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름을 오라다 만난 몽골리안
8월도 이제 1주일을 남겨두고 있지만 무더위는 여전하다. 새벽에만 잠시 시원할 뿐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된다. 정말 우리나라가 아열대기후대에 접어드는 모양이다.
한 달여 계속되는 이런 무더위 속에서 그나마 청량제 역할을 하는 것은 매주 목요일 오름을 찾아 떠나는 오름 산행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밝은 얼굴로 열두 명이 모였다. 서귀포 산과고 앞이다. 인원 점검이 끝나고 오늘의 일정을 간단히 의논한 후 곧장 미악산으로 행했다.
미악산은 5.16도로 돈내코 입구에서 산록도로 쪽으로 약 3km의 거리에 있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주변 조망이 좋아서인지 도로 남쪽에 주차장과 전망대를 만들어 관광지로 꾸며 놓았다. 우리는 길을 건너 금성목장의 문을 열고 오름으로 향했다. 오름까지는 약 2km가 되어 보이지만 시원한 벌판을 걷는 기분은 상쾌했다. 이따금 방목 중인 소나 말이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라 내닫는 바람에 약간 겁을 먹기도 했지만 새파란 잔디와 지천으로 깔린 고사리가 발목을 휘감는 느낌이 그만이다.
오름 기슭에 이르자 삼나무 조림지가 나타났다. 다른 오름에 비해 나이가 어린지 그리 크지 않고 중간중간 잘라놓아 걷기에 편했다. 어디서 소나기라도 내리는지 천둥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고 거기에 섞여 예비군들이 사격훈련을 하는지 총소리까지 들린다. 날씨가 무더워 땀이 비오듯한다. 본격적으로 오름을 오르기 전에 잠시 쉬기로 했다.
은하수의 복분자술과 독새기 안주로 기운을 회복한 우리는 단숨에 비고 113m의 오름을 오를 수 있었다. 남서쪽의 주봉에 해군 부대가 들어서 있어 그 곳으로는 갈 수가 없어서 사이에 있는 헬기 착륙장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바야흐로 즐거운 만찬이 시작되려는데 목장 관리인인 듯한 늙수그르레한 영감과 젊은이가 이 쪽으로 온다. 인심 좋은 우리 CNE가 그들을 그냥 보낼리 없다. 술과 안주를 권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 같이 있는 젊은이가 몽골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나라에 온지 2년쯤 됐다는 젊은이는 칭기스칸의 후예답게 말을 잘 타고 착해 보였다. 고향에 교사를 하는 애인이 있어 내년 봄에는 고향에 돌아가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란다. 한달에 9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고 있어서 착실히 모은다면 고향인 몽골에 돌아가서 괜찮은 생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완산이 외국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답게 얼마간의 팁을 건네니 무척 고마워했다. 이런 조그만 친절이 우리나라의 국위를 선양하고 외국에 우리나라의 좋은 이미지를 심는데 기여하리라고 본다. 사실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수많은 외국 노동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보다는 차별과 폭력, 임금착취 등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할 것이다. 다행히 이 몽골 젊은이는 같이 일하는 영감도 사람이 좋아 보여 한국에서의 생활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이들과 헤어진 우리 일행은 경방초소가 있는 동쪽 봉우리에 올랐다. 작년에 여기에 왔을 때는 한라산 백록담이 바로 가까이 보이고 서귀포 시가지와 앞 바다의 섬들이 장관이었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 한고 오름을 내려오다가 다시 그 몽골 친구를 만났다. 이번에는 자진해서 자기가 말을 타는 것을 보여주겠단다. 승마장에서 길들여진 말이 아니고 야생으로 고삐도 없는 그것도 커다란 호마를. 사실 이런 이벤트를 연출하는 것은 같이 일하는 영감님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말이 날뛸까봐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달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고장의 전형적인 말테우리를 보는 느낌이다.
사진을 찍어주고 내려오는데 자기도 사진 한 장 가졌으면 좋겠단다. 아마 고향에 가서 자랑을 하고 싶었겠지. 사진을 전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전해주는 방법이 여의치 않다. 다만 우리 인정 많은 앞장이 어떻게든 전해줄 모양이다.
약속한 점심 먹을 시간까지는 40분 정도 남아있어 우리는 돈내코 계곡으로 내려갔다. 평일이고 성수기가 지나서인지 한적한 편이다. 맑은 물만이 소리 내며 매끈한 바위 사이를 흐른다. 모두들 환성을 지르며 서둘러 신과 양말을 벗고 발을 물에 담그기 바쁘다. 야! 이 시원한 느낌! 발에서 전해지는 이 시원함이 소름이 되어 전신을 감싼다. 옷을 벗고 풍덩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유혹이 샘솟는다. 그러나 오늘은 참기로 했다. 용감한 친구는 웃통을 벗어던지고 등물을 해달라고 마누라를 불러댄다. 내년에는 오름 대신 돈내코 일정을 하루 넣어야겠다. 하루를 시원한 계곡에서 보낼 수 있게.
점심은 돈내코 유원지 내에 있는 식당에서 토종닭을 먹었다. 건물 뒤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단체손님을 받고 있었다. 풀모기가 달려드는 것 말고는 시원하고 좋았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 우리의 앞장 부인이 시원한 수박을 얼음에 채웠다가 손수 가지고 오셨다. 우리 오름 모임에는 처음이다. 아직 현직에 있는 관계로 한번도 오름에 참석 못하여 우리의 앞장을 외롭게 하더니 오늘 드디어 앞장이 짝을 채웠다. 그래서 오늘 앞장이 기십(?)이 보통이 아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오름을 오르고 있으면 언젠가는 같이 할 날이 있을 것이다.
오늘 오름에서 만난 몽골인하며 시원한 돈내코 물에 발 담그고 앞장 부인까지 함께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다음 목요일이 기다려진다. (2006.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