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작가 소설을 읽으면서
유월을 맞은 첫 번째 일요일이다. 즐겨 가는 산책이나 산행은 나서지 못할 상황이 생겼다. 여러 곳에 부실한 아내가 이번엔 발목이 붓고 발등에 통증을 심하게 느꼈다. 전날 자연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니 아내는 동네 병원에 들러 혈청 검사를 해두고 1주일 정도 안정을 권해 저녁부터 입원실에 머물렀다. 주말을 넘겨 검사 결과 나와야 정확하겠지만 짐작이 가는 탈이 떠올랐다.
간밤 아내가 부재중인 날이 밝아오는 아침을 맞아 하루 일정을 구상해 놓았다. 식후에 아내가 입원한 병실을 다녀온 이후 집에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아침을 차려 먹고 토마토를 잘라 통에 담아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 뜰로 내려서니 이웃 동 뜰엔 한 노인이 가꾼 수국이 피기 시작했다. 꽃송이는 토양 산도에 따라 색상이 달라진다던데 섞여 피었다.
맞은편에는 주로 초본으로 꽃을 가꾸는 꽃대감과 밀양댁 할머니가 꽃밭에 내려와 뭔가 돌보고 있었다. 꽃대감은 선홍색으로 피웠던 개양귀비가 저물어 여문 씨방 꼬투리를 따 모았다. 친구는 연말에 다른 꽃씨들과 함께 나눔을 할 씨앗을 마련하는 중이었다. 이웃한 안 씨 할머니 꽃밭에는 더 다양한 꽃들이 피어났다. 할머니는 호미로 꽃밭을 손보고는 보도에 흩어진 흙을 쓸어 치웠다.
친구와 할머니께 아침 인사를 나누고 아파트단지 상가 제과점에 들어 간식이 될 빵과 커피를 마련했다. 아내가 입원한 동네 병원은 멀지 않은 곳으로 메디컬빌딩 꼭대기 층 병실을 찾았다. 밤새 진통제가 든 수액 링거를 달아서인지 통증은 느껴오지 않아도 일요일은 당직 간호사만 근무해 마음이 쓰였다. 병실을 2인실로 사용해 이웃 병상 환자에 불편을 주지 않으려고 금세 나왔다.
집으로 되돌아 와 책상머리에 앉았다. 엊그제 교육단지 도서관을 찾았다가 작년 가을에 읽었 책을 한 번 더 읽으려 빌려다 둔 책이 있었다. 며칠 전 대산면 행정복지센터 출입구 홍보 게시판에 시민 대상 독후감 공모가 붙어 있었더랬다. 거기에 창원시에서 올해 ‘창원의 책’으로 선정한 하기주 ‘목숨’이 눈에 띄었다. 그 책은 창원 시민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목숨’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전 1,2,3권으로 된 이 작품은 해방 전 향토 마산 주변과 극동 연해주를 무대로 한 역사소설로 출판계에서 주목받았다. 소설 구성의 완성도도 높았지만 이 작품을 쓴 작가의 인생 행로가 소설다웠다. 부러워할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유수의 기업 최고 경영자를 지내던 이로, 60대 현역에서 은퇴 후 80대에 첫 번째 펴낸 작품이 ‘목숨’이었다.
날씨가 선선해 야외에서 현장 학습하기에도 좋은 날이었지만 집에서 ‘목숨’을 붙들고 보냈다. 작가는 해방 이전 출생해 내보다 20살 연상으로 기업가로 헌신 은퇴 후 인생 이모작으로 소설을 썼다. 65세로 기업 경영에서 물러나 청년기 잠재된 문학적 재능을 뒤늦게 발현했다. 일본 강점기 선대의 수난과 우리 지역 토막이 말을 살려내고 사라져가는 민속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때가 돼서 국수를 끓여 점심으로 먹었다. 올봄에 수산 장터를 지나다가 거기 명물인 ‘수산국수’ 다발을 사다 놓았는데 그동안 끓여 먹을 틈을 내지 못했더랬다. 수산국수는 제면기를 거쳐 나온 가닥을 공장 천장에 아크릴로 된 천연 채광에서 건조함이 특색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었기에 저녁은 건너뛰고 밤이 이슥하도록 1권에 이어 2권까지 읽고 3권은 못다 읽고 후일로 넘겼다.
하 작가 작품을 읽다 문득 김형석 교수가 생각났다. 백수를 넘긴 철학자는 지금도 강연과 집필 활동을 계속 이어가는데 건강을 유지함은 일과 두뇌 활동이었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황금기를 꼽은 시기는 60~75세라면서 그때까지 성장하는 것 같았으며 제일 행복하더라 했다. 65세 정년 이후 더 열심히 일했고 75세 즈음 좋은 책이 나왔다고 했다. 99세에도 일간지에 칼럼을 썼다. 24.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