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사렙타의 과부에게 보내시어,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7,7-16
그 무렵 엘리야가 숨어 지내던 7 시내의 물이 말라 버렸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8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9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
10 그래서 엘리야는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복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베풀면서도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내가 해주라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다 아는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 해주려다가 호구가 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애덤 그랜트는 사람을 ‘기버-테이커-매처’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습니다. 기버는 내어주는 사람이고 테이커는 빼앗는 사람이며 매처는 받으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공하는 사람을 보았더니 가장 높은 위치에 기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낮은 위치에도 기버가 있었습니다. 왜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내어주는 사람은 호구가 되는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에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도 아이에게 폭력까지 당하는 이지현 씨가 나왔습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아이의 호구가 됩니다. 이것 하나만 조심하면 됩니다.
또 '개는 훌륭하다' 10편에 토르라는 강아지에게 온 가족이 당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특별히 아버지는 개를 더 무서워하고 있었습니다. 토르라는 강아지는 아무 때는 끼어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물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애꿎은 것을 물기는 하지만 화를 잘 냅니다. 가족은 평화를 위해 토르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마음씨 좋은 가족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은 가족에게도 토르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토르는 가족들이 잘해주는 게 자신보다 서열이 낮아서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잘해주는 것이 오히려 토르의 교만을 부추깁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토르가 가족을 ‘몰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괜히 끼어들어서 마음에 안 들면 으르렁대고 무언가를 주어도 왜 미리 잘하지 않았느냐고 엄포를 놓습니다. 생존본능 중의 하나인 교만을 가족들이 키워준 것입니다.
이런 식의 베풂은 호구가 되기 딱 맞습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래서 먼저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좋은 것을 주는데, 그것들이 그 좋은 것을 받고 오히려 나를 밟고 물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면서 호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면서도 호구가 되고 있는지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내 감정을 살피면 됩니다.
토르가 아버지만을 특별히 공격하는 이유는 아버지의 ‘두려움의 냄새’를 맡기 때문입니다. 생존 욕구가 높은 개들은 두려움의 냄새에 매우 민감하다고 합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이를 이용해야 자기가 살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가 두려워서 잘해준다면 그 잘해주는 것은 모두 상대를 더 교만하게 만들고 나는 호구가 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몰이하며 최강자임을 자처하려는 토르를 강 훈련사는 되려 몰아붙입니다. 그 와중에 개에게 물려 피까지 흘립니다. 하지만 순종할 때까지 몰아붙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다시는 개에게 지나친 관심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관심을 주어야 할 대상은 절대 나를 두렵게 만드는 이어서는 안 됩니다.
왜 사람이 두려워질까요? 내 위에 올라서려는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상대에게서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내 부족한 것을 충족하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토르에게 저렇게 대하는 가족들도 분명 토르의 귀여움을 원하고 있습니다. 화내지 않을 때 가끔 부려주는 애교에 녹아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무언가 얻으려 하는 것을 아는 개는 그것을 이용해 상대를 두렵게 만들고 지배하려 합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베풀 때는 상대에게 원하는 게 없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잘해주면서도 가스라이팅 당하기에 십상입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두려워집니다.
유튜브에 ‘EBS 부모’에서 방영되었던 ‘불안한 엄마, 무법자가 된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5살 소라는 부모의 지나친 사랑에 무서운 것이 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아이가 생떼 부리면 다 됩니다. 엄마와 아빠는 아이의 그런 마음을 부모가 다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 눈에는 아이가 절제 없이 자라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기가 죽어있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대 기죽는 아이가 아닙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자신의 엄마에게 칭찬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야단만 맞다 보니까 자기는 자녀를 키울 때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칭찬해주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자신처럼 이해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 아이로 자라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미안해서, 그래서 두려워서 무언가를 해 줄 때 나도 망치고 상대도 망칩니다. 두려워서 무언가를 줄 때는 호구가 됩니다. 결국 상대에게 지배당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보상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하셨기에 당연히 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두려워하면 아이는 그 마음을 이용하게 됩니다. 미안함도 두려움입니다.
그냥 지금 해 주어야 하는 일을 하십시오. 이것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목자입니다. 목자의 양은 그 좁은 문 뒤에 계시는 주님의 것입니다. 양 떼를 이용해서도 안 되고 그래서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 때문에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어차피 자녀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 것입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십시오. 망가져도 주님 것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냥 맡겨졌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안한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랑, 그 좁은 문 뒤에 내가 데리고 가는 사랑해야 할 대상의 주인이 계십니다. 다만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 하나가 있다면 내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분 때문에 사랑하려고 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https://youtu.be/RIkpAbDuj_s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평생 구두 수선을 해왔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주 작고 허름한 구둣방을 운영하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셨지요.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만나기를 간절하게 바라니, 너의 구둣방을 오늘 방문하겠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니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구둣방에 먼지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청소했고, 구둣방에서 드실 수 있는 맛있는 음식과 음료도 준비했습니다. 또 구둣방이 추워서 따뜻한 담요로 예수님 자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개꿈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너무 생생한 꿈이었기에 기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아주 허름한 옷차림의 거지가 들어왔습니다. 너무 춥다고 하면서 이불이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담요를 주었습니다. 잠시 뒤에 한 학생이 들어왔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러니 음식이 좀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너무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한 음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청소부가 와서는 너무 목이 마르니 물 좀 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음료를 주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꿈에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냐면서 따졌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의 구둣방에 세 번이나 갔었다. 그리고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이웃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내게 해 주는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를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기원후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자기 거실 벽에 붙인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지요. 사실, 이와 비슷한 구절을 동서양의 여러 현인이 말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에서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점에서 이 황금률을 새롭게 표현하십니다.
첫째, 보답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아예 생각하지 말고 솔선하여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 교훈을 성경 전체의 정신을 종합한 말씀으로 제시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이 결국 주님께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경력은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감동하게 만들 수는 없어. 하지만 삶은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지(김성태).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