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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활동명 |
태풍 매미로 무너진 하우스 복구를 마치고 | ||||
장 소 |
두리팜(우리하우스) |
참가자들 |
두리팜 가족 (엄마, 아빠, 나, 동생) | ||
활동기간 |
03년 9월 ~ 04년 08월 29일 |
준비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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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험 내 용 |
∼내가 어릴 때 아빠는 광양에서 직장 생활을 하셨다. 포항제철(주) 광양제철소 냉연부에 근무하셨다. 나는 광양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유치원을 다녔다. IMF가 시작되던 98년 2월 우리가족은 조성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이곳 조성에서 초등학교을 입학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빠가 서둘러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된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렇게 빨리 서둘러 이사하지 않고 이것 저것 준비하고 차분하게 이사해도 되는 것을 내가 초등학교를 광양 제철에서 입학하고 다니다가 이사를 하면 전학 왔다고 친구들이 따돌림 시킨다고 왕따 시킨다고서둘러서 이사를 했다고 하셨다. 우리 집은 시설하우스에서 토마토를 재배하고 있었다. 그동안 시골생활이 힘들고 어려운데 결국 작년여름 03년 9월 13일 태풍 매미가 우리집 하우스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하우스가 무너지던 날 비는 억수같이 오고 아예 양동이로 하늘에서 내려 붓는 것 같았고 태풍으로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불었다. 태풍의 힘은 정말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서있던 벼가 쓰러지고 가로수 가지가 부러지고 어떤 것은 아예 뿌리 체 뽑힌 것도 보였다. 가벼운 것들은 이리저리 날라 다녔다. 비록 차안에 있었지만 자동차가 휘청거릴 정도로 심하게 흔들렸다.
그날 나는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태풍에 무너지는 하우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날씨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과 손전등에 비친 하우스 멀쩡했던 하우스가 바람에 의해 쓰러지고 말았다.
나와 동생은 차안에서 있었지만 엄마 아빠는 비옷을 입고 손전등을 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하우스를 줄로 묶고 다니셨다. 나도 나가서 도우고 싶었지만 아빠가 차에서 나오지 못하게 해서 나가지 못했다. 태풍에 애들은 날려가고 위험하다고 그래서 동생과 차안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엄마아빠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서 사리지지 않고 항상 맴돌고 있다. 나는 하우스가 무너지면 엄마아빠가 의욕상실 하시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으로 알고있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위에 모든 분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빠는 이곳이 고향이 아니고 살던 곳도 아니고 주위에 알고 계신 분도 없이 시골 빈집을 임대하여 살고 그 땅에 하우스를 짓고 토마토를 재배하고 계셨다.
그런데도 아빠는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나와 엄마로 하여금 하우스를 다시 제건 하자고 하셨다.
6학년 2학기 때 나는 광양 중앙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야만 했다. 그것은 내가 조성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때 씨름을 했었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6학년 때는 공부만 했는데 그때 광양 중초에서 씨름선수를 모집한다고 우리학교로 공문이 왔었다. 운동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연락이 왔다고 했다. 씨름을 할 것인가 공부를 할 것인가 많이 생각했다. 나도 그랬고 엄마아빠도 그런 것 같았다. 처음에 하우스가 무너지기 전에는 아빠가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아빠는 영민이 생각 의견에 전부 맡기고 따른다고 하셨다. 나는 씨름이 싫었고 싫다고 했다.
6학년 여름방학 때 광양에서 감독선생님과 코치 선생님이 우리 하우스에 오셔서 아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다. 영민이는 씨름이 싫태요 안 한데요. 영민이는 운동선수 안 시킨다고 확실히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옆에서 듣고있었다.
감독님과 아빠의 실랑이가 끝났다. 감독님이 알겠습니다 아버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할수없죠. 하지만 이번방학 동안만이라도 운동삼아, 체력 단련도 시킬 겸 방학동안만 보내주세요 하셨다.
아빠가 영민아 방학 동안 만인데 네가 양보해라 하셨다.
나도 할수 없이 이번 여름 방학동안만 한다고 마음속으로 굳게믿고 그렇게 한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광양으로 갈 때는 싫어서 짜증을 냈었는데....
하우스가 태풍에 무너지고 비닐이 찢어지고 토마토 수확을 며칠 앞두고 고스란히 바람에 날려 보냈다.태풍은 우리가족의 보금자리를 모두 날려보냈고 하우스만 무너지고 비닐만 찢어진 것이 아니라 아빠의 희망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진 것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보았다.
그래 씨름이 싫으면 하지 마라 하셨던 아빠가 .......
하우스가 무너지고 난 후 아빠의 생각은 180도로 달라지셨다. 평상시 우리들에게 농담도 장난도 잘 치셨는데 웃음도 없이 표정이 많이 굳어 있었다.
내가 싫다는 씨름을 강요하셨다. 나는 완강히 반항했고 죽어도 싫다고 했다.
결국 아빠는 매을 들고 나를 때리며 울고 나는 맞으며 울고 엄마도 동생도 모두 울고 말았다. 하우스가 무너져도 울지 않았는데...
싫어도 어쩔수 없다 그냥 전학 가라 나는 그때 아빠가 왜 그랬는지 나중에야 알았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광양중앙 초등학교에 갔다. 그후 나는 광양 중앙 초등학교로 등교해야만 했다. 도착하고 나서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 도착해서는 싫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거기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할 시간도없이 바쁘게 생활하고 운동하고 지겨웠지만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다.
거기는 전교 학생수가 1,000명이 넘었다. 그렇게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서 벌써 12월까지 6개월이 지났다. 내가 씨름을 하면서 일주일마다 한번씩 집으로 오고 그랬다.
하지만 내가 버스를 잘 안타 봐서 처음에는 이 버스가 가는거 맞나 하고 두려웠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광양에서 버스를 타고 순천 터미널에 내려 조성오는 버스를 갈아타야만 했다. 운동으로 피곤해서 버스에서 잠을 자다가 순천 북부정거장을 시외버스터미널로 잘 못 알고 많이 떨어진 곳에 내려서 몹시 당황했었다. 하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여기가 어디에요, 시외버스터미널은 어디예요 물었을 때 친절히 길 안내 해주시던 아주머니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버스에 무정차, 직통, 순천 경유 여수, 나는 이때서야 이말 이 무슨뜻인지 알았다.
무정차, 직통, 경유.... 처음에혼자서 조성 ~ 광양, 광양 ~ 조성 왔다 갔다할 때 무척이나 두려웠고 겁도 많이 났었다.
그때는 이랬었지만 지금은 많이 타봐서 익숙해졌다.
나는 그곳 광양 씨름합숙소에서 아침에 5시에 기상하고 운동시작 하는 시간이 5시30분에 시작해 7시까지 운동을 했다.
8시에 학교가면 3시에 마친다. 다시 3시부터 6시까지 운동을 하고 저녁을 먹은 뒤 8시부터 10시까지 헬스장에서 기초 체력 단련을 했었다.
그렇게 운동을 하면서 기합도 많이 받고, 맞고 울었던 적도 많았다.
운동을 하면서 참고 견디자 이겨내자 그래야만 한다 혼자서 이를 악물고 운동에 전념했었다.
그런 어느날 추운 겨울날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저녁 훈련를 마치고 합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 아빠에게 연락이 왔다. 다시 조성으로 오라고 전화가 왔다. 영민아 씨름 계속할래 하고싶으면 계속하고 아빠는 전화로 이해 할 수 없는 말만 하셨다. 나는 그날 밤세도록 생각을하고 또 생각을 했다.
집으로 다시 전화를 했다 아빠 나집으로 갈래 그래 공부열심히 할거지라는 말만 하셨다. 방학을 3일 앞두고 였다.
다음날 운동장에서 체육활동을 하고 있는데 낮익은 트럭 한 대가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 아빠였다 많은 아이들 속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 하셨는지 그냥 지나쳐 교무실로 가셨다. 나는 교실로 가니 6학년 담임 김유연 선생님이 영민아 책가방과 소지품등 네것모두 챙겨라 하셨다.
정말로 아빠는 나를 데리려 오신 것 이였다.
전학 수속을 마치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조성으로 올 때 차안에서 아빠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참고 있었던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영민아 그동안 힘들었지 고생 많았다.아빠가 너에게 정말 못할짓을 했구나 미안하다. 그때 아빠와 엄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하우스가 무너져도 울지 않았는데...
싫어도 어쩔수 없다 그냥 전학 가라. 나는 그때 아빠가 왜 그랬는지를 이제야 알았다. 그 당시 집 전화도 요금이 미납되어서 끊기고, 핸드폰도 고객의 사정으로 라는 메시지가 나오는 것을 지금에야 알았다.
아빠는 더 이상 농촌에 희망이 없는 것을 알고 주변을 정리하고 탈농을 생각하고 계셨던 것을 그래서 내가 짐이되고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내앞날이 걱정이 되어서 지금보다 나은곳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는 곳으로으로 가서 공부하고 운동하라고 앞날을 위해서 였다고.... 말씀해 주셨다.
내가 광양에서 운동을 하고 엄마 아빠는 조성에서 조금씩 하우스를 복구하다가 가족은 어려울수록 뭉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를 다시 전학시키신 것 이였다
세월이 지나고 먼훗날 네가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가족을 인정하지 않고 원망할까봐 데리러 왔다고. 그리고 굶어도 가치 굶고 고생해도 같이 고생하자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다시 조성으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그리고 조성에서 졸업식을 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나는 졸업 여행을 가지 못했다. 광양은 1학기때 이미 갔다왔고
조성은 내가 전학 간 뒤 2학기때 수학 여행을 갔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좋은 경험을 했고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다짐 했다.
겨울 방학 때 나는 하우스 복구 하는 것을 도와 드리기로 했다. 복구시기는 겨울이라서 춥고 힘드니까 하기 싫어서 짜증도 냈었다.
같은 또래 친구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경험했다. 그때 전기 용접과 쇠파이프를 절단하는 것을 배웠다. 상당히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데 아빠는 나에게 상세하게 가려쳐 주셨다. 이렇게 하면 위험 하고 다친다는 것을 먼저 가르쳐 주고 용접과 파이프 절단 작업을 가르쳐 주셨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소리치고 야단도 맞았다.
이것은 아주위험한 것이므로 어설프게 하면 다친다고 그래서 어린애들은 절대로 못만지게 한다고하셨다. 만약에 이런 일을 건설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시킨다면 미성연자 보호법으로 사업주는 구속된다고 겁도주셨다.
아빠는 고등학교를 기계공업 고등학교를 나오셔서 이런일을 잘하신다.
아빠 고등학교 친구분인 상권이 아저씨가 하우스 복구일을 많이도와주곤했다.
상권이 아저씨도 직장에 다니시는데 시간만 있으면 오셔셔 복구일을 도와 주셨다.
아 그래서 친구가 소중한 것이구나 하는 것도 배웠다.
그렇게 하나하나 기둥을 세우고, 또세우고 해서 하우스 형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태풍으로 인한 쓰레기들이 남아있어 치우는데도 시간이 많이글릴 것 같다.
우리는 올해 큰집에 차래 지내로도 가지 못하고 설날 아침에도 복구 작업을 했다.
겨울 도 끝나가고 복구도 마무리되고 이렇게 해서 태풍으로 무너진 하우스는 외부의 도움없이 우리 가족의 힘으로 복구되었다. 상권이 아저씨와 엄마 아빠의 노력으로 태풍 이전의 상태로 복구 되었가고 있었다.
그렇게 또 4개월이 흘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도 열심히했다.
학교에서는 특별할동을 했는데 나는 요리부에 들어갔다. 요리부 보다는 운동을 좋아해서 운동을 하는부로 가고 싶었는데 요리부를 택했다. 이유는 태풍에 무너진 하우스 복구로 바빠서 식사를 같이 못하는 날이 많았다. 나와 동생만 먹는날이 많았다. 요리를 할줄 몰라 라면을 끓여서 먹곤 했는데 동생이 다른 것을 먹고 싶어했다.
김밥, 음식등을 맛있게 만들어서 먹었다.
그래서 학교 요리부에서 배운 것을 집에서 유용하게 써먹었다.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빠가 실망하시는 것 같았다.
더 열심히 해서 좋은결과 나올수 있도록 노력 할것입니다.
싹 정리하고 04년 3/20일 복구한 하우스에 다시 토마토 정식을 했다.
다행히 하느님도 우리가족의 고생을 아셨는지 작황이 아주 좋았다. 토마토도 많이 달렸다. 방송국에서 찰영도 왔었다. 아빠는 토마토 판매 방법을 바꾸어 파쎴다.
지금까지는 공판장으로 판매 하셨는데 올해부터는 전화로, e-메일로 판매하시고 있다.
지금은 전남 농업기술원 우수농장 홈페이지에 등록도 되어 있고 인터넷 다음 에
카페도 개설하여 판매을 하고 계신다.
카페가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넘어 도시와 농촌의 정을 나누는 마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라고 쓰여있다. 도시와 농촌의 중간역활을 ....
7/28일 이번 여름 방학 동안도 모든일을 그만두고 하우스일을 돕기로 했다.
마침 이때가 앞 작기 철거와 정식이 계획 되어 있었다. 방학동안에 그래서 또 보람 있는 일을 했다.
나와 동생이 한 일은 토마토 넝쿨 철거 작업, 바닥쓸기,청소, 모종심기, 물주기, 토마토 남은 것 처리하기등 모든 것을 했다.
토마토 심는과정 : 정식 → 물주기 → 가꾸기 → 수확 → 철거하기
지금의 토마토는 건강식품으로도 많이 먹고 있다.
2003년에 왔던 태풍매미에 하우스가 무너져 엄마,아빠가 아직도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다. 여름방학 18일 동안 다른 때의 방학보다 보람있는 방학을 보냈다.
하지만 한여름이라 하우스 온도가 45℃~ 50℃까지 올라같었다.
그래서 엄마 아빠에게 짜증도 많이 내면서 했다. 제일 힘들었던 일은 물주기와 바닥쓸기이다.
이유는 물주기는 무거운 호수를 끌고다니며 800평의 심어진 토마토에게 물을 줘야해서 힘들고 바닥쓸기는 45℃~ 50℃의 날씨에서 먼지가 나니까 숨을 못쉬어서 힘들었다. 거기에다 내가 먼지 알레르기 가 있어서 더 힘들었서다.
내가 이번 여름에 많이 탄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영원히 기억속에 남는 것은 우리가족의 다시 찾은 웃음과 희망이였다.
나도 씨름을 그만두고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동생 영현이도 공부도 잘하고 자기할일도 알아서 잘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가족은 힘들게 살고 있지만 희망을 가지고 엄마 아빠 나 그리고 동생
넷이서 열심히 살고 있다.
지금 현재 하우스에는 토마토가 들어 있습니다.
뉴스에 태풍이 올라온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작년 매미 생각이 난다. 매미와 비슷한 태풍 차바가 북상중이라고 했다.반경이 780km 나 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우리가족은 지금 비상이 걸려있다. 이번에는 일 없어야 하는데....
우리 농장 이름은 두리팜 이랍니다.
엄마아빠 부부라서 둘이, 아들이 둘이라서 둘이, 나아가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하는 둘이, 그래서 두리팜 (DURI FARM) 이랍니다~~~
두리팜의 토마토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큰아들 나 작은아들 영현이 이렇게 4명이 사 랑으로 심고 가꾸었습니다.
여러분께 사랑이 넘쳐 빨갛게 익은 토마토을 권해드립니다
우리 농장 홈피와 카페 주소을 공개합니다.
첫댓글 사진 잘 보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