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코우 교각 전투의 패배는 튜토닉 전역을 경악시켰지만
수 없는 전쟁을 치룬 그들로써는 좌절이 아닌 새로운 노력으로 만들어갔고
미리 배치해두었던 크라코우의 북쪽과 할리크 서남쪽의 병력이 크라코우를 지원하러 달려온다.
크라코우 북쪽의 군단이 포위한 베네치아 군단을 교각으로 후퇴시키는 동안 신인 기사단원 베르트랑은
교각 동남쪽에 있던 베네치아 병사들과 맞닥들인다.
할리크 출신인 그는 저물어가는 폴란드 대신에 튜토닉 기사단에 들어오며 자신의 포부를 밝혔고
첫 전투를 신중하게 풀어나가려 했다.
1800여명의 베네치아 병사들을 맞아
베르트랑은 훌륭하게 400여명의 피해를 입고 격파한다.
잡은 포로들은 모두 해방시키며 관용을 보였고
그로 인해 그의 기사도가 높아졌다.
같은시각
얀셀름은 끝없이 키예프 왕국 병사들을 괴롭힌다.
얀셀름은 500여명을 이끌고 있는 노장 가브릴을 가뿐히 찍어 누르며 승전보를 알렸고
그가 승리하는 곳마다 키예프 왕국의 병사들은 경멸에서 존경으로 변해가는 지휘력을 선사 했다.
실로 얀셀름은 현 전술에서 조금 앞서나가는 차세대 전술을 구사했다.
당시 중세의 전술은 기병이 궁병에게 1차적으로 돌격을 하거나 우회하여 보병들을 포위 했는데
얀셀름은 궁병을 기병과 함께 운용하여 적 보병을 효과적으로 잡아냈다.
기병으로는 적 보병을 유인하면서 궁병을 배치하여 가는 길목에 화살을 뿌렸고
보병들은 우회하거나 정면 돌파를 시도하며 나머지 보병과 기병들을 잡는데 주력했다.
이는 보병들의 피해를 줄여 손실을 적게 하는데 매우 좋았다.
얀셀름이 연전 연승하는 동안 크라코우 쪽에서는 베네치아 총독을 궁지로 몰아 넣었다.
기사도가 충실했던 그는 퇴각하지 않으며 자신의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엥겔베르트는 베르트랑과 함께 총독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960명의 베네치아 병사들은 총독 호위 아래 멋지게 싸웠으나
총합 3500여명이 넘는 튜토닉 병사들에게 서서히 무너졌고
총독 역시 전투 중에 전사하여 나머지 베네치아 병사들은 패주하거나 항복하여 포로로 잡혔다.
엥겔베르트는 포로로 잡은 병사들을
베네치아 쪽에 몸값을 요구 했으나
베네치아 쪽에서 거절하며 그들을 사형시킨다.
베네치아를 강대국으로 만들고 있던 총독 베나수토는 수도 베니스로 송환을 승낙하여
장례식을 치루게 된다.
아직 베네치아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으므로
다음 총독이 호전적인지 평화적인지 알수는 없었으나
교황이 곧 제제를 해올 것이라는 예상은 할 수 있었다.
이쯤에서, 현 튜토닉 격전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첫번째
베네치아와 한참 교전중인 크라코우-할리크 지방이다.
폴란드가 자기 영역밖에 지키지 못하는 국력으로 감퇴하여 프워츠크쪽의 직접적인 움직임이 없었기에
프워츠크를 방비하던 엥겔베르트가 남하 할 수 있었고
할리크는 전염병이 자주 오가며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나
흐로드나-빌리니우스 쪽에서 꾸준한 지원 병력이 모여 할리크 남쪽 국경선에 배치해둔 군단이 베르트랑 군단이었다.
지속적으로 교전은 계속 될 것으로 보였으나 앞으로의 한두번 전투 후에는 교황이 교전 중지 선포를 내려 2년동안은
잠잠할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모스크바와 라쟌쪽이다.
모스크바 위쪽에는 남아있는 노보고르드 공국 병력들이 다수 모여있었으며
언제 모스크바와 노보고르드를 다시 침략할지 몰라 긴장상태 였고
라쟌은 점령 하자마자 전염병과 반란이 퍼지며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동쪽에 있는 키예프 왕국이 노보고르드 공국을 견재하여 미동 상태였기 때문에 전염병이 가라 앉을때 까지는 평화를
유지할 듯 했다.
세번째
현재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던
지토미르 - 키예프 지방이다.
첩보원의 정보에 의하면 키예프 동쪽에서 '몽골 대 제국'군이 서진을 시작한다는 첩보가 들려왔다.
현 전 세계 국력 1위 몽골은 우리에게 많은 위협을 주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제일 위험한 국가는 키예프였다.
키예프는 각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포착됬고
루프레히트와 게르하르트는 그에 상응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브랸스크 지방이었는데
브랸스크 쪽은 뛰어난 명장이 되가고 있는 얀셀름의 지휘하에 바로 남쪽에 있는 키에프 왕국의 수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 왕국의 수도인만큼 주둔해있는 병사들도 많아 얀셀름은 다시 한번 본국에서 지원을 기다리며 주위의 키예프 왕국
부대들을 격파하는데 집중한다.
현재 튜토닉의 적대적인 국가는 8국가였으나
실질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국가는 2국가였고
폴란드,덴마크,노르웨이,노보고르드,잉글랜드는 잠재적 위협 국가였다.
물론 폴란드,노보고르드는 국력이 바닥으로 떨어져 언제 망해도 수긍이 가능했고
덴마크는 튜토닉과 많은 전쟁에 국력이 휘청했으나 기회를 잘 잡아 서유럽의 몇곳을 점령하여
다시 한번 국력이 상승되고 있었다.
현재 서유럽쪽 강호는 잉글랜드였는데 수없이 교황에게 파문 당하면서 까지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고
프랑스가 정리된 마당에 아라곤 왕국과 크게 한번 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보였다.
마하드 칼리프국은 튜토닉에서 거리가 아주 멀어 직접적인 위협은 없을 것으로 판단됬다.
디트마르는 여기서 판단을 잘하여 한곳을 집중하여 점령하거나 전선을 유지해야 했는데
동쪽의 몽골군이 서진한다는 첩보를 듣고 더욱 더 머리가 아파진 상태였다.
이대로 키예프 왕국을 무너뜨리면 몽골과 전면전이 예상됬고 몽골과 전면전은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디트마르는 비스비 연안을 쳐다보며 다가올 전투를 다시 주시했다.
얀셀름은 키예프 왕국의 수도
즉 페레야슬라브 동북쪽의 키예프 부대를 격파한다.
얀셀름은 브랸스크의 치안을 우려해 신임 기사단원을 브랸스크로 복귀 시켜
재정비의 임무를 명령하고 자기 자신은 페레야슬라브 지역에서 계속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그 사이에 베네치아 부대가 다시 크라코우 서쪽에 출몰했다는 첩보원의 서신을 받은 엥겔베르트는 베르트랑과 협공한다.
이 전투에서 늦은 베르트랑의 지원으로 엥겔베르트와 기병 부대가 모두 전멸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베르트랑은 숲속을 최대한 가로질러 왔으나 이미 도착한 후에는 전투가 거의 끝나 있었고
서로 시체를 수습하는 타이밍이었다.
엥겔베르트 군단은 지휘관을 잃어 혼란에 빠졌으나 엥겔베르트 부관인 볼프가 생존하여 돌아와
정식 기사단원으로 임명 받고 엥겔베르트 군단의 인계를 받아 그들을 이끌었다.
1256년 가을
얀셀름은 키예프 왕국 견제를 계속한다.
새로운 신병을 규합하여 800여명의 부대를 격파하지만
기사단 위주로 편제된 800여명의 부대는 훌륭하게 얀셀름의 측면을 파고들어 피해를 조금 입힌다.
한편 게르하르트는 바이아의 병사들이 동쪽으로 빠진 틈을 타 바로 포위 했으나
이것은 그들의 함정이었다.
동쪽으로 빠진 병사들이 바로 복귀하여 내성에 있던 병사들과 선봉 게르하르트 후속 루카스로 이루어진 튜토닉 부대를 급습한다.
게르하르트는 당황한 기색으로 최대한 침착하게 지휘했으나 적 기병수와 우리의 보병수가 얼비슷해 기동력 면에서 완패하고
기사단원을 한명 잃은체 크게 패하고 근처 요새로 퇴각한다.
800여명을 죽이긴 했으나 1200명을 잃은 게르하르트는 정신적인 충격에 빠졌으며
멘탈 붕괴 상태에 들어가 부관들은 그를 할리크로 이송했다.
이 소식을 들은 루프레히트는
북쪽 노보고르드 지역에 신병 지원 요청을 했고
자기가 직접 남하 할 결심을 한다.
첫댓글 종종 패배를 하시니 더 재미지네염 ㅋ 하긴 이제 한두번에 패배로는 강력한 튜토닉을 무너뜨리긴 힘들때가 됏지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