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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4일(주일) 호텔에서 잘 자고 일어났다. 날이 참 좋았다. 여행 다니는 내내 날씨 때문에 불편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비가 올 것 같으면 그때는 잠 잘 시간이었고 아침에는 우리나라 가을 하늘 못지 않은 아주 화창한 날이 이어졌다. 참 감사하다. 오늘은 주일이다. 정말 오랜만에 독일 예배를 드린다. 우리의 예배는 미국식이라서 독일 예배와는 많이 다르다. 독일의 교회는 루터파 교회라 예배 의식이 약간 가톨릭 비슷하기도 하여 처음에 독일 예배를 드렸을 때는 많이 당황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잘 적응했고, 또 결코 가볍지 않은 근엄하고 장중한 독일 예배의 매력에 푹 빠졌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독일 예배를 그리워했었는데 특히 성탄절이 되면 더욱 그러했다. 하여간 9시 반 예배니 교회에 가기 위해 서둘렀다. 호텔 식당에 내려가 맛있게 아침식사를 하고 십자가교회(Kreuzkirche)로 갔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앞으로도 여정이 많이 남아있는데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독일 교인들은 교회에 들어오면 자리에 앉자마자 기도하지 않는다. 우선 자기가 앉을 자리에 가서 선 채로 잠시 기도한 다음 앉는다. 우리는 '독일식으로 기도할까 한국식으로 기도할까...' 하다가 한국식으로 했다. 아직 예배가 시작되지 않아 둘러보니, 우리 외에도 동양 여자가 있었다. 겉보기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여자처럼 보였다. 시간이 되자 오르간 전주가 시작되고 제법 나이가 들어보이는 담임 목사님이 나와 사회를 보고, 설교는 러시아에서 선교하는 비교적 젊은 독일 목사님이 했다. 회중 찬송도 잘 아는 찬송이라 파이프 오르간의 반주에 맞춰 힘차게 불렀다. 25년 만에 독일예배를 드리는 거였다. 마침 그날 예배가 러시아인을 위한 예배라 러시아어로 된 간단한 찬송도 함께 불렀는데 나는 러시아어를 몰라 악보만 보면서 그냥 콧노래로만 따라 불렀다. 유럽 여행기(9)를 쓰기 위해 '혹시나?' 하고 유투브를 찾아보니, 주일 아침, 독일 전역에 방송되는 교회(예배) 탐방 프로그램에 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동영상이 있었다. 동영상 처음에 등장하는 목사님이 우리가 예배드릴 때 사회를 보던 바로 그 목사님이다. 독일 개신교 목사님의 복장은 전통적으로 통으로 짠 검정색에 목에는 가운데 하얀 장식만 있어 수수하다. 감격스런 예배를 마치고 나와 호텔에서 짐을 정리한 다음, 그 다음 목적지인 ‘아이제나흐’(Eisenach)로 향했다. 체코에서도 그랬는데 독일 고속도로도 구간마다 공사하는 곳이 많아 여러 번 정체되어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조금 지루할 무렵, 어제 슈퍼마켓에서 아주 싼 가격에 체리를 산 게 생각나 체리를 먹으며 즐겁게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지금 독일에는 우리나라 제품이 많이 들어와 있다. 핸드폰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전제품이 정말 많다. 옛날 일제 가전제품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삼성과 LG가 일본을 밀어내고 당당하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길가에는 현대, 기아 차가 의외로 많았다. 의외로 많았다는 말은 독일차보다 많다는 뜻이 아니라, 심심치 않게 자주 보였다는 말이다. 독일은 자동차 강국이라 우리나라 차가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상황이 많이 변했다. 내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한참을 달려 오후 3시 15분에 우리가 묵을 밤베르거 호프(Bamberger Hof)에 도착했다. 그곳은 새로 단장한 작은 모텔이었는데 주인도 친절하고 모든 게 정갈하고 깨끗했다. 객실에서 잠시 쉰 다음, 곧장 아이제나흐 시내로 출발했다. 우리가 거기에 간 이유는 위대한 음악가 바흐(J. S. Bach)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다. (바흐 하우스와 박물관) 위의 사진에서처럼, 아이제나흐에는 바흐가 살았던 집(바흐 하우스 Bach Haus)이 있고 그 옆에 새로 지은 현대식 건물의 박물관이 있다. 재미있게도 박물관 지하에는 관광객들의 가방을 맡기는 곳이 있는데 그 이유는, 바흐 생가가 협소하여 많은 사람이 구경하는데 불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흐 당시의 악기들을 구경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이 직접 연주하면서 바흐를 소개하는 작은 음악회도 참석했다. 그리고는 루터 하우스(Luther Haus)로 향했다. 루터 하우스는 루터가 살던 집은 아니지만, 루터가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서 라틴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건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바흐 하우스에서 많은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루터 하우스의 관람시간이 지나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옆에 유리로 되어 있는 상점을 밖에서나마 구경할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루터에 관련한 여러 물품과 각 나라 언어로 되어 있는 성경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르트부르크 성 역시 관람시간도 이미 지나 매표원이 없었지만, 다행스럽게 성 문은 열려있어 들어갈 수 있었다.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성 문이 열려 있는 건 아마도 성 바로 밑에 성과 거의 붙어 있는 호텔이 있어 그 사람들 때문에 성 문을 개방을 한 것 같았다. 성 밖에서 루터가 성경을 번역한 방을 올려다보고 내일 다시 성에 올라오기로 하고는 내려가는데 한국 가족이 올라오고 있었다. 성 밑의 호텔에서 묵는 관광객이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호텔에 돌아오니 피곤이 몰려왔다. 아침부터 많은 일을 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루터가 머물며 성경을 번역하던 방) 8월 5일(월) 새 아침이 밝았다. 우리가 묵은 모텔의 객실이 도로 쪽이라 창문 열면 엄청 시끄러웠다. 빨래 때문에 방안이 습해서 창문 열었다가 너무 시끄러워서 다시 닫아야 했다. 이때 '다음에 여행을 하게 되면 도로쪽 객실은 절대적으로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의 일정은 바르트부르크에 다시 올라가는 것이었지만, 어제 올라갔으니 생략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성은 제법 높은 곳에 있어 차를 타고 올라가 주차하고 나서도 또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경사가 제법 가파르기 때문에 여자들에게는 힘이 들었던 것 같았다. 의견의 일치를 본 후, 아침식사 후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짐을 정리했다. 원래는 성을 구경한 후,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일정이 단축되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중간에 점심 해결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모텔 옆의 레베(REWE)라는 슈퍼마켓이 있으니 거기에서 점심용 요깃거리를 사서 차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레버쿠젠(Leverkusen)으로 출발했다(처제네 집이 레버쿠젠에 있음). 한참 달려오면서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것을 열심히 먹었어도 뭔가 좀 허전한 감이 있어 중간에 차에 기름도 넣을 겸, 배도 채울 겸 하여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작은 마을의 주유소를 찾아 기름 넣고, 터키 식당에 들러 케밥을 사 먹고 집에 도착하니 오후 3시 10분이었다. 정말이지, 1주일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호텔에서 편히 쉬며 지냈지만, 그래도 집을 떠나면 고생인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제는 집에서 좀 편히 쉬겠다는데 내가 보니, 해는 여전히 하늘에 떠있고, 저녁 먹을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문득 내가 살던 쾰른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내를 꼬드겨 함께 나가려고 했지만, 아내는 집에 오자마자 뭘 나가냐며 자기는 피곤하니 혼자 나가라고 하는 바람에 나 혼자 전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서울로 말하면, 명동거리인 쉴더가쎄(Schildergasse)에 도착해 슬근슬근 산책하며 옛 추억을 떠올리며 걸었다. 그 길은 호에쉬트라쎄(Hohestraβe)라는 길로 연결되고 그 길을 따라가면 유명한 쾰른 대성당(Dom, 돔)이 나오며 음악대학으로 가는 길이 된다. (쾰른 음악대학 건물) 화장실도 가야하고 목도 말라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음대로 갔다. 마침 음대는 방학이라 학생이 거의 없지만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 머물며 연습하러 온 학생들도 있었다. 자판기에서 물을 사 마시고는 라인 강변을 슬슬 걸으며 대성당에 들어가 구경했다. 유학시절, 쾰른 대성당은 하도 많이 들락거리며 구경해 신물이 날 법도 하지만, 이번에 또 들어가 보니 여전히 새로웠다. 프라하는 입장료를 받지만 쾰른 대성당은 돈을 받지 않아 맘 놓고 성당 내부를 돌아다니며 구경했지만, 더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혀있었다. 관람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거기에 들어가면, 동방박사의 유물을 둔 금박의 큰 상자가 있다. (이 유물은 원래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던 건데 전리품으로 빼앗아 온 거다. 이 상자 안에 동방박사 유물이 있다는데 아마 동방박사의 지팡이, 옷, 가방 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천주교에 하도 믿을 수 없는 전설이 많아 실제로 동방박사의 유물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다.) 쾰른 시내는 여전히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들이 많았다. 서울역 부근에 노숙자들이 많듯이, 여기도 그렇다. 그런데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독일 전철에서 볼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건 거의 폐인에 가까운 부부(?)가 맥주를 마시며 부부싸움을 하는 거였다. 여자는 남자를 더 이상 보기 싫다는 듯 창밖만 보고 남자는 여자에게 자꾸 말을 거는데 아주 거슬렸다. 여자가 대답을 안 하자 남자가 화가 났는지 소리를 지르고 내리는 것 같다가는 다시 자리로 와 여자에게 말 걸기를 수차례 했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젊은 부부의 남자가 참다못해 의분을 느끼고 남자에게 다가가 대차게(!) 한 마디 했다.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짐)였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젊은 남자 편인 것을 느낀 폐인 남자가 위기를 느끼는 듯 내리더니 다른 문으로 다시 타는 게 아닌가! 모두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까 젊은 남자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몇 정거장을 더 가다가 젊은 부부는 먼저 내려야 하는지 옆에 있는 다른 젊은이에게 눈짓으로 뒷일을 맡긴다는 사인을 보내고 사인을 받은 젊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가 처리할 테니 걱정 말고 내리라는 눈치를 주었다. 정말 멋있었다! 젊은 남자들이 전철의 중간 중간에 배치(?) 되어 여차하면 한꺼번에 달려들어 남자를 전차에서 밀어낼 태세였는데 다행인지 뭔지는 몰라도 하여간, 폐인 부부(?)가 함께 내렸다.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모른 척 하지 않고 의분을 느끼는 이런 분위기가 무지 부러웠다. 저녁 먹고 나서 소화도 시킬 겸 이번에는 전기자전거를 타보았다.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 다리로 바퀴를 돌리지만, 배터리가 도와줘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이런 자전거라면 언덕이나 산은 물론 세계 일주도 거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아도 곧 자전거로 장거리를 달려야 하는데 이걸로 타고 싶은 욕심이 났다. 하지만, 그건 아마추어나 하는 일이다. '자전거 매니아'라면 다른 도움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달려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