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스스로 ‘문화민족’이라고 부른다. 어느 민족인들 문화가 없겠는가마는 특별히 우리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우리 문화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문화를 얼마나 아끼고 돌보고 있는가?
전통문화의 현장에서 볼 때, 가장 안타까운 것은 선인들의 정신가치가 담긴 유산인 고전적류(古典籍類)의 관리실태이다. 조선시대는 민간차원의 자율적 지식생산 활동이 두드러졌던 시기이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자신이 몸담은 향촌에서 유학(儒學) 이념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40여만권으로 추산되는 방대한 양의 전적들을 남겼다. 그 속에는 당시 시대이념의 현실적 구현 양상이 그대로 담겨있고 지방문화의 다양한 모습들이 반영되어 있어서 조선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그러한 정신문화 유산 중 다수가 이미 일실(逸失)되었거나 서원과 향교, 개인에게로 흩어져 공개가 기피된 채 도난과 훼손·멸실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관찬(官撰)자료 중심의 기록문화재들이 정부의 관심과 재정적 지원 아래 규장각 등의 공공시설에서 과학적으로 보존되고 연구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금년 하반기에만 벌써 경주시 내남면 최씨 문중 전적 500권, 영광군 내산서원의 ‘강감회요’ 목판 380점, 경주시 양동마을 서백당의 전적 306권 등이 연달아 도난을 당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종이류가 대부분인 이 민간소장 기록문화재들이 관리 소홀로 인해 심각한 훼손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흩어진 것은 언젠가 다시 찾아 모을 수 있겠지만, 관리 소홀로 인해 변질·훼손될 경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민간에 소장된 자료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이러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결국 정부의 문화정책에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정부는 개별 소장처 대상의 유물관 건립 지원을 통한 분산관리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려 한다. 그러나 이미 건립된 다수 문중(門中)유물관의 운영 현황이 말해주듯, 현행의 소규모 분산관리 방식으로는 유물의 도난은 간신히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과학적 보존이나 체계적인 연구까지는 기대하기 어렵다. 문화유산, 특히 기록문화재는 잘 보존되어야 할 뿐 아니라 연구되어야 하고, 나아가 많은 이들이 보고 느끼는 문화적 향수(享受)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골동품이 아니라 이 시대 우리들과 소통하는 유의미한 정신적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간소장 자료 위탁보관 사업을 시행해 온 국학진흥원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최선의 방안은 과학적인 수장(受藏)시설과 관리 시스템, 그리고 연구진을 갖춘 공공기관에 위탁해 집중관리하는 것이다. 정부가 10년간 소규모 분산식의 유물관 건립에 투자할 예정인 800억원의 4분의 1을 대규모 공공시설의 건립 또는 운영에 지원하는 것만으로도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문화유산은 내 것이나 우리 문중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이며, 그것의 훼손과 멸실은 한 개인의 손실이 아니라 민족문화의 손실이다. 민간 소장 자료가 처한 현재의 위기상황에 비추어볼 때, 적절한 보존관리 대책은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문제이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위기 상황에 대한 인식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중지를 모아 최선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