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뜨신 밥 한 그릇 >
- 文霞 鄭永仁 -
어떤 손님이 오더라도 뜨신 밥 한 그릇 멕여 보내는 것이 어머니의 기본 손님 대접이었다. 일종의 우리 집 규방(閨房) 가풍이라 할 수 있다.
갑자기 손님이 들이닥치면 반찬은 토종닭 계란을 옹배기에다 찐 겨란찜이 그중 제일 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성은 마치 윤기 있게 지은 뜨신 밥처럼 자르르 흘렀다.
내가 인천에서 갑자기 내려가는 날도 어머니는 열일 젖혀 놓고 부랴사랴 뜨신 밥을 지어 먹이셨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엄마의 도리라고 생각을 하셨다.
지금도 귀에 생생하게 맴돈다.
“어여, 먹어! 밥 식을 텐데…….”
반찬이라야 장독대 둔덕에서 뜯어다 만든 달래간장과 며르치 꽁댕이 몇 개 넣어 끓인 햇감자 국이지만 꿀맛 이상이었다. 밥사발은 언제나 고봉이었다. 작은 무쇠솥에 불을 지펴 자운 이팝을 먹을 때는 뜨신 마음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다. 정작, 어머니는 점심에 꽁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먹는 둥 마는 둥 하셨을 것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이팝꽃이 쌀 튀밥처럼 피는 계절이다. 마치 이팝나무는 흰쌀밥을 고봉으로 퍼 담은 밥사발 같다. 이팝이라고 작명한데에는 쌀밥이라는 ‘이팝’과 ‘입하(立夏)’ 즈음에 흐드러지게 피어서란다. 오죽했으면 북한의 김정일이 인민에게 약속한 것이 이팝과 고깃국 먹이는 일이었다. 그나 그 약속 지키지 못하고 죽었지만…….
밥은 우리 민족의 생명줄이다. 특히 쌀밥은……. 흰쌀밥을 이팝이라 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은 굶주린 민족이었다. 사실 수많은 세월을 쇠고기에 한이 맺힌 민족이었다. 소 한 마리 잡으면 외국은 먹는 부위가 50여 가지 정도이지만, 우리 민족은 20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소피도 먹고, 쇠가죽도 먹었으니.
추수하자마자 양식을 걱정할 정도로 말이다. 양식을 그나마 여축하고 느루 먹기 위해서는 보리곱삶이, 감자밥, 고구마밥, 도토리 등을 밥에다 섞어 먹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구황(救荒)의 작물을 찾아야만 했다.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지금처럼 웰빙, 힐링의 호사스런 차원이 아니었다. 흉년에는 초근목피(草根木皮), 메밀, 칡, 도토리, 송기 같은 구황작물이었으나 지금은 웰빙이나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 받으니 세월은 참으로 무상하다.
누구나 알다시피 ‘쌀미 자(米)자’를 해자(解字)하면 ‘八十八’이 되는 것처럼 미곡 중심의 애환은 다 88번의 손끝에 머물고, 그 애환에 손재주가 많은 민족으로 부산물을 얻게 된다. 국제기능경기대회에서 연전연승하는 저력도 다 거기서 나오는 저력ㄷ이 된다.
어렸을 적, 밥 알갱이 하나 밥상 위에 흘리거나 밥주발에 붙어 있으면 어른들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주워 먹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지금 엄마들은 주워 먹인다면 비위생적이라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손주 둘에게 밥상머리 교육을 시킬 때, 그릇에 밥알 한 알 남기지 말고 먹을 것, 안 떨어지는 밥은 물을 부어서 깨끗이 먹을 것, 그리고 자기가 먹은 그릇은 반드시 개수통에다 갖다 놓을 것! 발우공양(鉢盂供養)l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잔소리 했더니, 지금은 으레 그러려니 한다. 교육은 결국 배우는 ‘학(學)’보다 익히는 ‘습(習’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밥은 우리 한민족의 생명 줄이었다. 밥숟가락을 놓거나 밥줄이 끊기거나 밥술이나 먹거나 밥심으로 살거나…….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무리 밥 아닌 다른 것으로 끼니를 때우지 못한다. 빵을 먹어도 밥을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 같으니 말이다. 아마 이게 쌀밥에 대한 수천 년 동안 길들여진 유전자이며 중독현상일 것이다.
우리 동네에는 ‘주발림’이라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동네 젊은 남자가 혼인을 하면 그 신혼부부를 데려다 뜨신 밥 한 끼 먹이는 마을 풍습이다. 차리는 반찬이라야 장에 가서 고기 한 칼 끊거나 자반고등어 한 손이이었으나 정성은 8첩 반상 이상이었다. 물론 밥주발엔 흰쌀밥이 고봉으로 담겨졌다. 거기다가 수줍어서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새색시에게 밥을 억지로 국에 말아주며 먹으라고 채근하는 걸 보면 따사로운 정이었다.
3년 전에 세상을 떠나 나의 둘째 형수도 둘째형의 직장이 집근처에 있을 때 3시 세 때를 뜨신 밥을 해서 형이 먹게 하였다. 점심까지도……. 그런 형수의 지극 정성 사랑에 지금도 잊지 못해 애 먹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 부뚜막 위에는 늘 밥 한 그릇이 놋주발에 담겨 놓여 있었다. 대처에 나가 있는 아들들을 위해서 언제나 마치 스페어타이어처럼 한 그릇 퍼 놓았다. 그 찬밥은 고스란히 어머니 차지였지만……. 또 아버지가 출타하시면 아버지 놋주발에 담은 밥 한 그릇을 밥보자기에 정성껏 싸아 뜨신 아랫목에 신부단지처럼 모셔 놓았다. 그건 아버지만의 밥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사랑으로 사신 게 아니라 따신 정으로 살았다. 그래서 늙으면 애정으로 사는 게 아니라 우정으로 산다는 것이 맞는 말인 것 같다.
세월(歲月)은 무상하고 무심하게 흘러, 세월호(世越號) 참사 어머니들도 마지막 가는 길에 뜨신 밥 한 그릇 수북이 담아 차가운 바다에 뿌렸다고 한다.
“우리 아들 배고프지?”
“어여 먹어! 얼마나 추웠겠니? 이 뜨거운 콩나물국에 뜨신 밥 말아서 어여 먹어! 어여, 어여…….”
첫댓글 감사합니다.
잊고 있던 옛 추억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어여 먹어라~하던 그때가 그리워집니다.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머~물다 갑니다
뜨신 밥 한 그릇 이란 구절에서 이미 확 다가오는 따뜻함이 있습니다. 글 전체가 참 푸근 합니다. 제가 요즈음 회사 동료들에게서 듣고 자꾸 되뇌게 되는 말 마디가 있습니다. 그게 제가 그동안 살아오며 들어보지 않은 말인데 참 인정스러워서 인 것 같습니다. .......... 사탕 한 알 주며 ' 입에 하나 물어' ......... 껍데기 무친 것 싸와서 ' 한 입 집어 먹어.'....... 그동안 전 좀 차가운 동네에서 살았었나 봅니다. 맘 따뜻해지네요. 여름날인데도 이 따뜻함은 마음에 안겨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친정 엄마가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