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햇살처럼
(멍덕골 방문기)
산골에 한 차례 비가 지나간 뒤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다. 며칠 전에는 한 골짜기에 사는 김씨 아저씨 댁에서 '강활'이라는 약초 캐는 일을 거들었다. 그냥 이웃집 일 도우면서 배운다는 생각으로 갔다가 아저씨가 품값을, 그것도 생각보다 많이 주시는 바람에, 그 뒤로도 시간 날 때마다 가서 일을 도왔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일도 못하고, 금방 돌아오지도 못하게 되어 점심 무렵까지 아저씨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태어나서 마흔넷에 상처한 뒤 혼자 공장 일을 하며 자식 넷을 키워왔다. 그러다 마지막 직장인 구청의 건물 청소직에서도 정년퇴직한 후 올 봄에 이 골짜기로 들어오셨다. 하나 뿐인 아들과는 잘 맞지 않았고 며느리 눈치 보는게 싫어서 누님네 가족이 있는 이 마을로 '귀농'을 한 셈이다. 아저씨는 기다란 장미 담배를 연거푸 태우며 지난 시절 고생한 얘기와 현재의 외로운 처지에 대해 말씀하다가 두어 번 눈시울을 붉혔다. 딸네든, 조카들이든 찾아올 때는 좋은데 막상 인사하고 떠날 때는 설운 마음이 자꾸 든다는 것이다. 나는 아저씨가 끓여 준 국물 많은 라면을 맛나게 먹으면서 위로를 한답시고 '혼자 사는 즐거움'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는데, 마음이 순박한 이 분은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감정을 추스렸다.
그 다음날도 아침 산책 삼아 강아지 백두를 데리고 아저씨 집에 가봤더니 반팔 차림으로 비를 맞으며 집 뒤 약초 밭을 둘러보고 계신다. "깟놈의 것, 오늘 못하면 낼 하면 되는 거구..." 아저씨는 또 장미 담배를 입에 문 채 주름 깊은 얼굴로 웃음지었다. 마침 음지기 골에 사는 정씨 아저씨가 고개를 내려오다 "웬 개야? 강아지야? 잡아 먹게?" 하며 마당으로 들어서서 백두를 한번 쓰다듬고 김씨 아저씨와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곧이어 아침 나절부터 막걸리 판이 벌어져 나는 슬며시 빠져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장작불로 따뜻해진 방안에서 윗집 차 선생님이 준 책 '아나스타시야'를 읽었다. 그야말로 '언크레더블'한 이야기인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하고 밝아진다. 예전에 사랑했던,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 남아있는, 한 사람의 얼굴과 몸짓과 목소리가 자꾸 아나스타시야의 이미지와 겹쳐져 가슴이 시리기도 했다. 그 사람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란다. 나도 그만 자책하고 내 마음 속의 빛을 좀 더 사랑하고 싶다. 그러다 보면 지난 고통의 이유와 의미를 밝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참, 지난 10일부터 13일 장수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최근 상황을 적어본다는 것이 서론이 길어졌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돌아와서 탈곡을 하고 여러가지 일을 하느라 좀처럼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쓸 짬이 나지 않았다.
시일이 많이 지나 생생한 감동을 전하기는 어렵겠지만, 여러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는 일은 중요하므로 차분하게 지난 기억을 더듬는다.
1. 장수 가는 길
지난 10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기분도 좋고 몸도 거뜬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낯선 땅과 장소를 만난다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설레였다. 우선 정다운 벗, 영주 씨를 본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굳이 대전의 버스터미널에서 영주 씨를 만나서 같이 가기로 한 것도 좀 더 빨리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춘양에서 대전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세 대가 있다. 첫차를 탔는데 버스는 봉화, 영주, 예천, 점촌, 함창, 상주, 화평 등등 중간에 터미널과 정류소를 합쳐 거의 열 군데 가까이 정차했다.
영주에서 승객 대부분이 내리고 차 안에는 노 신사분과 나만 남아 네 시간 정도를 침묵 속에서 여행했다. 상주를 지나자 노 신사분은 지루한지 "앞으로 몇 군데 더 설거요?"하고 물었고 호리한 체격에 잘 생긴 기사는 "아, 네 이제 무조건 그냥 갈 겁니다"라고 답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모처럼의 장거리 여행인데다가 벗을 만난다는 생각에 오로지 즐거울 뿐이었다. 배낭을 꾸리고 홀가분하게 떠나니 정처없는 방랑자가 된 기분이었다. 창 밖에는 우리 마을과 달리 아직 벼베기를 하지 않은 논들이 많았다. 농지 정리가 잘 된 논들이 시원하고 멋져 보였으나 내가 부치는 산골짝 다랑이 논이 더 예쁘고 정겹다고 생각했다.
대전 동부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약속 장소에서 벗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조금 낡고 우중충한 건물 안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문득 거울을 보니 불룩한 배낭을 맨 수염이 듬성듬성한 사내의 모습이 영 낯설다. 그야말로 '산에서 내려온 사람'같다. 내 얼굴을 보고 씩 웃어주었다. 혼자 맛 없는 김밥을 사 먹고, 신문을 사서 읽으며 기다리니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내 이름을 부른다. 영주 씨다. 차가 막혀 늦었다고 했다. 둘 다 휴대폰이 없으니 만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짧게 깍은 머리에 흰 색 자켓을 입은 영주 씨는 수행자처럼 견결해 보인다. 버스 안에 나란히 앉아 회포를 풀다보니 장수까지 두시간 십 분이 금방 지났다. 이 사람과의 대화는 즐겁고, 정신적으로 힘을 받는다. 영주 씨는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도법 스님 일행과 강원도 지역 탁발 순례를 한 달 반 정도 같이 하면서 귀농의 뜻을 굳혔다. 횡성에서 농사와 공부방 일을 병행하고 있는데, 생태적 삶과 교육에 대한 고민도 진지하고 깊다. 특히 일상에서의 생태적인 실천력은 동갑내기지만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다. 배울 점이 많고, 나의 허황된 이야기도 경청해주는 친구를 동기로 만났다는 게 얼마나 기쁘고 든든한지 모른다.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예전에도 몇 번 만날 뻔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 걸 보면 세상에 우연이 없다. 나는 결국 간절히 원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2. 멍덕골에 들다.
장수터미널에 도착해 우리는 한동안 공중 전화를 찾기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다 결국 터미널 안에 있는 걸 발견하고 이수재 형님에게 전화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 보지 못하고 놓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수재 형님은 통화를 끝내자마자 바로 터미널 안으로 들어섰다. 전날 모임이 있어 장수로 와서 오전부터 우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둘 다 전화가 되지 않아 답답했다고 하시니 무척 미안했다. 나는 대전에서 영주 씨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에도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이 분은 얼마나 궁금하고 지루하셨을 것인가.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기가 아직도 잘 안된다.
근처의 할인매장에서 술과 빵을 산 뒤에, 마을로 가는 버스 시간이 너무 늦어 택시를 타고 유정리로 들어갔다. 원래 같이 가기로 했던 분들이 개인적 사정때문에 못 오게 됐다는 소식을 수재 형님에게 들었다. 대신 거제에 사는 실상사 귀농학교 동기분이 우리 일정에 동참하기로 했다. 무슨 일이든 마음 내기보다 실제 몸 움직이는 게 더 어렵다. 처음에 마음 먹은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큰 복인 것 같다. 지역 출신의 택시 기사는 장수에 대해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충절을 지킨 여성, 논개가 장수 출신이고 원래 기생이 아니란 사실을 처음 들었다. 수재 형님은 장수 지역으로 귀농지를 정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셨는데 드디어 정해졌다니 나도 덩달아 기뻐 축하했다. 차로 삼사십 분 넘게 지나자 면 소재지가 나오고 조금 더 들어가자 마을 간판이 보였는데, 멍덕골은 찻길에서 빠져 한참이나 더 산속의 길을 올라갔다.
내가 처음 우리 마을에 들어갈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왜 길로 안 가고 차가 산으로 가지?' '이런 산골에 과연 사람이 산단 말인가?'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야?!'
당시 운전했던 명지 어머니의 인상이 나쁘지 않아 큰 걱정은 안 했지만, 만약 살게 된다면 살아갈 일이 막막했던 것이다.
어쨌든 한 해를 거의 다 지내고 나니 멍덕골 가는 길에서는 '흠, 골짜기가 제법 깊네' '미찌골보다 집은 별로 없는 편이네' '벼가 잘 자랐군'하며 여유가 생겼다. 사람의 적응력은 사람의 상상력을 초월하나보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쌓인 마을은 경사가 제법 있는 지형에 집이 네 채가 눈에 들어왔고, 한 쪽으로는 개천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를 처음 맞이한 것은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는 큰 아름드리 나무였고, 어디가 이남곡 선생님 댁인지 몰라 사람들 말소리가 들리는 집으로 들어갔더니 서혜란 선생님과 마을 할머니들이 건고추를 다듬다가 우리를 맞이했다.
"와, 이남곡 선생님과 얼굴이 닮으셨네요!"라고 하자 서 선생님은 "그래도 제가 조금 더 낫죠?"하시며 웃으셨고, 그 대답에 할머니들의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곧이어 이 선생님이 껑충한 키로 집 안에 들어섰고 우리와 일일이 악수를 나누셨다.
넓직한 집은 햇살이 잘 들어오는 거실과 주방 공간, 방이 두 개, 창고와 수세식 화장실 겸 샤워장이 있었다. 거실의 한 쪽 벽에는 '물처럼 햇살처럼 마음이 먼저, 좋은 마을'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가공 식품을 팔면서 처음에는 물, 햇살, 별이 좋아서 '삼호물산'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좋은 마을'로 바꿨다고 했다.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장류 가공시설부터 시작해 마을 구경을 시켜 주셨다. 가공 시설이 있는 마당에는 커다란 항아리들이 도열해 있었고 건물 안에는 큰 솥과 용기들과 수도 시설이 있었다. 그 곳에서 '좋은 마을'표 된장, 고추장, 간장, 청국장 등이 만들어진다. 마을에는 모두 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 선생님 댁이 가장 위에 있었고 그 아랫집이 고추 손질 작업하던 곳으로 현재는 빈 집이라 했고, 그 아래에 흙벽으로 지어진 예쁜 집과, 한옥 형태로 지어진 집이 띄엄띄엄 위치해 있어 한적한 느낌이다.
5년 전 이 선생님 부부가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는 현재 가공시설로 쓰는 건물에 살면서, 지금의 집을 지었고, 다른 두 집은 현재 작업실로 쓰는 집을 차례로 거쳐 새로 집을 짓게 됐단다. 멍덕골에는 예전에도 일곱 가구가 살다가 모두 나가거나 죽어 한동안 비었다가 다시 마을이 형성되는 중이라고 했다. '멍덕'은 한봉을 할 때 벌집 위에 씌우는 덮개를 이르는 말인데, 이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그 곳에서 예전에 벌을 쳤다는 얘기도 있고, 골짜기 모양이 꼭 멍덕의 생김새를 닮았다고 해서 그렇다는 말도 있단다.
마을 앞 쪽으로 세 개의 산등성이가 겹치다시피 마을을 감싸고 있고 저 멀리에는 귀정사가 있는 천황봉도 보인다.
할머니들은-정확히 말하면 할머니 세 분과 아주머니 한 분인데- 차로 십분 정도 떨어진 토박이 마을인 '만항'에서 올라와 품일을 하고 있었는데, 해가 저물자 이 선생님이 차로 그 분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시고 오셨다.
3. 만찬을 함께 하다.
고추 작업을 하던 집에는 산골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아주 고급스럽고 넓은 탁자와 화려한 무늬가 수 놓인 의자가 있었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가정부가 있는 부잣집 세트에나 어울릴 법한 주방 가구여서 사연을 물었더니 그 집에 살았던 사람 중 하나가음식점을 하다가 그만두었단다. 서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그 주인이 '시골 사람들도 이런 좋은 시설과 분위기에서 밥을 먹게 해야 한다'는 가상한 사업 취지로 그런 인테리어를 구상했다는데, 주 메뉴가 '국밥'이었단다. 그 서구적인 분위기와 중산층 취향의 가구에 국밥은 너무 심했다. 국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내가 손님이라도 국물있는 밥을 떠 먹으면서 엄청 부담스러울 것 같다. 어쨌든 그 주인분 덕분에 아주 우아한 식탁에서 만찬이 벌어졌다. 돼지불고기와 밑반찬, 우리가 가져온 사과, 땅콩과 술이 상에 올랐다.
선생님이 나를 보시며 "여기서 막내가 자넨가? 상 차리는 것 좀 돕지?"하시길래 나는 잽싸게 "이 쪽이 막내인데요. 제가 한 달 더 빠릅니다"하고 영주 씨를 가리켰다.
영주 씨는 착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용히 한 마디 날렸다.
"근데 제가 장가를 갔기 때문에 제가 더 어른입니다."
음, 만만치 않은 영주 씨. 이에 서 선생님이 '남자는 장가를 가서 애 아버지가 되어야 어른이 된다'고 덧붙이셨다. 여러 어른들께 들었던 말씀. 하지만 마음 속에 드는 어깃장 몇 자락. 그럼 스님과 신부님들은 평생 어른이 못 되는가? 권정생 선생님 같은 분은 독신으로서 얼마나 큰 사랑을 품으셨던가? 어른이 된다는 게 어떻게 된다는 것일까? 아이를 낳아 키워보면 저절로 어른이 되어지는가? 그럼, 세상에 나쁜 어른들은 왜 존재하는 걸까? 결혼 여부와 자녀의 유무가 성숙의 척도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술잔을 비울 때쯤 현관문이 열리더니 콧수염에 단이 짧은 바지를 입은 오십 대 남자가 하나 들어서며 인사했다. 수재 형님이 말한 귀농학교 동기분인데 별명이 '물개'라고 했다. 그리고 아랫 집에 살고 계신 박정주 선생님 내외분과 삼십대 귀농자 성균 씨도 들어와 함께 술과 저녁 식사를 했다.
물개 형님은 별명에 맞게 해저 탐사원 일과 강의를 하신단다. 거제도의 바닷가가 보이는 해변에 집을 짓고 살며 약간의 농사를 짓는데, 최근에는 캠핑카를 구입해서 여행을 구상 중이라 했다. '해저 탐사'만으로도 신비스러운데, 거기에 바닷가의 집과 캠핑카라니...우리같은 산골 출신들은 감탄을 할 수밖에.
게다가 물개 형님의 독특한 화법에는 모두들 쓰러질 지경이었다. 처음엔 과묵하고 매우 예의 바르신 분으로 보였는데 '알콜을 조금씩 섭취'해갈수록 비속어를 자연스럽게 활용하면서 직설적인 표현들을 마구 구사해서 우리를 웃겼다. 나이를 묻는 질문에 "제 연식이 좀 오래돼서.." 하는가 하면, 내 얼굴을 가만히 보시다 눈살을 찌푸리며 "여기는 산골에서 고생이 많은가봐? 얼굴이 삭았네.쯔쯔.. 다른 사람들은 얼굴에서 빛이 나는데...물이 잘 안나와?"하는 말이나 술잔을 제대로 안 부딪쳤다고 고개를 푹 떨구며 "봉화에는 주도가 없나봐. 아이 참, 다시 생각해봐야겠는데..."하는 말과 익살스런 표정은 좌중의 웃음을 터뜨렸다. 외람된 생각이지만 나이 드신 분이 참 천진하고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분의 분위기와 말투는 그 솔직함과 무대포 정신이 어딘가 개그맨 지상열을 연상시킨다. 물론 인물은 물개 형님이 훨씬 준수하지만.
나보다 한 살 어린 성균 씨는 내가 아는 선배를 잘 알고 있어서 반가웠다. 여덟살 연상인 아내가 올해 아기를 낳았단다. 그는 가톨릭 쪽 공동체에 있으면서 일찌감치 목수 일을 배웠고, 그 곳에 들어온 지 삼년차라고 했다. 안경 너머의 쌍커풀 진 눈이 크고 예뻤다. 작년에 출입국관리소의 폭력적인 단속에 걸려 강제출국된 방글라데시 친구의 눈이 그랬다. 그는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선반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렸고 험한 일을 하느라 몸이 많이 상한 채 한국을 떠났다. 그는 내게 "한국 사람들 미워하지 않는다"면서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 불쌍하고 고생한다"고 했다. 감옥같은 보호소의 면회창 너머로 끝내 눈물을 보였다.
영주 씨, 성균 씨와 나는 '연식이 오래되신' 분들이 모두 자리를 뜬 뒤에도 새벽 세 시 반까지 술자리를 이어가며 사는 얘기를 나누었다. 성균 씨는 귀농 1년차 때 부부간에 갈등이 심했던 얘기, 목수일 배운 과정, 비가림 하우스 제작 방식, 현재 생활의 어려움 등에 대해 들려주었고 영주 씨와 나는 현재 상황과 내년 계획 등에 대해 털어놓았다. 같은 또래들과 어설픈 농사 얘기를 부끄럼 없이 나눌 수 있어 즐거웠다. 앞으로 이런 청년들과 더 만나고 소통하고 서로 보듬어 주어야 세상이 점점 좋게 변화할 것이라 믿는다.
(계속)
첫댓글 그간 잘 지내셨죠? 오늘에서야 인드라망에 방문기를 올렸습니다. 후속편도 있으니 '현장귀농학교'로 놀러와 읽어보시길...따뜻한 대접과 뜻깊은 만남의 시간을 표현하기에 글이 너무 서툴고 두서가 없습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반갑네. 가을 겆이는 잘하고 있겠지. 오늘 아침 뉴스에서 봉화가 영하로 내려갔다는 말을 듣고, 영환이 생각이 났네. 매일 좋은 날들 되기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