 분명히 이 느림보를 타고 가서 비에 젖지 않았잖아요?”
이에 지혜로운 현자는 이렇게 답변했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쏟아지는 비에 대처할 줄 아는 것이 지혜지요.”
사실 현자는 느린 말을 탔을 때, 소나기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얼른 옷을 벗어 깔고 앉아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소나기가 지나가자 다시 옷을 입었던 것입니다. 한편 빠른 말을 타고 갔을 때에는 소나기가 도착하기 전에 빨리 말을 몰아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며 불평불만을 던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혜로운 현자는 어떤 상황이 와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 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지혜로운 현자의 모습보다는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현 상황을 헤쳐 나가기보다는, 어리석게 불평불만만을 던질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그래서 더욱 더 주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어리석고 나약한 우리들의 부족함을 주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충분히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달라고 청했지요. 그래서 특별한 기도를 해달라고, 또한 특별한 관심으로 자신을 만져달라고 청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자기들이 은총을 받지 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때문이라고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합니다. 바로 주님만이 구원을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믿음으로 실제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평불만대신 주님 안에서 지혜롭게 현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거울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은 없다. 거울 앞에 있을 때처럼 이맛살의 주름을 펴라. 그것이 명랑해지는 비결이며 늙지 않는 미덕이다(슈아프).
정원사 청년의 책임감
가난한 정원사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틈만 있으면 나무 화분에 열심히 조각을 했지요. 직장 퇴근시간 이후에도 그는 정원에 가서 조각에 몰두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물었습니다.
“너는 정원만 가꾸면 되는데 조각까지 하는구나. 임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수고하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정원 꾸미는 일이나 조각 하는 일이 모두 저의 업무 중에 하나입니다.”
청년 정원사의 투철한 책임감에 탄복한 주인은 청년에게 장학금을 주어 미술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나중에 세계적인 화가로 성장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미켈란젤로입니다.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자신의 환경을 탓하기 전에, 내 자신을 먼저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 구원의 길
안융 신부님
제2차 세계대전 중 원폭투하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나가사키. 그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나가사키 언덕에서는 약 4세기 전에 예수회 회원인 바오로 미키 수사를 비롯한 26명의 순교자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오직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박해를 당한 바오로 미키의 거룩한 최후는 다음과 같은 그의 마지막 설교를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이 나의 원수들과 내게 폭력을 가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황을 용서하고 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배에서 내리는 예수님의 일행을 알아본 사람들이 많은 병자들을 데려와 구원을 받게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은 사람들로 인하여 구원의 구체적인 결실이 맺어집니다. 바오로 미키를 비롯한 순교자들 역시 주 예수님을 알고, 믿었으며, 그분만이 자신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기꺼이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통한 그들의 신앙 증거가 오늘날 일본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이 우리 삶의 모든 것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시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복되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begging him to let them touch even the fringe of his cloak"
영어로 읽으니 청하는 간절함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우리 번역에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고 하는데 그저 청하는 것보다는 간청, 곧 간절히 청하였다 함이 좋을 듯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간청하는 사람이 행복치 않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비참하고 불행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간청을 하는 사람은 주님께 찬미와 흠숭을 드리는 사람 못잖게 훌륭하게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찬미와 흠숭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라면 간청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나게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청하는 존재이고 하느님은 우리의 간청을 들어주시는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임이 이 간청하는 기도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것을 더 좋아하실까요?
당신의 영광이 더 드러나기를 바라실까요,
아니면 당신의 사랑이 더 드러나기를 바라실까요?
여러분이 부모라면 자신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에게 영광스런 부모가 되기를 더 바라십니까, 사랑과 자비의 부모가 되기를 더 바라십니까?
재산과 권력을 많이 가진 부모가 되기를 더 바라십니까, 재산과 권력은 없지만 자식을 많이 사랑한 부모가 되길 더 바라십니까?
사랑이 전혀 없는 부모라면 모를까,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는 부모라면 자식에게 재산과 권력을 뽐낼 부모 아무도 없고 그저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고 사랑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랄 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한 기도는 하느님을 가장 하느님답게 하고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일 겁니다.
간절한 기도는 또한 기도하는 사람을 복되게 합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처지는 안타까운 처지임에 틀림이 없지만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허위가 없이 진실하고,
허영이 없이 겸손하며,
갈림이 없이 오롯하고,
거짓이 없이 순수하며,
진실하고 겸손하며, 오롯하고 순수한 사랑만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절한 기도가 필요 없는 제가 되기를 바라기보다 비록 제가 곤궁 중에 있을지라도 간절히 기도하는 저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능력
이진원 신부님
몇 년 전 일반 대학원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대부분 신자가 아니기에 사제이면서도 그냥 평범한 대학원생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생전 처음 만난 사제에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많은 질문을 던졌고, 사제도 똑같은 사람임을 신기해했다.
그중에 정말로 똑똑하고 자신만만한, 그래서 믿음은 나약한 사람이나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연락도 못하고 지내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예비자 교리를 받는다고 하더니 급기야 세례를 받았다. 그 후에 만난 그 사람은,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신앙을 가진 것만이 아니라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달라져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신앙을 갖고 변화된 사연을 들으면서 그동안 그에게 신앙을 권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뛰어다니며’ 주변의 알고 있는 병자들을 모조리 예수님께 데려 온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은 모두 병이 낫는 구원을 받았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해,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할 몫은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는 것뿐이고, 나머지는 예수님께 맡기면 되는데 그 사람의 됨됨이까지 미리 판단하고 지레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분의 능력을 믿고 용기를 내어 그분께 초대하면 그 사람을 예수님 앞에 데려온 우리도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과연 행복할까요? 자유가 억압되어 있는 상태가 행복하다고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감옥에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될 때야 말로 따뜻한 미소를 띠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지금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다음과 같은 감옥 속에 살고 있다고 ‘케이치프 노이드’라는 심리학자가 말합니다.
1. 자기의 예쁜 면만을 볼 줄 아는 자기도취의 감옥.
2.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을 보는 비판의 감옥.
3. 오늘과 내일을 암담하게 보는 절망의 감옥.
4. 옛날의 황금시대로 보는 과거지향형 감옥.
5. 다른 사람만 부러워하는 선망의 감옥.
6.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증오의 감옥.
어쩌면 이 감옥이야말로 우리가 벗어나야 할 감옥이 아닐까요? 현실 속의 실재 감옥은 육체의 자유를 가두는 것이지만, 위의 6가지의 감옥은 영혼의 자유를 가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자유를 제안받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다가온 병든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차례까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했던 것이지요. 그만큼 그들은 간절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육체의 병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당시의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죄를 많이 지어서 하느님께서 벌을 주신 것이라고 이야기하니까요. 따라서 그들은 마음의 치유가 더 필요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그들이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병의 치유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곧 구원에 대한 확실한 표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셨다고 전해주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라고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육체적인 병의 치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영혼의 치유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상처를 주는 것보다도 더 큰 잘못은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임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앞서 이야기한 여섯 가지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이 감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랫동안 갇혀있다고 해서, 즉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만이 영혼의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관련된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그것을 받아들인다(해리 브라운).
위인들은 우등생이 아니었다.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문학과 산수 외에는 점수가 형편없어 교사가 “학교를 떠났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작곡가 바그너는 16세 되던 해 무작정 학교를 그만두었고 복학한 뒤 4개월 만에 퇴학당하여 졸업장을 받지 못한 경력의 소유자다. 슈베르트도 음악 공부가 처진 나머지 아버지가 작곡 금지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정치가 처칠은 라틴어와 체육을 유난히 싫어해 낙제를 거듭했다.
소설가 카프카는 “학교는 개성을 말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곳”이라 했고, 시인 릴케는 “소년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절망을 겪었다”고 했으며, 앙드레 지드는 “학급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신세였다”고 토로했다. 또 헤르만 헤세는 15세 때 수도원학교가 싫어 신경쇠약증에 시달린 끝에 도중하차 했다.
그밖에도 간디, 아테아워, 페스탈로치 등도 1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그들은 나름대로 한 분야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당신도 둔재라고 실망하지 말고 좋아하는 분야, 잘하는 분야에서 1인자가 되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기적을 부르는 힘
김효준 신부님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배에서 내리시는 순간 예수님의 일상은 분주함으로 바뀝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사람들은 “두루 뛰어다니며” 예수님께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분주하셨고, 사람들은 그만큼 절실했습니다.
예수님의 분주함은 사람들의 그런 간절함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하느님의 깊은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느님은 아니라고 하실 수 있고, 우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하느님은 옳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하느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주십사고” 청하고 싶은 나의 절박함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우리의 간절함이 하느님과 만나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준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도 많습니다.
12년 동안 하혈 병을 앓은 부인의 경우가 대표적이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환자들도 그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이들이 감히 하느님께 손을 대었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감히 당신께 손을 대었다고 하셨을까요?
아마 이들도 하느님께 손을 댄다고 생각하였다면 아마 손을 대지 못했을 것이고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듯이 손을 대기는커녕 오히려 멀찍이 떨어져 무릎 꿇고는 벌벌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십니다.
이는 마치 겨울 청천 하늘에 달이 잎새 없는 나뭇가지에 걸리듯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걸리어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느님이며 인간이시라는 것은 골치 아픈 신학의 문제가 아니고 도그마의 문제도 아닙니다.
만남의 문제이고 사랑의 문제입니다.
느낌의 문제이고 감동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내려오시어
우리의 손에 걸리고
우리의 귀에 걸리고
우리의 코에 걸리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걸리는 하느님의 겸손과 사랑에 우리는 프란치스코처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손안에서 제대 위에 계실 때,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에 싸이고 온 세상은 떨며 하늘은 환호할지어다!
오, 탄복하올 위대함이며 지고의 장엄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기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높여 주시도록 여러분도 겸손해지십시오 .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두지 마십시오.”
옷자락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번은 한 신자분이 고민이 있어 저에게 상담 메일을 보내오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몸에 아직까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있는데 가족들의 권유로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신부님들을 찾아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형제님은 이렇게 기적을 찾아다니시면서 마음이 편치 않으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다니기는 하시지만 아내에게는 다음부터 그런 곳에 가자고 재촉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 것도 자신을 성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치료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꾸준히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분은 병원에서 원인을 정확히 잡아내고 수술을 하여 고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정화시켜서 더 큰 사람으로 단련하고 계시다는 생각이 있지만 또 언제 주님께서 치유해 주실지 몰라 답답하기도 합니다. 물론 빨리 치유해주시기를 원하시지만 다만 기적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는 것은 마음이 불편한 것입니다.
부모님과 아내의 뜻대로 치유기도를 받으러 다니는 것이 옳은 것인지 참고 기다리며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저의 의견을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병원에서 진단이 나오고 그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야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계속 원인을 모르고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면 저는 치유를 좀 더 받으러 다니시라고 권유해드립니다.
부모님과 아내의 뜻을 따르는 것도 있고 또 기적을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수많은 병자들이 찾아오고 그 분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다’나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병이 낫지는 않았을 텐데 예수님은 누구나 병을 고쳐주십니다. 이는 누구도 병으로 고통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모두 치유해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멀리 떨어져서는 병이 고쳐질 수 없었고 예수님께 다가와 옷자락이라도 만진 사람들만 치유가 되었습니다. 그 분께 다가와 옷자락을 만지는 것 안에는 ‘간절함’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항상 복음전파를 위해 여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러 온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재산을 다 탕진하는 것일 수도 있고 길거리에서 변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는데, 그러고도 치유 받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동네 사람들에게 큰 창피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분께 달려올 수 있는 믿음과 겸손이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주님께서 항상 치유를 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도 지병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지병을 주님의 뜻이라고 하며 그냥 참아 받지는 않았습니다. 매번 들어주시지 않았음에도 세 번씩이나 강하게 주님께 치유를 청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자 바오로는 그냥 그 지병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세 번씩이나 간곡히 청했다는 것은 잊지 말아야합니다.
지병이 있을 때 치유의 은사가 있는 사제나 교회가 승인한 어떤 분이 있다면 찾아가 치유를 청하십시오. 저희 외할머니도 치유를 받아 삼십 년이나 더 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마음속에서 그런 방법으로는 나의 병을 치유를 해 주시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드신다면 그 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시고 잘 받아들이십시오.
치유를 청하지만 치유가 안 되는 것은 내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 겸손해지는 기회도 될 수 있습니다. 먼저 정말 열심히 믿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가장 높은 영성은 항상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는 마음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가장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 주려고 하는 데 원하지 않거나, 굶는 사람에게 음식을 주려는데 받으려하지 않거나, 가족이 없는 고아를 가족으로 맞아들이려 하는데 들어오려 하지 않고, 또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려는데 귀를 막아버린다면 그보다 안타까울 수는 없습니다.
사제로 성당에 있으면 별의별 사람이 다 거짓말로 돈을 얻어내러 옵니다. 저는 이유 불문하고 원하는 만큼을 내어주었습니다. 어쨌거나 가난한 사람이고 적어도 내가 줄 수 있는 무엇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이렇게 주고 싶은데 하느님 맘이야 어떻겠습니까?
저는 오늘 예수님은 ‘제발 원하기만 해라.’는 마음으로 기다리십니다. 옷자락을 만진 사람은 ‘다’ 나았다는 말은 원하는 사람에겐 ‘다’ 그 원하는 것을 들어주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정말 불치병은 손을 뻗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 이 백성>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치유활동을 통해 당신 백성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님은 보편적인 사랑, 큰 사랑, 모든 인류를 다 품어 안으시는 큰 사랑의 소유자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신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 당신과 함께 인생여정을 걸어갔던 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도 충실하셨습니다. 당신과 가까이 살았던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랜 투병생활로 고생이 많은 환자들의 마음 상태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한번 잡아보겠다는 절박한 심정,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번 회복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예의나 격식을 제대로 차릴 여유도 없지요.
때로 이쪽 사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일방적이고도 찰거머리 같은 요청에 때로 힘겹기도 했을텐데,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언짢아하지도 않으시고, 한명 한명의 아픔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정성껏 치료해주십니다.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까지도 함께.
요즘 "토착화"란 용어를 자주 씁니다. 교회나 수도회에서 개최하는 회의나 행사 때 마다, 특히 선교관련 세미나 같은 때 단골 주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토착화"입니다.
그런데 "토착화"란 단어 본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토착화"를 외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교회나 수도단체가 한 지역에 "토착화한다"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참된 토착화는 단순히 전례생활에만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사 때 부르는 성가를 무조건 국악성가로 바꾸고, 성찬의 전례 때 사용되는 제병을 백설기 떡으로 바꿔 사용하고, 전례복장을 모두 한복 스타일로 바꾸는 것만이 토착화의 전부는 아니겠지요.
토착화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이 나라, 이 땅, 이 백성을 극진히 사랑한다는 가장 뚜렷한 표현"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몸 붙여 살아가는 이 나라 백성들을 극진히 사랑하기에 그들의 전통이나 문화, 사상이나 가치관을 존중하여 열린 마음으로 대처하고,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 토착화의 본질일 것입니다. 토착화의 핵심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육화강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바로 그 곳, 자신이 두 발로 서있는 바로 그 땅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정신이며, 그 육화의 영성의 실천이 토착화입니다.
<왜 이렇게 눈물이 안 날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랜만에 한 열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열흘 동안 새벽미사, 오전 오후 30분짜리 강의 한번씩 외에 별다른 일이 없었기에 "이 특별 보너스 같은 시간을 어떻게 영양가 있게 보낼까?" 고민도 많이 했었지요.
"영화도 한편보고, 눈 덮인 무등산 산장에도 한번 다녀오고, 운주사도 한번 다녀오고, 몇몇 보고 싶었던 사람들도 만나야겠다" 고 작전은 잘 짰지만 하나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뒹굴뒹굴 사제관에서만 비몽사몽간에 지내다 세월 다 가버렸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소득이 있었다면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선물"과의 만남입니다.
낮잠을 많이 자다보니 그저께 밤에는 잠이 통 오지 않았습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가 TV를 켜니 영화 "선물"이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약간은 진부한 신파조 분위기가 나는 영화였기에, 또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가 빤히 예측되었지만 영화 "선물"은 묘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요즘 나는 왜 이렇게 통 눈물이 안 날까?" 고민하시는 분들, "눈물 한번 원 없이 흘려보고 싶다"는 분들은 꼭 한번 빌려다보시면 좋겠습니다.
영화 "선물"은 제대로 한번 "뜨지 못해" 슬픈 개그맨 남편과 불치병으로 죽어 가는 아내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시한부 삶을 사는 아내 정연은 자신이 가고 나면, 혼자 남을 남편 용기를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하고 가슴 아파서 일부러 더 심한 말과 행동을 하지요. 영문을 모르는 용기는 그런 아내 정연이 밉기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기는 정연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정연을 위한 마지막 선물로 그녀가 보고 싶어 하는 옛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는 이벤트를 꾸밉니다.
한편 죽어가는 아내는 "뜨지 못해" 힘들어하는 개그맨 남편을 한번 띄워주기 위해 자신의 병까지 속여 가며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찾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이렇게 일기장에 썼습니다. "아내가 아프단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제 더 이상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단다. 하느님, 맙소사. 제발 조금만 시간을 더 주세요. 남은 시간동안 내가 그녀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도록..."
한편 아내는 속울음을 참으며 이런 마지막 일기를 썼습니다. "사실 당신을 두고 가는 일,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져. 나 없이 당신이 무얼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당신을 좀 더 따뜻하게 많이 사랑해주지 못했던 일들, 생각할수록 미안해. 당신 잘 알겠지만 당신은 세상이 내게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었어."
죽어가면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비결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결국 "사랑"이었습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서 지켜봐줄 때 설령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할지라도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한부 환자들, 불치병 환자들, 임종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랑임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신구약성서를 통독하고 나서 성서를 덮는 순간 우리 머리 속에 최종적으로 남는 느낌이 무엇일까요? 제게 있어서 그 느낌은 "사랑"이었습니다. 신구약성서의 최종적인 결론은 결국 "사랑" 임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도 결국 "사랑의 예수님",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당신께 다가서는 그 수많은 환자들, 끊임없이 몰려드는 인파들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 만나주십니다. 그들이 원하는 바를 원 없이 채워주십니다. 사랑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결국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만이 한 인간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유효기간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마르코6,54-55)
---
“긴급(緊急)하다.” “긴박(緊迫)하다.” “급박(急迫)하다.”
“시급(時急)하다.” “절박(切迫)하다.” “애바쁘다.”
아주 급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형용사들이다.
무엇인가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임을 말하고 있음이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데려왔다고 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것인가?
서둘러야 할 그 무엇은 아닐까?
복음의 유효기간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시간을 긴 시간으로 본다면 서두를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삶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덧없이 흘러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느낀다면 분명히 복음은 서둘러야 할 어떤 것이다.
백 년이 주어진들, 이백 년이 주어진들 우리의 삶의 길이에 만족할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우리는 어떤 조건 하에서도 인생은 짧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복음이 아름답고 신나는 일이라고 믿는가?
그렇다면 서둘러 복음을 살아야 한다.
복음이 말하는 기쁜 소식이 내 삶으로 녹아 들어야 한다.
복음은 장신구가 아니다.
필요할 때 여기 저기 매달고 다니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복음은 생명과 직결된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인이다.
삶의 껍데기가 무엇이고 알맹이가 무엇인지 식별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
'옷자락 술'은 '성사'의 상징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젤라 스터길이 중학교 1학년 때 자신이 사는 한 동네에서 간호사를 돕는 봉사를 했었습니다. 여름 방학 내내 일주일에 서른 시간정도를 일을 했는데, 그 대부분의 시간을 길레스피 씨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서 보냈습니다.
길레스피 씨는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의 상태에 신경을 쓰는 사람도 없는 듯했습니다. 안젤라는 그의 틈나는 대로 그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아주 가끔 안젤라의 손을 꼭 쥐는 것 외에 길레스피씨의 반응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장기간 의식불명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주일 동안 부모님과 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가 병원으로 갔을 때는 길레스피 씨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안젤라는 간호사에게 차마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였습니다. 안젤라는 그 후로도 병원 봉사를 계속 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녀는 주유소에서 아주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누구라는 걸 떠올리는 순간 안젤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길레스피 씨가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혹시 다섯 해 전에 동네 병원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해 있었던 길레스피 씨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안젤라는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병원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길레스피 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혼수상태에 있을 때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고,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안젤라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한 인간이 아니라 천사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길레스피 씨는 자신을 소생시킨 힘이 바로 안젤라의 목소리와 그녀의 손길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둘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눈물을 쏟고 포옹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안젤라는 길레스피 씨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길레스피 씨는 안젤라에게 언제나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를 천사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참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나를 천사로 만든 사람]
‘안젤라’라는 이름의 뜻은 ‘천사’입니다. 어쩌면 진짜 하느님께서 안젤라를 통하여 길레스피 씨를 살려냈는지 모릅니다. 안젤라 안에 천사가 정말로 있으면서 그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의식불명의 상태였던 길레스피 씨가 자신이 살아날 수 있었던 힘이 그녀로부터 왔다면 그녀는 어쩌면 생명의 힘을 전달해주는 통로였던 것입니다. 그녀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살리는 힘은 하느님에게로부터만 나오게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녀를 통해서 그 힘을 주실 수는 있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병자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도 만져보려고 노력하였고, 그 술을 만지는 사람들은 누구나 병이 나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옷자락 술은 무엇입니까? 옷에 달려있는 가장 끝자락입니다. 그 끝자락에 병은 치유하는 성령님이 숨어계신 것일까요? 옷은 분명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입은 옷도 그 옷 자체로만은 어떠한 힘도 지니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 옷을 통해 당신 에너지를 내보내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 옷이 예수님 자신은 아닐지라도 그 옷 술을 통해서도 그분은 생명의 에너지를 전달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안젤라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의 ‘옷자락 술’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분의 성령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도구들, 그것이 무엇일까요? 분명 예수님은 아니지만 그분을 연결해주는 것, 우리는 이것을 ‘성사’라 부릅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그분의 성령을 받고 새로운 삶으로 변화됩니다. 성사는 7성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나에게 들어오시는 모든 도구들이 다 성사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내 안에 모시는 행위를 넓은 의미의 ‘기도’라고 합니다. 마치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려 했다면 우리는 7성사는 물론이요, 성경읽기나 성체조배, 좋은 강의 듣기 등을 통해서 그분의 에너지가 나에게 흘러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만약 내 삶의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기도를 찾아서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서는 어떤 에너지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즉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뜻은 마치 당시의 병자들이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 했던 것처럼 그분의 에너지가 흘러오는 모든 성사들, 모든 기도들을 찾아서 하려고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어쩌면 매 순간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으려 손을 뻗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도 의심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