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이 8일 서울 시내 호텔에서 열린 2025 미래전략 컨퍼런스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 뉴스1]
시험 문제가 바뀌었다. 채점 방식도 바뀌고 옆자리 수험생도 바뀌었다. 그런데 한국만 모른다. 반도체 '초격차'를 이룬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의 진단이다. 그는 "한국은 중국을 여전히 만만하게 보고 있다. 한국 기업의 성공 방식은 유효하지 않고 전방위 개혁이 필요하며 그 시작은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8일 열린 서울대 자연과학부 과학기술산업융합최고전략과정(SPARC) 총동창회 학술포럼에서다. 권 전 회장은 1985년 삼성전자에 연구원으로 입사해 2008년 반도체총괄 사장, 2012년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됐다. 지난 2017년 삼성전자가 인텔을 제치고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에 오르자 일선에서 물러나 삼성종합기술원 회장을 맡았다.
권 전 회장은 한국은 성공의 저주에 갇혔다고 직격했다. "한국이 이 정도 성과를 낸 것은 인류 역사에서 기적이지만 성공은 거기에 안주하는 기득권을 낳았고 정치·경제 제도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권 전 회장은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변수로 (정부 주도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중국을 꼽았다. 그는 반도체 철강 조선 휴대전화 등 한국의 주력 수출품목 중 한국에서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선진국이 만든 것을 한국이 가져와 훨씬 값이 싸고 좋게 만든 것은 대단하지만 부가가치가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개혁 대상은 규제 시스템이다. 미국은 안 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네거티브 시스템인데 한국은 해도 된다고 정한 것만 하는 포지티브 방식이고 이런 식으로는 모범생은 키울 수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발상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이 정권마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권 전 회장의 '다시, 초격차' 출간을 앞두고 열린 이날 포럼에서 권 전 회장은 '똑똑한 리더' 개념부터 다시 정의했다. 기존 한국의 지도자들은 대개 '똑똑하고 근면'했는데, 이것이 현재의 비효율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보다 기계 지식이 많기 때문에 지식보다 '지혜'가 많은 지혜로움이 필요하고, 주말에 쉬지 않는 부지런함이 아니라 머리가 세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지혜로운 부지런함을 새롭게 정의했다. 회사 최고경영자(CEO)가 대학 기초연구자와 만나 토론하고 다른 분야 사람들에게 영감을 얻는 일이 종종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상사들이 낡은 방식으로 종종 직원들을 불러 회의하고 자료를 준비시키니 기업의 유능한 인재는 생각할 시간이 없다"고 지적했다.
권 전 회장은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향한 조언으로 "이 사업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명확히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병철 삼성전자 창업자의 사업보국이나 일론 머스크 테슬라 창업자의 화성 개척 같은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 경영인에게는 「오너가 부여한 임무를 확실히 수행해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 결정적일 때 오너를 설득해 사업 전략을 관철시키는 회심의 일격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