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東萊)는 부산직할시와 경남 양산군의 일부지역을 차지했던 지명으로, 본래 장산국인데 신라때 거칠산군으로 고치고 경덕왕때 동래군으로 개칭하였다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의 6부촌장으로 정씨(鄭氏)의 성을 하사 받았던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智白虎)의 원손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받들고 고려초에 보윤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을 1세조로 하며, 누대에 걸쳐 정착세거 해온 동래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온화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하여 남과적을 삼지 않는다는 가통을 지켜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온 동래정씨는 부산 양정동 화지산에 자리잡은 2세 안일공 정문도(鄭文道)의 묘소에 대한 명당의 전설이 아래와 같이 전해오고 있다. 그가 죽었을 때 맏아들 목(穆)이 장지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가 동래부사를 지내던 고익호가 일러준 화지산에 장례를 치루었다. 그러나 장례를 치룬 다음날 이곳에 와 보니 누군가가 무덤을 파헤쳐 놓았다. 기이하게 생각하고 다시 복원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분통을 참을 수 없었던 목(穆)은 밤을 새워가며 숨어지켜 보기로 하였다. 밤이 어지간히 깊었을 때 도깨비들이 나타나 또다시 무덤을 파헤치며 하는 말이 "여기가 어딘데 함부로 건드려, 적어도 금관을 묻어야 할 곳에....." 하며 중얼 거리는 것이었다. 가난하게 살았던 목(穆)은 이 사실을 알고 걱정이 되어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 "염려마오. 황금 빛 나는 보리짚으로 관을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을 것이오."하고는 사라졌다. 그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과연 그 후부터는 무사하였다. 목(穆)은 고려 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를 역임하고 슬하에 아들 제(濟). 점(漸). 택(澤). 항(沆). 4형제를 두었으며, 목의 아우 선조(先祚)는 호장을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동래와 양산 등지에 산거하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좌복야 목(穆)의 세째 아들 택(澤)이 고려 때 찬성사를 지내고 문장과 재능으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항(沆)은 숙종때 등과하여 우사간을 거쳐 양광도와 충청도의 안찰사를 역임한 후 인종때 지추밀원사. 예부상서. 한림학사 등을 지냈다. 인종비 공예대후 동생의 남편으로 문명을 떨쳤던 [서]는 의종때 폐신 들의참소로 동래에 유배 되었는데, 그 곳에서 정자를 짓고 오이를 심어 과정(瓜亭)이라 당호(堂號)를 삼고 연군(戀君)의 정을 가요로 읊은 <정과정곡 (鄭瓜亭曲)>을 지어,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13세 때 진사가 되었던 흠지(欽之)는 양도공 양생(良生)의 손자로 풍채가 좋고 성품이 강직했으며, 특히 사학(史學)과 천문학(天文學)에 정통하여 세종의 명을 받아 역법(曆法)을 연구했고, 그의 아들 갑손(甲孫)과 창손(昌孫)이 크게 현달했다. 갑손(甲孫)은 대사헌이 되어 대강(臺綱)을 바로잡아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판한성부사와 예조판서 . 좌.우참찬을 지내고 중종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갑손의 아우 창손(昌孫)은 세종때 부제학으로 춘추관의 수찬관을 겸하여 [고려사]와 [세종실록]. [치평요람]등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세조때 영의정에 올라 왕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세조가 신임하여, "내가 경을 공경하기를 숙부와 다름 없오" 하면서 창손이 술을 권하면 반드시 어좌에서 내려 앉았으며 술을 못마시는 창손을 위하여 좌석에 반드시 단술을 준비케 하였다고 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발의 연골 뼈가 붙어 일어설 수 없다고 칭병하여 벼슬을 마다했던 구(球)는 18년 동안이나 거짓으로 앉은뱅이 노릇을 한 집념의 선비였다. 그의 아들이 난세에서 간신 들과 집념으로 항거하면서 기구하게 일생을 마친 희등(希登)이다. 그가 상처(喪妻)하자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 김안로가 사위로 맞으려 했으나 "평생을 홀애비로살지 그 추문(醜聞)에 들진 않겠다"고 면박을 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구수담이 간신 진복창을 추천하자 "이놈은 간사한 자의 괴수다"고 막말을 하고 진복창이 앉았던 자리를 거두어 불 태우기까지 하였다. 그는 용기있는 저항으로 뜻있는 선비들의 존망을 받았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용천으로 귀양가기 전야에 별세했다. 직제학 사(賜)의 아들이 성종조의 명신 난종(蘭宗)이다. [명신록]에 의하면 그는 풍채가 아름답고 도량이 활달하여 세조의 아낌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날 세조가 주역(周易)과 원각경(圓覺經)의 우열을 물으니, 세조가 독신하는 임금인 줄 알면서도, "불교의 요사스런 글을 어찌 [삼성경(三聖經)]과 비교하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세조가 크게 노하여 역사를 시켜 매질하게 하였으나 난종은 얼굴 빛이 평상시와 같이 태연하므로 기가 질려 그만 두었다고 한다. 난종의 아들이 중종조의 명상(名相) 광필(光弼)이다. 안당. 김정. 조광조. 김식등과 더불어 <팔현(八賢)>으로 일컬어졌던 광필은 이조참의가 되어 연산군의 사냥이 너무 심하다고 상소를 올렸다가 아산으로 귀양가기 시작하여 관력의 절반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며, 중종반정으로 재기용되었다. 서울 중구 회현동 1가 14번지는 동래정씨의 옛 기지였다고 한다. 이곳은 문익공 광필이 살던 터로 약 400여 년간 자자손손 대를 이어 지켜 왔던 유서 깊은 곳이다. 어느날 광필의 꿈에 선인이 나타나 집앞 은행나무에 열두개의 서각대(犀角帶)를 걸어 놓고 가더라는 것이다, 그후 광필의 손자 유길(惟吉), 증손 창연(昌衍), 현손 태화(太和)등 열두 명의 상신(相臣)이 배출되어 동래정씨의 화려한 명맥을 이루었다 광필의손자 유길(維吉)은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대사헌과 이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선조때 좌의정에 이르렀고, 문장과 시에 능했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창연의 아들로 <삼세호당(三世湖堂)>이라 우러름을 받았던 광성(廣城)과 광경(廣敬)은 형조 판서와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광서의 아들 태화(太和)는 효종과 현종조 에서 영의정을 지내며 현상(賢相)으로 명망이 높았다. 조선조에서 17명의 상신(相臣)을 비롯한 수많은 명신 현관을 배출해 낸 동래정씨는 전주이씨, 안동김씨와 더불어 [삼대상신가문]으로 유명을 떨쳤으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충의열사가 배출되어 도덕과 학문이 뛰어났던 석학(碩學)들과 함께 명문 동래 정씨의 가통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남한에 총 98,423가구, 414,7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