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눈에 보이는 것 같이 아주 분명한데 너무도 쉽게 율법을 행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에 넘어간 것을 안타까워하며 책망하는 것입니다(1). 바울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을 다행하고 나서 인지 아니면 듣고 믿을 때인지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2).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괴로움을 받았는데, 이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고있습니다(3-4). 나아가 바울은 아브라함도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때문에 율법을 잘 지켜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과는 달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자들이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합니다(5-7). 하나님은 육체적 아브라함의 자손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했습니다(8). 때문에 믿음을 가진 자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율법은 의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 아래에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모든 것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10). 아무도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라도 어기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율법을 다 지켜서 “하나님 저를 의롭다고 해 주십시오”라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율법은 오히려 죄 아래 있게 만듭니다. 이런 율법의 속박과 저주에 우리를 건져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율법을 다 지키신 예수님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대신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13-14).
사람이 약속을 맺고 공증하면 그 이후에는 변경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사백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더하거나 뺄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그 씨’로 말미암아 이방 나라에 전파될 것이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 씨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비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을 받게 됩니다(15-18).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거짓 형제’들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언약이 중보자를 필요로 하는 율법보다 더 탁월한 것임을 강조합니다(19). 율법의 기능과 효력은 약속하신 “씨,” 혹은 “자손”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 까지라고 밝힙니다. 율법은 ‘범법함으로 더해진’ 것입니다(19). 즉 율법 이전에 사람이 규범으로 삼고 살았던 그 무엇인가가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은혜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나란히 놓이게 된 것으로 더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일 살릴 능력이 있는 율법이 주어졌다면, 참으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20-23). 율법은 은혜와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24). 만약 율법이 없었다면 모두가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해서 사람이 죄의 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초등교사’는 고대 로마시대에 있었던 가정 교사 노예인데, 부모가 자녀를 훈육하는 권한을 주어서 노예이지만 그 집의 자녀를 때로는 회초리로 때릴 수 있는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장성해지면 그 교사 노예는 그 아이에게 더이상 권한이 없고, 오히려 그 아이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믿음과 율법의 관계가 꼭 이렇습니다. 율법은 노예 교사(초등교사)로서 우리의 마음에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때로는 가책을 느끼게 하면서 우리가 죄인을 것을 깨닫게 하여 우리 안에는 의롭게 될 만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하여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 후에는 율법의 속박 안에 있지 않고 율법을 지배합니다. 지배한다는 것은 율법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갈라디아 교회는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이 믿음은 차별이 없이 믿는 모든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예수님께 속하게 하고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도록 합니다. 바울은 이런 논증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율법을 지켜야만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에게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잊지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자체만 생각하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지 잊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율법을 완전히 다 지키지 못함으로 저주를 받아야 할 우리의 자리와 모든 율법을 다 지킨 예수님의 자리가 십자가에서 바뀌었음을 기억합시다. 또 믿음으로 우리 마음에 계신 성령께 순종하고 감사함으로 율법을 지키며 바르게 사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아멘.
첫댓글 아멘...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