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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원문보기 글쓴이: boaskorea
일방적 이스라엘지지가 하나님의 뜻? 4. 세대주의 신학, 기독교 시오니즘과 친 이스라엘 정책
이인엽
http://blog.naver.com/inyeop2/220060881904
지난번 글까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역사, 유대인들의 핍박 경험과 이스라엘의 건국과정,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미국 내 유대인들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과 함께, 미국의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의 기반이 되는, 기독교 시오니즘과, 세대주의 신학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주변의 기독인들 중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자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근본주의적,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은 어떤 내용이고, 충분한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 그리고 기독교 시오니즘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들을 일으키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죽어도 된다?
‘회복’, ‘용서’, ‘제3성전’ 등의 다큐멘타리 영화를 만든 김종철 감독의 인터뷰 영상 하나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김종철 감독은 자신이 생각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천년간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의 회복 뿐 아니라, 이천년간 그 땅에 살던 팔레스타인들이 함께 회복이 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라고 생각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이스라엘내 기독교인들(메시야닉쥬)의 상황을 다룬 1편 '회복'을 개봉하고, 팔레스타인 기독인들의 상황을 다룬 2편 '용서'의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회복’을 개봉하자,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많은 기독인들이 영화에 열광하고 홍보까지 해주어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팔레스타인의 기독인들을 다룬 ‘용서’를 개봉하려 하자, 놀랍게도 ‘회복’에 열광했던 같은 사람들이 찾아와 “이스라엘 편인지 팔레스타인 편인지 색깔을 분명히 하라, 영화를 중단하라”고 하면서 상영반대 운동까지 벌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은 가나안 입성시 아말렉을 다 죽이라고 하셨다, 여리고 성이 무너져 이방인들이 다 죽었듯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는 희생당하는 이들, 피흘리는 이들이 필요한데 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지 않는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자기들처럼 예수님을 믿는 팔레스타인인들조차 이스라엘 국가를 위해 희생되어 마땅하다는 이런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입장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원조는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로, 위와 유사하게 국가 이스라엘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기독인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명한 근본주의 목사인 제리 폴웰은 1981년,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겠다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창27:29)이 국가 이스라엘에 적용된다며,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들을 다루신다”는 말로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을 정당화 했고, 이스라엘의 극우정당인 리쿠드당과 연계해 미국에서 그들의 대변자 역할을 했습니다. 역시 유명한 팻 로버슨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더 지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이슬람은 새로운 나치, 즉 절대 악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전체가 하나님이 유대인에게만 준 땅이므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유대인국가를 세우는 것 외에, 어떠한 협상도 있을 수 없고, 팔레스타인과 타협을 하는 정치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거라 말한 바도 있지요. 그는 2006년 방송에서, 가자 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을 철수시킨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을 "하나님의 땅을 나눈데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라고 주장해 큰 물의를 빚었고, 역시 팔레스타인과 협상을 추진했던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1995년 이스라엘 극우 청년에게 암살된 것에 대해서도, 역시 하나님의 땅을 나눈 것에 대한 심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난 글들에서 설명했듯이, 라빈과 샤론 총리 모두 과거 팔레스타인에 강경정책을 추진했던 인물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들조차 끝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보복으로 인해 아주 약간의 타협을 한 것인데, 로버슨은 그 조차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근본주의 기독인들은, 근본주의 유대인들만큼, 때로는 그 이상으로 극단적이고 강경한 이스라엘 중심적 팔레스타인 정책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비 슷한 예로 우리가 잘 아는 '영광의 주님 찬양하세(Majesty)'라는 곡을 만든, 오순절 계열의 잭 헤이포드 목사는 “이스라엘인들이 나라를 지킬 군인이 부족하다면 자신과 자신의 교인들은 이스라엘과 같이 그들의 적에 맞서 싸우겠다”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의 안보를 지지하는 것이 마치 기독교인의 사명인 것처럼 믿는 보수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레이건 등 미국의 보수 정치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며, 이스라엘의 극우 세력과의 밀월관계로 인해, 제리 폴웰은 1981년 이스라엘 극우 지도자였던 야보틴스키의 이름을 딴 상을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수상하기도 했고, 팻 로버슨은 2002년 미국의 시오니스트 단체로 부터 우호의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기독교 시오니스트들의 친이스라엘 일변도의 입장에는 신학적 요인도 있지만, 미국의 우파 정치인, 이스라엘의 극우세력과의 특수관계에서 오는 돈과 정치적 영향력도 중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기독교 시오니스트들이야 말로, 자신들의 든든한 지지세력으로 확보하고 있는 셈입니다.
구약에 대한 인종주의, 혈통주의적 해석의 오류
이렇게 팔레스타인의 현실과 기본적 인권조차 무시하는 극단적인 입장들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은, 먼저 구약성경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이스라엘 왕국의 수립을 인종주의적, 혈통주의적으로 보는 왜곡된 관점, 즉 하나님은 자신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편드시고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을 위해 원주민을 학살하는 분이라는 해석 때문입니다. 그러나 출애굽 시기 이집트에 대한 심판은, 대제국 이집트와 파라오가 약자인 이스라엘을 노예화하고 학대하며, 그들을 해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것에 대한 심판이지, 단지 이방인이라고 해서 심판받은 것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이집트의 장자가 죽은 것은, 그들이 먼저 이스라엘의 남아들을 모두 죽였던 악에 대한 심판으로 봐야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의 총리시기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인들과 평화적으로 지냈고, 이사야서에는 이집트를 나중에 하나님이 축복하시겠다는 예언(사 19:21-25)도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도, 그 당시 ‘수간이나 인신제사’ 같은 가나안 주민들이 저지른 관영한 죄(레18-1-23)에 대한 심판으로 진행된 것이지, 그들이 단순히 혈통적으로 이방인이었기에, 아니면 이스라엘에 땅이 필요해서 죽어도 됐다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과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할 당시 그는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 시기에는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의 죄가 아직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창15:13-14)에 4대가 지난 후에야 그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의 기준에 따라 죄를 따라 심판하는 분이지, 혈통에 따라 이방인이라고 무조건 죽이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땅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언약을 지킬 때에만 주어진 것이며, 언약을 어기고 가나안 주민들과 동일하게 죄가 관영하게 되면, 이스라엘도 똑같은 심판을 받고 땅에서 쫓겨난다는 경고(레18-24-29)를 받았고,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과 포로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또한 누가 ‘이스라엘’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도, 성경은 혈통적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언약을 지키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은 이들이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구성원의 대부분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으로 구성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며, 혈통적으로 비 이스라엘일 지라도, 하나님을 사모하여 그 공동체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들은 받아들여졌습니다(사56:3-7). 출애굽 시기에도 유대인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민족이 그들을 따라 나섰으며(출12:38), 마태복음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 인물 중, 다말, 라합, 룻,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 등 다수가 이방출신이었지요. 결국, 이스라엘은 ‘혈통’이 아닌 ‘언약’을 지키느냐에 따라 정의되는 공동체였습니다.
신약에 오면 인종주의적 관점은 더욱 설 자리를 잃는데, 세례요한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눅3:8)고 했으며, 예수님은 동서로부터 많은 이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천국에 않으려니와 본 자손들을 쫓겨나 이를 갈게 되리라(마8:11)고 말씀하시며 바리새인들의 선민사상을 질타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나 여자, 부자나 가난한자의 구분을 뛰어넘는(갈3:28, 29)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지요. 결국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의 의를 따르는 자(롬9:6-8, 롬4:13,14)이며, 언약을 지키며 오실 메시야를 기다린 아브라함처럼 메시야를 받아들이는 자가 참 이스라엘이기에, 메시야를 거부한 유대인들이 아닌, 교회가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두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제자를 세웠고, 야고보 사도가 교회에 편지하면서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한다(약1:1)고 했던 것도 이와 연관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수가 찬 후에(롬11) 이스라엘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돌아온 다는 것’은 메시야께 돌아온다는 것이지, 세속국가 이스라엘의 건국이나 영토의 팽창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연결시킬 근거는 전혀 없는 것이지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이 특별한 백성이고,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안보와 번영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하신다는 '선민사상'과 정확히 충돌합니다. 결국, 성경을 인종주의 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왜곡이고, 하나님을 한 민족의 수호신으로 격하하는 신성모독적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비뚤어진 인종주의적 시각이 만연했을 때,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이 저주받은 이야기를 왜곡해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노예제를 합리화하거나, 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왜곡해 엄청난 숫자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대학살을 합리화 하는 극악무도한 일들이 벌어졌으며, 이러한 왜곡된 성경해석은, 이제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준식민지 점령정책, 분리주의 정책과, 무자비한 군사적 폭력을 합리화 하는 기독교 시오니즘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체신학과 세대주의
기독교 시오니즘의 기반은 근본주의, 세대주의 신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체신학은 구약의 이스라엘은 소명에 실패했고 메시야인 예수님을 거부했기에, 교회가 영적인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을 교회가 ‘대체’했다는 신학입니다. 전반적으로 이 입장은 복음주의적이지만, 이것이 극단화 되었을 때는, 유대인들을 아예 버림받고 저주받은 민족으로까지 보는 오류가 나타날 수 있고,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반유대주의적인 태도까지 보여, 수천년간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학살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발해 나온 ‘세대주의’는 존 넬슨 다비와 C.I. 스코필드 (스코필드 성경의 저자) 등에서 기원하는데, 이들은 성 경과 역사를 7개의 세대로 구분해 해석하고, 하나님이 각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통치를 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특정한 역사적 기점들과 끼워 맞춰 보려는 경향이 강하고, 특히 이스라엘의 건국, 영토의 확장과 완성, 제3성전의 건축, 그리고 그에 반발하는 세력과의 아마겟돈 전쟁이, 종말에 대한 결정적인 징조라고 보면서, 그 이후 예수님의 재림과 천년왕국이 이루어진다고(전천년설) 믿습니다. 신약과 교회 시대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특별한 위치는 지속되어, 교회와 구분되는 독립적인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고 보면서, 유대인과 이스라엘 국가가 역사의 특별한 지표가 된다고 믿고, 일방적인 이스라엘 지지를 강조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제리 폴웰이나 팻 로버슨은 세대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근본주의자이자들이고, 극우적 정치관을 가진 것으로 유명합니다. 냉전기에는 소련과의 전쟁에서 핵무기 사용도 불사해야 하며, 그로인해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면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게 되고, 믿는 자들은 그전에 휴거할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참고로 휴거라는 개념은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지 않은 논란이 많은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를 위한 중재노력도 의미가 없고, 핵무기반대 평화운동은 적그리스도를 이롭게 한다는 어이없는 주장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온, EU나 UN이 계시록의 열뿔이라거나, 그 지도자가 적그리스도이며, 바코드나 베리칩이 666이라느니 하는, 조잡하고 알레고리적인 성경해석들은 대부분 이런 세대주의적 문자주의적 성경해석에서 나온 것들이지요. 문자주의하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고 잘 해석하는 것 같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계시록 8:11의 ‘쑥’이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말하느니, 9:7의 전갈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는 ’황충’은 전투 헬리콥터를 말하느니 하는 유치찬란한 해석들이 많고, 예수님의 정신과 성경의 메시지를 역사와 문맥가운데 해석하기보다 자기들의 좁은 관점에서 생각나는 것들을 성경과 일대일 대응시켜, 미래에 대한 퍼즐맞추기 같은 SF 판타지를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의 단순무식하고 순진한 입장이 극우 정치세력에게 가장 좋은 토양을 제공해, 성경과 기독교를 극우 정치관을 합리화 하는 도구로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에 기반한 기독교 시오니스트 들은, 전세계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는 동시에 기존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추방되거나 말살되고,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타인 전체와 구약에 기록된 광대한 영토에 수립 되며, 현재 이슬람의 황금사원 자리에 유대인의 제3성전이 건축되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과 통치를 앞당기는 일이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이 기독인의 사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긴다는 해괴한 논리로, 이스라엘의 준식민지정책과 끝없는 영토확장,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폭압과 학살, 그리고 중동국가들의 갈등, 핵전쟁 등을 지지한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들은 이름만 예수님을 달았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와 화해의 십자가 정신과는 정확히 반대의 위치에서 예수님과 교회의 이름을 욕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은, 지난번 글에서 설명했듯이, 세계각지에 흩어져 핍박받던 유대인들이, 구약을 선민사상으로 해석하고, 국가주의적으로 적용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강조하는 사상이지요. 많은 기독인들이 착각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과 시오니즘,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에 필연적인 연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기본적으로 시오니즘은 구약을 해석하는 여러 입장 중에 하나, 특히 극단적으로 혈통주의적, 영토주의적, 국가주의적인 해석입니다. 실제로 전통주의 유대인 중에 NETUREI KARTA라는 단체(http://www.nkusa.org/)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열방중에 흩으셨기에, 참된 메시야가 오기 전에 인위적으로 유대 국가를 설립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믿으며 세속국가 이스라엘에 세금을 내거나 군대에 가기를 거부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을 반대하며 그들에게 땅을 돌려주라고 외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적이라고 칭해지는 이란이나 팔레스타인 지도자들과도 교류하며 평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시오니즘에 기반한 국가 이스라엘이 큰 위협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이스라엘 정부로 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유대교는 곧 시오니즘이고, 모든 유대인들이 시오니스트라고 볼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기독교 시오니즘은 세대주의적 신학과 전천년설, 종말론에 치우쳐,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해, 시오니즘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선민의식을 내세운 바리새인의 관점이나, 예수님 당시의 폭력을 통해 유대국가를 수립하자는 열심당원들의 생각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극단적인 대체신학에서 영향을 받은 반유대주의가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박멸하려고 했다면, 극단적인 세대주의와 기독교 시오니즘은 이스라엘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는 일종의 반대극단과 이스라엘에 대한 왜곡되고 치우친 사랑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중 일부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아도 유대교로 구원받는다던지, 이스라엘의 영토회복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축이 예수님 재림을 위해 필요하다며, 현재 일부 유대인들이 준비하고 있는 제3성전의 건축과 집기와 기구를 만드는 일들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국내의 한 단체는 얼마전 유월절을 재현한다며 살아있는 양을 죽여 피를 받고 제사를 지내는 황당한 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행위가,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에서 보듯,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전과 제사의 기능을 폐기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부정하고,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런 분들은, 미국에까지 가서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를 걸어놓고, 대규모 유대인 초청 집회를 열기도 하는데, 기독교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대체신학이 한국교회에서 뿌리 뽑혀야 한다고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보다도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를 앞세우고, 민족을 초월해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해야할 사명보다도, 왜곡된 형태의 종말론과 세속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내세우는 이런 입장은 성경왜곡의 극치입니다.
이들이 보는 성경의 성취이자 유대교 국가 이스라엘이라는 관점과 달리, 실제로 이스라엘은, 다종교 사회이자 일반적인 세속국가중 하나이고, 구약성경의 가르침과 거기서 나타난 하나님을 그대로 믿는 종교적 유대인은 20-30%에 불과합니다. 또한 기독교인이나 선교사에 대한 테러나 위협이 끊이지 않고 있지요. 반면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모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거나 테러리스트일 거라는 선입견과 달리, 팔레스타인 역시 다종교 사회이며, 그 안에 오랜 역사를 지닌 기독교인들이 있고, 예를 들어 서안 지역 230만 명중 19%인 44만 정도가 기독교인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결국 기독교 시오니스트들은 자신들의 특정한 신학적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시키고 왜곡해서, 상상속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시오니즘이 보는 이스라엘과 종말에 대한 관점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기독교 왕국(Christendom) 에 가깝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일수록, 민족주의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한국이나 미국, 이스라엘을 선택받은 나라, 그리고 북한, 이슬람, 이란 등을 손쉽게 악마화하는 관점을 보여줍니다. 근본주의 기독교는, 나를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보면서, 모든 것을 선악의 싸움으로 단순화 하고, 다양성을 부정하며, 헤게모니의 장악과 타자의 박멸을 주장 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자신들이 비판해 마지않는 근본주의 이슬람과 상당히 유사한 사고체계를 보여주기도 하지요. 무지와 독단에 기반한 근본주의자들이 세계를 분쟁과 갈등으로 끌고 가는 상황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눈을 감고, 이스라엘의 폭압을 축복하다
지난번 글들에서 소개했지만,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만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상식적인 인간으로서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은 불법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군사점령 하고 있고 가자를 봉쇄하고 있고, 서안에 불법 점령촌을 건설해 이미 40만 이상의 이스라엘 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해가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인들의 독립 요구는 60년이 넘게 무시되고 있지요. 물론 기독인으로서 팔레스타인 측에서 자행하는 폭력이나 테러도 지지할 수 없으나, 2008년 가자 전쟁시 팔레스타인측 사망자수 1381명(민간인 900명, 어린이 400명), 이스라엘측 사망자 13명에서 보듯이 팔레스타인 피해규모는 거의 100배에 해당할 정도로 팔레스타인은 현실적인 약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할 ‘머리’가 있고, 남의 고통을 느낄 ‘가슴’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식의 단순무식하고 폭력적인 발언을 하기는 쉽지 않지요. 오늘날 KKK단원 등이 아니고서는,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나 미국의 흑백차별정책을 지지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내에 8미터 높이의 장벽을 세워 팔레스타인 마을을 쪼개고 분리시키며, 대테러 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인종청소에 가까운 민간인 대량학살 저지르는 행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지하는 것이 충격적인 현실입니다.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투쟁했던 유명한 투투 주교는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보고 있으며, 이는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피노체트, 밀로셰비치, 이디 아민과 같은 독재자들이 추진한 정책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 바 있지요. 2009년 장벽이 설치된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그는 “이스라엘은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한 보상을 아랍인들에게서 받고 있다”며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철망과 장벽, 총으로는 안보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고 “우리가 모두 믿는 하나님은 언제나 약자를 편애하시는 분”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홍미정, 서정환, 울지마 팔레스타인, 2011, p.78) 이와 유사하게,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자신의 저서 (Palestine, Peace not Apartheid)에서 이스라엘의 억압이 계속된다면 테러리즘은 계속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통제와 식민지배가 평화협정의 걸림돌이 되고 있고, 가장 경멸적인 형태의 인종차별이 자행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본권들이 박탈당하고 있다고 용감하게 경고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갈등은 각자 역사적 종교적 정체성으로 양보가 어렵고, 영토와 자원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수십년간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속되는 폭력과 약자들의 고통을 돌아보고, 평화를 위한 화해와 용서를 이야기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근본주의적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에 빠진 기독교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의 강경파에 힘을 실어주고 평화협상을 가장 반대하는 세력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맹목적 이스라엘 지지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무조건 반유대주의자로 매도하는 마녀사냥을 하기도 하고, 또한 이스라엘의 폭압적인 정책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마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한다는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진다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는 이란을 선제공격할 것을 주장하거나,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이 현재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에 까지 걸쳐 있기 때문에 이 영토일부까지 이스라엘이 차지해야 하고 이런 과정에서 중동전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하며, 그것이 곧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길 아마게돈 전쟁이라는 식으로 전쟁을 부추깁니다. 현재 이슬람의 황금의 사원이 서있는 곳은 유대교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곳으로 신성시 되며, 이슬람에서는 모하메드가 승천한 곳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일부 유대인들은 황금의 사원을 없애고 그곳에 제3성전을 건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역시 종교 갈등을 폭발시키고 중동전쟁을 일으키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기독교 시오니스트들은 이미 신약에서 폐기된 성전의 개념을 지지 할 뿐 아니라, 중동의 갈등을 촉발하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의 평화와 화해가 아닌, 전쟁을 부추기는 광기마저 보이는 것을 보면, 잘못된 성경 해석이 얼마나 무서운가, 또한 자신들의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성경을 가자고 합리화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오류와 심각한 정치적 문제점들로 인해, 세대주의와 기독교 시오니즘은 미국의 진보적인 주류 교단은 물론이고, 복음주의적 대학들인 풀러나 휘튼 대학에서도 부정되고 있으며, 세계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존 스토트도, 유대인들의 귀환과 유대 국가수립을 성경예언의 성취로 보는 세대주의 신학에 반대한다는 것과, 유대인들의 회복은 영토나 국가의 회복이 아닌, 메시야이신 예수님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명확히 밝힌바 있습니다(John Stott, The Place of Israel). 반면에 미국의 보수적인 남침례교단이나 오순절계통에서는 세대주의 신학이나 기독교 시오니즘의 영향이 지배적이고, 이것이 보수 정치세력과 유대인들의 정치 로비와 맞물려 미국의 외교 정책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요. 최근에는 진보교단인 PCUSA에서도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기업들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자는 안건으로 교단분열까지 일어나고 있을 정도 입니다. 국내에는 백투예루살렘 운동이나 신사도주의 운동 등에서 이러한 주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세대주의적 사고가 교단에 상관없이 일반화 되어 있어 매우 우려가 됩니다.
마치며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단순한 주장을 반복하는 기독인들은, 이-팔 갈등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무지하거나, 고의적으로 눈을 감고 있고, 왜곡된 관점으로 성경과 현실을 보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제 기독인들 중에서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기에, 올바른 성경적 관점을 가르치고 이-팔 갈등에 대해 인종주의가 아닌, 예수님이 가르치신 평화와 화해가 실현되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책에 깊은 혐오와 분노를 표시하고 있고, 이를 일방적으로 지지 하는 일부 개신교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평화와 화해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 인이라면, 적어도 예수님의 이름, 교회의 이름으로 현재 극단적인 이스라엘의 준식민지 점령정책, 영토확장정책, 군사적 폭력을 축복하고, 폭력의 악순환과 평화협상을 가로막는 일은 없도록, 올바른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주제에 관심갖는 분들을 위해 몇권의 추천도서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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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홍미정,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코리아연구원 현안진단 25호, 2006년 3월 23일 (http://knsi.org/knsi/admin/work/works/iss25_hmj060323.pdf)
홍미정, 서정환, 울지마 팔레스타인, 시대의 창, 2011
원혜진, 아! 팔레스타인 1, 2 - 만화로 보는 팔레스타인 역사, 여우고개, 2013
-오마이 뉴스 연재 링크 (http://www.ohmynews.com/NWS_Web/Issue/series_pg.aspx?srscd=0000011040)
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랄프 쇤만, 잔인한 이스라엘
노암 촘스키, 숙명의 트라이앵글
존 미어샤이머 스티븐 월트, 이스라엘 로비
자크 엘룰, 하나님은 불의한가?
홍익희, 유대인 이야기, 행성:B잎새, 2013
John Stott, The Place of Israel (http://www.emeu.net/pdf/The_Place_of_Israel.pdf)
Jimmy Carter, Palestine, Peace not Apartheid
Jimmy, Carter, We can have peace in the Holy Land
Stephen Sizer, Christian Zionism: Road-map to Armageddon?, IVP Academic, 2005
Stephen Sizer, Zion's Christian Soldiers?: The Bible, Israel and the Church, IVP Books, 2008
Ralph Shoenman, The Hidden history of Zionism, 2002
Stephen Walt and John Mearsheimer, The Israel Lobby and U.S. Foreign Policy, 2006 (Article) (http://mearsheimer.uchicago.edu/pdfs/A0040.pdf)
Stephen Walt and John Mearsheimer, The Israel Lobby and U.S. Foreign Policy, 2007 (Book)
<추천영화>
김종철 감독: 회복, 용서, 제3성전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 2008)
The Birth of Israel (BBC)
With God on our side (8 minutes summary of Israel-Palestine conflict)
첫댓글 기독교에선 이스라엘을 통해 역사한다고 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로 보고 있습니다. 글대로 이스라엘은 처음이요 끝인 나라로 중동에 있는 가나안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지막때로 생각하며 열심히 바라봅니다. 이스라엘은 곧 주님이 오시는 재림을 알리는 것으로 여기며 또 자신과 연결시켜버려 이스라엘이 어떤 일을 벌여도 죄가 없는 나라로 여깁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인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된 나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십자가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한 거였고 그것은 하나의 모형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지구상의 똑같은 한 나라일뿐이지 그 위도 아래도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이 구원의 시작이고 마지막인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은 오직 성경에만 있는 것이고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봤다면 지구상의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인간의 욕심에서 시작된 것이고 범죄입니다.
@믿음의군사 이스라엘은 지구상의 한 나라일뿐입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오직 성경 안에만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금도 참된 선지자의 나라로 보니 유대인인 오워를 신격화하고 이스라엘을 보면서 마지막때를 점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보면서 자기의 나라도 선택한 민족이라며 민족주의인 극단주의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믿음의군사 여호와의 말씀은 오직 성경 뿐입니다. 보이는 이스라엘은 평범한 이방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성경은 이미 예언 ^^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것이라.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계획과 섭리를 모르는~요상한 글을 퍼오는군요 ㅎㅎ
아비가일이라는 히브리 이름이나 쓰지말고, 글 쓰든가 ;;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