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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4년 6월 27일 토요정례법회 ○
☆ 청년 강연
청년 6단 차명섭 교우님의 '원불교를 만나서' 강연이 있었습니다.
★ 김제원 교무님 설법
반갑습니다.
7월도 8월도 아닌 6월인데,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가 되어서 지구환경 문제가 걱정입니다.
오늘 뉴스 보면서 수고하신 분들 참 손이 너무 많이갔고,
잠도 못 주무시고 또 어떤 사람은 월차를 내서 하루종일 편집하기도 하는 그러한 노력속에서,
뉴스는 일반법회 때에도 보고, 전국 교무님들도 다 보게 되신다.
교화로 잘 활용하시면 좋을 것 같다.
영미부 식구들, 그리고 권도훈 교우는 다음주에 뉴질랜드로 어학연수를 간다고 한다.
이번에 가면 한참 걸릴 텐데.. 수고하셨다고 박수 한번 쳐 주시기 바란다.
오늘 명섭 교우가 강연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교에 가면 조실 스님이 있고, 스님들이 앉아 계시다.
그래서 나름대로 견성한 스님이 있으면 많은 스님들 앞에서 문답을 한다. 그때 걸림이 없으면 인증을 받는다.
나는 원불교에서 말하는 지자본위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나는 명섭교우가 앞으로 큰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육신의 나이는 적지만, 마음의 나이는 또래보다 한두살이 아니라 매우 높은 마음의 나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무척 흡족하고 기분이 좋다.
본래 마음은 나이가 없다. 우리의 육신은 몇십 년 살고 간다.
오고 가고 하면서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 나이가 많다 적다 하는 것이지,
인과와 영생을 바라보는 원불교의 신앙인은 평등에 바탕한 차별, 구별로써 살아야 한다.
어린 놈이 폼잡는다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명섭 교우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어디에 가서나 그렇다.
우리 한국사회가 아주 못된 문화가 있는데 지자본위가 안되는 것이다.
프로야구 있는데, 실력이 나으니까 10년 밑이어도 연봉이 10배가 높다. 아무 할 말이 없다.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회사에서는 연봉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능력을 직장 상사에서 인정받는 만큼 연봉을 받는 것이다.
지자 본위 입장에서 그것이 맞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유교 문화, 차별문화, 차서 문화 덕분에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다.
여기에 처음 오신 분에게 나이가 몇 살이냐고는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이를 보아서 어린 것 같으면 맞먹어버리지는 않았으면 하였다.
내가 옛날에 전화를 받았었는데, 누구냐 그러기에 "간사입니다"라고 이야기하니, "응, 그러냐"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무식한 것이다. 언제 보았다고 그러는가.
전에 안철수 씨가 TV에 나온 것을 보았다.
고등학교인가 중학교 때에 택시를 탔는데, 늦게 일어나 지각할 뻔 한 아들에게 어머니께서 돈을 쥐어주면서 "잘 다녀오세요"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운전사가 "형수냐"고 물었다. "어머니입니다" 하였더니, 당신은 참으로 좋은 어머니를 만났다고 하였다.
이 생에는 어머니로 만났지만 영생에는 어떻게 만났을지 모른다. 내 아버지일수도, 할아버지일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봐야한다. 우리 대산종사님은 맞먹기를 잘 하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 친근감을 느끼고 사람들이 감동을 하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진리를 깨쳐서 성품에서는 구분이 없다는 것을 안 상태에서 친근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친근감도 없고, 또 진리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반말을 쓰면 상대는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명섭교우가 교당도 여기저기 다니고, 초등학교 때도 많은 학교를 옮겨 다녔다.
나도 아버지께서 선생님이었기에 자주 옮겨 다녔었다. 선생님 자녀들의 비애랄까.
부모님이 다 선생님인 경우에는 자녀들이 할머니나 다른 분들에게 키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명섭 교우가 아까 뒤에 썼는데 부모님 사랑을 많이 못받고, 기숙사에서 살아서 따뜻한 정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것이 자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고 시골에서 고려대 올라온 것을 보면
아들을 키우기 위한 지능계발을 위한 책, 장난감 등 교육의 기회를 따로 부여받았을 텐데, 그것을 몰라서 원망하고 아쉬워한다.
우리는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여기서 좀 더 못해서 그것을 아쉬워 한다.
중생들은 열 번 잘해주다가, 한번 잘못해주면 원망한다.
그런데 불보살들은 어떻게 되는가, 십에 육만 맞아도 감사생활 한다고 한다.
사실은 십에 육이 맞은 것이 아니라, 육을 하려다 보니 사를 못한 것이다. 그것이 이치다.
이것을 하려다 보니 저것을 못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과연 그런 사람이 어디 있으며, 그런 일이 어디에 있는가. 전체를 보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명섭 교우가 변화된 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었다. 짜증나고, 원망한 것들을 다 조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학원을 다니며 영어실력이 늘거나 수학문제를 풀다보면 재미가 있지만, 마음은 묘하게 잘 보이지 않는다.
부모나 대종사님 은혜 속에서 내가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되고,
내 마음이 원만해 지고 나름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것을 잘 모를 뿐이다.
그래서 대은을 무은이라고 한다.
조카들이 돈을 주면 삼촌 최고라고 한다. 그러나 그 엄마가 더 큰 은혜인줄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스승님의 은혜에서도 또는 마음공부에서도 여러 원리, 효과 등에 대하여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 여학생 옆에 같이 안 앉았다면, 기도를 안 하였을라나.
기도는 진심으로 하면 효과가 반드시 있다. 그러나 결과는 진리에게 맡겨야 한다.
첫 만남에 내가 촌놈이라고 해서 섭섭했나 보다. 친근하기 위한 농담이었는데...
나는 명섭 교우를 평소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대학 1학년이면 무슨 생각하는가.
드디어 합격했다. 내가 연애도 하고, 가고 싶은 데도 가고, 부모님을 떠나서 마음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나는 명섭이를 보면서 그래도 잘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왜, 그렇게 하기 어렵다. 내가 대학교 1학년들을 16년간 보아왔다.
대학교 1학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명섭이 정도도 100명 중에 5명도 안된다. 전부다 와서 미꾸라지 같이 빠진다.
과외, 시험공부, 알바, 여자친구, 집에 가야 한다, 몸이 안좋다, 레포트가 많다, 온갖 핑계들을 대면서 다 빠져나간다.
내가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되었다.
명섭교우가 도종인가, 즉 도의 종자가 있는가 하였더니 어릴 때 회장도 했던 경험이 있던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게 자리잡고 있어서 빨리 안착했던 것 같다.
어릴 때 교화가 중요한다.
뱃 속에서부터, 태중에서부터 독경 목탁 경종소리를 들은 것이 중요하다.
처음 온 사람에게도 이제는 따뜻하게 해 줘야 겠다.
명섭 교우가 여성다운 면이 있는 것 같다. 칭찬을 즐긴다든가...
명섭 교우는 다른 짓거리를 별로 안하는 것 같다.
나도 별 일 없이 잘 다녔다. 학교에서는 정말 조용히 다녔다.
나는 법회 와서 앉아계시면서 조용히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언젠가는 나같이 이 법에 마음을 내면 전무출신을 할 수도 있고,
또 큰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듣고 듣다 보면 달라진다, 그것이 진리 아닌가 생각하였다
나는 여기 와서 헛 생각을 해도 좋으니, 일단 들어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법회 출석을 놓치면 심고도 안되고 연원의무도 안된다. 마음도 원만해질까? 스승에게 보은하게 될까? 그렇게 안된다.
가장 기본이 법회 출석이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무님 누구 알고 하는 것 필요없다. 법회 출석이 안된면 안된다.
내가 엊그저께 교회 테이프를 들을 적이 있다.
미국에서 교회를 다니는 교회 신자가, 영국에 출장을 갔다가, 예배를 보러 미국까지 간 것이다.
나는 그럴 것까지 있느냐 생각하다가,
당대에 군산에 계시던 희산님이 생각이 났다. 당시 태전약품이라는 약품 도매상을 하였다.
서울에 왔다가도 법회에 빠지지 말라는 정산종사님 말씀을 듣고, 법회 보러 군산까지 내려갔다.
그 분은 살아계셨을 때 인정받은 출가위셨고, 얼마나 많은 교당에 희사를 하였는지 모른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딱 한 번 빠지셨다.
당신 자식은 서울에 보내 냉방에서 공부를 시켜도 교무님들 어디 불사한다고 하면 다 손에다 쥐어주어 보냈다.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가!
신심, 그리고 진리를 가늠잡은 마음에서 나온다.
현실 세계를 진리적 가치관에서 잡는다.
진리적 시각에서 바라본다.
현실적 시각과 진리적 시각이 같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너무 다르다.
현실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리적으로는 정반대인 경우가 너무나 많다.
아까 대학선방도 다녀오셨었는데, 금년 여름에는 따로 훈련을 나지 않았었는가.
만덕산이라도 다녀오기 바란다.
군대가기 전에, 대학 1,2학년 때 교당 훈련도 나지만 다른 훈련도 나시기 바란다.
절에 템플 스테이도 좋으니 가보기 바란다.
명섭 교우는 처음에 왔을 때는 그렇게 피부가 거칠었었다.
그리고 어두운 기운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기운이 참 좋다.
이것이 그대로 본인이 말한 것이다.
내가 얼마나 화내고 피폐하고 다혈질이었는데, 그것이 바뀐 것이다.
그런데 사은의 은혜를 배우니 감사생활이 된 것이다. 마음이 달라지니 얼굴이 바뀐다.
그러니 눈빛 생각도 바뀌고 피부도 달라진다.
내가 우리 친구들을 만나면 맞먹을 수가 없다. 형님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예전에는 내가 나이먹게 보였었는데 지금은 친구들을 보면 내가 형님이라 해야 할 정도이다.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 공부를 하면 거친 마음이 보드라워지고, 기본적인으로 화나는 확률이 덜어지는 것이다.
화가 나기는 난다. 그러나 났을 때도 다르다.
그 나는 마음을 바라보고, 나 지금 화났네 하고 대화할 수도 있고, 그 마음을 떨칠 수도 있다.
남 이야기하듯이 바라볼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공부인 것이다.
그래서 바로 본래 마음을 찾아올 수도 있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 공부인의 차이점은 화가 날 수 있다. 그러나 다른사람보다 얼른 심신작용을 찾아낸다.
보통 사람은 창피해서 미안하다고 말 못하고, 또 어른들은 싸우면 일생 안 봐버리는 경우도 많다.
형제간도 그러한데, 친구간에는 더 그러할 것이다.
우리 마음에 본래 그러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본래 마음자리 가버리면 어떻게 되나?
나라는 자존심이 없으니 고개를 얼만든지 속여도 관계가 없다.
나라는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도 안나오는 것 아니냐.
그러나 나를 알면 다른 이에게 사과도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존심이다.
우리 명섭 교우가, 아까 엄마하고 차 타고 가면서 엄마가 옛날같이 하니까,
마음 속으로 나무아미타불 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거친 마음을 계속 하면 힘이 붙는다.
우리가 마음의 유연성을 갖자는 것은 거친 마음은 녹아나고, 선심에서 강력한 힘을 쓸 사람은 쓸 수 있다.
권투를 잘 하는 사람은 상대가 흔들흔들하면 소나기 펀치를 날릴 수도 있다. 우리의 마음도 똑같다.
우리의 마음도 선심일 때는 강하게 쓸 수 있다.
그러나 똥고집 부릴 때, 성질 났을 때는 유들유들하게 바꾸어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보은하고 베풀 수 있는 마음, 마음은 유연해야 한다.
가장 이 세상에서 부드러운 것?
물과 공기다. 그래서 마음이 허공이요, 하늘이라 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대문닫은 마음, 철석같이 굳은 마음인가.
아니다 가장 부드러운 공기와 같은 마음이다.
얼마든지 같이 참여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이다.
안되는가, 아니다.
오빠야, 좀 착해진 것 같다.. 이것이 두 동생이 한 말이라고 한다.
박수 한번 쳐주시기 바란다.
가장 인정받기 어려운 사람이 바로 동생이다.
인정받기 쉽지 않다.
그래서 그만큼, 스스로 변화가 되니 그렇게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본인은 지독한 인과의 고리, 악순환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악순환, 엄마와 아들이 치고 받고 하면서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서 본래의 주제는 저리 가 버리고 중간의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전혀 다른 것을 가지고 하고 있다.
우리 인생도 그러한다. 선순환을 시킬 것이냐. 악순환을 할 것이냐.
우리가 그 마음을 어떻게 처리하면서 알게 된다.
그래서 원불교를 신앙하면 부정적인 생각이 줄어드는 것, 이것이 사실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다.
부드러워지고, 안 보이는 은혜가 보인다. 거칠던 것이 부드러워진다. 이것이 원불교 마음공부이다.
은혜가 보이고, 또 하나는 마음이 비워지고.
그런데 수양과 연구, 신앙이 빠지면 묘하다.
마음은 잡으면 있어지고, 놓으면 없어진다 하지 않았는가.
길원이가 어제 뉴스 편집하는데 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 화면이 무슨 화면인지 모르면, 먼저 짜증부터 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로 무슨 화면인지를 내라. 일반 훈련인지, 아닌지"
우리의 마음이 각박하다.
우리가 마음을 비울 줄 모르고 각박하게 살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이상하게 산다.
내가 군대에서 수색소대 근무했었다.
특수 특공훈련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힘든 훈련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처음부터 끝말이 다 욕이다. 그래서 내가 이등병 때 첫휴가를 받아서 나왔었다.
광주 충장로에 예전과 같이 서 있었는데, 갑자기 드는 생각이 아 누구하고 싸우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누구에게 욕도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내가 놀라버렸다.
우리가 어떻게 단련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진다.
우리가 신앙과 수행이 달라지면, 입도 거칠어지고 생각도 거칠어지고 전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순간 경계따라 마음 챙기는 것만 마음공부가 아니라, 평상시에 은혜를 계속 되뇌이는 것이다.
그러면 경계를 맞이할 때에 부정적 요소가 자체가 줄어든다.
평상시에 각박한 마음으로 사는 것과, 평상시 편안하고 은혜로운 마음은 이미 삶 자체가 너무나 차이가 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아까 책을 보고, 강의도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결국은 교리와 연결되더라 하는 것을 안 것도 똘똘하다. 사실은 진리가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그리고 마음의 원리가 뻔하다. 이치도 일도 마찬가지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핵심의 근간, 대소유무의 이치, 시비이해의 일, 그러한 관계성 속에서 우리가 해놓은 것이 교리가 아니다.
수행을 한 사람이 삼학을 보면 환장할 것이요, 철학자가 진리의 세계를 보면 좋다고 하리라 하였다.
원불교를 아는 사람은 한 사람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좋아한다.
일원상의 세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그 안에서 나온다. 우리가 공부를 하면, 다른 것은 참고만 하면 된다.
여러분들은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연계하여 하면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대 국문학과 나온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이것을 알면, 원불교 공부가 너무너무 재미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친구들을 보면 너무나 철딱서니 없어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교화의 눈, 따뜻한 마음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 중요하지, 안되겠다 하고 재단하는 눈으로만 봐서는 안될 것이다.
그 다음에 솔직하게 이야기를 잘 해 놓았다.
그대로 이야기해 보겠다.
과거의 소원은 사회적 성공, 부모님 잘 모시고, 내가 낳은 자식에게 좋은 환경 마련해 주는 것,
내가 남에게 피해 안주고 사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소원 아닌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나 이제 서원이 마음공부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것으로 되었다.
평상시에 나태심은 똑같이 둔다면?
공부는 안하고 교당도 안오고 나태심은 똑같이 둔다면? 아무것도 안된다.
학교공부, 나태, 교당.
우리 공부는 나태는 빼 버리고, 학교공부와 도학공부를 병진하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이 없는가? 아니다. 사실은 많다.
대부분은 바쁘다고 하는데 다 시간이 있기는 하더라.
나는 명섭이를 보면서,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니는 사람이, 프로그램, 시설, 눈높이 불공이 없이
교당에만 나오라고 한다면 나부터도 안 나오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만약 이 친구가 고원회나 교당에 왔으니 원불교에 나왔지, 아니라면 아 아름다운 원불교 추억이여, 할 것이 아닌가.
내일 삼성교우가 강연한다.
인천에서 회장하고 교화 엄청나게 잘 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금년에는 그렇게 잘 아니하더니, 마누라를 잘 얻어서 오게 된 것이다.
아내가 화요공부방에 더 열심히 나오니, 더 잘 나오게 되고, 금년 목표는 참 주인 교당의 주인이 되자고 하였다.
뿌리를 보았더니 그렇게 열심히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몇년 전에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은빈교우를 잘 안 만났다면 아직도 안 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어린이 교화도 중요하지만, 중고등학교 교화도 중요하다. 여러분들이 노력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 한 사람 해준다 한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랬다 할지라도, 한 때 아무리 열심히 했던 회장이라도 연결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결혼도 잘 해야 하고, 다리 잡는 사람을 만나도 끌고 와야 하며,
안 나가려는데 느닷없는 사람이 나를 잡아서 교당에 나오게 할 수도 있다.
내가 좀 순진한가 보다.
무엇이 순진한가.
누가 나에게 그러더라. 그렇게 믿느냐는 것이다.
다니다가 떠난 사람이 많은데 그러게 믿느냐 하는 것이다.
교당 그 주인같이 하다가, 교당 안나온 사람 때문에 그것 때문에 아파버렸다.
자기 부모만 부모, 형제만 형제가 아니다.
그러면 잠을 못자고 몸사리를 치는 것이다.
그럴 것이 무엇 있는가. 그렇게 순진한가. 나는 모르겠다. 멍청한가. 순진한가.
그래도 나는 내생이라도 갚을 것이다 생각한다.
이 생에 내가 잘하면 나도 좋고 서로 좋은 것이다.
질문 있으면 해주십시오.
★ 질문과 답변
Q. 박순명 교우님 : 처음에 교당 나이 묻지 말라는 표현하셨는데 저는 나이를 물어서 나보다 크면 실수할 까봐 묻는 경우도 있다.
A. 교무님 : 나이를 묻지 말라는 표현보다는, 나이를 물어서 나이가 적으면 그것으로 맞먹으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여기는 남자도 여자도 거지도, 학벌 좋은 대통령도 다 하나다. 일원상 자리는 평등하다.
여기서는 다 부처님 대접 받고, 오직 남아있다면 지자본위와 공도자 숭배만 있는 그런 법당이 되야겠다는 뜻이다.
Q. 이지현 교우님 : 마음의 단계가 처음부터 온화한 태도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
A. 교무님 : 마음의 단계가 집심이다. 마음공부는 첫째는 집심, 둘째는 관심, 셋째는 무심, 이후는 능심이 된다.
처음에는 내 마음을 모으고, 그 다음은 내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타를 완전 비우는 것이다.
그 다음에 능심으로 선배에게 은혜도 베푼다.
이런 단계를 다 거쳐서도 하지만 능심부터 할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런 순이다. 그 다음에는 서로 얽히어 진다.
처음에는 일심이란 것에 집착도 된다.
아까 공부를 하다보면 관심과 집심으로 자기를 단련하다보면 외부로 차가워 지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기 교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내 마음을 막 챙기다 보니 밖으로도 요구하고 용납이 안되더라.
대산종사님도 예전에 총부에 담배 펴고 다니는 사람들을 다 몰고 다니셨다. 나이 드시니, 허허 왔는가 하셨다.
다 수행의 과정 중에서 그러한 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 사람이 저 단계구나 하는 것을 알고 이해하고 그 다음단계들을 안내해 준다.
원불교를 모르는 사람은 너 원불교 다니면서 뭐다 싶은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