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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원문보기 글쓴이: boaskorea
일방적 이스라엘지지가 하나님의 뜻? 2. 이스라엘은 왜 인종주의 군사국가가 되었나?
이인엽
https://blog.naver.com/inyeop2/30152339629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은 아직도 ‘인종주의’에 기반한 국가로 존재해 왔고, 팔레스타인에 ‘준 식민주의 점령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21세기의 특수국가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인데, 첫번째로는 이스라엘의 국내적 요소–유대인의 역사와 이스라엘 건국과정 및 국내정치-이고, 두번째로는 국제적인 요소-미국과의 특수관계, 특히 미국 내 막강한 유대인 로비와 근본주의 보수기독교의 신학적 합리화를 통한 미국의 일방적 친이스라엘 정책입니다. 지난번 글에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를 요약했다면, 이번 글에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건국과정을 살펴보면서, 인종주의 군사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의 경험
로마제국에의해 전세계로 흩어진 후 유대인의 역사는 디아스포라와 반유대주의에 따른 핍박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전에도 반유대주의는 수세기동안 존재해 왔는데,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유대인들은 언제나 미움의 대상이나 의심의 대상으로 핍박을 당해 왔습니다. 예수를 살해한 자들로 미움을 받은 유대인들은, 십자군 전쟁때도 엄청난 학살을 당했고, 기독교로 개종을 거부해서 처형되거나 추방되기도 했고, 전염병이 돌면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탔다는 소문이나, 이들이 기독교이 어린이들을 잡아다가 피를 뽑아 마신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중세에는 돈놀이, 즉 금융업을 죄악시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금융업에 많이 종사 했는데, ‘베니스의 상인’ 같은 작품에서 보듯이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런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고, 또한 그렇게 재산을 모은 유대인 금융 세력들이 국제관계의 이면에서 전쟁을 부추겨 돈을 버는 세력이라는 주장도 존재해 왔습니다. 로스차일드 같은 유대계 금융세력의 파워에 대한 주장은 음모론의 단골소재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세계역사나 현재 미국의 월스트리트의 현실등을 보면 세계 금융에 대한 유태인들의 막강한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1차대전과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은 유럽인들사이에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를 더욱 부추겼는데, 그로 인해 희생된 유대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지요. 유럽 곳곳에서 진행되던 반유대주의는 1894년 프랑스에서 유대계 장교인 드레퓌스를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아서 논란이 되었던 유명한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잘 볼수 있는데, 이를 취재한 유대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결국 유대국가의 수립만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해 시오니스트의 선구자가 됩니다. 헤르츨의 주도아래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총회가 열렸는데, “조국 시온의 언덕으로 돌아가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는 바젤 선언이 채택되었고, 당시 헤르첼은 늦어도 50년 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유대국가를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신기하게도 정확히 50년이 지난 1948년 11월 이스라엘이 건국됩니다.
개인적으로도 독일 여행을 갔을때, 다카우(Dachau)에 있는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방문했었고, 워싱턴D.C.에서도 홀로코스트박물관을 방문해서 억울하게 죽어간 유대인들을 애도한 경험이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정책을 논하기 전에,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이 겪은 고난을 아파하고, 특히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게 가한 처절한 악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에게 행한 악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도 듭니다.
한편 홀로코스트나 반유대주의를 생각하며 유대인들의 건국이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은 이해는 되지만, 현재의 근본주의 기독인들이 보듯이 이스라엘은 무엇을 하든지 옳고, 팔레스타인 인들은 아무 권리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모든 혐의를 씌어 일방적으로 핍박하던 과거 유럽 기독교의 모습과 또 다른, 반대 극단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인들은 중세에는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박멸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지지하는 일종의 반대극단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구약 성경을 민족주의 국가주의로 읽는 것은 오독이라는 것을 앞에서도 여러번 말씀 드렸고, 특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며, 팔레스타인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원칙은 인종주의가 아닌 평화와 화해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더 기억할 점은, 지금은 유대-아랍간의 갈등이 심각한 사실이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유대인들을 핍박한 것은 아랍인들이 아니라, 중세시대에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이었고 근대에는 역시 유럽의 나치와 인종주의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세의 무슬림들은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폈고, 팔레스타인에서도 이스라엘 건국 초까지만 해도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이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헌팅턴의 문명충돌론 류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은 절대 공존이 불가능한것 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아랍-이스라엘 갈등은 적어도 이스라엘의 건국과 중동전쟁, 팔레스타인 점령 이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잘 아시다시피,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서 정점을 이루어 600만의 유대인들이 인종청소를 당하게 되고, 유대인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극도의 피해의식과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정신에 강력한 일종의 DNA를 형성하는데, 그것은 ‘종족의 말살에 대한 극도의 공포’와 ‘안보에 대한 강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타인에게서 극도의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 중,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더 민감하고 성숙한 인간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일부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고통에만 집착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쉽게 남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의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정책은 후자와 가까운 모습을 더 보이는 것 같습니다.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고 안전을 보장받고 싶은 열망은 이해가 가지만, 문제는 그것이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억압과 핍박위에 진행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결국, 나의 ‘안전’이 너의 ‘생존’이나 ‘기본권’보다도 더 중요하고, 내 안전을 위해서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극도의 자기중심성으로 밖에 이해하기 힘듭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몇년간 거주하며 평화활동가로 활동했던 한 친구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나치에게 핍박받은 자신들의 경험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즉, 나치로 부터 극도의 인종차별과 종족말살의 위기를 경험한 이스라엘이, 역시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인 시오니즘을 형성했고, 그에 따라 타인종이자 스스로의 생존과 안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을 무자비 하게 다루고 핍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논리이지요. 집에서 부모에게 학대를 받은 아이가, 학교에 와서 자기 보다 약한 아이를 유사한 방법으로 학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괴물과 싸우면서 닮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니체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역학관계는 시오니즘과 이스라엘 건국과정을 보면 좀더 자세히 관찰 할 수 있습니다.
2.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의 건국과정
(참고로 이 부분은 랄프 쇤만의 저서 ‘잔인한 이스라엘(The Hidden History of Zionism, 2002)’을 주로 인용했습니다.)
먼저 시오니즘의 선구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오니스트의 대부로 불리는 테오도르 헤르츨은 1904년 앞으로 세워질 유대인 국가의 모습을 “(아랍이나 아시아의) 야만성으로부터 문명을 지키는 전방요새”라고 묘사해 그 인종주의적 성격을 드러냈고,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시오니즘 운동의 목표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 영토는 구체적으로, 레바논과 요르단 전체, 시리아 2/3, 이라크 절반, 투르크 일부, 쿠웨이트 절반, 사우디 아라비아 1/3, 포트 사이드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카이로를 포함한 시나이 반도와 이집트 1/3을 포함하는 영토인데, 1947년 랍비 피쉬만은 역시 약속의 땅은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의 일부를 포함한다고 하며 헤르츨의 주장을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랄프 쇤만, p.97)
시오니즘의 이데올로기적 선구자 블라디미르 야보틴스키는 1923년 시오니즘 운동의 교과서가 되는 “강철벽(The Iron Wall)”이라는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우리와 아랍 민족 사이에는 현재나 가까운 미래에 자발적인 화해를 위한 어떤 토론도 있을 수 없다. […] 왜냐하면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아랍민족의 국가에서 유태인이 다수로서 지배하는 국가로 바꾸려고 하기 때문이다. […] 원주민의 동의를 얻어 한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 사례를 단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가? […] 식민지화는 팔레스타인 아랍 민중의 의지에 반해 진행되어 왔고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모든 식민지화 과정은, 그것이 아무리 제한된 형태라 하더라도, 원주민들의 도전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식민지화는 강철벽을 포함한 무력의 호위속에서 진행되고 발전될 수밖에 없다. 강철벽은 원주민들이 결코 돌파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대아랍정책이다.” (랄프 쇤만, p.32)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야보틴스키의 ‘강철’이라는 주제와 표현은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로부터 영감을 받은 사상이라는 점입니다.
싸우다가 닮는다는 말처럼, 시오니즘은 파시즘의 인종주의로 부터 핍박받은 유대인에게서 생겨난 사상이지만, 극도의 인종주의로 부터 생겨난 또 하나의 인종주의라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시오니즘 운동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주의 식민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리투아니아 출신의 많은 유태인들이 남아공에 정착하기도 했는데, 헤임 바이즈만과 헤르츨 같은 시오니스트들은 남아공의 인종주의적 식민주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두 운동사이의 실질적 협약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1934년에 남아공의 주요 집단과 이스라엘은 공동투자회사를 설립했고, 54년간 이 회사는 팔레스타인 토지를 사들이는 등 합작 활동을 했습니다. (랄프 쇤만, p.30)
더 믿기 힘든 사실로, 홀로코스트와 반유태주의가 진행될 때, 시오니즘의 지도자들이 적극적인 유태인들의 구출 노력에 반대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무차별적 구출은 유능한 인력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리고 와서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1943년 말, 유럽인 수백만 명이 학살되고 있을 때 미국에서 시오니즘의 주요 대변자로 활동하던 랍비 스테픈 와이즈는 유대인 구조 법안에 반대하는 증언을 했는데, 구조 법안이 팔레스타인의 식민지화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또한 벨포어 선언을 주도한 시오니즘 지도자이자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헤임 바이즈만(Haim Weizmann)은 “‘당신은 6백만 유태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자신은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며, 개인은 냉혹한 세계의 먼지에 불과하기에 자신의 운명을 감내해야 하고,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해 젊은이들과 유능한 인물들을 구출하길 원한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부다페스트의 유태인 구조위원회의 루돌프 카스트너 박사는 1944년에 나치인 아돌프 아이히만과 헝가리의 유태인 문제 해결을 위한 비밀협약을 맺었고 600명의 저명한 유태인을 살려주는 대신 80만 유태인의 학살에 침묵하기로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렇게 볼 때, 시오니스트들은 자신의 동족의 구출보다도 시오니즘에 기반한 유대인 국가 건설과 정치권력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있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과거 PLO나 현재의 하마스를 테러집단으로 비난하고 평화협상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시오니스트들이,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는 테러리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지도자들중 상당수는 건국 이전에 테러리스트로 활동했었는데, 예를 들어 이스라엘 6대 총리가 되는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은 건국 이전에 유대 테러집단 ‘이르군’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영국 총독부가 1939년 부터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제한하자, 1946년 영국 총독부와 헌병 사령부 등이 있었던 예루살렘의 다윗왕(King David) 호텔을 폭파해 91명이 사망하는 유명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역시 이스라엘의 7대 총리였던 이츠하크 샤미르(Yitzhak Shamir)는 1940년까지 이르군에 참여했다가 영국 당국에게 체포와 탈출을 거듭하던 중, 1943년 ‘레히’라는 조직의 지도자로 활동하는데, 당시 UN의 중재자로 팔레스타인문제에 개입하고 있었던 스웨덴의 외교관 폴케 베르나도테(Folke Bernadotte) 백작이 자신과 같은 극우 시오니스트들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가 타고 있던 UN 차량을 공격해 암살하는 등, 여러 암살 사건에 관여하였습니다. (참고로 베르나도테 백작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중재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던 유명한 외교관이었고, 노벨평화상 수상까지 거론되던 인물이었지요. 실제로 그의 참모였고, 후임자가 된 랄프 번치는 195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샤미르는 후에 이스라엘 첩보기관인 모사드에 들어갔다가 1983년부터 1984년까지, 또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이스라엘의 제7대 총리를 지냈습니다. 이러한 시오니스트 극우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면 동족들에게도 테러와 암살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시오니스트들의 과거를 생각해 볼때, 사실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이 테러를 일삼고 있다고 비난하며 협상을 거부하고, 전면적 공격을 퍼붓는 것은 모순성이 있습니다. 시오니스트들의 초기 지도자들의 테러전술을 국가 수립을 위한 필요악으로 합리화 한다면, 그보다 더 극심한 점령과 식민통치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저항폭력을 단순한 테러리즘으로만 보면서 협상을 반대하는 명분으로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유엔이 영토를 분할한 1947년 직전까지 팔레스타인 영토가 87.5%, 유대인들은 6.6%에 불과했으나, 유엔은 팔레스타인의 약 56%를 유대 국가에, 약 43%를 아랍 국가에 할당하라고 결정하고 팔레스타인은 이에 반발합니다. 그러자 ‘이르군’과 ‘하가나’ 같은 시온주의 민병대들은, 아랍인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일부 유대인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영국의 암묵적 지지하에 팔레스타인인들을 추방하기 위한 테러를 시작합니다. 특히 1948년 3월 부터는 'D계획(Plan Dalet, 공식 명칭은 여호수아 계획)‘으로 불리는 보다 조직적인 작전에 따라 팔레스타인들을 학살하고 추방시키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1948년 4월9일 데이르야신(디야신)에서는 254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을 무차별 학살해, 이르군의 지도자인 베긴이 자랑스럽게 말했듯이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르군’이라는 말만 들어도 공포에 질리게 되었고, 이는 엄청난 피난행렬로 이어져 약75만 명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학살이, 극도의 공포심을 일으켜 팔레스타인을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초대 수상이었던 벤 구리온(Ben Gurion)과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책임지고 있던 유대 식민지개척부의 책임자 요세프 바이츠(Joseph Weitz)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벤구리온은 1936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할된 유태 국가는 마지막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과 주변 국가에 우리가 정착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이야기 했으며 1938년 6월에는“나는 (팔레스타인 인들의) 강제 이송을 지지한다. 그것은 전혀 부도덕하다고 보지 않는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1938년 연설에서는 “시오니즘 열망의 한계는 남부 레바논과 남부 시리아, 현재의 요르단과 시스-요르단 전역, 그리고 시나이 반도를 포함한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요세프 바이츠의 1940년 12월 20일 일기를 보면 팔레스타인인들을 내어쫓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는 두 민족이 이 나라에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 작은 나라에 아랍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아랍 주민들을 모두 이웃 국가들로 이주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마을 하나, 부족 하나도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라고 언급했습니다. (랄프 쇤만, p.48)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영국군이 철수하자 시오니스트들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하는데, 이는 팔레스타인들에게 ‘알-나크바(Al-Nakba)’, 즉, 대재앙의 날로 기억됩니다. 다음 날인 5월 15일, 미국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곧바로 승인하는데, 이에 맞서 팔레스타인은10월 1일 1차 팔레스타인 민족회의에서 국가를 선포하지만 국제사회는 이를 철저히 무시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야보틴스키의 ‘강철벽’의 사상을 비롯한 시오니스트들의 정신은 건국이후 구체적인 이스라엘의 정책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었던 이츠하크 라빈은 인물은 ‘강철벽’의 사상을 이어받아 1967년 전쟁의 작전을 ‘철의 의지’라고 명명했고, 1975, 76년에는 웨스트뱅크(서안)에 ‘철의 손’이라는 정책을 공포했는데 그 결과 30만명 이상이 투옥되고 제도화된 고문에 시달렸습니다. 라빈에게서 참모총장 자리를 이은 라파엘 에이탄은 웨스트 뱅크에 ‘철의 팔’이라는 정책을 시행해 억압수단에 암살을 추가하고, 1987년과 88년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시에 다시 국방장관이 된 라빈의 정책은 ‘철의 주먹’으로 철저한 억압과 집단적 처벌정책을 추진합니다. 그리고 1982년 레바논 침공에서 난민촌을 쓸어버리는 군사작전은 ‘철의 뇌’라고 명명됩니다. (랄프 쇤만, p.36)
1954~55년 이스라엘 2대 총리를 지냈고 48년에서 56년까지 유태인 정치국의 책임자와 외무부 장관을 지낸 모세 샤레트(Moshe Sharett)는 자신의 일기를 출판했는데, 이스라엘의 군사적 도발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세계 구석구석으로 분산시킴으로써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아랍 세계를 분할하고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분쇄하며 이스라엘의 지역적 패권아래 괴뢰 정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랄프 쇤만, p.48)
1984년 이스라엘 노동당은 이스라엘의 유력 일간지 두곳에 전면 정책광고를 실었는데, ‘네가지 아니오’에 초첨을 맞춘 이 광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팔레스타인 국가는 인정할 수 없다. 2.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는 어떤 협상도 없다. 3. 1967년 국경으로 돌아갈 수 없다. 4. 어떤 정착지도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1985년 노동당 출신의 헤임 헤르조그 대통령은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신성한 영토였던 이 땅을 결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유태인은 이 땅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랄프 쇤만, p. 180)
3. 공존의 기억이 말살된 인종주의적 군사국가 건설
이러한 시오니스트들이 주도해서 건국된 이스라엘은 인종주의적 사상과 군사주의에 기반해서 건설됩니다. 이는 박노자 교수의 글, 유대인, ‘유대인을 말살하다’에 잘 나타나 있는데 (박노자 교수 글. 하얀가면의 제국이라는 단행본으로도 출판되었음.), 그는 팔레스타인 인들에 대한 학살과 추방 뿐 아니라, 유대인 사회 내부에서도 ‘단일성’의 신화를 바탕으로 억압, 배제, 차별의 구조를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박노자 교수에 따르면, 유럽의 독일을 중심으로 거주했던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들은 독일어를 골간으로 하는 이디시(Yiddish)어를 썼는데, 특히 유대인 진보세력들은 이 이디시를 공식언어로 사용했고, 진보적 국제주의와 반전(反戰)의 전통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시오니스트들은 유대교의 사어(死語)인 히브리어를 다시 인위적으로 뜯어고쳐 현대화하고 ‘민족의 언어’로 설정한 후 이디시어 신문·잡지들의 발행이 금지되고, 이디시어 학교·극장 설립도 불허해, 1970년대까지만 해도 길거리에서 이디시어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욕설과 물리적인 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사회 상류·중류층을 이룬 아슈케나지들과 달리, 이슬람권 출신의 유대인인 ‘세파르디’(Sephardi)들에 대한 단일화 정책은 거의 인종주의적인 문화유산의 말살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시온주의에는 무관심한 반면에 천년 이상 같이 한 땅에서 살았던 아랍인들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졌던 이들의 일상 언어와 문화를 금지시키고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탄압하고 세뇌했다고 합니다. 아랍인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했던 이들의 역사 자체가, 시오니즘에 기초한 인종주의와 아랍에 대한 증오라는 이스라엘의 건국이념이 맞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는 ‘가장 악질적인 후진 분자’로 분류된 일부 종교적인 세파르디들로부터 갓난아이들을 빼앗아 유럽 출신의 시온주의자의에게 입양시키는 ‘2세 동화 작전’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거의 일본의 식민지 무단 정책이나, 북미에서의 인디언 말살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인종주의적 국가주의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건국한 우파 시오니스트들은, 유럽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 안에 존재했던 진보적, 국제주의적, 반전(反戰)적 전통, 그리고 이슬람권 출신의 세파르디 안에 존재했던 아랍인들과의 평화, 공존의 기억은 부정, 말살시키는 동시에, 국가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히브리어에 기반해, 시오니즘적 단일민족 사상만을 주입해, 3년간의 군복무를 주된 경험으로 공유하는 이스라엘의 2세들을 창조해 났다는 것이 박노자 교수의 주장입니다.
동시에 2차대전 과정에서 유대인내의 극우 시온주의자들을 견제할 중도나 진보세력이 거의 궤멸된 것도 현재의 이스라엘이 나타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분드(Bund)당 같은 급진 사민주의자들은 히틀러와 스탈린에 의해 상당수가 도살되었고 극우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과 전술에 반대가 되면 같은 유대인들에게도 테러나 살해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 형성된 이스라엘의 사회와 이념은, 현재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팔레스타인 정책이 어떻게 국내에서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아시다 시피 이스라엘은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어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동안 복무하도록 되어 있고 43-45세 되기 전까지 1년에 약 1개월 동안 예비군 훈련을 받는데 이러한 현실은, 한국의 군사독재정부하에서 팽배했던 군사문화하에서 처럼, 안보위협의 강조를 통해 내부의 반대의견이 묵살되는 분위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시도 때도 없이 테러공격과 교전, 전쟁작전이 수행되는 상황이라 이스라엘의 현 정책에 대한 반대가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인종적으로 국민의 75% 이상이 유대인이고 20%가 아랍인이며 그 외에 많은 소수민족이 있는데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은 없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여러면에서 차별이 존재합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의 동방유태인인 세파르딕은 주로 빈곤층을 형성하고 있고 아랍국가 출신 유태인들도 아랍인들과 비슷한 외모로 차별을 받고 있고, 이스라엘 사회는 독일, 폴란드계 유태인인 아슈케나지들이 지배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아랍인들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적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비해 열악한 조건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토지의 93%는 유태인 국가기금에 의해 관리되는데, 땅에 거주하거나 토지를 빌리거나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최소한 3대이상 어머니 쪽의 유태혈통을 증명해야 합니다. (랄프 쇤만, p.70) 명백한 인종차별 정책이지요. 사막을 개간해 옥토로 만들었다는 환상을 심어준 키부츠는 공동체적, 사회주의적 요소도 있고, 환상적인 성공의 예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 팔레스타인 점령지에 건설되었고 비유태인은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그 땅에 정착하기 위해서 수백 년 동안 농사를 지어 온 아랍 농민들은 "퇴거"되었고, 공동체주의적인 키부츠의 생활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열려있었다는 것이지요.
4. 근본주의 유대교의 영향
이스라엘의 강경정책 뒤에는 근본주의 유대교 사상과 이를 설파하는 근본주의 랍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82년5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레바논 전쟁이 일어나고 9월 16일 레바논의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서 단 사흘만에 절반이 부녀자와 어린이였던 3천여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무참히 학살당하는데, 일부 근본주의 랍비들은 이를 '전 세계에서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진정한 정화'라고 유대인들에게 설교했다는 충격적인 자료도 있습니다. 2008년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 당시에도 근본주의 랍비들의 군 정신교육이 문제가 되었는데, 한 이스라엘군 장교는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와의 인터뷰에서 "종군 랍비들이 이번 작전을 종교전쟁으로 몰고 갔다"고 말하며 랍비들이 “이 성스러운 땅의 정복을 방해하는 비유대교도들을 몰아내자”고 가르쳤음을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에 따르면 가자 전투에 참전한 한 익명의 이스라엘군 예비역 병장은 "훈련소에서 만난 랍비가 '이번 싸움은 빛의 자식들과 어둠의 자식들 간의 대결이요, 특정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주민 전체와 맞서는 전쟁'이라고 설교했다"고 했고, 적에게 절대로 자비를 베풀지 말 것을 조언한 랍비도 있었다고 합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최근 10~20년 사이에 민족주의적이고 극우주의 적인 세력이 군과 종군 랍비들에 대거 진출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결국 팔레스타인측 사망자 1381여명 중 민간인이 900여명(어린이 400여명)에 달할 정도로 무자비한 공격이 있었던 배후에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악마화한 근본주의 랍비들의 설교가 있었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이죠. (관련기사)
최근 팔레스타인 임산부 그림이 있고 “총 한발로 두명 사살”이라는 구호가 적혀있는 디자인의 티셔츠를 이스라엘 군인들이 주문한 것이 공개돼 파문이 일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사회학자인 오르나 사손 레비(Sasson Levy) 교수는 "이런 디자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한 적개심을 강화하거나 자극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며,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사람'이 아니라서 어떤 짓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늘고 있다"고 지적한 바도 있습니다.
(관련기사)
이스라엘 내부의 극우적 성향을 볼 수 있는 다른 예로, 2008년 마탄 빌나이 이스라엘 국방부 부장관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더 엄청난 ‘홀로코스트’를 안겨줄 수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고, 다른 예로 랍비인 이스라엘 로센은 "팔레스타인인은 남자, 여자, 아이를 불문하고 모두 죽여야 한다. 그들의 가축도 예외가 돼선 안된다"는 취지의 극단적인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으며, 사무엘 엘리야후라는 이름의 랍비는 지난 3월 예루살렘에 소재한 유대인 종교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해 학생 8명을 숨지게 한 팔레스타인인의 자식들을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극단적인 주장을하기도 했습니다. (관련기사)
이러한 유대교 근본주의는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공존을 옹호하는 지식인이나 인권단체, 타 종교인을 겨냥한 `백색테러'의 증가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2008년 9월25일 이스라엘경찰은 평화운동단체인 `피스나우(Peace Now)' 회원들을 살해하는 사람에게 100만 세켈(3억4천만원 상당)을 제공하겠다는 현상금 전단과 포스터를 발견해 회수했는데, 전단이 발견된 곳은 이날 새벽 예루살렘에서 테러범들이 투척한 사재 파이프 폭탄에 부상한 제브 스턴헬 히브리대 교수의 집 주변이었습니다. 홀 로코스트 생존자인 스턴헬 교수는 팔레스타인 내 식민마을인 유대인 정착촌의 건설에 반대해왔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공존을 촉구하는 글도 일간지에 수시로 기고해왔다는 점에서 극우 유대주의자들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5. 근본주의의 충돌과 공존
유명한 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에서 문명간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이슬람 문명과 그 인접 문명에서 가장 큰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면서, 간접적으로 이슬람이 국제분쟁의 원인인것으로 지목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타리크 알리라는 작가는 ‘근본주의의 충돌(The clash of fundamentalisms)’이라는 저서를 통해 헌팅턴을 비판했는데, 현재의 갈등은 이슬람과 비이슬람간의 갈등이 아닌 ‘근본주의 간의 충돌’로 봐야한다는 것이지요. 기독인들은 특히 이슬람을 악마화 하는 경향이 강한데, 사실 엄밀하게 봤을 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안에는 모두 근본주의 세력이 있고, 이들은 서로 갈등하는 동시에, 상당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을 선과 악의 갈등으로 이해하고 스스로를 선, 타자를 악으로 인식하며,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합리화 하고, 경전을 문자적이고 근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사회에 적용하고자 하며, 타자나 타 종교에 관용이 없고, 타자가 정복되거나 박멸될때까지 끝없는 투쟁을 주장하며,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반대하거나 종교가 정치를 지배해야 한다 주장 등, 아주 유사한 성향이 많지요. 위에서 살펴본 예들을 볼 때, 유대교 안에 존재하는 근본주의 세력이 오늘의 대 팔레스타인 강경정책을 낳았고, 이들의 극우적인 태도는 앞으로도 평화협상을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를 비판한 임지현 교수는 ‘적대적 공범자들’이라는 책을 썼는데, 사실 평화 협상을 바라지 않는 이스라엘의 강경파와, 테러전술을 쓰는 팔레스타인 내의 강경파는 현재와 같은 끝없는 갈등을 유지하는데 이익을 같이 한다는 의구심도 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 근본주의 세력을 지양하고 생명의 가치와 평화와 화해를 모색하고 기도해야 할 기독인들이, 유대교 근본주의에 기반한 인종주의적이고 극우적인 대 팔레스타인 정책을 일방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러한 기독인들의 신앙성격은 바로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결국 이스라엘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옳다라는, 성경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근거가 빈약한 현재 보수 기독교인들의 입장은 ‘근본주의’라는 코드를 통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이스라엘 사랑이 일종의 짝사랑이라는 것이죠. 이들은 ‘유대-기독교 전통 (Judao-Christian Tradition)’이라는 말을 끔찍히도 좋아하는데, 미국의 전통 문화는 이 ‘유대-기독교 전통’이라고 주장하며 이에 대치되는 문화와 사상, 주로 이슬람이나 공산주의를 미국에 대한 위협이나 악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한편이고 많은 것을 공유한다고 믿고 싶어하지요.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에게 물어보면, 보수기독인들이 왜 자기들 보다도 더 이스라엘문제에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고, 싫지는 않지만 재미있다는 묘한 웃음을 짓곤 합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유대교인들 안에는 아직도 천년이상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받아온 박해의 기억이 자리잡고 있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강렬한지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덧셈 기호도 다른 모양으로 바꿔서 사용할 정도입니다. 김종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회복’을 보면 이스라엘에 있는 메시야닉 쥬나 기독교 선교사들이 폭탄테러나 공공연한 위협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미국의 보수세력은 이스라엘이 중동의 유일한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웬만한 아랍 국가 못지 않게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사회이고 직간접적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같은 근본주의 보수기독교의 입장은 성경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너무나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파심이지만, 제가 이런 부분을 설명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보고 팔레스타인 갈등의 평화적 해결과 또한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도, 성경적 입장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어디를 봐도 단순히 이방인이기 때문에 죽여도 된다는 말씀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집트에 대한 심판이나 가나안에 대한 정복과정은, 그들이 저지른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고, 이스라엘도 동일한 죄를 범할때 하나님은 처절하게 심판하고 가나안에 살 권리를 박탈 당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혈연이 아닌 언약공동체였고, 혈연과 상관없이 이방인들도 믿음이 있으면 공동체로 들어올 수 있었고, 혈연적 유대인이라도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끊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이 편을 드신다는 주장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방인이자 이교도이므로, 모든 것을 잃고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거나 죽어도 상관없다라는 식의 근본주의 보수기독인들의 입장이, 어떻게 예수님의 가르침, 즉, 인종과 성별, 빈부귀천을 떠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모든 사람의 생명과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며, 만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조화될 수 있는지요? 다시 말하면, 그런 입장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유사한지, 아니면 인종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이교도들의 박해와 살해를 합리화 하는 극단주의 이슬람과 더 유사한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는, 아직 이스라엘의 존립과 안보에 대한 집착, 외부의 위협에 대한 공포가 지배적이긴 하지만, 이제 팔레스타인과의 갈등과 전쟁, 그리고 가자와 서안에 대한 점령상태가 끝없이 지속되고, 이스라엘의 정책으로 인한 희생자와 국제사회의 비난이 늘어가면서, 내부에서도 자성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이스라엘의 건국 동기와 현 팔레스타인 정책이 인종차별적이고 낡은 개념에 바탕한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국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압제자로 변하고 있구요.
6.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
물론 이스라엘의 정책이나 정치 지형이 단순한것 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도 현실을 직면할 수록,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압적 식민통치나 정착촌의 확대만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식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극우파와 근본주의자들의 주장과 안보논리에 의해, 평화 협상은 제한되거나 금새 깨어지고 강경정책이 힘을 얻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유명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총리임기: 1974~77, 1992~95)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의 영웅으로, 정계에 진출해 미국과의 철저한 동맹과 군사력 강화를 통한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추구합니다. 철저한 시오니즘의 전사였던 그도,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테러와 살인이 발생하자 결국 협상과 타협이 없이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92년 부터 PLO와의 대화를 통해 평화노선을 추진합니다. 1993년 빌 클린턴의 중재하에 아라파트와 오슬로 협정을 맺고 가지지구와 서안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고 그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물러날 것을 동의합니다. 그러자, 오랫만에 중동의 평화가 찾아오고 그는 1994년 아라파트, 그리고 당시 외무장관인 시몬페레즈와 함께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합니다. 1995년에는 요르단의 후세인1세 국왕과 평화협정을 통해 양국간의 전쟁상태를 끝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강경한 시오니스트들은 그를 ‘비겁자’라고 맹비난했고, 1995년 텔아비브의 중동평화회담 지지 연설 후, 라빈은 유대인 극우파 청년이 쏜 총에 살해됩니다. 그를 살해한 이갈 아미르라는 극우주의 유대인 청년은 라빈 살해 5년이후에도, 라빈을 암살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왜 진작 라빈을 죽이지 않았는가 후회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역시 전쟁영웅으로 유명한 아리엘 샤론 총리(임기 2001~06)는 국방장관이었던 1982년,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응징하겠다며 레바논을 침공해 한달만에 2만여명을 학살하고, 악명높은 사브라-샤틸라 난민촌에서의 학살을 방조해 83년 국방장관직을 사임하기도 했으며, 이후 건설장관 시절에는 가자지구와 서안에 200여개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밀어부쳐 팔레스타인 문제를 악화시킨 바가 있습니다. 그러던 그도 끝없는 분쟁과 갈등 앞에서 일종의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자지구에서나마 정착촌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는데, 가자지구에서 철수하는 대신 서안에서 정착촌은 더 늘리기 시작했다며 비난하는 의견도 있지만, 적어도 과거의 극우 정책에서는 한발 물러난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정책 변화 직후, 이스라엘의 극우 강경파는 곧 샤론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조국을 팔아넘겼다며 맹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리쿠드 당원들이 샤론의 가자지구 철수 계획을 극력 반대하고, 결국 샤론은 리쿠드 당을 탈당해 2005년 카디마라는 새 정당을 만들었는데, 2006년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상태에 빠지고, 그해 카디마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그의 당수직과 총리직은 부총리였던 올메르트가 이어받습니다.
이에 대한 미국의 근본주의 보수 기독교인의 입장을 볼 수 있는 것이, 유명한 팻 로버슨(Pat Robertson) 목사의 발언들입니다. 한국전쟁 때 해병대원으로 참전했었고, 1988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로버트슨 목사는 1989년 기독교연합(Christian Coalition)을 창립해 기독교 우파의 정계 진출을 지원해왔고, 기독교방송네트워크(CBN)를 설립해 ‘700 클럽’이라는 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해 오고 있는데, 2006년 방송에서, 가자 지구 유대인 정착촌 철수를 단행한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가 뇌출혈로 쓰러진 소식을 전하면서 이를 "하나님의 땅을 나눈데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라고 주장해 큰 물의를 빚은 바 있습니다. 1995년 라빈 총리의 암살에 대해서도 역시 하나님의 땅을 나눈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구요. 이분은 워낙 망언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예를 들어 2005년에는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암살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역시 거센 비난을 산 바 있고, 역시 2005년 뉴올리언즈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태풍 카트리나가 낙태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주장했으며, 2010년 아이티 지진은 과거 아이티가 프랑스에서의 독립을 위해 부두교를 통해 사탄의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2009년 가자 전쟁이 벌어져,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던 약 1381명의 팔레스타인 인들이 살해 되고 이스라엘에 대한 전세계적인 비난이 급증했을 때에도, 그는 전세계의 비난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고, 기본적 상식이나 지적인 판단력 조차도 갖추지 못한 단순무식한 발언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은, 역시 근본주의적 성경해석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로버슨 목사와 거의 유사한 신학적 사회적 관점을 공유하는 김홍도 목사라는 분이 비슷한 발언들을 많이 해서 물의를 빚었었지요) 특히 로벗슨 목사가 이스라엘의 강경 정책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는 근본주의적 성서 해석과 세대주의 신학에 기반해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 축출이 예수의 최후 심판이 있기 전에 도래할 천년왕국의 징조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대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설명해 보겠지만, 결국은 왜곡된 성경해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지요.
소위 근본주의와 문자적 성경해석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성경을 더 철저히 지키는 좋은 입장 같은데, 현재 이들의 정치적 입장들을 엄밀하게 보면, 성경 전체의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입장을 지지하는 몇 구절을 자의적으로 선택해, 그에 기반한 정치적 입장들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합리화 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한가지 예만 들어, 비극적인 자연재해를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규정해, 희생자들의 마음을 다시한번 찢어놓은 로버슨 목사의 비인간적인 발언들을,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어떻게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요? “눅13:4-5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이스라엘 내의 극우세력과 근본주의 유대교, 그리고 미국 내의 우파와 근본주의 기독교가 동일한 역할, 즉, 평화 협상을 비난하고, 팔레스타인에 강경탄압정책을 추진하게 만들어,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대척점에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평화 협상을 추진한 지도자들이 물러난 이후에는 다시 강경정책과 극우파가 등장했는데, 현재 이스라엘 총리인 네탄야후(임기 1996~1999, 2009~현재)가 바로 이를 대표하는 정치인입니다. 그는 라빈이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시몬 페레즈 총리를 1%차로 물리치고 96년 총리가 되었고, 잠시 정계를 물러났다가 샤론의 뒤를 이은 올메르트와 카디마 당의 인기가 떨어지자 다시 강경정책을 내세우며 총리로 집권합니다. 미국에서 공부했고 네오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그는 이란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오래전 부터 주장해 왔고, 1967년 이전 경계에 대해서 조차 합의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극우파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미국의 정치인들은 정치적 입장을 떠나, 이스라엘의 정책이라면 일방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고, 네탄야후는 두려울 것이 없이 이란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하며오바마를 압박하고 서안에 정착촌을 확대하여, 중동의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정책이 장기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갈등과 테러를 영속화시킬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뮌헨'에서 보듯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테러와 암살은 더 상대를 더 극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근본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주민들은 계속되는 테러와 학살, 위협과 폭압속에서 살 수 밖에 없고, 결국 이러한 중동의 지역갈등은 언젠가 폭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오랫만에 쓰다보니 글이 무척 길어졌습니다. 저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신학적 정치적 차원들을 계속 고민하고 공부해가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크리스찬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이 성경적 입장이다”라는 극도로 단순무식한 입장과 구약성경을 민족주의, 인종주의적으로 해석한 현재의 시오니즘 정책이 얼마나 문제가 많고 위험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스라엘 정책의 가장 큰 지지 기반인 미국의 정책과 지지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근대 유대인에 대한 아랍인들의 학살은 히틀러에 대한 협력, 그리고 자발적으로 학살부대(페다인)를 조직해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게요. 글이 거짓정보(날조)로 가득차 있네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