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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정연행은 군산시 선연리에서 출생하여 1925년 개복교회의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서 구원받았다.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헌신은 뛰어나, 시댁을 구원하고자 원당교회(1927)를 설립하였다. 1930년 군산 구암교회 성경학교에서 전도사 자격을 취득한 후, 익산 용산교회(1936년), 다송교회(1938년), 제일교회(1942년)에서 시무하였고, 해성교회를 설립하고(1946년) 시무 중에 한국전쟁을 만나 순교하였다.
첫 개척지 원당마을(현 군산시 미룡동)은 미신 섬기기를 좋아하고 봉건사상이 강하였지만, 정연행은 늦은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철야기도하고, 신발이 닳아 1년에 몇 켤레 해어질 정도로 전도를 열심이었다. 그러므로 원당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갔다. 정연행 전도사는 평생 철칙이 있었는데 온전한 주일성수였다. 한 번은 며느리 신옥례 집사가 주일 아침에 옷을 다리다가 야단을 맞고 아예 그 옷을 입지 못한 일도 있었다. 이렇게 주일에는 세상일은 아무 일을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께 예배만 하며 온전히 주일을 하나님께 바치고 거룩하게 지키도록 교육하였다. 해방 후 정 전도사는 단정한 용모, 뛰어난 연설, 명석한 판단력과 지혜로 대한민국 옥구군 애국부인회 회장을 맡았고, 전북 여전도회 연합회장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지역 공산주의자들을 집중적으로 찾아가 설득하여 십 수 명을 전향시켰고 해방 후 정부는 치안유지를 위해 공산주의자들을 구속했을 때, 경찰서장을 찾아가 담판하여 20여 명을 석방시켰다. 석방되지 못한 자들은 6.25가 발발하자 경찰이 다 사살하였다.
1927년에 설립한 군산원당교회
공산 치하가 되자 석방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전도사님은 우리 생명의 은인이므로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보호하겠소” 장담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예수 믿지 말고 우리 여성위원장이 되시오!” 강요했다. 단호하게 거절하자 수차례 끌려가 구타당하고 고문당했다. 이런 형극에 피난을 권유했지만 정 전도사는 “다 피난 가면 누가 이 교회를 지키겠느냐? 일제강점기 때도 신사참배를 믿음으로 이겼으니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지키겠다.”며 피난을 거절하였다. 결국, 정 전도사는 일제강점기 때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킨 죄목으로 붙잡혀가 추석 다음날, 9월 28일 밤에 원당 뒷골에 일본군이 파 놓았던 방공호 속에서 정연행 전도사, 윤응칠 집사, 윤행원 성도, 이춘석 집사, 조봉익 집사, 김두영 성도, 문병길 등 7인 성도와 우익인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정연행 전도사의 시신은 10월 2일에 발견되었다. 당시 원당 굴 앞에서 순교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산당들이 죽창과 총칼을 들고서 “지금이라도 예수를 모른다고 말만 해라, 그러면 살려주마.”하며 유혹하고 위협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정 전도사는 평상시의 침착한 모습으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고 예수 믿으시오” 오히려 그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결국, 공산당은 교인들을 학살하고 정 전도사와 몇 명은 굴속에 생매장하고 굴 입구를 흙으로 메워버렸다. 정 전도사의 유해는 굴속 가장 깊은 곳에서 홀로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으로 찾을 수 있었다. 정 전도사의 두 아들 홍천봉, 홍만봉과 손녀 홍청자를 비롯하여 자신이 개척한 원당교회 교인 14인도 같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두 교회 성도 21인이 순교하였다.
1946년에 설립한 군산해성교회
셋째아들 홍삼봉은 해성교회 장로로 사역했으며, 손주 되는 홍성근과 증손 홍광택 씨도 해성교회 장로로, 넷째아들 홍팔봉과 순교자 큰아들 홍천봉의 아들 홍상근과, 손자 홍충근, 홍성석, 홍진석, 홍정석 씨도 현재 장로로, 손녀 홍성자는 준목으로, 손녀사위 박영신 목사(선친은 순교자 박호준)는 전국에서 교회를 섬기는 참으로 귀한 영적 가문이 되었다. 정연행 전도사처럼 승리하기 위해 날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한다.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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