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고가 탐방은 동구 둔산동 경주최씨 세거지의 백불고택(百弗古宅)이다.
백불고택이 있는 마을은 옻나무가 많아 ‘옻골(漆溪)’이라 일컫기도 한다.
경주최씨 광정공파(匡靖公派)의 후손이 모여 사는 곳으로, 조선 중기 때
학자 대암(臺巖) 최동집공이 1616년 이곳에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됐다.
세거지는 종가인 백불고택을 중심으로 보본당(報本堂), 동계정(東溪亭),
집안의 사당인 가묘(家廟), 집안에 전해오는 전적과 유품을 전시한 숭모각,
20여채의 조선시대 가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거지로 가는 길은 동구 방촌동 방촌시장에서 맞은편 동촌 비행장 가는
방향으로 안내판을 따라 한참을 가면 해안초등학교가 나오고 거기를 지나
골짜기로 들어서는 숲이 보이면 이곳이 경주최씨 세거지 초입이다.
대구 시내와 비교적 가까운 데다 도로, 등산로, 산책길이 갖춰져 있는 등
잘 정비· 보존돼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특히 주말엔 가족단위로 고가탐방과 민속놀이체험을 즐길 수 있다.
대구시에서 문화재해설사까지 파견하고 있어 단체 손님이면 친절하게
안내받을 수 있다.
마을 주위에는 거북의 옆모습처럼 생긴 산자락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뒷산 봉우리가 마치 살아 있는 거북과 같다 해서 이 봉우리를 ‘생구암(生龜岩)’이라 부른다.
마을 어귀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숲이 울타리처럼 되어 있고, 좀 더 걸어가면 수령 350년의
거대한 회화나무 두 그루가 높게 서 있어 마을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 백불고택(百弗古宅)
백불고택은 조선 영조 때의 학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 선생(1705~86)의 종택이다.
조선 인조 때 대암 최동집 선생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지은 주택으로 400년 가까이 되어
가는 주택이다.
1982년 3월4일 대구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된 후 2009년 6월19일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261호로 지정된 이 고택은 14대를 면면이 이어온 경주최씨의 주거 공간이다.
최흥원 선생의 아호 ‘백불’은 ‘백부지(百弗知) 백불능(百弗能)’에서 취하였다.
즉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아무 것도 능하지 못하다’는 겸양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백불고택 현판이 걸린 사랑채 대청에는 수구당(數咎堂·최흥원의 첫 아호)이란 편액도
걸려 있다.
백불고택은 현재 대구지역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694년(숙종20)에 지은 ㄷ자 형의 안채와 1905년(고종42)에 지은 一자 형 사랑채로
이뤄져 있는데 조선시대 양반건축과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최흥원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태초(太初) 혹은 여호(汝浩), 호는 백불암. 일찍이 이상정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는데 1778년(정조 2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교관
(參敎官)이 되었고, 1782년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를 거쳐 1784년(정조 8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좌익찬(左翊贊)이 된다.
어려서부터 침식을 잊을 정도로 학문연구에 열중하여 후에 ‘칠계(漆溪)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하여 규약을 세워 강학과 근검으로 저축에 힘쓰게 하고
선공고(先公庫), 휼빈고(恤貧庫) 등을 두어 생활 안정을 얻게 하였다.
이것이 당시의 유명한 ‘부인동규(夫仁洞規)’였다.
죽은 뒤 1789년(정조 13) 효행으로 정문을 세웠고, 이듬해에 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이 있다.
◆보본당
사랑채 동쪽에 자리한 보본당은 1742년(영조 18년)에 세운 재실이다.
‘보본’이란 조상님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의미이다. 6·25전쟁 당시 임시학교로
활용된 적도 있다고 한다. 그 뒤편에는 가묘와 별묘의 사당 2동이 담장 안에 같이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실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반계 류형원의 ‘반계수록’을 고쳐 쓴 곳이다.
1770년 백불암이 영조 임금의 명을 받아 이곳 보본당 서쪽 방에 교정청을 설치하고
최초의 교정본을 완료했다고 한다.
◆동계정
동계정은 종택 동쪽 개울가에 세워진 건물로, 백불암의 아들인 동계 최주진 선생의 학문을 기려
세운 정자이다. 자손들의 강학 장소로 이용돼 왔으며, 담장은 개울과 접하고 산자락 아래에 있어
풍광이 아름답고 운치가 있는 건물이다.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요즘 전통예절과 민속놀이 체험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어 고가의 활성화에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
동계정이 선 곳은 원래 동산서원이 있던 터이며,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헐리면서 재실 목재로
동계정을 건립했다고 한다.
◆정려각
마을 초입에 있는 정려각은 백불암의 효행을 기려 선생의 사후인 1789년 사라에서 지은 전각이다.
정려각 안에는 정조가 하사한 홍패가 걸려 있다. 정조가 백불암의 업적을 칭송해 하사한 문서를
비롯해 종가에 전해 내려오는 고서와 호패,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로 만든 성학십도 병풍, 제기 등
많은 유물이 있는데, 이 유물들은 종가 서편에 위치한 숭모각 안에 진열되어 있다.
◆숭정처사 유허비
숭정처사(崇禎處士) 유허비는 대구시 동구 용수동에 있다. 이 비는 조선 효종의 대군사부인 최동집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려 세운 유허비로,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찬하였으며, 영조 40년(1764)에 시냇가 자연석
바위에 새긴 것이다.
동화사와 갓바위로 가는 갈림길인 백안동을 가기 직전 왼편으로 부인동으로 가는 길목에서 차로 약 5분 정도
가면 왼편 개울가에 있다. 이곳에서 최동집이 말년을 보내며 은거하였다.
최동집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진중(鎭仲). 아버지는 현령 최계(崔誡)이며 한강(寒岡)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에 진사 3등 51위로 합격하고, 참봉에 제수되어
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뒤에 팔공산 농연(聾淵)가에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대암은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으로, 이후에는 효종의 스승으로, 말년에는 처사의 삶을 살았다.
대암의 삶은 그의 5세손인 백불암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백불암은 효자로 유명했으며,
지금의 용수동 부인동 일대의 주민을 위해 ‘부인동 동약’을 만들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였고
‘농연서당’을 짓고, ‘숭정처사유허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연호로 대암이
명나라가 망하자 이곳으로 들어와 은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자연석 비석으로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예다.
종가를 수호하면서 선조들의 업적을 이어가는 일은 오늘날 어느 종가마다 느끼는 무거운 책무다.
시대가 변하여 가치관이 변하고, 고택이나 유물을 보관해 나가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에,
국가나 지방에서 적극적으로 힘써야 할 것이다.
옻골은 현재 15세 최진돈 종손이 살고 있다. 줄곧 백불고택 사랑채에 기거하다가 얼마 전에
마을 중앙에 ㄱ자 형태의 한옥을 새로 지어 차종손과 함께 생활을 하며 접빈객하고 종가의
유물들을 보존해 나가고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반갑게 맞이해 주시면서 여러 가지 집안
얘기와 안내를 해 주셨다. 사랑에서 차를 한잔 마시면서 보니 방안에 액자 2폭이 걸려 있었는데
종손의 부친이신 백헌(白軒) 최병찬(崔秉瓚) 선생의 필치다.
‘世不我容 知我者天(세불아용 지아자천·세상이 나를 용납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것은 하늘이다).
동방금석문연구회장·능인고 교사 jiju222@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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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정, 동계정 편액, 백불고택 편액(위에서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