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궁타령이 있다고 한다.잘은 모르겠는데 아주 그 고된 일때문에 생긴 노래라는데 인터넷 보면 나오겠지.고종1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마자 시작한 일이 바로 임진왜란(만력의란)으로 인해 불탄 정궁(正宮)을 다시 세워 왕권을 강화하겠다고 하여 당백전등을 남발하여 흥선군 실각에 가장 큰 단초였다고 평가받는 그 경복궁을 바라다 보는데 버스 한번 타고 한정거장만 지나면 바로 끝인게 경복궁이다.이런거 지었다고 나라살림을 거덜냈다고 하는 말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일제에 의해 많은 전각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터자체가 서울 경복궁은 크질 않다.아마 세계어디에서도 이렇게 작은 왕궁은 그리 많지 않다.심지어 아프리카 토후국 왕궁도 경복궁 정도는 한다.
세계어디에서도 -이말을 계속 쓸 수밖에 없다-이처럼 친서민적으로 담을 야트막하게 지은 왕궁은 어디에도 없다. 아프리카 토후 왕국에서나 담이 없다.
경복궁을 평가하는 말중에.자연그대로 산세의 흐름에 맞추어 이렇게 담을 쌓은 왕궁은 그 어디에도 없다라고 몇년전에 신문기사에서도 본적이 있다.언듯 들으면 참 조상의 지혜가 어떻다면서 감탄해 마지않겠지만 말을 바꾸면 그 얘기는 곧 그곳은 왕궁이 아니라는 얘기다.
일제시대 기사에서도 나타나는데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등 서울의 궁이라고 지칭하는 곳의 특징을 묘사한 글에서 19세기 서울경복궁옆에다가 집을 짓는데 바짝 바특하게 담옆에 지어서 그것에 의지해 집을 지은 것이 많았다고 표현했다.참 그 왕실 자비심이 부처님이다.세상 어디에 왕궁의 벽에 집을 짓는 것을 허용하는 왕실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왕실은 지엄한 곳이다.배가 고픈 서민들이 저곳에는 왕이 사는 곳인데 저따위 돌담만 넘으면 곡식이 가득하다.배가 골아 죽겠는데 저 담을 넘고 설령 죽더라도 먹고 죽는게 낫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야트막한 담이 서울의 궁이 같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 왕이 사는 곳이었다면 어림반푼어치도 없다.
경복궁등 서울의 궁은 일제시대때 만든 기존의 전각등을 합쳐서 만든 그리고 비용이 적게 드는 돌담을 대충 이어 만든 헐리우드 세트임을 잊지 말자.
성곽설립비용이 제일 비싸다는 점을 인식하자.건축물은 거의 대부분 나무이기때문에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든다.한반도 일본렬도에서 수많은 목수들을 불러다가 돈주고 만들면 그만이다.
그들은 결코 성곽을 만들정도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를 튼튼한 돌로 지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헐리우드 세트 성곽과 조선총독부의 튼튼한 화강암과 비싼 대리석 건물 중 당신이 만약 일본천황이거나 총독이었다면 한정된 자원과 돈을 가지고 있다면 어디에 우선순위를 둬야 될까?
그리고 서울시청건물도 튼튼하게 돌로 만든 일제였다.
경복궁 헐리우드세트는 대충만들고 조선총독부와 서울시청건물에 더 투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에서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인해 없어져서 다시 중건하는 것이라면 전쟁에 대비해 먼저 성곽부터 쌓는것이 일의 순리 아닌가?
더군다나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경복궁중건부터 시작했다.그런데 왕권의 상징과 같은 즉 백성들에게 권위를 내세울려면 자연스럽게 왕궁을 성곽으로 둘러쌓야 한다.근데 서울의 경복궁은?
서안고성을 지을려고 그렇게 당백전을 남발하고 국가재정을 파탄낸것이지 결코 저런 전각 몇채때문에 나라살림을 거덜낸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서안의 성곽은 철저히 전투에 대비해 지은 성이다.성곽의 높이뿐만이 아니라 두께도 상당하다.그래야만이 대포에 견딜수 있기 때문이다.
PS.그럼 북경의 자금성은 뭐냐고 할 것이다.자금성은 청조의 왕궁이 맞다.청조는 내몽골 몽골일대 호화호특지역 오이라트지역등을 다스린 왕조이다.옛 명조의 땅이었던 사천성일대도 그들의 영향력이었지만 결코 대륙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한 왕조이다.
그들은 대련항구에서 가까운 지역인 북평일대에 북경을 설치하고 서양과의 교역도 활발했던 왕조이다.
마테오리치등의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던 교역국가였다.청조의 누루하치가 홍이포로 인해 부상을 당해 죽은 사실때문에 홍타이치등 후대 왕들은 적극적으로 서구와의 교역을 중시했다.그 서구의 대부분은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 영국등의 해양교역국이었고 대대로 청조가 설립된 이후 황제의 대관식에 서구양이들이 그들의 옷을 입고 참석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대륙조선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듯이 중국의 왕으로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조선의 왕이고 황제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25사를 개작하면서 홍무제와 리성계를 같은 시대 사람으로 알고 있다.
주원장의 업적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 리성계가 한일이고 명조의 대원정시대를 이끈 영락제는 리방원의 업적을 가로채서 명나라의 업적으로 둔갑을 시킨것이고 임진왜란의 만력제 신종은 조선의 선조와 동일 인물임을 상기하자.
강희자전 또한 강희제 청조의 오랑캐왕이 만든것이 아닌 조선의 동시대 인물 인 현종의 년호가 강희였음을 우리는 안다.
강희자전 은 곧 효종의 아들인 현종대왕의 지시로 인해 만든 백과사전임을 알아야 한다.
어쩜 이렇게 명청조의 왕과 조선의 왕의 제위기간이 얼추 맞는지 의심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조선의 황제의 행적과 일치시키기 위해 손문의 신중국파들이 이런 짓을 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 8인의 결사단에서 손문을 지키기위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라고 장엄하게 묘사했지만 사실 그는 반역자이다.삼민주의를 외쳤지만 그의 릉인 중산릉을 보면 그도 결국 황제처럼 거대한 분묘를 세웠고 그 자신이 황제가 될려고 했던 인물이었고 그의 후계자인 장개석도 사실 손문의 후사가 미미하여 어쩔수 없이 더군다나 갑자기 후사문제 후계자 문제를 거론할 시간적 여유가 없이 손문이 타계했기에 국민당 정부는 큰 돈을 들여 중산릉을 건설하고 그를 황제처럼 모셨다.
그리고 시대착오적으로 장개석은 자신도 황제가될려고 했다가 그렇게 봉건황제처럼 군림할려고 하다가 중국공산당의 차별화전략에 말려 결국 대만으로 쫒겨났고 모택동도 황제처럼 군림하고 살다가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황제권을 강화할려고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것이다.그와중에 대륙의 조선사는 반도로 축소되는 결정타를 맞았던 것이고.
첫댓글 http://durl.me/8v46j 대조선은 대륙에 있었다 . 대륙의 중원. 중국이 현 중공이 아니라 지구의 한복판 중앙아시아인것이다.
경복궁타령(景福宮打令)은 경기도 민요의 일종이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무렵에 생긴 민요이며, 그에 대한 원망을 풍자적으로 나타낸 노래다. 장단은 자진타령 장단이며, 5음계 구성으로 도로 마친다. 선율형은 난봉가 계통 민요와 비슷하며, 매우 구성지고 씩씩한 민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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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남문을 열고 파루(罷漏)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
(후렴) 에 에헤이에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2절) 을축사월 갑자일에 경복궁을 이룩하세.
(3절) 도변수(都邊手)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고서 갈팡질팡한다.
(4절) 단산봉황(丹山鳳凰)은 죽실(竹實)을 물고 벽오동 속으로 넘나든다.
(5절) 남산하고 십이봉에 오작(烏鵲) 한 쌍이 훨훨 날아든다.
(6절) 왜철쭉 진달화 노간죽하니 맨드라미 봉선화가 영산홍이로다.
‘대장금 무대’ 경복궁 수라간 복원된다
‘대장금 무대’ 경복궁 수라간 복원(=捏造,造作))된다
2011/02/16 09:56:36 헤럴드경제
http://durl.me/c5f9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