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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고난받게 될 일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마귀가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서 시련을 당하게 하리니 그러면 너희가 열흘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러면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계 2:10).
성경 본문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문자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성경 독해의 시작이자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계시록은 상징과 비유로 뒤덮인 모호한 암시적 예언의 책이 아니라 사실과 역사를 기록한 실증적인 책이라는 점을 먼저 알아야 이와 같은 구절에서 실수하지 않고 최선의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 열흘 동안 환란이란 말을 신약 교회사에 투영, 적용해서 로마 제국의 열 차례 기독교 대박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은 계시록을 역사적 적용한 사례인데 그것은 50% 정도는 타당한 해석이지만 100%가 될 수는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은 역사적 해석과 예언적 해석이 항시 병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구절에서 상징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실질적으로 대환란 때 이런 일들이 있겠다 하는 해석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직 대환란이 아닌 교회시대에 처한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이것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일어나는 일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대환란 때 저런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정도로 지나갈 수 밖에 없다는 약점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막상 7년 환란이 시작되어 봐야 이 열흘 동안의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이 누구이며 언제 그 일이 발생하는지 사실로서 증명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본문을 살피면서 주목하게 된 사실 중 하나라면 이 일이 언제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조금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평상적으로 "대환란"이다, 그렇게 규정하는 말은 7년 전체를 합쳐서 대환란이라 보통 부르고 그래서 "7년 대환란"이라는 말도 흔히 쓰는 것이다. 그것은 귀에 쏙쏙 들어온다는 언어 친화성 면에서는 적절한 용어 배합이겠지만 교리적 적확성 측면에서는 모호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대환란"이라는 단어를 쓸 경우에 항시 그것은 후3년 반을 의미하고 있으며 전3년 반은 대환란 자체와는 별도로 나누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우리가 전3년 반과 후3년 반의 차이점, 속성에 대해 과연 얼마나 세부 사항들을 파악하고 있나 하는 질문을 드리기 위해서이다. 나도 사실 이 부분에 대해 속속들이 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알아나가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 중에 한 명일 따름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깨달은 것에 대해서 그것이 영적 유익이 된다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하는 생각으로 이것을 쓰는 것이다.
그의 지혜를 통하여 그가 자기 손에 기술을 늘려서 자기 마음속에 자신을 높이고 평화로 많은 것을 멸하리라. 그는 또한 통치자들 중의 통치자를 대적하여 설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 부서지게 되리라(단 8:25).
그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 동안 언약을 확정하고, 그 주의 중간에 그가 희생제와 예물을 금지시킬 것이요, 그는 가증함을 확산시킴으로 황폐케 하리니 진멸할 때까지 할 것이며, 정해진 것이 황폐케 한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더라(단 9:27).
다니엘의 칠십 째 주, 곧 7년 환란 기간이 전반기와 후반기의 두 파트로 나뉜다는 기본 전제는 단 9:27을 근거로 내려지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환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에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사항인데 문제는 그 대전제를 맞다 인정하더라도 전3년 반과 후3년 반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는 대부분 주석가들이 잘 모르는 상태이고 굳이 알려고 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것 같다. 환란통과론을 주장하는 교인들 같은 경우는 물론 그들의 생각은 미혹에 빠진 것이긴 하나 그 자들이 이 7년 기간의 전체, 혹은 상당 부분을 통과한다고 여기기에 그나마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환란의 구체적 양상에 상당히 관심을 갖고 이런 저런 추측들을 하지만 그들도 심도있게 정확히 해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왜 그럴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 하나는 그들이 진정 그것을 알고 싶지 않다는 심리적 원인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이다. 무슨 얘기인가, 사람들은 두려운 사태에 직면하면 이성적 대처를 하기보다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타조가 모래 속에 머리를 묻거나 꿩이 고개를 파묻고 현실 도피를 하듯이 사람들은 정말 두려운 것에 대해서는 "금기", "타부"라는 딱지를 붙인 채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는 큰일 나는 것 마냥 그 주제를 피해 버린다. 그래서 대환란의 구체적 연구에 대해서 기독교계는 대체로 외면하는 것이다.
환란통과론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자기들이 직면할 현실이라 여기고 두려워서 덮어 버리는 면이 있다. 환란전휴거를 믿는 세대주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어차피 7년 기간을 통과할 것이 아닌데 굳이 연구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간략하게 넘어가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결국 이쪽 저쪽으로부터 모두 외면의 대상이 되어 대환란에 대한 연구가 지금까지 미진했던 것이며 실로 7년 환란이라는 사태가 심히 가까운 지금 시대가 되었음에도 7년 환란에 대한 외면과 무시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현실에 대해 한편 개탄하지만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게 약"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의 진리를 직면하고 감당할 용량이 안 되는 간장 종지 만한 그릇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자기들 분수에 넘치는 진리를 알아 봐야 그들이 써먹을 데도 없고 기껏해야 교만한 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야, 나는 당신들이 모르는 성경의 비밀들을 많이 안다."라고 야바위, 약장수 짓을 하면서 돈이나 받아 챙겼을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대다수 교인들의 계시록에 대한 심한 무지는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도 기존 기독교계의 성경에 대한 무지와 나태에 동참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팔 걷어부치고 나서서 밝힐 것을 밝히고 우리의 향상된 영적 지각, 곧 하나님께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향상된 계시를 확장해서 계시록의 모호한 많은 부분들을 최선을 다해 더 밝혀내고 미혹된 사람들을 진리로 계도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적그리스도는 7년의 시작을 어떤 모습으로 개막할 것인가, 그는 유능한 정치인이기 이전에 경건한 종교 지도자의 면모로 세상에 첫 선을 보일 것이 분명하다. 그는 매우 유력하게도 로마 카톨릭 교황으로서 그에게 권세가 주어진 7년 환란 기간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실 증명하기에 하나도 어렵지 않은데 역대 모든 교황들은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 자들이 진리와 무관한 "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팍스 로마나)를 신봉하기에 문제인 것이지 평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의와 화평을 주시기 위해 지상 재림하시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 땅에 전쟁을 종식시키고 지속되는 평화를 줄 수 있다는 달콤한 약속과 함께 멋진 교황 성하의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을 축복하며 거룩하게 등장할 것이다. 교황 프란시스가 늘상 입에 달고 사는 그 싸구려 "평화" 말인데, 프란시스를 포함 역대 교황들 누구도 자기들의 입에서 뱉어낸 평화를 실천해 본 적도, 실현해 본 적도 없다. 평화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순전히 아마추어이며 그들의 사악한 종교 체제, 로마 카톨릭이 "평화의 왕"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요 우상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 영적 맹구들이다.
어쨌건 적그리스도도 계 6장에서 볼때 "평화"를 약속하며 등장할지라도 그의 평화는 며칠, 혹은 몇 달도 지탱하지 못하고 붕괴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내가 보니, 보라,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자가 활을 가졌더라. 그에게 한 면류관이 주어졌고 그는 나가서 정복하고 정복하려 하더라(계 6:2).
위 본문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입하여 읽는 사람들은 이성에 문제가 있기보다 양심에 오작동이 있는 자들로 여겨지는데 성경에서는 그런 이들을 양심에 화인 맞았다라고 한다. 그들은 정치인들이 매번 선거 때마다 공허하게 내뱉는 '동북아 평화', '세계 평화' 같은 선동 구호를 신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클린턴이나 부시, 오바마 급의 정치 사기꾼이라고 내심 여기는 부류들이다. 예수님은 뒤돌아서면 즉시 깨져버릴 평화 조약 따위 맺기 위해 재림하시는 게 아니다. 그 분이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서시면 그때부터 최소 1천년 동안 평화가 지속된다. 계 6:2의 흰 말 탄 그 신사가 주는 평화는 1년도 못 가고 깨져 버린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평화를 주노라"라는 멋진 시적 선언과 함께 등장할지라도 즉시 그 약속을 어기고 평화로운 나라들을 침공하여 "정복하고 정복하려" 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제외한 전세계를 전3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완전히 자신의 열 왕국 체제 안으로 밀어넣고 굴복시켜야만 한다. 그래야 그가 후3년 반의 그 중요한 사역, 666표 사역과 짐승의 형상 사역을 수행하겠기 때문이다.
내가 단언하겠는데 적그리스도가 전세계를 정복하는 데 걸리는 그 시간이 전3년 반의 기간이고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거기서 빼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배교하여 사탄의 회당이 되는 유효 기간이 역시 전3년 반 기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3년 반 동안 이스라엘은 완전히 타락하여 소돔과 이집트화 될 것인데 적그리스도는 그 기간 동안 전세계를 휩쓸면서 어떤 나라는 회유와 협박을 통해, 어떤 나라는 경제 봉쇄로 IMF 사태 같은 것을 유발하여, 또 어떤 나라는 직접적인 전쟁을 통해 정복해 나갈 것이다.
다시 말해 대환란 때의 스머나 교회의 저 박해 받는 교계 인사들, 물론 그리스도인은 아니라 메시야닉들이지만 그 유대인 성도들은 적그리스도 시스템에 의해 직접 박해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지배에 넘어간 이스라엘 산헤드린에 의해 핍박받고 있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라면 저 사람들을 열흘 동안 옥살이 시키고 좀 괴롭히고 스트레스 주며 협박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즉시 망나니들에게 넘겨서 목을 잘라 버리는 것으로 대응한다(계 20:4). 그것이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가 환란 성도들을 처리하는 업무 방식인데, 그는 매우 과격하고 흉포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타입 폭군이다.
즉, 몇 사람이 될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의 메시야닉 지도자급들, 하나님의 회당에 속한 그 예수 믿는 유대인들의 우두머리들이 이스라엘 정부에 체포되어 10일 동안 구류를 당하는 것이 본문에 나온 것이다. 그들이 10일 동안 갇힌다는 것 자체도 이방인의 때와 상관이 있는 숫자인데 10은 이방인의 숫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이 처형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죽기까지 신실하라"는 말은 "죽으리라"는 확정형이 아니며 심한 괴롭힘을 당할지라도 사도행전의 바울이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던 빌립보 감옥 사건처럼, 또는 베드로가 헤롯에게 처형되기 전 천사에 의해 구출된 것처럼 하나님이 구해주실 여지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면류관"은 꼭 순교해야지만 받는 면류관이 아니라 순교에 준하는 고난과 핍박을 통과한 크리스찬들에게도 주는 상이다. 흔히들 이 면류관을 순교자 면류관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새삼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경청하는 것이 하나님께 경청하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인지 판단하라(행 4:19).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 처음에는 사역을 중단하라는 교계 지도자들의 협박이 가해졌고 그 어떤 협박도 사도들에게 통하지 않자 산헤드린은 본연의 마귀적 속성을 드러내면서 폭도들을 앞세운 물리적 공격에 나서서 본보기로 스테판을 처형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3년 반에 이스라엘의 메시야닉 쥬들은 사도행전 때 예루살렘 교회를 일으킨 사도들이 처했던 입장과 비슷하게 점점 고조되는 종교인들의 박해 위협 속에서 사역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본격적 박해에 직면하여 사역이 어렵게 되면 결국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이스라엘 영내를 벗어나서 소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 전체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또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 즉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내고 또 새 방언들로 말하리라. 그들은 뱀들을 집을 것이요,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결코 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병자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회복되리라.”고 하시더라(막 16:15-18).
위 막 16:15-18의 본문은 흔히 "지상 명령"이라고 불리는 복음 전파의 명령인데 사람들이 여기서 간과하는 내용이 이 명령에는 상당히 교회 시대와는 거리가 있는 왕국 복음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도들은 이 명령대로 했고 그들은 실제로 방언을 말하거나 뱀들을 집고 신유를 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도 시대가 종료되면서 그와 같은 초자연적 이적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은 표적이 역사하지 않고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믿음으로만 신자에게 역사하시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은사주의자들은 "아니야, 사도시대에 있었던 표적은 지금도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어, 우리가 성령께 구하기만 하면 사도들처럼 다 할 수 있어"라고 억지를 피우고, 반면 개혁교회 칼빈주의자들은 "그래, 표적들은 사도 시대가 끝나면서 함께 끝난 것이고 지금은 방언이니 신유니 더 이상 없어."라고 이야기한다. 어느 쪽이 옳다고 하겠는가? 일단은 후자가 맞는 이야기를 했고 전자는 역사적 사실을 이탈한 공상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후자, 개혁교회도 절반만 맞는 이야기를 한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허공에 날려 버렸다. 그 자들은 무천년주의라는 엉터리 종말론을 받아들였기에 사도행전이 단지 역사라 믿을 뿐 미래의 청사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해 버린 것이다. 사도행전 때 있었던 기적과 표적들은 교회 시대 때는 멈추어 있지만 대환란이 되면 또 등장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죄들을 범했어도 그것들을 용서해 주시리라(약 5:14-15).
야고보서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게 주어진 서신서이고 이 책의 교리 중 상당부분이 대환란에 할당되어 있어서 야고보서는 가히 7년 환란기를 대처하는 대응 메뉴얼 격의 서신서라 보기에 합당하다. 이 책의 내용은 로마서 중심적 은혜 복음 신앙만 갖고 있는 믿음의 초보자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울 수 있는데 그래서 마틴 루터도 이 책을 해석하기를 포기하고 머리를 쥐어 뜯었던 것이다.
위 약 5:14-15대로 여러분이 교회의 목사님들을 환자들에게 보내어 주의 이름으로 그 어떤 기름, 올리브 기름이던지 참기름이나 들기름이든지 뭐든 붓고 병 낫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해서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저 구절의 "기름 붓는 의식"에 대해 "아, 그것은 문화적으로 볼때 그 시대의 유대인들이 행하던 종교 의례 같은 것 아니냐"라고 할지 모른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심코 "문화적인 거 아니냐"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성경에서 먼저 검증해야 한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은 영적 눈이 열릴 것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지각을 축복하시어 마땅히 봐야 할 진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많은 마귀들을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붓고 병을 낫게 하더라(막 6:13).
구약의 사례들은 일단 제외하고 신약에서만 병자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사례를 찾아 보면 한 구절이 더 찾아진다. 막 6:13인데 거기서 열두 제자들이 이스라엘 도처에 나가서 왕국 복음을 전파할 때 "기름을 붓고 병을 낫게 하더라."
눅 9장에도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데 눅 10장에서는 또 다른 칠십 명의 제자들이 임명받아 파송되는 것이 나온다. 그들의 사역은 앞선 열두 제자의 것과 같은 성질인데 그들도 기름을 붓고 병자들을 낫게 하는 일을 위해 보내진다.
기름은 그냥 의미 없이 붓는 게 아니라 그 아픈 자들의 질병이 피부병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면이 있다. 물론 꼭 피부병이라서 그런건 아닐 수 있지만 피부 질환자들에게 바르는 연고 같이 기름 성분을 가진 약재를 연상해 보면 된다. 7년 환란 때는 땅과 하늘에 기상 이변, 바다의 이변, 땅의 재난들이 속출할 것이고 곳곳에서 화산이 터진다던지 운석이 떨어져서 대기가 탁하고 건조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인간은 몸의 여러 부분 중에서 피부가 상하고 욥과 같이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거나 거지, 나사로의 그 이야기에서처럼 피부병 걸린 나사로가 되어 버린다.
주님 초림 당시, 주님의 공사역 당시 이스라엘에는 수많은 각색의 환자들이 있었는데 그 질병의 원인은 물론 못 먹고 못 사는데다 의사도 잘 없어서 그랬지만 특이점은 "문둥병의 만연"이었다. 주님께서 문둥병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경우들을 여러분이 성경에서 제대로 살펴보려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문둥병을 낫게 했던 것과 같이 놓고 봐야 한다. 문둥병 치유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 다음으로 가장 충격적인 기적이었고 그래서 주님의 문둥병 치유를 보았던 유대인들은 거기서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을 이어받아 사역했으니 실질적으로 엘리야 쥬니어 같은 사람이고 그래서 예수를 엘리야로 인식하는 유대인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는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는 선지자이거나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과 같다.”라고 말하더라(막 6:15).
환란 기간 중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그때의 전세계 사람들은 깨끗한 물, 청정한 공기가 아닌 더러운 물, 오염된 대기를 마시고 흡입하며 서서히 병들어가게 될 것이다. 지금은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의료 보건의 붕괴 직전, 적신호 상황이 전세계를 뒤덮을 것인데 그때 의사는 태부족하고 병자는 도처에 널려 있어서 그야말로 주님 초림 당시의 열악한 이스라엘 의료 상황처럼 그때도 병자들이 한집 걸러 신음하며 매일 동네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며 장사를 치러야 하는 우울한 시절이 도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에 전파하신 복음은 "왕국 복음"으로서 그 복음은 혼의 구원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육체적 구원, 곧 병 치유라던지 마귀를 쫓아냄 같은 종합적인 복음이었다. 특히 병 치유는 왕국 복음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요소인데 주님도 그렇게 주의 제자들도 사도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병치유 사역을 했다.
이런 그림은 대환란의 예표로서 작용하며 우리에게 계시하는 분명한 사실이 있으니 이는 대환란의 예고편, 청사진은 사도행전이라던지 사복음서, 또는 히브리서나 야고보서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대환란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우리에게 태부족하다, 그렇게 하나님께 불평하기보다 자신의 기존에 했던 성경 공부가 너무 부실 공사였다는 것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으로부터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자, 스머나 교회에 대한 교리들 역시 스머나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일곱 교회들 전체에 주어진 것이다. 특히 교리적으로 대환란 때의 지역 교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위 구절을 적절하게 해석하지 못할 때 행위구원론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으니 유의하여 읽어야 한다.
"둘째 사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계 20:14이나 21:8을 참고하면 된다.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 아는 분들은 굳이 이것을 볼 필요는 없겠지만 하여튼 둘째 사망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이 처하게 될 영원한 멸망의 형벌, 영벌 그 자체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가증스런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마술하는 자들과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하시더라(계 21:8).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으로부터..." 이것을 읽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은혜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크리스찬이라면 읽다가 곰곰히 생각할 것이다. 그는 성급하게 이 구절을 자신의 구원 교리에 적용하려 하지 않고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그는 요한계시록에서 "이기는 자"에 대한 구절들을 찾아본 연후에 그 "이기는 자"가 예수님의 "이김"을 통해 이미 천성 예루살렘에 대한 약속과 보증 아래 살아가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 즉 대환란의 성도들임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니, 나는 그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요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되리라(계 21:7).
이 구절은 그렇다면 어떤가, 이것도 그리스도인에게 교리로 적용하기에 합당해 보인다면 당신은 계시록을 하나도 해석할 수 없는 영적 맹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결코 적용될 수 없으며 그런 적도 없는 교리의 말씀이다.
우선, "이기는 자"는 진행형의 상태를 말하는데 구원의 완료가 아닌 진행되는 와중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이기는 자"는 어떤 우여곡절과 과정을 통과한 연후에야 하나님께 자식으로서 인정받고 성도로 합격 인증을 받는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여러분이 그렇게 구원받았는가? 이와 비슷하게 믿는 사람들을 알미니안이라고 부르는데 그러나 알미니안 교리를 믿는 크리스찬들조차도 계 21:7처럼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이 진행 중이라 여기기는 하지만 현재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맞다고 생각하고 그들도 "하나님 아버지"라 한다. 그러나 계 21:7에 따르면 알미니안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들이 완전히 이겨야지만, 즉 구원을 완성해야지만 하나님께서 자식으로 인정해 준다고 하니 현재는 "예비 자식"이지 자식이 안 된 것이다.
이것이 알미니안들의 비극이자 해프닝이기도 한데, 그들은 바울의 은혜 교리와 환란시대의 행위 교리를 분간할 영적 안목이 없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부분을 따와서 모자이크식 교리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 복음은 믿는다 하고, 또 믿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 된다는 사실은 믿으면서 계시록, 히브리서, 야고보서 등에서 "구원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에 대한 구절만 보면 또 거기에 편승해서 가려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 되는 자격에 대해 어떻게 규정짓고 있는가? 관련한 많은 구절들이 있지만 가장 핵심 중의 한 구절만 가져와서 살펴보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알미니안식으로 해석하려면 요 1:12은 무척 어려운 수수께끼가 될 것이나 평범한 은혜복음적 관점으로 보자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한 견습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아들 예비 후보로서 수련 과정을 밟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롬 8:14).
이는 너희 하나님의 아들들이 흠 없고 순전하여 비뚤어지고 변질된 민족 가운데서 책망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 너희는 빛들로서 세상에서 비추는 자들이라(빌 2:15).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기존 교회에서 무슨 칼빈주의건, 알미니안이건 헛된 교단 교리를 배웠건 그 하나도 도움 안 되는 잡지식들은 몰아내고 순전하게 위 구절들을 보기 바란다. 그러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진리와 사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예수를 믿었고 그를 주로 영접했다면 그 사람은 이제부터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구원받을 때 아들 예비 후보가 되어서 쭉 살다가 죽을 때에야 진짜 아들이 되는 게 아니올시다.
우리가 살펴본 신약적 "아들됨"의 교리와 계시록의 저와 같은 구절을 한번 비교해 보라. "진행형 구원"과 "완료형 구원"의 이 두 가지가 사실상 같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다시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은 이성이나 학식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양심이 비틀어져서 성경을 거꾸로 보려 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제 본 11절에서 더 주의해서 봐야 하는 행간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둘째 사망과 육체적 사망"의 차이점과 관련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상기 말한 바와 같이 "둘째 사망"은 몸의 사망이 아닌 혼의 사망, 곧 영벌을 뜻한다 했다. 몸의 죽음에 관해 성경에서 "첫째 사망"이라고 별도 규정짓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개념상 "첫째 사망=육체적 죽음"이라 말할 수는 있겠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진 것같이(히 9:27).
예수님이 7년 환란전 공중 재림하실 때 산 채로 몸이 변화되어 휴거되는 그 성도들을 제외하면 인류 역사 동안 살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히 9:27의 범주에 들어간다. 즉 그들은 최소 한 번은 죽어야 되는 처지에 있는데, 내가 최소 한 번이라고 한 이유는 어떤 사람은 두 번, 세 번도 육체적으로 죽기 때문이다. 구약 선지자들이 죽은 사람들을 살려준 경우 그 사람들은 두 번 죽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살려주신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로 두 번 죽는 케이스이다. 그들은 부활했으나 살다가 다시 죽었으니 두 번 죽은 것이다. 따라서 히 9:27에서 "한 번 죽는 것은"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한 번만 죽는 것이라는 게 아니라 "최소 한번은 죽어야"라는 뜻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일반적으로 한 번은 죽게 마련이다, 그런 진술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전 글에서도 좀 설명했듯이 환란 성도들은 불멸불사의 몸이 아닌 당장은 아담의 속성을 가진 옛 몸을 가지고 부활하여 천년왕국 기간 동안은 그 상태로 살게 된다라는 이야기를 여기서 좀더 해야 되겠다.
거기에는 날 수로 되는 아기도, 자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한 노인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니 이는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요 백 세가 된 죄인은 저주를 받은 것이 될 것임이라(사 65:20).
천년왕국은 죽음이 허용되는 나라이며 그때는 사람들의 수명이 노아의 홍수 이전처럼 엄청나게 길어지지만 그래도 죽음을 겪는 사람들은 여전히 나오며 노화라는 과정도 존재한다. 그래서 "아기"도 있고 "노인"도 있으며 그 당시에 범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아 백 세에 죽는 것이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야 백 세를 살았다고 하면 나이가 꽉 차서 죽는 것이지만 천년왕국 때는 기본적으로 그 백성들이 나무의 수명처럼 천 년을 살기 때문에 혹자가 백 세에 죽으면 일반적 인간 수명의 1/10만 채우고 죽는 것이 되고 그런 죽음은 저주를 받았다 간주되는 것이다.
물론 사 65:20에서 백 세가 되어 죽는 죄인은 범죄를 저질러서 저주를 받았지만 먼저 언급된 "자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한"이라는 부분에서 역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 수명을 채우고 죽기도 한다라는 말이다.
노화와 자연사라는 형태로 육체적 죽음을 경험할 여지는 천년왕국 백성, 그리고 환란시대에 구원을 받은 환란성도들(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있어 열려 있는 가능성인 것이다. 그래서 계 2:11은 "둘째 사망"에 대해 특정하여 말씀하고 있지 육체적 죽음은 건너 뛴 것이다.
즉, 저 구절의 "이기는 자"는 첫째 죽음의 해를 당할 수 있지만 둘째 사망의 해는 결코 받지 않는다, 즉 이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가 그렇듯이 그들도 천년왕국에 살 동안 <궁극적인 구원의 보장>만큼은 갖고 산다는 얘기다.
우리가 자신에 차 있으니 정녕 몸에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오히려 더 원하노라(고후 5:8).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주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라(살전 5:10).
우리는 <육체적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현 상태에서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주님이 7년 환란 전에 오시는 그 휴거를 우리 생애 중에 행하시면 살아서 하늘로 갈 것이요, 그것이 지체되면 우리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먼저 혼이 가서 부활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요, 그렇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공중에서 주와 만나는 그 순간부터 몸의 사망과 관련이 없는 진정한 해방을 맞게 된다. 그러나 대환란 때 구원을 받아서 이런 저런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목베임 당하여 순교하고 지상재림 전에 다시 부활해서 천년왕국에 들어간, 그래서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어 통치하는 그 성도들, 그 사람들은 육체적 죽음을 한 번 더 겪어야 되는 상태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적어도 천년왕국 동안은 그렇게 지내야 하고 영원 시대에 가면 생명 나무를 통해서 완전히 사망이 떠나가게 된다.
여기서 필자가 한 단계 더 나아간 심도 있는 해석을 제시할 것인데 이것은 곡과 마곡의 반란의 이유에 대한 나름 합리적 추론이기도 하다. 이것은 입증이 된 교리까지는 아니고 추론이기 때문에 그 점을 명기하고 이야기한다.
자기가 지은 곳에 다른 사람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아니하리라. 이는 내 백성의 수명이 나무의 수명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들의 손으로 일한 것을 오래 즐길 것임이라(사 65:22).
천년왕국 동안 유대인들은 민족적으로 사 65:22의 케이스에 들어가서 "나무의 수명"을 누릴 것이고 즉 그들은 약 천 년 정도 수명을 유지할 것이다. "한 세대"가 실질적으로 천 년으로 계수되는 것이다. 천년왕국의 법령에 복종하고 만왕의 왕이 되실 예수님의 말을 잘 듣는 이방 민족들 중의 신실한 자들도 약 천 년 정도 살 것이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통치하면서도 늙지도 죽지도 않기 때문에 계속 같은 스탠스를 유지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왜 반란이 일어나는지를. 천 년 동안 살았던 그 신실한 자들의 세대가 끝나고 <세대 교체>가 일어나는 시점이 도래하는데 하필 그때 또 사탄이 구렁에서 올라와서 거의 다 자연사하고 퇴장한 구세대 대신 세상의 주역으로 등장했을 천년왕국의 신세대들을 무차별로 미혹하여 반란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배교하는 과정도 항상 신실했던 구세대가 퇴진하면서 그들의 신실함을 배우지 못한 후세대들이 각종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연루되면서 일어났던 것을 보면 천년왕국 때에도 그것이 동일하게 발생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수명이 천년왕국 때는 무지막지하게 길어지기 때문에 최소 천 년 동안은 신실한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그들이 자연사하면 곧 사탄의 반역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편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라, 그들은 주를 알지 못하더라(삼상 2:12).
우리 교회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모형들을 많이 보여주시는데 그게 무엇인가, 신실하고 헌신적인 목사, 선교사들이 그들의 사역을 자녀에게 계승해 줄 경우 그것이 어떻게 타락, 배교, 붕괴되는지 보면 된다. 하여튼 신실한 아버지 목사 밑에서 신실한 아들 목사가 동일하게 배출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대부분 보면 아버지가 신실할지라도 아들은 아버지보다 신앙이 떨어지게 마련이고 심지어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이런 문제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단순히 그 자녀가 나쁜 친구와 어울렸거나 교육을 잘못 받아서 그렇다 생각하면 여러분은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 아무리 최상의 교육을 잘 시켜도 그런 황당한 일은 무작위로 발생하는데, 아버지가 아주 신실한 목사로서 자녀에게 최상의 신앙을 전수해준다 할지라도 그 자녀가 마귀의 자식이 되어 버리는 돌발 변수는 통제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자식이 옳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신앙 교육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얘기다. 인간이 이런 구제불능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은 그의 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씨 안에는 '죄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죄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육체를 이기는 믿음의 훈련을 시키고 신앙인으로서 육체를 다스리고 잘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죄성을 가진 몸으로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도 생각 한 번 삐끗 잘못하면 가증한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태어난 자가 의로워질 수 있겠느냐?(욥 15:14).
한 씨가 그를 섬길 것이요, 그것이 주께 한 세대로 여겨지리라(시 22:30).
시 22:30은 매우 중요한 천년왕국 관련 구절인데 왜 그런지 보라. "한 씨"는 곧 "한 세대"인데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세대, 곧 시편의 70-80년(시 90:10)이라는 그 개념이다. 우리 시대에는 한 세대가 70~80년인데 천년왕국 때는 어떻게 바뀌어진다고 내가 위에서 말했던가? 한 세대가 물경 1천년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년왕국에 입성한 그 초창기 세대는 주께 천년을 아우르는 "한 세대"로 여겨지며 우리 시대 기준으로 환산할 때 1천년이라는 기간 동안 인간들의 세대 교체가 10번은 되어야 하겠지만 주께는 그것이 고작 "한 세대" 인 것이다.
이제 앞으로 계시록 20장 이후를 이야기할 때 더 세밀하게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제 여러분은 왜 천년왕국이라는 기간이 영원시대와 분리되어 따로 설정된 채로 성경에 제시되는지 뭔가 감이 잡히기 시작할 것이다. 천년왕국은 "한 세대"로서 영원 시대의 무수한 "세대들"에 앞선 맛뵈기 시대인 것이다. 그들은 영원 시대에 펼쳐질 낙원을 천년왕국 때 먼저 맛뵈기로 경험하면서 마지막 주님의 테스트, 사탄의 반역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세대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한 세대 동안 그들을 시험해 보실 것인데 거기에 통과한 자들은 복받은 민족들이 되어서 영원 시대로 넘어가 더 이상 어떤 위험도 없는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살게 될 것이요, 시험에 넘어진 자들은 사탄과 함께 불못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에 인간들은 거의 천 년 동안 장수하면서 구원의 기회를 가졌었다.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면서 그들의 행각을 지켜보셨는데 결국 노아 홍수 이전 시대의 환경이라던지 그 당시 인간들의 지식과 지혜의 수준이 지금에 비할 때 월등히 좋고 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완벽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사탄이 설치한 미끼를 그대로 물어 버렸고 이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워서 홍수 심판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같은 일을 겪었으면서도 오늘날의 인간들은 "인간성은 신뢰할 만 하다" 라던지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 "휴머니즘은 고귀한 것" 따위의 반성경적 구호에 심취해 있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 없이는 완전한 구제불능의 쓰레기라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도덕과 교육,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서 인간을 신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 끈질긴 착각, 교만을 완전히 박살내시기 위해 인류 역사 7천년 동안 주님의 "빅 픽쳐"를 그려 놓으셨는데 즉 그것은 인간이란 역사에서 교훈을 못 얻는 우둔한 존재다, 몇 번이나 같은 일을 경험해도 경험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 참 어리석은 존재라는 사실을 교훈으로 주시기 위해 이처럼 노아의 홍수, 그리고 곡과 마곡의 반란 같은 사건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영원 시대, 곧 계 21장 이후의 시대에 들어서면 그때부터 세상은 영원한 평화가 오게 될텐데 이는 인간들이 진짜로 과거의 어리석음에서 교훈을 배울 것이고 더 이상 "휴머니즘" 따위의 너절한 철학 놀이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시간은 굉장히 심오한, 어떤 면에서는 초신자에게 상당히 어렵게 느껴질 만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러나 이것은 계시록을 제대로 공부하고자 하는 어떤 신자라도 건너뛰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진리였기에 여러분이 여기서 많은 유익을 얻게 되기를 바라며, 또 그렇게 될 것을 확신한다. 다음 시간에 12절부터 이어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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