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파와 비둘기파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라크 침략 전쟁 이후 부시 행정부의 외교 정책 현안으로 다시 떠오른 ‘북핵 문제다.
‘북핵 문제’는 한반도 전체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부시 행정부 내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립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 볼 수 없는 이유다.
지난 며칠 동안 불거져 나온, ‘럼즈펠드 비망록’이나, 미국기업연구소에서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공화당)이 한 말이란 결국 이라크처럼 북한도 ‘손을 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이들 매파들의 구상은 무엇인가? 부시 대통령의 정책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들 매파들 즉 ‘신보수주의자’(neoconservatives)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제4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려고 하는 이들의 철학과 전략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 칵테일
▲ 존 애쉬크로프트 미국 법무장관.
출처 news.bbc.co.uk
부시 정권의 특징은 기독교 근본주의와 신보수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칵테일한 것이다.
부시는 잘 알려져 있듯이 텍사스 출신으로 이른바 ‘성경벨트’라고 불리는 미국 남부 지역(텍사스, 캔사스, 사우스캐롤라이나, 앨라바마, 조지아, 뉴올리안즈 등)을 배경으로 한 기독교우파 세력을 등에 업고 있다.
사회문화적으로 볼 때, 기독교 근본주의는 1960년대 반전운동, 흑인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 히피운동에 대한 역사적 반동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공립학교에서의 ‘성경과 기도의 자유’, 마약․ 동성애․ 낙태 반대, 남녀평등 헌법수정안 폐기 등을 주장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새롭게 공업지역으로 부상한 미국 남부 지역의 경제력이 이들의 물적인 토대다.
부시 행정부 내에서 이들 기독교 근본주의를 대변하고 있는 이는 존 애쉬크로프트(John Ashcroft, 61) 법무장관이다. 애쉬크로프트는 오순절교회(여의도 순복음교회와 같은 교파라 한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예일대와 시카고대에서 학위를 마쳤다. 미주리 주 법무장관과 상원의원을 역임한 인물로 클린턴의 탄핵을 가장 목청 높여 외쳤던 사람이다.
하지만, 조지 부시 대통령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신보수주의자는 이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는 성장 배경이 다르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주로 동부 해안 출신이며 대부분 유대계이다! 아침에 성경이 아니라 시사잡지를 읽는 사람들이다. 사회문화적으로도 임신 중절을 금지하고자 하거나 학교에서 예배를 강요하려고 하지 않는다.
부시 행정부 내 신보수주의자의 대표는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 59) 국방부 부장관이다. 월포위츠는 교직자 가정에서 성장한 유대인이다. 뉴욕 출신이며, 코넬대와 시카고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예일대와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눈에 띄는 이력으로는 1983년부터 86년까지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현재 제임스 켈리), 1986년부터 89년까지 인도네시아 대사, 1989년부터 93년까지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 1993년 국방대학의 국가안보전략 교수 등이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뒤 사람들은 이 전쟁이 부시 1세 때부터 계획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1992년 폴 월포위츠가 당시 딕 체니 국방장관(현 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2000년 9월 <미국 방위의 재건--새로운 세기를 향한 전략, 힘, 자원>, 2001년 <21세기를 위한 전략적 에너지 정책>(체니 보고서), 2002년 9월 <미국국가안보전략>(부시 독트린)으로 이어지고 있다.
둘이면서 하나인 것
▲ 폴 월포위츠 미국 국방부 부장관. 출처 www.whitehouse.gov
애쉬크로프트와 월포위츠의 이력을 찬찬히 뜯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두 사람 모두 시카고대학에서 각각 법학박사 학위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 칵테일의 고리인 것이다.
시카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요즘 한창 메이저리그에서 그 이름을 알리고 있는 최희섭을 떠올릴 터이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카포네와 같은 갱스터를 떠올릴 것이다.
또 정치와 경제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시카고학파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 1899-1992)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을 떠올릴 법도 하다. 자생적 질서로서의 시장 중시, 반케인즈주의 즉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의 축소, 화폐와 통화 중시, 이들의 경제이론을 현실에 적용한 이른바 레이거노믹스, 신자유주의 등등.
또 다른 한편, 정치학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1899-1973)라는 정치철학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스트라우스나 하이에크나 모두 1950년대초 시카고 대학의 사회사상위원회(Committee on Social Thought)의 구성원들이었다.
밀턴 프리드먼은 최근 이라크 전쟁이 세계경제를 진작시킬 거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만약 레오 스트라우스도 살아 있다면, 이라크 전쟁이 ‘좋은 체제’인 ‘미국의 민주주의’가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된 거라고 말했을 듯싶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경제사상과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은 그 궁극의 지점에서는 둘이면서 하나다. 이들의 사상과 철학이 1970년대 이래의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자본주의적 극복방안의 연장선상에서 복원되고 다시 재정립되었기 때문이다.
규제완화, 민영화 작은 정부 시장원리 복지지출 축소 등등의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담론들은 1980년대 신보수주의 정권(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들에 의해 하나의 국경 안에서 정책 수준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던 것이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이후인 1990년대부터는 신자유주의적 전략을 일국적 차원에서 세계적인 차원으로 재편해나가야 한다는 논리로 전개되었다.
말하자면, 1992년의 폴 월포위츠의 보고서는 이런 세계자본주의 재편의 군사적 대응 보고서였던 셈이다. 또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를 대신해서 1995년 1월 1일부터 공식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는 세계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제도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나쁜 체제는 전복시켜라?
▲ 정치철학자 레오스트라우스. 출처 www.straussian.net
레오 스트라우스는 1973년에 사망했고 사실 그때까지 신보수주의는 공식화하지 않았다. 물론 오늘날의 신보수주의자들의 전략과 철학이 모두 스트라우스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레오 스트라우스의 사고방식은 신보수주의자들에게 기본적인 밑그림을 제공했다.
스트라우스의 저작은 국내 정치학자들에 의해 몇 권 소개되어 있는데,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에 소개된 약력에 따르면, 1899년 독일 헤센 주, 키르히하인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1916년 시오니즘에 ‘귀의’하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독일을 떠났다. 파리, 런던을 거쳐 뉴욕으로 건너갔다. 194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시카고 대학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플라톤, 스피노자, 홉스, 마키아벨리 등이 주된 연구대상이었다. 주요 저서로 <스피노자 성서학의 기반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토마스 홉스의 정치철학> <폭군론> <마키아벨리에 대한 사상들>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 <국가와 인간> <자연권과 역사> 등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적 교의의 실질적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의 양식마저 급진적으로 바꿔놓았다. 그의 정치적 교의의 실질적 내용은 전적으로 새로운 군주와 관련된 하나의 새로운 교의, 즉 사회의 토대, 다시 말하여 사회구조에 본원적으로 내재하는 비도덕성과 관련된 교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교의의 발견자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도덕률, 새로운 십계명의 전달자이다. 그는 가능한 한 최고의 의미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군주, 새로운 모세, 예언자이다."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아티클에서 마키아벨리를 논의하고 있는 부분이다. ‘새로운 군주, 새로운 모세, 새로운 예언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시오니즘적인 언어로 해석하고 있다.(너무 단정적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스트라우스에게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개념 가운데 하나가 플라톤 <국가론>의 원제인 ‘politeia이다.
“고전 철학자들은 최선의 사회를 정치체(politeia)라고 불렀다. 정치체는 일반적으로 헌법(constitution)으로 번역된다. (하지만)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레짐(regime)을 고려하고 정치체를 레짐으로 번역할 것이다. 문명이란 레짐이란 용어의 근대적인 대체 용어이다.”(<자연권과 역사> 홍원표 역, 인간사랑, 166-170쪽에서)
다시 말해, 우리 말로 표현되는 국가, 정체, 헌법, 레짐, 문명, 체제 등은 모두 ‘한 사회의 생활방식’과 ‘정부형태’를 연계시키는 사유를 드러내는 말이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이 체제가 인간의 본성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20세기에 어찌하여 인류는 나치즘이나 코뮤니즘이라는 전체주의 체제(폭군)를 만들어낸 것일까? 스트라우스는 ‘근대성(mordernity)을 문제삼는다. 근대성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미덕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부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근대성의 근본을 이루는 계몽주의 즉 이성적 사유에 종교를 대립시킨다. 종교란 그에게 ‘율법’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실천 가능한 종교 즉 율법은 기독교라고 말한다.(결국 신보수주의나 기독교 근본주의도 둘이면서 하나다.)
스트라우스는 미국이 본질적으로 고전적 지혜와 성경을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라고 본다. 그리고 이런 국가가 전체주의 체제(폭군), 다시말해,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나치 독일과, 제3차 세계대전인 냉전시대에는 소련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제2의 가나안인 미국의 소명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유일한 희망이라 할 좋은 체제‘와 반드시 부정되어야 할 ’나쁜 체제‘…….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2년 1월 29일 국정연설에서 북한,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스트라우스 자체는 반세계화주의자였다. 어떤 면에서 그러했는가 하면, 보편적인 우정, 세계시민, 인류애란 사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좋은 사람’이란 인류애를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애국자였다. 이런 생각들은 이후 패트리어트 미사일, 패트리어트법으로 표현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이 신보수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예언자와 관련하여 마키아벨리는 모든 무장한 예언자는 정복했지만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했음을 가르친다. 무장한 예언자의 최고의 경우는 모세이고, 비무장 예언자의 최고의 경우는 예수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과연 예수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한 만큼 실패했다. 그러나 그가 기초한 새로운 양식과 질서를 수많은 민족들의 수많은 세대들이 수용했던 만큼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이러한 승리는 선전 때문이다.”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스트라우스는 무장한 예언자인 모세와 비무장 예언자인 예수를 대비시키면서, 예수는 실패했지만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가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선전’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받아들인 단 하나의 기독교 요소는 선전이라는 관념”이라고 말한다.
마치 나치의 괴벨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신보수주의자들에게 ‘선전’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과업으로 여겨지고 있다.(이번 이라크 전쟁은 역사상 가장 공공연하게 거짓말을 대중매체를 통해 선전한 전쟁이었을 것이다. 또한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살해되었는가!)
신보수주의자들에게‘선전’은 마키아벨리가 준비해온, ‘문명화된 세계의 급진적인 변화’를 위한 준비 즉 ‘정신적 전쟁’의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장차 정치권력에서 변화를 촉진시킬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고자 해왔다.
신보수주의자들은 학계와 언론계에 형성되어 있는 실핏줄과 같은 네크워크를 통해 워싱턴의 ‘정치권력에서 변화를 촉진시킬 의식의 변화’를 촉진하려고 하면서 정치무대에서 자신들의 사고방식이 중심적인 위치에 서도록 담론의 지배력을 강화해왔다.
이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는 잡지로는 <코멘터리Commentary> 외에 <퍼블릭 인터레스트Public Interest> <아메리칸 엔터프라이즈American Enterprise> <뉴 크리테리온New Criterion>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 <퍼스트 싱즈First Things> <위클리 스탠더드Weekly Standard> <프런트페이지Frontpage> 등이 있다.
싱크탱크로서는 ‘허드슨 연구소’ ‘해리티지 재단’ 미국기업연구소(AEI), ‘대중문화연구센터’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 안보정책센터’ 등이 있다.
그리고 루퍼트 머독의 <폭스뉴스>는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을 저속한 형태로 대중에게 확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또한 <월스트리트 저널>의 사설란은 신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군사주의를 ‘선전’하는 공간이다.
이밖에 <유럽 vs 미국>의 저자인 로버트 케이건(Robert Kagan) 카네기 재단 수석 연구원, 찰스 크로서머(Charles Krauthammer), 마이클 켈리(Michael Kelly)등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보보스>의 저자인 데이빗 브룩스(David Brooks) <위클리 스탠더드> 편집인 등의 언론인 등도 주요 논객이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정신적 전쟁’인 ‘선전’을 위해 이토록 많은 이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이 실핏줄과 같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미국의 대내외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들의 글과 책이 끊임없이 한국의 보수언론을 통해 그 담론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점이 더욱 문제일지 모른다.
이를테면, 찰스 크로서머가 <워싱턴포스트>에 칼럼을 발표하면, 국내의 보수언론은 그의 자극적이면서도 황당하기까지 한 칼럼의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찰스 크로서머나 마이클 켈리는 www.jewishworldreview.com의 주요 필자인 유대인이다.)
이 글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조선일보>의 워싱턴 특파원은 신보수주의자인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와 나눈 인터뷰를 한 면에 걸쳐 보도하고 있다. (2003년 4월 27일자.) 이 뿐만 아니라 대안적인 매체라고 내세우는 인터넷매체조차 이들의 담론을 번역하고 소개함으로써 이들의 담론이 확산되는 데 앞장서는 경우도 있다.
또한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을 구상하며 미 국방정책위원회 위원인 엘리엇 코언의 <최고 사령부(Supreme Command)>라는 책을 읽었다고 알려지자, 발빠른 번역자들과 출판사들이 번역에 나서 출판한다. (아침에 읽는다는 성경 외에는 별로 책과 가까이 하지 않는 부시에게 신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구상’을 ‘주입’하기 위해 읽혔던 책을 국내 독자들도 읽어야 한다는 것일까?)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 부시 행정부 내에 포진해 있는 신보수주의자들, 여러 싱크탱크, 각종 잡지와 신문을 통해, 자신들의 담론을 지배적인 담론으로 만들고자 하는 신보수주의자들, 이들과 ‘정신적 전쟁’을 벌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들의 담론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선 이들의 담론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들의 논리를 반복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이미 이들의 담론은 차고 넘친다. 직간접적으로 신보수주의자들의 담론의 영향권 아래 있는 듯이 보이는 국내 여러 연구소의 연구원들, 교수들의 담론은 전문가‘라는 형식을 빌어 보수언론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확산되고 있다.
적어도 이들의 담론에 대해서는 소개가 아니라 비판적인 읽기가 필요하며, 이들의 ‘전쟁의 담론’을 비판하면서 여기에 대항하는 ‘평화의 담론’을 확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식 모델만이 옳다?
레오 스트라우스가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교조(敎祖)’라고 한다면, 스트라우스의 제자인 앨런 블룸(Allan Bloom), <퍼블릭 인터레스트>의 발행인이자 <코멘터리><엔카운터> 등과 같은 잡지의 편집자였던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져 있는 다니엘 벨(Danile Bell), 현재 <코멘터리>지를 통해 영향력을 펼치고 있는 노먼 포도레츠(Norman Podhoretz) 등은 이들의 ‘교사(敎師)’다.
이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미국식 민주주의 모델이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식 모델만이 옳다!”고 하는 이들의 맹신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에 ‘이식된’ 미국의 정치와 기술과 문화가 만들어낸 체제우월적인 성과에 뒷받침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의 전쟁’에서 과연 미국식 모델이 그대로 ‘이식’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미국의 일본점령 정책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단적으로 말해 “이라크는 일본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미국식 모델이 이식된다면, 이라크 내 다수파인 시아파가 정권을 잡아야 할 것이다.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신정정치’의 가능성도 있다.
이런 가능성을 신보수주의자들이 ‘용납’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자기 모순은 ‘이라크 전쟁 이후의 전쟁’에서 이미 노정되고 있는 중이며, 숱한 갈등의 불씨가 낳고 있다.
또한,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은 문화상대주의와 근대성을 비판한다. 어빙 크리스톨이나 다니엘 벨 등이 1970년대 초반에 전개했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16세기 이래로 서구문명을 통해 이어져온 맥락인 모더니티의 근본적인 가정은 사회 단위가 집단이나 길드, 종족, 도시 따위가 아니라 개인이라는 점이다." 모더니티의 발전과정은 2가지 충동으로 드러난다.
하나는 경제적 충동, 즉 재화와 화폐의 자유로운 이동과 개인의 사회적 자유로운 이동을 이상으로 삼는 부르주아 기업가들의 자유방임주의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급진적이며 실험적인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문화적 충동이다.
다니엘 벨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이란 이 두 가지 충동이 일으키는 모순이다. 다니엘 벨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에서 구속받지 않는 경제적 충동은 청교도적인 제한과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이런 ‘미덕’은 자본주의 자체에 의해 붕괴되었다. 종교의 대치물로서의 문학과 예술의 노력은 문화적 양식으로서의 모더니즘을 초래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고갈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신보수주의자들이 제시한 것은 ‘전통’으로의 복귀였다. 다니엘 벨은 ‘초월적 개념을 제공하는 정박지’인 종교 관념으로 회귀하자고 말한다.
이런 논의가 의미하는 바는 앞서 언급했듯이 1960년대의 모랄 즉 반전평화, 남녀평등, 인권운동, 다양한 예술적 실험 등에 대한 격렬한 반동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 벨은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정치는 전통과 모더니티 사이의 싸움”이라고 하면서, “1960년대의 문화적 충동은 그것과 병행한 정치적 급진주의처럼 얼마간은 상당히 기진맥진해졌으며 반문화는 일종의 환상임이 알려졌다”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트의 노동의 신성화에 뿌리박은 도덕적 보상체계에 기초를 둔 전통적 합법성”을 회복하자고 다니엘 벨은 말한다. 종교의 부흥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현대 문화의 비틀거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교적인 해답은 분명히 준비되어 있다…베버가 말했듯이, 역사의 특정한 맥락에서 종교란 모든 힘 중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이다”라고 벨은 말한다. (이상 인용은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오세철 역, 전망, 1980년에서)
신보수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이미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데올로기적인 칵테일이 이루어질 준비는 되어 있었던 셈이다.
신보수주의자들은 국내 정책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케네디)과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닉슨)이 만들었던 ‘복지국가’ 정책을 비판한다. ‘복지국가’가 기존의 사회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외교 정책에서는 1970년대의 데탕트는 소련에게 더 이로운 것이었다고 부정한다. 1960년대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도 전면적으로 비판하며, 헨리 키신저의 현실주의 외교 노선도 반대한다.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국제주의자들이다. 예를 들어, 어빙 크리스톨이나 노먼 포도레츠는 뉴욕에 살고 있는 신보수주의의 대부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한때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세계화해야 한다는 ‘미국식 영구혁명론’으로 바뀌었다고 할까?
(포도레츠에 따르면, 럼즈펠드 국방장관, 딕 체니 부통령 등은 보수주의자일 뿐 신보수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면 신보수주의자들은 원래 좌파였던 이를 말하며, 럼즈펠드나 체니는 일관되게 보수의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미국이 세계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과거 공화당의 주류를 이루던 이들의 사고방식의 차이다.
예전의 공화당의 사고방식은 미국이 국익을 지키기 위해 동맹관계를 맺은 다른 나라의 체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마치 그 나라의 ‘나쁜 체제’를 유일한 희망인 ‘미국식으로’ 바꾸어야 할 사명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여기고 있는 듯이 보인다.
‘미국이 세계에 대해 취하는 어떤 결정적인 행동’이란 무엇인가? 이 부분에서 언급해야 할 인물이 랜드연구소의 연구원이자 미 국방부의 정책 고문이었던 앨버트 월스테터(Albert Wohlstetter)이다. 이 인물이 신보수주의자들에게 미국의 핵정책 독트린의 아버지로 불린다고 한다.
월스테터는 전통적인 핵정책인 이른바 상호확증 파괴전략(MAD)을 대신해서, ‘점진적인 억지력’이라는 것을 제안했다 하는데, ‘점진적인 억지력’이란 제한적인 전쟁을 인정하면서, 전술 핵무기의 사용과 ‘지능적인’ 무기와 고도 정밀 무기를 사용해서 적의 군사력을 정확하게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월스테터의 말에 귀를 기울여, 전략방위체제(SDI)를 추진하면서 ‘스타워즈’라는 이름이 붙인 바 있는데, 이것이 바로 미사일방어체제(MD)의 원조다.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식 영구혁명’을 위해, 명백하게 현존하는 위협세력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미국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세력에 대해서 ‘선제공격’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이라크 전쟁은 그들의 ‘선제공격론’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또 미국‘만’의 안보와 번영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치 파시스트 국가들이 국제연맹을 대하듯이 유엔을 상대함으로써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를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들이 ‘겁쟁이 매파(chicken hawks)라고 지적한 바 있다. “월포위츠, 펄, 부시, 체니 등은 베트남 전쟁을 강하게 지지하던 이들이지만, 정작 자신들은 모두 특권을 이용하여 징병 유예 조치를 받았으며, 한번도 전투에 참가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호전성은 도덕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데다, 문자 그대로 극도로 반민주주의적(anti-democratic)이다.”
4성 장군 출신이며, 조지 부시 1세가 걸프 전쟁을 일으켰을 때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비둘기파로 불리고 있는 기이함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이 얼마나 극단적인 군사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이 해방과 민주화라는 레토릭을 뒤집어 씌우고 있는 미국식 모델이란 실상 미국 서부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약탈하고 학살했던 것과 같은 학살과 약탈의 모델일 뿐이라는 사실이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 여실하게 드러났다.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은 어떤 세계적 위협이 있더라도 ‘자유’를 수호하겠다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미국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이미 여러 비판적인 학자들은 지적했듯이 오늘날 지구의 평화를 불안하게 만드는 실질적인 위협은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거의 공갈에 가까운 ‘선전’ 때문에 생겨나고 있다.(계속)
2001년 9월 11일, 이른바 9.11 사건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인 뒤, 미국 언론이(국내 언론을 포함해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쓰고 있을 때, 신보수주의자인 엘리엇 코헨은 <월스트리트저널> 2001년 11월 20일자, ‘제4차세계대전(World War IV)’이라는 글에서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인 냉전에 이어서, 현재 제4차 세계대전 중이다”라고 주장했다.
코헨은 아프가니스탄은 단지 ‘제4차 세계대전’의 전선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제4차 세계대전의 적은 ‘호전적인 이슬람교도(militant Islam)이며, 호전적인 이슬람교도란 서로 경쟁적인 입장에 서 있는 수니파, 시아파, 와하브파라고 규정했다.
이어서 노먼 포도레츠는 2002년 2월 <코멘터리>지에 ‘제4차 세계대전에서 이기는 방법(How to win World War IV)’이라는 글에서 코헨의 글을 인용하면서, ‘아주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닉슨과 포드 대통령 시절이었던 1970년대부터 미국의 외교관들이 수단이나 레바논 등지에서 계속해서 살해되고, 대사관이 공격을 받았던 사실에서부터 9.11사건까지 지루하게 언급한 뒤 미국이 ‘공격’을 받고 있는 이유는 미국이 ‘힘’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9.11은 의심할 바 없이 미국의 힘에 대한 경멸의 산물이다. 미국 대통령이 그렇듯 오랫동안 테러리스트에 대해 힘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테러리스트에게 미국은 내리막길에 들어선 나라이기에, 한때 칼로써 이 세계의 많은 곳을 정복했던 호전적인 이슬람교도가 소생한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는 게 포도레츠의 주장이었다.
포도레츠는 또한 이렇게 주장한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짧은 기간 내에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capitalist democracies)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제3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앙 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악의 제국의 오래된 심장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슬람 세계만 유독 예외로 남아야 한단 말인가?”
전 CIA국장이었던 제임스 울시는 2002년 11월 16일에 행한 한 연설(<프런트페이지> 11월 22일자에 발표)에서 다시 엘리엇 코헨의 논의를 인용하면서, (1)제4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적은 누구인가 (2)미국은 왜 이 적과 전쟁을 벌이는가 (3)국내외에서 벌이고 있는 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이 연설에서 제임스 울시는 엘리엇 코헨과 마찬가지로 ‘제4차세계대전에서의 미국의 적’을 세 가지 그룹으로 규정했다.
첫 번째로 이란의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시아파 이슬람교도, 이들은 1979년 이란의 정권을 장악하면서 미대사관을 공격했고, 1983년에는 베이루트에서 해군 막사를 공격했다. 거의 4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미국에 대해 테러행위를 벌이고 있다는 것.
두 번째는 파시스트로서 이라크 및 시리아의 바트당을 말한다. 이들은 1930년대 파시스트 당을 모방하고 있는 전체주의자들이며 반유대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것.
세 번째로 수니파 이슬람교도. 이들 또한 근본주의자들이며, 그 근원을 따지자면 18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고, 1950-6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로 이민하면서 뿌리를 내린,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운동인 와하브(Wahhabi)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로서, 이들도 ‘우리(미국)’을 십자군, 유대인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
울시는 “적어도 1994년 이래로 미국은 이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런 적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벌이려 하는가? 울시는 미국이 증오의 대상인 된 것이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경제적 자유, 남녀 평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이런!)
‘제4차 세계대전’은 나치에 대한 전쟁과 비슷한 것이라는 논지를 펼치는 것이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미국의 대응과 비슷하게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중동의 적들(시아파, 수니파, 바트당 등)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들 ‘적’들이 이전에는 ‘부유한, 결단이 난, 허약한 국가’(rich, spoiled, feckless country)인 미국이 싸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뒤집을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울시는 미국의 인프라가 대부분 기술적으로 고도화되어 있으면서도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테러에 의해 손쉽게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작은 칼도 큰 칼과 마찬가지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국내의 이슬람교도의 대다수는 테러분자가 아니지만, 이들 가운데에는 서양의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내 이슬람교도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그것이 “윌슨의 ‘14개조항’의 민족자결주의를 위해 제1차 세계대전을 이겼던 방식, 처칠과 루즈벨트의 ‘대서양헌장’을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이겼던 방식, 트루먼 대통령 때 시작되었고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가장 정확하게 표출된 고귀한 사상을 위해 제3차 세계대전을 이겼던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울시는 이것이 ‘국가간의 전쟁(war of countries)’이 아니라 ‘폭군에 대한 자유의 전쟁(war of freedom against tyranny)’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미국이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편이었음을 확신시킨 것처럼, 중동 민중의 편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엘리엇 코헨, 노먼 포도레츠, 제임스 울시, 이들의 말을 정리하자면,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마찬가지로 ‘제4차 세계대전’의 또 하나의 전선일 뿐이며, 적은 수니파, 시아파, 하와브파 등 호전적인 이슬람교도이다.
이들 호전적인 이슬람교도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말하듯 ‘폭군’이다. ‘폭군’인 ‘적들’이 미국을 ‘부유한, 결단이 난, 허약한 국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힘’을 보여줌으로써 ‘폭군’을 제거하고 ‘나쁜 체제’를 변화시킴으로써 중동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 명쾌한 듯이 보이는 논리다. 마치 폐쇄회로처럼 갇혀 있는 듯, 스트라우스적인 사고방식이 반복되고 있다. 그들의 말은 조금씩 용어가 다르긴 하지만 결국에는 동어반복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들은 같은 말을 지겹도록 반복하는 ‘광신도’와 비슷하다.
(1)우선 첫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이들의 주장이 미국식 자유, 미국식 자본주의,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자기도취적인 맹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식 자유, 자본주의, 민주주의란 결국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정치 경제 사회’이다. 나치가 아리안족의 ‘위대한 인종의 보존’을 주장하며,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듯이, 이들의 주장은 대안적 세계를 모색하고 있는 이 지구상의 숱한 이들의 ‘꿈과 희망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저지르고 있다.
(2)두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대다수가 유대인인 신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 철저하게 이슬람교도를 ‘적’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적인, 유대인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또한 노골적으로 개입했든 하지 않았든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이 원한 전쟁이었다. (울시 전 CIA 국장뿐만 아니라 현재 사실상의 ‘총독’ 역할을 맡고 있는 이라크 재건인도지원처장 제이 가너 등이 이스라엘의 극우파 정당인 리쿠드당이 후원하는 미국의 유대국가안보연구소(JINSA)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3)세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이들의 주장이 자기모순적이라는 점이다. 미국보다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독재정권을 지원한 국가는 이 지구상에 없다. 미국이 지금까지 문제삼았던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오로지 ‘친미적이냐 아니냐’만 문제삼았다. 미국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는 국가냐 아니냐만 문제삼았던 것이다.
이들은 이란에 대해서는 해외 망명 그룹들을 지원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팔레비 전국왕의 가족들을 내세워 이란에 진입하려 할 것이지만, 거꾸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가는 해체하려고 시도할 거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또한 신보수주의자들은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 정권 타도와 국가 해체 등도 주장한다. 이른바 ‘중동의 민주화 도미노론’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라크 내에서조차 미국은 이라크 민중의 거센 ‘반미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다.
(4)네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과 일본에 ‘이식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를 전세계로 확장하겠다는 생각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역사란 오로지 앵글로-아메리카 형의 세계사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몰이해는 이번 전쟁에서 보듯 ‘다른 문화, 다른 문명’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약탈의 양상으로 드러났다.
미국의 일본 점령을 연구했던 학자들이 “이라크는 일본과 다르다”라고 말했던 이유는 이라크가 오랜 기간 ‘반영 독립 투쟁’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라크인들은 반영투쟁의 기억을 갖가지 문학과 예술의 형태로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러기에 앞으로 반미투쟁의 역사가 전개되리라고 이들 학자들은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5)다섯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이 엄청나게 반윤리적이라는 점이다. 이번 이라크 전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들이, 미국이 ‘관리’하고 ‘통제’하는 매스미디어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대안적인 뉴미디어들은 이제까지 폭로되지 않았거나 은폐되어 있던 미국의 반윤리적인 본질을 드러내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문화상대주의와 근대성을 비판하면서 그 비판의 근거로 ‘종교의 미덕’을 내세웠지만, 그 ‘미덕’이라는 것이 학살과 허위의 ‘미덕’이라는 것을 대안적인 뉴미디어들이 여지없이 밝혀낸 것이다.
뿌리내리기 vs 디아스포라
‘제4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은 ‘다음은 당신들 차례다(Youre next)라고 말하고 있다. 이란, 시리아,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등등 이슬람국가들은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행보를 ‘두려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세계의 여러 언론에서도 이를 반영하듯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 하고 따져들고 있다.
하지만 벌써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이 그 어떤 나라보다도 미국에 대해서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음을 깨닫고 이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이 ‘경찰국가, 수용소국가, 감옥국가’로 변해가는 데 대한 저항운동과 일반적인 민주주의의 요구를 지켜내려는 시민불복종운동은 주목할 만한다.
또한 미국의 정계 내에서도 이들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이 전개되고 있다. 공화당뿐만 아니라 민주당에도 신보수주의자들이 침투해 있기에(예를 들어 미국 민주당 내의 신보수주의자 들의 중심은 조지프 리버만이다. 리버만은 2000년 대선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유대계 출신 부통령 후보였다. 2004년 대선에도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다음 선거에서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정책과 노선에 대한 비판이 하나의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전 행정부의 기조였던 국제주의, 외교 우선, 최저 군사행동, 기존 국제기구 중시 vs 신보수주의자들의 일방주의, 군사중심주의, 선제공격전략, 기존 국제기구 무시 등.
최근 2004년 대선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를 선언한 린든 라루쉬(Lyndon LaRouche)가 주도하는 잡지 <이아이알(Executive Intelligence Review)> 2003년 4월 18일자는 신보수주의자들의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토니 페이퍼트(Tony Papert)의 ‘레오 스트라우스의 비밀의 왕국’, 제프리 스타인버그(Jeffrey Steinberg)의 ‘부시의 용서할 수 없는 이라크 전쟁 이면에 숨어 있는 비열한 거짓말쟁이들’ 등이 그것이다.
‘네오콘(neocon)이라고 불리고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다. 올초 노먼 포도레츠는 몇몇 재단이 후원하는 ’디스 위크 싱크탱크‘라고 불리는 한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서 신보수주의자들이 대부분 유대인임을 시인한 바 있다.
신보수주의자=유대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교조(敎祖)라 할 수 있는 레오 스트라우스부터 유대인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자칭 타칭 신보수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은 모두 유대인적인 사고방식을 내면화한 인물들이다.
린든 라루쉬는 2003년 3월 21일에 발표한 물리적 기하학이라는 전략(Physical Geometry as Strategy)이라는 글에서 “이라크 침략에는 어떤 ‘전후(戰後)’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전쟁이 계속될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레오 스트라우스의 ‘유니버설 파시스트’적인 ‘학동들’이 부시 정권에 구축한 진지가 파괴되지 않는 한 전세계는, 그리고 중동은 전쟁을 피하지 못할 거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라루쉬는 이 전쟁의 이면에는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과 함께, 나치 독일을 전쟁으로 몰고 간 것이 ‘금융자본가의 이익(financier interests)’이었듯이 이 전쟁의 동인도 ‘금융자본가의 이익’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가설적인 이야기 한 가지를 덧붙이면서 이 긴 잡문을 끝내기로 하자.
먼저 첫 번째의 가설. 신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제4차 세계대전’이란 결국 유대인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금융자본가들의 전쟁이다는 것. 즉 이 전쟁은 금융자본가의 전쟁이자 유대인의 전쟁이었다는 것.
이 가설에 따르면, 레오 스트라우스가 말하는 나쁜 체제, 문명, 국가, 정체, 헌법, 레짐이란 말하자면, 유대인 금융자본가가 자신들의 뜻대로 자본을 투자해서 이윤을 뽑아낼 수 없는 체제, 문명, 국가, 정체, 헌법, 레짐을 뜻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유대교는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무장한 예언자‘인 모세의 율법을 기본으로 고유한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른바 ’바빌론의 유수(Babylonian Captivity, BC 597~BC 538년) 이후의 일이다.
바빌론의 유수 이후 유대인들은 기본 경전(토라)인 ‘모세 5경’을 정리하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재구축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전래되어 오던 홍수 설화 등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로 번안되어 모세 5경에 실리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신보수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사에서 큰 오점으로 남아 있는 ‘바빌론의 유수’에 대한 복수란 말인가? 가설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 가설은 이 전쟁이 금융자본가의 전쟁‘이자 ’유대인의 전쟁‘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듯, 유대인의 역사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역사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분산(分散), 이산(離散)을 뜻하는 말이다.
유대인이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로 떠돌게 되었던 것은 외세의 정복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 유대인들은 그렇게 떠돌았던 이유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어느 곳에서나 유력한 ‘상업자본가’, ‘금융자본가’(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로서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문명사에서 자신의 땅에 뿌리를 내린 농업 세력과 유력한 상인 세력이 ‘세계사적으로’ 맞부딪친 전쟁은 ‘포에니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농업국가인 로마가 팽창함으로써 무역으로 번영해온 상업세력인 카르타고와 충돌한 것이다. 그리고 BC3세기 중엽부터 BC2세기 중엽까지 1백 년이 넘는 전쟁 끝에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멸망한다.
하지만 무역을 중심으로 번영을 추구하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카르타고의 상층 귀족이었던 세력(여기에는 물론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들은 ‘각지로 흩어져’ 자신의 ‘부’를 유지하고 확대해 나간다. 또한 그 ‘부’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이들은 베네치아(페니키아의 음운변동?), 암스테르담, 런던, 뉴욕 등 카르타고와 지리적으로 유사한 통상의 요충지를 거점으로 삼는다. ‘디아스포라’의 기나긴 여정이 거쳐간 지점들은 자본의 중심지였으며 ‘부’를 축적하기에 용이한 곳이었다.
금융자본가의 특징은 특정한 국가에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금융자본가는 고향이 없는 자로서 오로지 ‘부(자본)’만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여길 뿐이다. (‘히브리Hebrew’라는 말 자체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옮겨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자본주의의 초기에 자본-임노동의 관계는 봉건 권력의 토지에 예속되었던 인간을 토지(고향)에서 이탈시켜 ‘떠돌아다니는 자’인 자본의 축적욕구에 종속되도록 임금노예로 바꿈으로써 가능했다.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enclosure)이다.
다시 말해, 유대인이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이 세계의 지배적인 금융자본가들, 그리고 그것을 이념적으로 드러내는 네오콘들은 전세계를 향해 지금 상징적인 의미에서 인클로저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해체, 금융자본이 자유롭게 이윤을 뽑아낼 수 없는 문명의 파괴과 체제의 전복, 이농, 노동시장의 유연성, 투기적 금융자본의 국경 없애면서 넘나들기 등등....
금융자본은 끊임없이 뿌리를 뽑으려 한다! 공동체의 뿌리를, 노동자의 뿌리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인클로저 운동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떠돌아다니는 자’인 자본의 축적 욕구에 따라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근대문명의 상징인 기차가 그렇지만, 인터넷, 핸드폰, 노트북, PDA 등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등이 추구하는 디지털문명의 ‘자유로움’도 결국 근본적으로는 ‘떠돌아다니는 자’인 자본이 노동자의 정신과 육체를 기존의 장소와 지역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개발되었던 것이다.
디지털문명의 유목민적 속성을 철학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노마디즘이 한편으로는 저항의 담론을 생성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탈주라는 것도 결국 권력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탈주라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터이다.
이런 의미에서 ‘금융자본가의 전쟁’ 그리고 ‘유대인의 전쟁’인 이라크 전쟁은 ‘뿌리 내리려는 자와 뿌리를 뽑으려는 자의 전쟁’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 가설의 결론이다.
뿌리를 뽑으려는 자에 대한 저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뿌리를 내리는 운동이 되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공통체라도 그것을 무참하게 파괴하려 하는 자본의 운동에 맞서는 것은 아주 느리게느리게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에 굳건히 뿌리 내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사고, 그런 행동, 그런 삶의 방식.....마치 한 그루 나무와 같은....
‘제4차 세계대전’은 ‘뿌리 내리려는 자와 뿌리를 뽑으려는 자의 전쟁’이기도 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센 물결을 이루었던 반전운동은 바로 뿌리를 뽑으려는 자의 무자비한 공격에 대한 뿌리 내리려는 자의 방어이자 저항이었던 것이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