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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진주강씨(晋州姜氏)
【시조】강이식(姜以式)
【인구】966,710명 (2000년 현재)
【주요파】▲박사공파 ▲소감공파 ▲시중공파 ▲은열공파 ▲인헌공파
우리나라 모든 강씨의 시조는 고구려 때 용장 강이식이다. 고구려 영양왕 8년(서기 597년) 중국 수나라는 고구려에 국서를 보낸다. “상국(上國)인 수나라에 지성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는 방자한 내용이었다. 왕은 이에 대한 화답을 논의했다. 이 때 강이식은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왕은 이를 흔쾌히 받아 들였고 강이식은 정예병력 5만명으로 수나라 군사 30만명을 요동땅에서 격퇴한다. 그는 또 살수대첩 때 을지문덕과 함께 수양제의 1백만 대군을 무찌른다.
해동의 명장이라 일컫는 귀주대첩의 강감찬 장군과 자주대첩의 강민첨 장군은 진주강씨를 빛낸 인물들이다. 이들의 후손들은 후에 ▲명장파를 이룬다.
진주강씨는 ▲명장파와 고려 원종 때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강계용과 사도소감 강위용, ▲문하시중 강원용 등 3파가 진주강씨의 3대 산맥을 이룬다.
강희안과 강희맹 형제는 조선 초기 진주강씨가 배출한 대문장이다.
강희안은 세종 때 집현전 직제학으로 정인지, 성삼문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다. 용비어천가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했으며 저서 “청천양화소록”이 있다. “산수인물도” 등 그림과 “강지돈령석덕묘표” 등의 글씨는 조선조 문화의 귀중한 보배다. 그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로 “시서화삼절”의 칭호를 들었다.
그의 아우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요, 서화가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고 예종 즉위년에는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진산군에 봉해졌다.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좌찬성에 오른다. 당대 으뜸가는 문장으로 사후에 성종이 서거정을 시켜 유고를 편찬케 했다. “사숙재집”과 “금양잡록” 등이 전해진다.
병자호란 때 적의 향도가 돼야 했던 불운한 무장 강홍립도 진주강씨의 후손이다. 1618년 명나라가 후금을 토벌할 때 명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원병을 보내게 되자 김경서와 함께 1만3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한다. 그러나 후금과의 접전에서 일부러 지는척 하면서 쉽게 항복했다. 남의 전쟁에 우리가 피흘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계속 억류당해 있다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향도로서 입국하게 된다. 그 바람에 결국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한다.
강세황은 정조 때 시.서.화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왕희지 등의 서체를 본떴으며 모든 서체가 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림은 산수와 사군자에 뛰어났으며 시풍은 독자적인 경지를 보였다. 저서 “표암집”이 있고 그림은 ”난죽도“와 ”묵죽도“ 등이 전한다.
강항은 정유재란 때 고향 영광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그 뒤 이충무공의 진영으로 가던 중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간다. 일본에서 성리학을 가르쳐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었다. 선조 32년에 석방되어 귀국한다. 그 뒤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여 수은집, 간양록, 문차록 등 저서를 남겼다.
근대인물로는 1919년 서울역에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토에게 수류탄을 던진 강우규의사는 근대 진주강씨 인물이다. 당시 60세였던 그는 거사 후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제목: 뿌리를 찾아서 2002.12.
진주강씨(晋州姜氏).
姜씨는 우리나라 성 가운데 여섯째 가는 대성으로 그 수가 백만 명에 가까운 96만 명(2000년 현재)에 이른다.
문헌상의 본관은 진주를 포함하여 금천(衿川), 안동(安東), 백천(白川) 등 9본이 있다.
그러나 모두 대종인 진주의 지파(支派)로서 오늘날 모든 姜씨들은 진주를 유일본으로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진주강씨의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모든 姜씨의 도시조(都始祖)가 된다.
진주강씨는 박사공파(博士公派)를 비롯 소감공파(少監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 인헌공파(仁憲公派) 등 5파가 있다.
이 가운데 인헌공파를 제외한 4파는 관향(貫鄕)을 진주로 했으며 인헌공파는 금천(衿川)을 본관으로 써 왔다.
시조 강이식은 고구려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였다.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8년(서기 597년), 5호16국과 남북조의 난세를 평정하고 한족(漢族)의 통일국가를 형성한 수(隋)나라는 북방의 강국 고구려에 국서를 보내왔다.
“상국(上國)인 수나라에 지성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는 방자한 내용이었다.
왕은 군신들을 모아 이에 대한 화답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姜장군은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답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를 흔쾌히 받아 들였고 장군은 정예병력 5만명을 인솔, 수나라 군사 30만을 요동땅에서 격퇴하고 개선했다.
그 후 장군은 살수대첩의 명장 을지문덕과 함께 양제가 이끄는 1백만 대군을 무찔러 다시 한번 기개와 용맹을 떨쳤다.
이같은 우국충절의 기개와 무장의 자존심은 진주강씨 후대에서도 숱한 장군을 배출했다.
해동의 명장이라 일컫는 귀주대첩의 강감찬장군과 자주(慈州)대첩의 강민첨장군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 두 명장파(派)와 고려 원종 15년(1274년) 통신사서장관(通信使書狀官)으로 일본을 다녀온 국자박사(國子博士) 강계용(姜啓庸)과 사도소감(司徒少監) 강위용(姜渭庸), 문하시중 강원용(姜遠庸) 등 3派가 진주강씨의 3대 산맥으로 그 후손이 번성, 1백만명을 육박하게 된 것이다.
조선조에만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상신(相臣) 5명, 대제학 1명, 원수 및 장군 25명, 명신과 공신 51명을 배출했다.
강희안(姜希顔)과 강희맹(姜希孟) 형제는 조선 초기 진주강씨가 배출한 대문장이다.
강희안은 세종 23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으로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
단종복위 계획에 관련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참으로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했다.
‘용비어천가’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했고 저서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이 있다.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등 그림과 “강지돈령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 등의 글씨는 조선조 문화의 귀중한 보배가 되고 있다.
그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로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의 칭호를 들었다.
그의 아우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요, 서화가이다.
세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고 예종 즉위년에는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진산군(晋山君)에 봉해졌다.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을 편찬했으며 병조, 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당대 으뜸가는 문장으로 꼽혀 그의 사후에 성종은 서거정을 시켜 유고를 편찬케 했다.
“사숙재집(私淑齋集)”과 “금양잡록(衿陽雜錄)” 등이 전해지고 있다..
세조 때 우.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던 강맹경(姜孟卿)은 젊어서부터 명재상 황희정승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강희맹의 아들이다.
병자호란에 적의 향도가 돼야 했던 불운한 무장 강홍립(姜弘立)도 진주강씨의 한 사람이다.
1618년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토벌할 때 명의 요청으로 조선에서 원병을 보내게 되자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부원수 김경서와 함께 1만3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다.
그러나 후금과의 접전에서 일부러 지는척 하면서 쉽게 항복했다.
남의 전쟁에 우리가 피흘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김경서 등 10여명과 함께 계속 억류당해 있다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향도로서 입국하게 된다.
그 바람에 결국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했으나 사후에 복관되었다.
강세황(姜世晃)은 정조 때 시서화(詩書畵)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글씨는 왕희지 등의 서체를 본떴으나 어느 서체에도 신묘의 경지에 들었다.
그림은 산수와 사군자에 뛰어났으며 시풍은 독자적인 경지를 보였다.
저서 “표암집(豹庵集)”이 있고 그림은 ”난죽도(蘭竹圖“와 ”묵죽도(墨竹圖)“ 등이 전한다.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姜碩期)는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예학(禮學)에 정통했다.
그의 딸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빈(嬪)이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후에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붙잡혀 같다가 서양문물에 관한 서적을 가지고 귀국했으나 왕위에 올라보지 못한채 귀국 두 달만에 죽고 말았다.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姜씨의 역사는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저서로 월당집(月塘集)이 있다.
강항(姜沆)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공조.형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정유재란 때 고향 영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충무공의 진영으로 가던 중 왜군에 포로가 되어 일본 대판(大阪)으로 잡혀갔다.
일본에서 그 곳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을 가르쳐 일본 성리학의 원조로 꼽히게 된다.
뒤에 경도(京都)로 옮겨졌다가 선조 32년에 석방되어 귀국했다.
조정에서 교수(敎授)에 임명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거절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 수은집(睡隱集), 간양록(看羊錄), 문차록(門車錄) 등 저서를 남겼다.
한말 김택영, 황현 등과 함께 삼대시인으로 꼽혔던 강위(姜韋) 또한 진주강씨가 배출한 인물이다.
강화도조약에 조선측 대표로 참석했고 청.일을 왕래하며 기우는 국운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외교가이기도 했다.
문무겸비의 가문으로 알려진 진주강씨는 일제 식민지 암흑기에 많은 독립투사와 항일운동가를 낳았다.
1919년 9월2일 서울역에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토(齋藤實)에게 수류탄을 던져 암살하려 했던 강우규(姜宇奎)의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당시 60세의 노인으로 사토의 살해는 실패했으나 수행원 등 37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후 피신해 다니다가 밀정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강인택(姜仁澤)은 3.1운동 당시 천도교 지하 운동원으로 함경도 지방 책임자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강원호(姜元浩), 강기동(姜基東), 강재천(姜在天) 등도 모두 조국독립에 목숨을 바친 의열(義烈)들이다.
강홍열(姜弘烈)은 3.1운동 때 영남 학생대표로 활약하다 상해로 망명, 의열단에 입단해 항일투쟁을 했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렀다.
강진해(姜鎭海)는 1931년 한국독립군 별동대장으로 지청천 등과 합세, 동경성(東京城) 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쳤다.
1924년 임시정부의 회계검사관과 의정원 의원 등을 지내면서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탄핵안을 제출했던 강창제(姜昌濟)도 근대의 인물이다.
진주강씨의 주요 집성촌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강화
△전북 순창
△전남 여천.영광
△경북 안동.상주
△경남 진양.의령.고성.사천.산청.남해.함양.합천
△북제주.남제주
△황해도 벽성.안악.연백
△평남 용강.덕천
△평북 박천.정주.창성.강계
△함남 정평.홍원.북청.이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