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신론(讀史新論)_상세(上世) : 발해국의 존망
아아, 우리나라가 압록강 서쪽을 포기하여 적국에 내준 것이 어느 때부터 비롯하였는가?
그것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때부터였다고 하겠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발해의 대씨의 전해 내려오는 혈통을 미루어 보면 곧 그들은 우리 단군의 자손이며 그들이 통치했던 인민을 물어보면 곧 우리 부여의 종족이요 그들이 차지했던 강토는 곧 고구려의 옛 강토이니 대씨를 우리 역사에 기록하지 않으면 마땅히 누구를 기록할 것이며 대씨를 우리 역사에 기록하지 않으면 마땅히 어느 나라 역사에 기록하겠는가?
아아, 저 한 임금 한 조정을 위하여 하찮은 작은 절개를 기록한 것도 길가는 나그네의 입에 뻔질나게 오르내리며 역사가의 칭찬이 분분하여 수천 년 이후 사람들의 숭배를 받거늘, 우리 발해의 선왕은 고구려 멸망 후에 남은 수백 명의 군사로 백두산 동쪽에 우뚝 솟아 동쪽으로 신라를 적대하고 서쪽으로 중국을 적대하며 그 외에 또한 흑수말갈 거란 유연(柔然) 등을 적대하여 피나는 싸움 10여 년 끝내 허다한 적국을 물리치고 독립의 공을 이루고 면면한 역사를 3백 년이나 전하였으니 대중상 대조영 대무예의 그 인격과 그 역사가 과연 어떠한가?
그러나 우리나라 역대는 세는 자가 발해의 역대를 세지 않으며 문헌을 전하는 자가 발해의 문헌을 전하지 아니하여 발해국이라 말하면 흉노 거란 선비 몽고와 같은 종류로 보며, 대중상 대조영이라 부르면 묵돌 야율아보기 모용수 징기스칸과 동렬로 보아 분명한 우리 단군 후예의 한 영웅을 저들 오랑캐 족속 가운데의 영웅으로 아울러 웃으니 아깝다 저 대씨의 여러 왕들이 당시 조국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 헌신할 때 어찌 죽은 후의 명예를 구하였겠으리요마는 단지 발해의 역사가 전하지 않으므로 첫째는 국민들의 영웅 숭배하는 마음을 없애버리며 둘째는 후세 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왔던 강토를 망각하여 이로부터 대국이 소국으로 되고 대국민이 소국민으로 되어버렸다.
안정복이 우리나라 역사를 읽다가 태조 이성계가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여 둘러 뺄 때 멀리 나아가 요동과 만주를 병합치 못하고 그 후에 원나라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이 요양 지방 13주를 가지고 우리나라에 귀화하거늘 이것을 받지 않아 명나라에 귀화하게 했던 까닭에 압록강이 드디어 굳은 경계가 되어 천하의 약국이 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니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것이다.
대저 한 나라의 성하고 쇠하고 흥하고 망하는 일이 하루 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요 그 유래한 바가 반드시 먼 곳에 있으니, 결과만 보고 원인을 거슬러올라가 살펴보지 않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태조 이성계 때에 유익의 귀화를 받아들이지 않음은 그 후에 압록강 서쪽을 잃게 된 결과이거니와
“이러한 결과를 낳은 원인은 무엇인가”
하면 김부식이 역사를 편찬함에 발해국을 우리나라 역사에 싣지 않았음이 그 원인이라 하겠다.
당당한 고구려의 유민으로 고구려 옛 당에 자립한 발해국을 우리 역사에 기술하지 않고 압록강 서쪽의 천지는 누가 점령하든지 우리가 묻지 않았던 까닭에 수백년 이래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이나 눈에도 자기네 국토를 오직 압록강 동쪽의 당만이 우리 땅이라 하며, 우리 민족도 오직 압록강 동쪽 민족만이 우리 민족이라 하며, 우리 역사도 오직 압록강 동쪽 역사만이 우리 역사라 하며, 사업도 오직 압록강 동쪽의 사업만을 우리 사업이라 하였다.
이에 사상이 압록강 바깥에 한 발자국을 넘을까 경계하며, 자나깨나 압록강 바깥에 한 발자국 넘어설까 두려워하여 우리의 선조인 단군 부루 동명성왕 대무신왕 부분노 광개토왕 장수왕 을지문덕 연개소문 대중상 대조영 등 여러 성인 철인 영웅 호걸들이 마음을 다하고 피를 흘려 만세에 서로 전할 터전으로 우리 자손들에게 준 큰 토지를 남의 것으로 보아 그 아픔과 가려움을 상관하지 않았다.
이 대문에 고려 혜종 때에 거란이 대씨를 격파하여 전 만주를 점거하매 우리 단군의 발상지가 슬그머니 다른 민족의 손에 들어가니 무릇 우리 부여 민족이 각기 칼을 뽑아 들고 일어날 시대인데도 오히려 압록강 동쪽만 고수하여 조상들의 원수를 묻지 않으며 민족의 억울함을 생각하지 않으니, 그 까닭이 어디 있는가 하면 곧 김부식이 발해를 우리 역사에 기록하지 아니하여 그 땅이 우리 민족의 소유임을 알지 못한 때문이다.
그 후에 강감찬 강민첨이 거란과 싸워 그들의 20만 대군을 쳐부수고 추격하여 압록강을 쫓아가 이르렀을 때에 발해 유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일제히 분발하여 뛰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국의 병력이 이와 같으니,
우리들이 마땅히 이 때를 틈타 우리 조국의 마지막 힘으로써 거란을 격파하고 대씨의 사직을 재건함이 이 때가 아니겠는가?”
하고 즉시 발해의 동경을 다시 수복하여 국호를 재건하며 전후 수십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고려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 때야말로 우리 부여 민족이 승승장구하고 나라 안과 밖이 하나로 되어 단군의 옛 영토를 회복할 시대인데, 이 때도 오히려 압록강 동쪽만 고수하여 진취적인 사상이 없었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하면 곧 김부식이 발해를 우리 역사에 기록하지 않아 압록강 바깥쪽의 민족이 우리 민족과 같은 민족임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또 고려 말년에 이르러 우리 수륙군도통제 최영이 백전백승의 큰 위세로 요동과 심양을 함께 토벌코자 할 때가 곧 우리 부여 민족의 수백 년간이나 잃었던 옛 영토를 회복할 시대이거늘, 이 때에는 또한 국내의 권력다툼에 급급하여 압록강 바깥을 한 발자국도 찾아내 돌려받지 못했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하면 곧 김부식이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하지 않아 압록강 바깥 수십만 리 땅이 본래 우리의 땅인 줄을 알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김부식은 역사에 대한 식견이나 재주가 전혀 없어 지리가 어떠한지도 알지 못하며 역사의 관례가 어떠한지도 알지 못하며 자기나라의 높일만한 것도 알지 못하며 영웅이 귀중함도 알지 못하고 단지 허무맹랑하고 비열하며 전혀 생각해 볼 가치가 없는 얘기를 끌어 모아 몇 권을 만들고 이것을 역사라 하고 또한 삼국사라 한 사람이니, 역사여, 역사여, 이러한 역사도 역사인가?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김부식이 우리 역사를 저술할 때 발해를 빼버린 것은 과연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가 중국 역사의 예를 모방하여 우리나라의 정통 비정통을 분별할 때 그가 살았던 시대가 바로 고려 중엽이므로 압록강 서북 부여 옛 땅은 모두 거란이 점유한 바가 되었으니 만일 부여의 옛 강토를 모두 가진 자를 정통으로 시인하게 되면 고려도 또한 비정통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압록강 바깥은 우리 민족이 차지하였던지, 다른 민족이 차지하였던지 이것은 모두 다른 나라로 보고 오직 압록강 동쪽만 오로지 차지했으면 이것을 정통군주로 받들어 당시 임금에게 아첨했으니 애석하구나, 애석하구나.
그런즉 고구려도 곧 우리 역사에서 배척하여 싣지 않음이 옳은데 무슨 까닭으로 삼국이라 불렀겠는가?
이것은 또 그 까닭이 있으니 고구려가 평양에 도읍하였던 때문이다.
그런즉 발해도 일찍이 우리나라 서북쪽 일대를 차지하였으니, 만일 그 도읍만이라도 이 서북쪽 지방에 옮겼더라면 우리 역사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이것 또한 그렇지 않다. 저 김부식의 마음은 오직 자기 조정(즉 고려)에 정통을 부여함이니 만일 발해의 도읍이 압록강 동쪽에 있었더라면 그는 또한 고구려까지 아울러 우리 역사에 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부식 혼자만을 또한 어떻게 책할 수 있겠으리요만 내가 가만히 탄식하는 바는 수백 년 동안 우리 역사가들이 모두 김부식의 감추고 속임으로 말미암아 발해 역대가 우리 역사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