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44주년(2010년) 중앙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 / 박성현
폭염 / 박성현
아버지가 대청에 앉자 폭염이 쏟아졌다. 족제비가 우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맑은 바람에 숲이 흔들리면서 서걱서걱 비벼대는 소리라 말했다. 부엌에서 어머니와 멸치칼국수가 함께 풀어졌다. 땀을 말리며 점심을 먹는다. 아버지의 눈을 훔쳐본다. 여자의 눈을 쳐다보면 눈이 뽑힌다는 아랍의 무서운 풍습을 말한다. 석류가 터질 때 아버지는 다시 아랍으로 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빗장을 단단히 채우고 방을 나오지 않았다. 세밑까지 어머니는 화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기다리면 착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내게는 마음이 없고, 문도 없었던 겨울이었다.
한낮 / 박성현
버스가 서울역사발물관 앞에 멈췄다. 된장국 냄새가 솔깃하다. 골목을 돌고, 다시 골목 끝으로 가면, 저편에 집 한 채 기우뚱 있다. 영산홍이 피고, 떨어졌다가 다시 피는 5월에도 그 집은 비스듬히 서 있다.
녹슨 파란색 철제 대문을 지나면 텃밭 같은 마당에 큰 개 한 마리 햇볕을 쬐고 있다. 몇몇 노송이 한 세월 돌아가면서 입고 다녔던 장삼처럼 곱게 펴져 있다. 시멘트 담 가까이 돋아난 풀잎이 흔들린다. 허기진 마음이 풀잎을 따라 바닥으로 잠긴다. 풍경 소리가 난 듯했으나 바람이 항아리를 울리고 간 소리다. 항아리에는 된장이 익어간다. 대청마루에 모시적삼을 입은 노부부가 나란히 세모잠을 잔다. 수백 년 전의 기억은 모조리 잊히지만 한낮에는 늘 되살아났다.
우체부 김 씨가 등기소포를 가지고 초인종을 누른다.
박성현 시인 1970년 서울 출생. 건국대 국문과 박사. 서울교총 근무. 서울 교대 출강.
[당선 소감]
나는 더욱 낮아지고 치열할 것이다 문 밖에 햇빛이 울창하다. 햇빛의 비늘을 들추며 바람이 지나간다. 바람을 만졌으나 흩어지며 사라졌다. 바람과 어긋난 것이다. 못내 아쉬운 마음이다. 저 문을 들고 나는 것은 바람뿐일까. 그것이 궁금하여 신문을 접고 밖으로 나간다. 바람은 온갖 모양으로 거리를 떠다닌다. 살구나무에서 꽃이 피고 질 때도 바람은 제 속살을 들이밀고, 녹슬어가는 자전거에도 바람은 있다. 그 바람을 보는 내내 눈이 아프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이승의 온갖 냄새를 맡는다. 도처에 냄새가 있다. 냄새는 바람 속에서 길을 내고,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 냄새의 끝에 가만히 손을 댄다.
또한 소리도 있다. 고추가 붉게 말라가는 소리, 나무그늘이 펼쳐지는 소리, 감자가 주춤주춤 꽃을 밀어내는 소리. 나는 소란스러워진다. 많은 소리가 한꺼번에 멈출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귓속에 담아두었던 두툼한 소리의 책들을 꺼낸다.
시가 되지 못하는 말은 없고, 시가 아닌 말도 없으므로 세상은 시로 가득하다. 내 안에 길을 내고 나를 관통했던, 모든 이름들을 하나씩 부를 것이다. 그 이름들이 형상을 가지고 불쑥불쑥 자라도록, 나는 더욱 낮아지고, 치열할 것이다.
늘 내 등의 밭을 가꾸시는 부모님께 영광을 돌린다. 바람과 냄새, 소리가 시가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김영철 선생님, 말이 익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신 고창운 선생님과 김진기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글과 삶을 나눈 건대 글꾼 친구들과 이안 형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이문재 선생님과 장석남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시에서 났으니, 나는 시에서 피고 질 것이다. 오늘은 나의 아내, 변영수에게 희고 눈부신 꽃을 바쳐야겠다.
[심사평]
시적 내공 엿보인 작품세계 펄떡이는 자기 색깔 키우길
신인들의 작품을 앞에 놓고 있으면, 회를 뜨기 위해 펄펄 뛰는 생선을 도마에 올려놓은 기분이 되곤 한다. 벅찬 의욕에 덤비고는 있으나 쉽게 어찌 해볼 수 없는 경우다(끝내 생선회를 뜨는 사람은 아니므로 오해 마시길!). 난감할지언정 싱싱한 비린내는 정신적 활기를 북돋우는 농염한 매력이므로 문제는 늘 생선의 선도에 있게 마련이다.
본심에 올라온 시들에 대한 첫인상은 한꺼번에 막 출하된 ‘양식 생선’들 같다는 의견이었다. 미리 수요를 예측하고 있는 듯한, 적당히 시류에 맞춘 패턴이 눈에 거슬렸다. 제각기 자라온 작품들, 가두리의 흔적이 없는 ‘자연산 활어’가 점점 드물어진다고 진단했다. 거듭 살피는 과정에서 오래 아가미가 멈추지 않는 시들이 남았다. 이해강, 박성현 두 분의 시였다. 이해강 씨의 장점이 박성현 씨에게는 없었고 박성현 씨의 장점이 이해강 씨에게는 없어서 선뜻 택일하기가 어려웠다.
이해강 씨는 응모작들이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 문제의식도 건강했고 대상을 장악하는 힘과 언어 감각도 기성 시인 못지않았다. 그런데 지나치게 안정적이라는 것이 흠결로 지적되었다. “바람의 마찰음이 신음소리를 내며 조여진다 엎질러진 담쟁이 넝쿨을 끊으며 흰 점이 맹렬하게 뚫리고 있다”(‘터널’)와 같은 수사의 과잉도 단점이었다. 신인은 도약대를 밟고 뛰는 존재이므로 그만큼의 새로운 높이가 필요함을 새겨주시길 바란다.
반면 박성현 씨는 지나치게 ‘다양’했다. ‘소행성 B1023'과 같은 SF적 요소에서부터 ’봉화 가는 길‘ 같은 전통 서정시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소품에서부터 장시에 가까운 호흡까지 보여주고 있어 잡식성 어류의 왕성한 소화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습작기가 매우 성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편편마다 내구력도 뛰어났다. 지면에 발표되는 두 작품이 얼핏 서정 소품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박 씨가 갖고 있는 시적 역량이 의심되진 않았다. 이번 당선이 자기 목소리를 분명하게 설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본심에 오른 응모작 대부분이 최근의 시적 유행에 편승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가두리’를 스스로 어떻게 벗어나는가에 집중해야 하며, 과연 ‘벗어났는가’에 대해서도 깊이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밝혀둔다. 모여서 길러지는 가두리는 결코 바다가 아니다. 넓고, 깊고, 큰 바다는 가두리 밖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해강 씨의 응모작을 최종적으로 내려놓을 때 매우 안타까웠다는 사실을 밝히며, 권혁진, 정수연 씨에게도 정진을 당부드린다.
심사 : 이문재, 장석남
〈시 본심 진출작〉 * 권혁찬 ‘저장고’ 외5편 * 김 현 ‘코끼리 구름 선인’ 외4편 * 류성훈 ‘월면 채굴기’ 외5편 * 박성현 ‘한낮’ 외5편 * 박진섭 ‘기형 圖’ 외4편 * 백연주 ‘순장의 길’ 외4편 * 성은주 '시끄러운 靈‘ 외4편 * 이해강 ‘옆구리’ 외8편 * 정수연 ‘슬픔이 돋아나는 속도’ 외5편 * 정태균 ‘손톱이 자라는 시간’ 외6편 * 최 설 ‘새장 속의 새’ 외5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