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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deQdLeLNX_w
대한민국에서 성경을 믿고, 성경을 최종 권위로 인정하는 최고의 설교자 가운데 한 분입니다. 부산의 그리스도인들이 조도희 목사를 아신다면 그분은 복받은 분입니다. 이제 조용히 그분의 설교를 경청해 보십시오.
일시: 20230222 수요 기도모임
본문: 학개 2:10~19
설교: 조도희 목사
주제: 성전 건축에 따른 하나님의 복
기도회에 참석하여 제가 받은 감동입니다.
세상은 악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초림에 주님은 나누기 위해 오셨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나눈다.
두 번째 오심(재림)은 화평을 가지고 오신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있다. 칼이 먼저 온다. 아마겟돈으로 온다. 화평의 조건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의가 먼저이고 화평과 기쁨이 그다음이다.
1. 제가 받은 소중한 메시지 구절은 동영상 16:56~18:39까지입니다.
(명령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에 심판이 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10절부터 19절까지 교재 보겠습니다.
두 번째 예언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대상은 율법과 관련된 대제사장들, 레위인들이지요. 그리고 율법과 관련된 백성들입니다.
내용은 성전 건축에 따른 하나님의 복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뜻이었지요? 하나님의 명령이었지요? 명령을 분명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환경이 부정적입니다. 적들이 계속해서 공격하지요. 그러니까 안에서 타협을 해버리는 거예요. 이런 환경에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다. 타협하는 그 즉시, 게으름이 그 사람을 먹어버립니다. 게을러져 버렸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거부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은 다양한데 특별히 이스라엘과 관련된 심판은 비를 내리지 않으시는 것이고요, 흉작이에요. 나무에 과실이 맺지를 않고...
그것을 깨닫고 마음을 돌이켜 회개할 때에 하나님의 복은 다시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는 것이에요. 그 부분이 무엇과 관련되어서 복이 임하는 것이냐? 하나님의 관점은 성전이 건축되는 것이거든요. 그 성전 건축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의 중단되었던 복, 그것은 다시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10~19절까지 읽으십시오.
2. 제가 받은 소중한 메시지의 두번째는 동영상 24:57~35:16까지입니다.
(준비된 상태에서 경배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경배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제사의식 거룩한 것이지요? 제사의식 거룩하다고요. 그렇다고 그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이 참여했다고 하는 의미만으로 자동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냐? 이것이 핵심이에요. 우리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경배 드리는 자, 조건은 바로 영과 진리로 경배 드려야 되지요. 영과 진리로 경배 드려야 된다고요. 우리의 거듭난 영이 하나님께 영으로 경배 드려, 진리로 경배 드려야 되는 것이에요. 진리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를 포함하는 것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경배를 드려야 되고요, 또 하나 그 진리라는 것은 진실성이에요.
진실로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려야 되지요. 그런데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도 얼마든지 경배 드릴 수 있다 그거예요.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느냐? 그것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13절에 그러자 학개가 말하기를 "만일 시체로 불결하게 된 자가 이것들 중에 어떤 것에 접촉했다면 그것이 불결해지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불결해질 것이라." 하더라.
두 번째 질문, 이거는 뭐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시체를 만지면 불결해집니다. ~~(중략)
레위기의 주제는 한마디로 말하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이에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은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면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 바로 대표적인 것이 제사의식인데 그 거룩함을 잃어버리는 수가 다양하지요. 그 거룩함을 잃어버려서 불결함을 입었을 때는 어떻게 불결하게 되어버렸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 상황 상황에 맞게 제사의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 이거예요. 그러면 다시 정결하게 돼요. 거룩함이 회복하게 돼요.~~(중략)
삼손의 경우에 대단한 두려운 교리가 있습니다. 내가 범죄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설교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요. 내가 범죄 했지요? 심지어는 그 사람의 구령의 열매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수 있습니다. 교회, 가정 기탄없이 나아가요. 사업? 직장? 건강? 괜찮아요. 스스로 속게 만드는 거예요. 스스로 속게 만들어요. 아! 여기 예외가 있구나. 전체의 하나님의 말씀을 다 부인할 수는 없지마는, 여기에 예외사항이 있구나.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예외에 넣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무서운 일입니다. 삼손이 그랬어요. 삼손이.
아! 범죄를 해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것이구나. 다른 사람은 범죄 하면 심판해요. 자기는 예외사항이라. 과연 그런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하나라도 잊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그때그때마다 심판하실 것이냐? 아니면 몰아서 심판하실 것이냐? 이것만 남아 있어요. 하나님의 저주를 계속 머리 위에 쌓아가는 사람이 있고요, 그렇지 않고 그 즉시 즉시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냐? 그건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하나님 소관이기 때문에, 삼손이 그런 경우에 그랬습니다.
삼손 같은 경우에는 이제 범죄 했을 때에 제물을 드려야 되는데 제물에 해당되는 것이 제일 밑에 나와 있지요. 아내와 장인을 잃었고요, 재판관기 15:6절에서 또 자신 자체를 삶의 제물로 드렸지요? 결국은 나실인의 법을 이루어 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아 내시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13절에서 언급하는 시체로 말미암아서 불결하게 된 자라 그렇게 말합니다.
14절에 그때 학개가 대답하여 말하니라. 주가 말하노니,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민족이 내 앞에 그러하며, 그들 손의 모든 일이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불결하도다. 이 결론을 내기 위해서 앞의 예들을 들은 거예요. "주가 말하노니, 이 백성이 그러하고" 무서운 말이에요, 이 말 나올 때, 주의 백성이라고 마땅히 말씀하셔야 된다고요. "내 백성" 그렇게 말씀하셔야 돼요. 파라오에게 "내 백성 가게 하라." "Let my people go" my people이라고요. 근데 지금 제삼자로 말씀하세요. 이 백성이다, 이 백성. 예수님도 성전에서 나올 때, 그러셨죠? 주의 명절이 분명한 이름인데 유대인의 명절 그렇게 말했을 때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민족이 내 앞에 그러하다 그렇게 말했지요? 무엇을 말하는 거예요?
아까 살펴보았던 것처럼 의식은 거룩한 것이라. 근데 준비된 상태에서 그 의식을 통과하면 훼손된 거룩함이 회복이 되는 것이 분명한 것인데, 마음의 준비 없이 그 의식에만 참여했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이냐? 고기가 닿은 것은 다 거룩해져요. 고기가 닿은 것이 옷자락에 닿았거든요? 그 옷자락이 다음에 닿는 것, 거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냐?
사람들이 말하는 모태신앙 그런 거 적용할 수 있겠지요? 아버지 어머니 생애에는 잘 믿었어요. 그렇다고 그 믿음이 자동적으로 그 자손의 세대에까지 연결이 되는 것이냐?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또 뭐예요? 또 "이 민족이 내 앞에 그러하며" 무어에요? 그 시체를 만지는 것이 불결하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데, 시체를 만져서 불결하고도 다시 거룩해지는 하나님의 말씀, 거기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냥 계속 진행을 해왔다고. 근데 이것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이 백성, 이 민족이라고요. 1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에 주님께서 기회를 한 번 주신 것이지요. 왜 포로로 흩어졌지요? 심판 때문에 그런 건 너무나 자명하다. 그런데 그 심판의 기간이 다 차자 하나님께서 두 번의 기회를 주신 거예요. 두 번째 기회를 주셨다 이거예요. 그렇게 해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시체를 만진 자같이, 거룩한 의식에 준비되지 않은 채로 참여하는 자같이 다 불결하게 되었고, 다 부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지요? 회개하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맞추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 1:11~15절로 돌아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십일조 한 번 빠지지 않고요, 기도 시간에 절대로 빼먹지 않고, 안식일 절대적으로 지키고 이사야 1장에서 하나님 앞에 제물 바치는 데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질려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뜰을 밟아서 더럽히지 말라. 피비린내에 내가 질려버렸다. 짐승들 흘린 피비린내 질려버렸다. 왜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흠향하셔야 불로 태워서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갈 텐데, 하나님께서 안 받으시니까 그 피가 썩잖아요? "나는 더 이상 너희들이 바치는 제물을 견딜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너희들이 하는 기도를 들어줄 수 없다. 나는 너희들이 바치는 경배를 더 이상 받을 수 없다."
냄새나는 기도이기 때문에, 다 육신적인 기도이고, 욕망 실현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기도이기 때문에, 경배도 마찬가지이지요. 나는 너희들이 바치는 경배를 더 이상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끔찍이 싫어하셨던 것이 바알 숭배였는데요, 호세아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아주 혐오하시는 것이 바알 숭배였지요. 우상 숭배였다고요.
심판의 목적은 회복입니다.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스라엘은 무엇을 잘못했지요? 성전 건축을 중단해 버렸어요.
성전 건축을 게을리해 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이거예요.
자기 보존이라고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박국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환경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대로 나무에 과실이 없어요. 그렇지만 바뀐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박국의 마음이 바껴져 버렸어요.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지요? 성경적 기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도는 기도를 인도해요. 처음에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기 시작하지요. 그럼 하나님께서 받으세요. 그 기도를 통해서 나에 대한 상황과 그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자연스럽게 내 기도의 방향을 틀어요. 그러고 나서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같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까 달라진 것 아무것도 없어요.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기쁨이 있습니다. 확신이 있습니다. 기도 응답을 완전히 받은 것이지요. 하박국이 그랬어요.
3. 제가 받은 소중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48:20~
(하나님의 일이 시작될 때에는요, 원수의 방해는 필수적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아무 방해가 없다, 그러면 일이 진행이 안돼요. 그것은 마치 빙판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인데요, 거기 운동화 신고 걸어가는 것과 똑같아요. 계속 미끌미끌 거린다고요. 계속 미끄러져요. 거기에 해당되는 저항력이 받쳐줘야 해요. 그래야 계속 진전이 있게 되어지는 거지요.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뜻을 안 세우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의 결심을 하지 않으면, 그런 상태에서 경배에 참여해 봐야 아무 일도, 아무 방해도 없어요. 그런 상태에서 성경 공부해 봐야 재미만 있어요. 그런 상태에서 심지어 더 나가서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를 해봐요, 재미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해 줘요. 다 인정을 받아요. 무슨 방해가 있어요? 거기에? 그러나 그 마음의 중심에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들어가면은요, 반드시 원수의 방해가 있습니다.
성전 건축,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이거든요. 원수들이 방해를 한다고요. 그러니까 중단을 해버렸어요. 패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없으셔서 원수들의 위세나 권세만도 못한 것이냐? 결국은 무릎을 꿇은 것이란 말이지요. 절대 그래서는 안되는 것인데, 원수들의 방해로 인해서 이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는데 한 달 두 달 아! 이것이 막 늦어지기 시작하네? 1년 2년 늦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변하지 않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야 되는데, 변하지 않아야 될 마음이 변화돼버린다고요. 마음이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관심이 없어져요. 무서운 겁니다. 무관심, 그것을 게으름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하나님의 일들로 채워졌던 마음이 관심이 없으니까 탁 가라앉게 되지요? 다른 것들이 뚫고 와서 채워버린다고요. 마음은 진공상태가 유지될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요. 뭔가로 채워져야 돼요. 성령으로 채워지든지? 악령으로 채워지든지? 악령은 무엇을 통해 일해요? 육신과 세상을 통해서 일하잖아요. 그러니까 세상 것들로 꽉 채워 버린다고요. 육신의 것들로 꽉 채워버린다고요. 변질된 마음, 그래서 자기 일에 급급해지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럼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던 말, 해치워버리는 일이 발생해요.
경배, 해치워버려요. 안 하면 찜찜해요.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안 하면 뭔가 석연치 않다. 이 이스라엘이 바로 이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셨지요. 지금 수확이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과실나무에 과실이 안 열리면 어떻게 돼요? 그런 상태가 된 것이에요. 그러나 이제 마음을 회개하기 시작했지요. 무엇 때문에? 선지자의 말에 경청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에요. 학개의 말이지만, 스룹바벨의 말이지만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이 됩니다. 그럼 어떻게 돼요?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기억하세요.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 저는 20230222 처음으로 부산성경침례교회를 방문하여 수요 기도모임에 참석하여 조도히 목사님의 성경공부에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그곳에 가게 하셨고, 저로 이 오늘의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바로 저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기도 모임 후에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교리와 진리가 너무 확고한 것이 장애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교리(doctrine)를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냐? 아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알수록 기도해야 한다. 간구와 탄원이 아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기도이다. 간구와 탄원이 아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친밀감이다. person to person으로 할 말이 많아야 한다. 친밀감을 갖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친구와의 관계를 무한 확대하는 것이 친밀감을 갖는 것이다. 나와 예수님의 친밀감을 방해하는 것을 줄이라. 자유와 기쁨을 확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