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종 교수는 5일 서울 청담동 벙커에서 ‘개불성-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주제로 강연했다. 강의는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청담동 벙커에서 진행된다. 다음은 3회차인 이날 강의를 정리한 것이다. 벙커에서는 우 교수 외에도 매주 월요일 최강욱 변호사와 이정렬 전 판사의 '쫄지마 형사절차', 매주 화요일 김윤태 교수(고려대)의 '사상가를 통해서 본 복지국가', 매주 금요일 바리톤 박경종 교수의 '불금가수' 등 강의가 있다. 매주 목요일은 전국구 공개방송을 한다. (02)515-3159
불교는 제자리 찾기
무엇이 불교인가? 부처님이 일생 동안 설한 가르침을 불교라고 말한다. 불교는 “너의 본래 자리를 찾아라!”라고 하는 제자리 찾기 운동이다. 이는 본래의 자신에게 눈떠 살아가라는 각성제 먹기 운동과 같다. 사실의 세계(사바세계)로부터 진실의 세계(극락정토)를 인식하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까? 삼법인은 존재실상을 알려준다. 네가 붙잡으려는 것은 다 똥이라는 것, 연기실상은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세상만유의 법칙을 말한다. 그 방법으로 부처는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했다.
초기불교는 개인 수행을 통한 아라한을 목표로 삼았다. 초기불교는 욕망의 소멸을 중시했지만 대승불교는 다르다. 대승불교는 자타불이 수행을 통한 보살을 인간상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욕망의 긍정을 뜻한다.
똥꼬집을 버려라
지난 시간 <금강경>의 가르침을 이야기했다. 달걀을 두고 피카소와 달리는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릴 것이다. 둘이 서로 자기가 바라본 달걀이 옳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자기가 보는 것이 전부이고 옳다고 여기는 것이 똥고집이다. 부처님은 끝없이 자신의 똥고집을 버리라고 했다.
대오각성은 깨달음을 통해서 깨어있음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한국불교는 성철 스님의 깨달음에 멈춰서 맴돌고 있다. 그러다보니 조계종이나 신도들이 방황하고 있다. 각성이 빠진 그저 깨달음만 외치는 형국이다.
‘여시아문’인데 객관일 수 있나
오늘은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불교가 무엇인지는 경전에 나온다. 불교 경전에서는 공통적으로 ‘여시아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시아문’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말이다.
주관과 객관을 놓고 볼 때, ‘나’라는 주관이 들어가 있는데 객관이란 과연 가능한가. 반대로 객관이 곧 전체인가? 미붓아카데미에서 ‘일미진중함시방’을 이야기하면서 주관이 모이면 객관이 된다는 위험한 주장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낱낱의 주관이 모인다고 해도 여전히 주관일 뿐이다. 언제부터 객관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객관이란 가능한 것인가.
본보기로 성장기때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경전도 그런 것 같다. 객관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의 확장, 주관의 다수가 객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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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하고 폭력적인 질문
사람들은 왜 합리적 선택을 하지 않는가? 이는 경제학 인지심리학 진화심리학 등에서 던지고 있는 멍청하고도 폭력적인 질문이다. 생명체는 생명 현상을 나타내는 물체이다. 신체적‧정신적 개체 고유성을 말한다. 개체고유성은 아상이다. 각각의 생명체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다. 생태계는 각 생명체의 다양한 어우러짐을 말한다. 생명은 진리이고 길이고 불성과 모든 존재의 근원을 말한다. 폴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명은 모든 존재 그 자체, 모든 존재의 기적을 뜻한다.
사람들이 왜 합리적 선택을 안 하는가에 대해서 알려면 무엇이 삶의 합리성인가를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합리적 선택을 한다. 단지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을 뿐이다. 모든 생명은 기본적으로 생명체의 고유함을 갖고 있기에 개인의 선택은 그 자체로 운전하고 합리적이다.
진실 아닌 사실로 구성된 세상
우리가 익숙한 것들은 이해할 수 있는 객관 표현적인, 너와 내가 공유할 수 있는 것들, 지구가 둥글다와 민청련 사건 등 과학적‧사법적 사실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진실이 아닌 사실로 구성된 세상이다. 생명을 하나의 틀로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몰이성적인 전체주의적 사고이다.
불교는 말을 떠나야 하기에 언어에 대한 이해와 맞닿아 있다. 소쉬르는 “모든 것은 하나로 이해될 수 없다”고 했다. 불교도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소쉬르는 언어의 요소를 랑그와 파롤로 구분했다. 파롤은 상황 속에서 각 개인이 실제로 말하거나 문장으로 쓰는 구체적 말이다. 랑그는 파롤의 배후에 존재하며 파롤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문법 규칙과 공통개념을 뜻한다. 파롤은 개인화된 관점이지만, 랑그는 그 아래의 공통된 구조이다.
소쉬르는 파롤을 언어학 연구대상에서 제외했다. 랑그만을 연구 대상으로 했다. 파롤은 지나치게 개별적이고 규칙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독화살과 같아
불교에서는 삶의 주인됨을 강조한다. 지금 바로 여기, 현장을 강조하는 불교는 개체화된 생명을 말하고, 그들의 삶을 강조한다. 데리다는 언어와 실제에 있다는 공통된 의식을 해체했다. 불교는 구조주의적인 출발점은 갖고 있지만 결국 그 구조를 해체시킨다. 그 점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접근과 밀접하다.
불교는 경전을 떠나 사유 속으로 들어갈 것을 강조한다. 강하게 말한다면 여시아문으로 시작되는 모든 경전은 뻥이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종교는 독화살과 같다. 비유컨대 삶이 죽음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은 좋아하지만 왜 죽음은 싫어하는지 알아?” 죽음이 답했다. “너는 달콤한 것이지만 나는 직면하기 괴로운 진실이기 때문이지.”
종교는 모두 뻥이다.
가르침과 종교의 형태는 구분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체제 안에 담긴 의례 등 장치에 눈을 뺏기고 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불교 안의 불교를 봐야한다. 불교 안에 있는 부처님의 뜻을 찾아야한다. 불교가 경전에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법화경> 비유처럼 불난 집에 아이들이 있는데, 불났으니 빨리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온다. 아이들을 나오게 하는 장난감과 같은 것이 불교이다.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게 불교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세상은 뻥이고 눈속임이다. 세상의 모든 형상과 가치 제도 문화 등은 일시적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바로 삶의 현장이다.
세상의 불교는 경전을 들고 있는 승려의 몫이다. 불교가 곧 승려의 몫일지도 모르지만 경전의 가르침은 사부대중의 몫이다. 승려들은 사교입선까지만 말하지만 심우도가 뜻하듯 사선입속까지 와야 한다.
사랑을 본보기로 들어본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사랑‧쾌락으로 포장된 생식을 위한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 20대는 생식활동에 가장 적합한 몸과 마음을 갖고 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려면 눈속임의 열정이 사라져야 한다. 세상은 다양한 허상으로 이뤄져 있다. 이 세상에는 속고 사는 자, 속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자가 있다. 이 가운데 제일 찌질한 사람이 속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바로 수행자들이다.
부처님 말씀은 별 것 없다.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것이다.
여시아문의 불교는 거짓
불교가 뭐냐고 할 때, 경전이 어떻고 한다. 불교란 경전마다 나오는 “여시아문”과 <능가경>의 “49년 동안 한자도 말하지 않았다”로 대비된다. 들었다는 사람은 있는데, 말한 사람은 없다고 한다. <벽암록> 등에 많은 공안이 있지만 이것 하나만 생각해도 된다. 나는 들었다는데 왜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사실과 진실을 들여다보고 여실한 관점을 가지라는 것이 불교이다. 연기적 실상, 삼법인 그것을 위한 팔정도가 있지만, 우리가 접하는 불교는 여시아문이다. 성철 스님의 열반송을 본보기로 든다.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요즘 큰스님들의 열반송은 적당히 베낀 것 많다. 성철 스님만큼은 열반송을 직접 쓴 것 같다. 수많은 설법, 정법이라는 말하는 것도 실은 하나의 달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붉은 빛과 푸른 산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한 것이다. 불교를 경전으로 이해하고, 경전을 소유한 승려들의 것으로 여긴다면 수많은 죄업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바람이 없는데 파도가 일어
<선문염송> ‘운문끽구자’에는 “부처님이 태어날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 내가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아이를 몽둥이로 때려잡아 개밥으로나 던져주고 세상을 태평케 했겠다”라고 한다. 운문의 이 말은 부처님 뜻을 잘 이해한 것이다. 달을 가리킨 손가락, 거짓을 꿰뚫어 강조한 것이다.
<선가귀감>에도 무풍기랑이라고 했다. 바람이 없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불교(종교)는 개밥으로나 던져줘야 할 것이다.
<유마경>에서 유마는 침묵했고, 양무제의 물음에 달마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불식은 “알지 못한다”는 것으로 단순히 안다와 모른다는 것과는 다른 말이다. 달마의 ‘알지 못한다’는 안다와 모른다는 인식의 세계를 벗어난 답이다. “삼계유심 만법유식”이라고 해서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대상이 오직 인식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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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로서의 불교는 개밥
불교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종교로서 불교를 말한다면 스스로 개밥을 먹는 것과 같다.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 ‘구자무불성’에 대해서 말하겠지만 은근히 개와 연관이 많이 된다.
유식에서는 우리 마음은 8가지 작용이 있다고 했다. 안이비설신의 6식과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이 있다. 우리의 자성은 망상으로 이뤄진 번계소집성(망유)과 인연이 만나 일어나는 의타기성(가유)과 진여인 불성자리를 뜻하는 원성실성(실유)으로 구분했다.
“마음은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그림쟁이와 같다. 세상에 못 그릴 것도 만들지 못할 것도 없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을 겪었지만, 지금 임진왜란이 있었다는 한마디로 끝난다. 그 아픔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 집중하는 것이 중요
<금강경> 에드워드 콘즈의 영역본 가운데 “…mindfully fixing his attention in front of him.”이라는 구절이 있다. 부처님이 앉고서 그 앞의 의심에 집중했다는 구절인데 한국의 <금강경>에는 빠져 있다. 이는 앞서 서술된 탁발했던 행위에 집중했다는 것이고, 지금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이 우리에게 사실과 진실의 틈새를 바라보는 것을 알려주고, 개밥과 진짜 밥을 구분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항상 무엇을 하건, 사람들에게 왜 합리적 선택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에 매 순간 집중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능동적인 주인이 되는 것이다.
알면서 속아주는 여유
불교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자 미망일 뿐이다. 그것은 오직 당신을 속이기 위한 미사여구의 속삭임이다.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여유는 당신의 몫이다. 왜? 평화롭고 충만한 삶을 위해서.
주금강이라 불리는 덕산 선사가 떡 파는 노파를 만나면서 어느 마음에 점심을 찍겠느냐고 했다. 덕산이 답을 못해서 떡을 먹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떡을 얻어먹을 수 있겠나? 답은 2주 후에 설명하겠다.
승려들이 우리에게 빨대를 꼽고 돈 벌기 위한 수단에 속아서는 안 된다. 속아서 재산도 주고, 여자들은 몸도 상한다. 깨어있어야 속지 않는다. 소승에서는 속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대승에 와서는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라고 한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cetana@gmail.com]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객관은 존재한다, 四禪 이상에서만!!!
오온[=명색]도 거짓[=幻]이다.
그러나 오온을 떠나서는 <부처>를 이룰 수는 없다는 딜레마!
본문 아래 부분....
<금강경> 에드워드 콘즈의 영역본 가운데
“…mindfully fixing his attention in front of him.”이라는 구절이 있다.
부처님이 앉고서 그 앞의 의심에 집중했다는 구절인데 한국의 <금강경>에는 빠져 있다.
이는 앞서 서술된 탁발했던 행위에 집중했다는 것이고, 지금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
본문의 여러 주장에 대해서 뭔가 찜찜한 부분이 있어도 뭐라 하지 못하겠지만,
'부처님이 앉고서 그 앞의 의심에 집중했다'.... 이건 완전히 망발임.
초불 번역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서'에 해당되는 그 구문입니다.
부처님이 무슨 의심을 집중을 합니까? 무슨 탁발했던 행위(과거일)을 집중하시나?
뻥은 위 글 대부분이 뻥일 것입니다.
봄봄은 한 가지 사실로 모든 것을 재단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부처님을 모함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이것도 속아 주어야 하나요? ㅎㅎ
@봄봄 그냥 쓰세요, 허심탄회^^하게...
~~~ 제가 볼 땐 위 글 전부가, 몽땅---망발입니다...!!!
오온은 거짓이다.
그러나 오온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딜레마!
불교는 거짓이다.
그러나 불교를 떠나서는 불교를 이룰 수 없다. ~ 이것도 딜레마?
아위자 님의 언명하시는 그 딜레마는 분명 불교의 길이 맞지만
우교수님과 같은 불교-먹물^^들이 외치는 그 길들은 전부 비-불교의 길로 보입디다만……
저만 그런지요^^? 왜----!!!!!
<불교가 무엇인지는 경전에 나온다.> ... 따라 행하는 것은 제쳐두고 경전이 해석되고 이해 되십니까?
알아요? 봄봄은 경전 말씀을 알아 먹기가 쉽지 않네요.
[여시아문]을 주관/객관...... 인정하지 않으면서
<불교는 “너의 본래 자리를 찾아라!”라고 하는 제자리 찾기 운동이다.>라는 깨달음은 獨覺이요,
경문을 보고 깨달으신 거유? 부처님 친견하여 들으신 겁니까? (직접 들어도 역시 주관이지만)
[여시아문]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금강경> 에드워드 콘즈의 영역본에 나오는 구문이
북방 漢譯에 나오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심각한 일입니까?
初發心만 잊지 않고 있으면 되는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생략해도 무방한 내용입니다.
말 그대로 승가에서는 茶飯事여야 할 일. 다만 경문의 의미와 실재로 행하는 것이 그기 그긴지 모를 뿐.
무엇을 강조하려는지 취지는 알아 먹겠는데,
그렇다고 <불교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자 미망일 뿐이다.>? 우교수가 부처하슈.
아위자님 간만에 글 올려 주셨는데... 통상의 인사말은 '잘 보았습니다.'인데 오늘은 아님.^^ _()_
@봄봄 ㄲㄲㄲㄲㄲ ~ 세상에나!
봄봄 님이 이렇게 과격^^하실 줄이야.........
통상의 인사말은 --- 인데 오늘은 아님. + 우교수가 부처하슈.
~ 감정의 이성화를 꿈꾸는 이 짐승이 보기에도 그 정도면 충분히 격해 보이십니다!
<대승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자 미망일 뿐이다>
~ 우교수님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을 말이 헛-나오는 모양입니다.
~ 그랬다간 조직원들로부터 맞아 죽지^^않나요? 혹시 아위자 님께 제가 맞아 죽을지도……
아위자 님은, 참나-여래장이 지배하는 한국-선불교의 현실에서
어떻게 비-여래장의 대승불교를 간추려 내어서 애지중지하시는지요, 궁금합니다, 그냥……
불교닷컴에 들어가서 본문을 보니 내용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탁발 후' 앉아서 그 앞의 '대중에 의식을' 집중했다는 구절인데 한국의 <금강경>에는 빠져 있다.>
위 본문에는
<부처님이 앉고서 그 앞의 의심에 집중했다는 구절인데 한국의 <금강경>에는 빠져 있다. >
이렇거나 저렇거나 그 의미는 아닌데 <의심>이 아니니 그래도 좀 낳네요.
이상하네... 아위자님도 그대로 스크랩했을 것이고, 불교닷컴의 내용이 변신했을리도 없고...
오늘 봄봄이 더위 먹었나? 기사가 더위 먹었나? 이상도 하다. ㅋ
<그 앞의 '대중에 의식을' 집중했다는>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인지???
불교닷컴이 기사가 맞다면(맞겠지, 아마 아위자님이 스크랩 에러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러면 우교수님의 말씀은 탁발할 때는 탁발하는 것에 주의를 기우리고
대중들을 대면하고 있을 때에는 대중들에게 주의를 기우린다.
즉 지금.현재에 충실하고 계신다. ...대략 이런 의미인 듯 합니다.
해석은 잘못 되었으나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라는 의미에서는 말이 됩니다.
앞서 방방 흥분한 것 일부 취소합니다. 확인하지 않은 봄봄의 불찰이 있습니다.
대충 읽어보니... 원문과 본문이 다르곳 두 곳이네요.
1. 위에 올린 내용이고.
2. 제일 마지막 ....대승에 와서는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라고 한다.
<그것이 소욕지족이고 보살행이다.>
@봄봄 의심 to 의식 = 오자 교정으로 보입니다.
불교계의 지도자 급 또는 선배이신 분들은
행위 이전의 말과 글도 진중하셔야 하는 데 참으로 그렇지 못한 것 같네요.
급기야 우교수님도 대질(?) 질문을 당하시는군요. ~ 봄봄 님, 아니시죠^^?
TO 우희종교수 + 여시아문의 불교는 거짓이요, 뻥이다?
(중략) 그렇다면, 모든 팔만사천경은 모두 다 뻥이요 거짓이 되는 것입니까?? - 다 뻥이요 거짓이라면서 왜 금강경은 자꾸인용을 하며 가르치십니까? - 결국 우교수님도 한입가지고, 말따로 행동따로가 아닙니까?
공개적으로 질문했으니 공개적으로 시원하게 답변 해보시기 바랍니다!
독백-대승이든 초기불교든 경전을 펴는 순간 '여시아문'이 되어야 한다. 여시아문은 특정인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거짓이다'가 아니라 '실천없는 불교일때 불교는 거짓이 된다' 수행자가 양심이 없을때 불교는 거짓이 되는 것이다.
수행자 고타마사문은 깊숙히 있는 양심을 보았기에 붓다가 된것이다............... 내가 느낀대로 독백......
유명인들의 <어처구니없는 ‘오류’>는
학자분들이나 불로거분들이나 스님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이중표’교수의 견해나 ‘진흙속의 연꽃’님의 글이나 ‘후박나무’스님의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를 읽어 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오류가 있는데요...................... 다름 아니라 <순관(anuloma)과 역관(patiloma)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를 들어.
<A를 조건으로 한 B다>라는 말씀과 <B의 원인은 A다>라는 말씀이
“어떻게 해서 다른 말씀으로 이해되는 것인지?”
‘아위자’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두 표현의 부처님 말씀은
같은 말씀이십니다.
@아위자 특히 ‘후박나무’스님께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표재를 내거시고서 ‘방향’을 중시하시는 스님분이신데도 불구하고, <연기의 방향은 항상 일정하여 逆(=거스를 역)방향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아실만한 분이신데도 ....... 아마도 <12연기의 환멸문이 역관(patiloma)인 것>으로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위자 순관(anuloma)=<A를 조건으로 한 B다>라는 순서로.
역관(patiloma)=<B의 원인은 A다>라는 순서로.
이거든요. 즉, 같은 말씀의 ‘다른 표현’인 것이지
<12연기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과는 무관한 용어입니다.
굳이 적용하자면, <12연기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은 둘 다
‘순관(anuloma)’으로 언급된 것입니다.
@아위자 ‘역관(patiloma)’은 단순히 뒤에서부터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서
관(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연하지요. 그 누가 처음부터 12연기를 순관으로 사유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정각을 얻기 이전의 보살시절’에는 <고(苦)의 원인>[☜불교이해의 핵심. 불교가 왜 설해졌는가는 이 때문임.]을 찾아서 <노사(老死)>를 이해하신 것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없는 경지에서 <고(苦)가 설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아위자 그 <노사(老死)>의 원인은 <생(生, 다시 태어남)>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원인을 찾아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서 ‘역관(patiloma)’인 것입니다.
경전에 보시면요, 순관 보다 역관의 경문이 훨씬 더 많습니다. 당연하지요.
그러한 역관의 최종적인 결론을 순서대로 다시 정리한 것이 ‘순관(anuloma)’
이고요. 순관으로 설해지는 경문은 몇 개가 되지 않습니다.
@아위자 그리고 ...... 12연기의 완성형이 <유전문과 환멸문>인데요, 둘 다
‘순관(anuloma)’이라니까요. 미칩니다. 미쳐요. 소위 유명인들 마저
혼동하니........... 지적을 해 주어도 고치지 않고서 버티기로 일관하시는
형편들이시니 ....... 불교가 만만치 않기는 만만치 않은 모양입니다.
한 번은 또 다른 어떤분께서 <혼동>하시기에 ......... "제기랄~~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는 것이라는 말이나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는 말이나....... 뭐가 다른 말? .... 돈이 있으면 떡 사먹을 수 있다는 말이나 떡 사먹지 못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라는 말이 <다른 말>이유? 미치겠네. 미쳐. ..... 정신 차리슈!"라고 말했다가 <원수진 일>이 있었음. ㅋㅋ.
입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본전>은 하는데......... 상대방이 누군가를 가리지 않고서 <입을 놀려대니> 온갖 비방을 한 몸에 받는 처지로 몰락한 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ㅎㅎㅎㅎㅎㅎ
하여간 '아위자'는 <입이 보살>이라............. 口業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
요즈음은 ...... 얼마나 口業을 많이 지었으면, 이빨이 서너개 만 남아서 <맛 있는 것들>은 전부 '물건너 간'상황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게을러서 치과도 안 가고 뭉개고 있는데요........ㅎㅎㅎㅎㅎㅎㅎㅎ 발음도 시원찮아 져서 <웃깁니다.> 없으면 없는대로 살지 하면서 ........ 이제는 <단 것때문에 이빨 상할 걱정은 끝이다>라고 우기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위자 한 번 맘 먹고 임플란트 하세요.
저도 십 여년 이상 무지무지 험한 이를 가지고도 죽지는 않기에 버티고 살았는데
고생해서 대 공사를 한 번 하고 나니 입 안이 무지 평안해졌습니다. 구업은 더 벌리게 되었지만요.
게으르기는 아마 저를 못 이기실 터인데, 잘 생각해 보세요. 구강-열반을 향하여. _()_
으~~~아~~~아~~~아~~~! 왕-짜증 나네요.
아위자 님이 우교수님을 한 번 변호해 주십시오. ~ 한국불교의 실상을.
우교수님의 흠을 잡아 욕하기는 상당히 더 싫거든요.........ㅠㅠㅠㅠㅠㅠ
아위자 님 글 이해하느라 고생하는 이들에게 씨잘데기 없는 글을 올려서 자극하신 죄로요. _()_
교리적인 측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나, 禪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저도 문외한 입니다.
우선 당장, 三昧도 안 되는 인간이라니까요. ............ 우희종교수는 <간화禪>에 대해서는
<정통적인 수행을 하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요즈음, 송담스님의 탈종 이후에
'서리맞은 독사'가 되셔서 독기를 뿜기도 하시는데, 아마도 위 글은 간화선의 입장에서
하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독기하고는 별 상관 없는 내용이라는 추측.
그리고 원래 이 분은 <착하신 분>이시고, 누구보다 조계종에 애정이 많으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저 귀담아 듣는 입장이고요. 적어도 <간화선>에 관련해서는
제가 발 벗고 따라가려고 해도 '무리'이신 분입니다. 그러하니 ....... 이상한 부분은
<전문가들도 '오해'하는 바가 많다>라고 지적하는 '수준'에서 다른 분들을 언급한 것입니다.
요즈음 논란이 되고 있는 <서의현스님 문제>는 ....... 저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 <승복입고 살고 싶다>는 점에서는 .... 과거문제는 덮는 것이 좋겠다는 개인적인 입장이고요.
문제는 자승원장의 '행태'가 문제라고 보는데요 .......... 한 마디로
<조계종을 말아 먹으려고 작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의현스님 문제를 처리하는 것도
<정당하게 처리>하여야 할 문제를 구렁이 담 넘어가는 방식으로 처리하려했다는 점에서
<자승 다운 꼼수>를 계속 부린 것인데요......... 아마도 속으로는 <의현스님을 복권시킬 의도>도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 보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대중을 우롱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 견해로는 ........ 개혁 당시의 조계종과 사회 분위기에서는 ...... 요즈음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로
<서의현 스님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봅니다. 지금 조계종의 종권을 쥐고 있는 권승들이
훨씬 더 악랄하고 더러운 인간들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아위자 특히 <현응이 도법이>에 비하면 그렇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현응이 도법이 등등>이 '구렁이 담 넘어가는 방식'으로
<어떻게 '자승체제'를 옹호하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진짜 <악독한 놈들>의 행태를 잘 보셔야 합니다.
@아위자 <착하신 분> + 애정이 많으신 분
~~~ 이런 분들은 다른 집에도 많이 널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런 분들의 공통점은 “불-교”를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고요.
~~~ 차라리 이 분의 싸부님의 전매 특허 수행인 눈-귀-코 3년 수행이 더 도움이 될 듯.
~~~ 한국불교 문화에 대한 태생의 연을 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 한국에서 보게 되는 대승불교는 저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기독교 교회일 뿐이니까요.
“계-정-혜”를 씨줄 날줄로 엮지 못하고, 먼저 해체부터 떠드는 이들은 이젠 사기꾼으로 보게 됩니다.
착한 사기꾼, 애정이 많으신 사기꾼 ~ 이 언어 조합이 그놈-참나-열반보다는 더 타당한 맥락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