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진산인 금정산
[금정산] 금정산(金井山)은 북으로 양산시 동면에 접하고, 동으로 금정구, 남으로는 동래구, 서로는 북구와 접하는 부산의 명산으로 진산이다.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치닫는 낙동정맥의 남쪽 끝에 솟은 산으로 주봉인 고당봉(801.5m)이고, 장군봉(727m), 계명봉(605m), 상계봉(638m), 원효봉(687m), 의상봉(620m), 파리봉, 미륵봉, 대륙봉 등 600m 내외의 봉우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금정산의 정상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데, 물의 빛깔이 황금과 같다. 금어(金魚)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샘에서 놀았으므로 금정산이라 부르고, 산 아래에 절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라 이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정산은 숲이 울창하고 계곡마다 맑은 물이 흘러내려서 시민들의 발길이 끓이질 않는다.
[범어사] 범어사의 연혁 범어사는 금정산 기슭에 자리잡은 대사찰로 오랜 역사와 많은 스님을 배출한 명찰이다. 신라 문무왕 때 창건하고 흥덕왕 10년(885년) 현 위치에 크게 개창하여 대가람의 면목을 갖추되었다.
이후 범어사는 천 년의 법통을 이어 오다가 임진왜란의 병화로 일시에 회진된 뒤 10년이 지난 1602년 관선사가 재건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다시 화재로 전소되었다. 1613년 묘전대화상이 다시 역사(役事)를 시작한 이후 여러차례 크고 작은 증축, 수축공사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 또한 의상대사가 창건한 10대 사찰 중에 『金井之梵漁(寺)』가 들어있어 이 때 이미 범어사가 이름있는 절로 손꼽혔음을 증명한다.
범어사의 창건 전설 신라 문무왕 때에 왜구가 침범해 피해가 많았다. 하루는 문무왕이 꿈을 꾸었는데, 신인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대왕은 근심하지 마소서. 태백산중의 의상대사는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후신으로 항상 여러 신중(神衆)을 거느리고 다닙니다. 대왕께서는 의상대사를 맞이하여 친히 함께 금정산으로 가시어 금정암 밑에서 7일7야 화엄신중경(華嚴神衆經)을 독송하고 정근하시면 미륵여래가 금색신을 현현하고 사방의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색신(色身)을 나타낼 것이며, 비로자나여래가 금색신을 나타내어 보현, 문수, 향화동자(香華童子) 등 40법체를 거느리고 제신 천왕이 각각 병기를 가지고 해동을 위압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입니다. 만약 후대에 어진 이가 이어나지 않아 왜적이 침입하고 사방에 병란이 일어나거든 또한 이 바위 밑에서 화엄정근을 하시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간과(干戈)가 길이 쉬게 될 것입니다.〉
고 하였다. 그래서 문무왕은 의상대사를 불러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금정산 밑에 범어사를 짓게 한 것이다.
범어사의 문화재 〈대웅전〉보물 제434호로 석가여래상을 비롯하여 미륵보살과 가라보살을 봉안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614년(광해군 6)에 묘전화상이 세웠고 1713년(숙종 39)에 흥보화상이 다시 수리한 것이다. 건물은 조선 중기의 불교건축의 표본으로 정면의 아담한 교창(交窓)과 닷집의 섬세한 조각 장식은 한국 최고의 목조 건물로 평가받는다.
〈삼층석탑〉통일 신라시대의 3층탑으로 보물 제260호이다. 신라탑의 양식을 갖추었으나 상, 하기단의 면석에 기둥모양 대신 안상을 조각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일주문〉일주문은 만법(萬法)이 구족(具足)하여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 있어 또한 일명 삼해탈문이라고도 하여 원래 사찰 건물의 기본 배치에 있어서 사찰 경내에 들어갈 때 는 먼저 지나야 하는 문이다. 일반적인 건물의 기둥의 배치는 방형으로 구성되지만, 일주문은 기둥이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것이 특징이다.
[금정산성] 사적 제215호('76. 2. 9 지정)로 금정산 일대에 축성된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길이는 17,337m이고 성벽의 높이는 1.5m ∼ 3m가량이다. 성내의 총면적은 약 2,512,000평(약 8,213㎢)의 성곽이다. 현존하는 산성은 임진, 병자의 난을 겪고난 후 국방에 관심이 높아진 1703년(숙종 29)에 축성한 것이다.
부산의 옛 중심지였던 동래
[동래의 진산인 구월산(九月山)] 구월산은 계명보에서 남진한 지맥이 회동저수지와 온천천 사이를 좁게 뻗어와 부곡동에 솟은 산으로 동래의 진진이다. 옛 이름은 윤산(輪山)이고, 이것은 동래 쪽에서 보면 산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둥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동래의 중앙에 위치한 마안산(馬鞍山)은 윤산에서 뻗어내린 산등이의 봉우리로 동래의 주산이고, 산의 모습이 말의 안장을 닮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래 동헌과 망미루] 〈동헌〉동헌은 동래구 수안동 421-56 7번지에 위치하며, 조선시대 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던 곳이다. 일명 아헌이라 부르고, 관아 건물 중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동헌인 충신당은 정양필이 창건하여 1711년 이정신이 충신당이란 편액을 붙여 조선 말까지 동래 부사는 이곳에서 집무를 보았다. 부산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단일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동헌이다.
〈망미루〉동래구 온천동 209번지 금강공원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의 대문이다. 이 건물은 1742년(영조 18)에 동래부사 김석일이 동래부 청사 동헌앞에 세운 문루였으나 일제시대 시가지 정리계획에 따라 현재 위치인 동래 금강공원 입구에 옮겨졌다. 앞면에는 동래도호부(東萊府都護府) 라고 쓰여져 있는 큰 편액이 있고, 후면에는 망미루(望美樓)라는 큰 편액이 있다.
[동래 온천] 『동래부지(1740)』는 "동래 현의 5리 북쪽에 있다. 그 열은 계란을 익힐 만하고 병을 가진 자가 목욕을 하면 문득 낫고 신라 시대에는 왕이 자주 행차했다. 벽돌 네모서리에 구리기둥을 세웠는데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였다. 동래온천은 신라부터의 온천이고 고려 때는 고관대작이 다녀간 시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동래 온천장이 오늘날처럼 발전한 것은 일제 때이다. 1915년 부산진과 동래 사이에 전차가 놓이고, 1927년 동래의 온천장까지 철도가 연장되었다. 지금은 시영탕원 6개, 사설인 개인탕원 20여개가 100m 이상의 지하에서 겨울 성수기면 30 ∼ 60도의 온천수를 1일 2,500톤 가량 뽑아 올린다.
[동래 정씨의 시조인 정문도의 묘] 화지산(和池山) 연제구 거제동의 해발 142m인 전형적인 구릉 산지로 산정은 종순형이고 사면은 완만하다. 이 산은 오래 전에 지금의 연지동 자리인 화지산 아래에 '화지언(和池堰)' 이란 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연지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못에는 연이 많아 '연못골' 또는 '연지언(蓮池堰)'라 불러 연지동이 되었다. 또 1740년의 『동래부지』에 보면, "동래부 서쪽 10리에 위치하며 호장(戶長)을 지낸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시조인 문도(文道)의 묘가 있는 "이라 기록하여 동래 정씨의 선산으로 알려져 있다.
정문도의 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문도는 읍에 속한 아전이었는데,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묘는 현의 서쪽 7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아전 벼슬임에도 불구하고 성명과 묘의 위치까지 기록된 점을 보면 동래 정씨의 후손들이 그만큼 훌륭한 가문으로 대를 이어온 이유이다. 조선시대에 정승을 지낸 사람을 보면, 전주 이씨가 22명, 안동 김씨가 19명, 동래 정씨가 17명, 청송 심씨가 13명의 순인데 인구 수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고려하면 동래 정씨는 한국 최고의 가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묘를 연화도수형 또는 야자형 명당이라 부르는데, 연꽃형의 명당은 주변이 넓고 평평해야 하는데 이 좌청룡과 우백호가 가깝게 있고 가까운 곳에 물이 보이지 않는다. 야자형으로 보면 우백호가 혈을 감싸고 돌아 안산이 되어야 하는데 이곳의 안산은 혈에서 약 11킬로 떨어진 영도의 봉래산이다. 묘는 정남향(자좌오향)으로 봉래산은 곡식을 고봉으로 담은 형상 즉 깔대기 모양이나 묘 앞에 흐르는 물이 적어서 재산과는 인연이 멀다.
또한 이 묘는 물이 좌측에서 나와 혈장을 감싸안지 못한 재 무정하게 묘 앞쪽으로 곧게 빠져나간다. 따라서 좌우에 청룡과 백호가 감싸 장풍의 형국은 양호하나, 물이 직류함으로 재산이 흩어진다. 또 패철로 보아 물이 오방(午方)으로 빠지고, 이 때 정남향인 자좌오향(子坐午向)을 놓았음으로, 소위 왕향왕파(旺向旺破)에 해당되어 가난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고, 내룡의 입수도 자계(子癸)로 쌍산이 불배합되어 생기가 왕성치는 못한 터이다. 땅의 기운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좌우의 장풍과 내룡의 기세만을 탐한 묘지이다.
<배롱나무〉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정문도의 묘 양쪽에 위치하여 사다리꼴 모양을 이룬다. 수령은 약 800년의 노거수로서, 정문도의 묘를 봉분할 때 식수하여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 나무는 원줄기는 고사하여 수간만 남아 있으나, 나무의 움트는 힘에 의하여 새로운 움이 여러 갈래로 나와 뿌리에서부터 측간을 이루고 있다.
동쪽의 노거수는 4개의 측간이 형성되어 있으며, 높이 8.3m에 가슴높이 25m에 이르고, 서쪽의 것은 3개의 측간에 높이 8.6m, 가슴둘레가 4.1m, 수관 목이 20m에 이른다. 꽃의 색깔은 동서 모두 분홍꽃을 피우고 있으나, 수령이 오래된 관계로 생장 상태가 양호한 편은 아니다. 배롱나무는꽃이 100여일 동안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목백일홍(木百日紅) 또는 상부에 많은 가지를 쳐서 여름철에 오랫동안 분홍빛 꽃이 가지 끝에 뭉쳐 피기 때문에 백일홍이라 불린다.
[동래의 풍수] 동래는 계명봉에서 남진한 용맥이 수영강과 온천천을 사이에 두로 뻗어내리고, 두 물이 합수한 지점에서 용맥이 멈춤으로 지기가 매우 왕성한 터이다. 풍수에서 용맥을 타고 흐르는 지기는 물을 만나야 멈추고, 그곳에 바람이 불면 지기가 흩어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래는 계명봉에서 남동진한 기맥이 계좌산→구곡산→장산으로 이어지며 좌청룡이 되고, 또 금정산에서 금정산성→만덕터널→금정봉→금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우백호가 되어 장풍의 형국이 양호하다.
동래로 집입하는 수구가 좁고 그 안쪽에 마치 삼각주처럼 평탄하고 넓은 분지에 위치하여, 동래는 대을 이어 부를 이룬 명당으로 판단된다.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첫 번째 수구를 꼽았다. 수구가 엉성하면 많은 살림도 여러 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저절로 없어진다고 했는데, 좁은 수구는 부지의 내외를 격리시키고, 안쪽에는 들어서면 확트인 경관이 넓게 자리잡아 별천지같은 느낌을 준다.
내부의 땅이 평탄하여 곡식이 풍성하고, 바다가 가까워 해산물도 얻을 수 있으니 땅의 지기는 왕성하고, 장풍이 좋고, 땅은 비옥하면서 해산물도 얻을 수 있고, 수구가 좁아 생기가 흩어짐없이 머무르는 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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