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철교의 피란민’이란 사진이 있다. 미국 시사지 <라이프>의 사진기자 막스 데스퍼가 찍었다. 그는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B29기와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 서명 장면을 찍은 전쟁사진가다. 한국에는 1950년 7월17일 들어와 많은 사진을 찍었고, 대동강철교 사진은 1950년 12월4일 찍었다. 이 사진은 12월18일치 <라이프>에 휴 모펫 기자가 쓴 기사와 함께 실렸다. “상황을 간단히 말하면, 도주”라는 글이었다. 전쟁에서 미군의 퇴각과 함께 북한 주민들의 피란 상황을 생생히 보도함으로써 독자에게 뉴스로서 충격적인 이미지를 전달한다.
데스퍼와 헬름스의 대동강철교
사진❶로 데스퍼는 1951년 보도사진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후 이 사진은 전쟁의 비인간적 참상을 기록하고 고발하는 이미지로 재현되면서 인류애적 원조(구원)를 보편화하는 장치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미국적·세계적 수용의 맥락에서 그렇다. 한국에서는 ‘자유피란민’의 재현으로 수용, 재생산됐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이 사진이 어떤 이야기 속에 있는지를 보면 명확하다. 공산주의의 압제를 피해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위해 탈출을 감행한 월남 피란민의 ‘엑소더스’인 것이다. 모세가 유대인을 이끌고 갈라지는 홍해를 건너는 이미지와 겹친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데스퍼가 사진을 찍은 하루 전 12월3일 대동강철교 피란민을 거의 같은 구도에서 같은 상황을 찍은 미군 사진병이 있다. 10군단 배속 226통신대 사진병 헬름스 병장이다. 그는 대동강철교에 매달린 피란민들(사진❷)과 “얼음같이 찬 대동강을 맨발로 건너는 피란민들”을 여러 장 찍었다.
사진 설명이 흥미롭다. 용산 기념관에 깔려 있는 반공 자유피란민의 월남 엑소더스 이야기의 출처인 셈이다. 사실 미군 사진병이 찍은 대부분의 피란민 사진에는 이런 설명이 많다.
똑같은 역사의 한 장면을 포착한 두 사진의 설명, 정반대로 사진 이미지를 읽고 수용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데스퍼는 전쟁의 비인간적 참상의 기록과 고발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헬름스 병장은 반공 자유의 엑소더스 신화를 포착했다.
어느 사진이 깊이 가라앉은 진실을 드러내고 있을까? 이 사진의 배경이 되는 12월3일 유엔군의 평양 철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당시 평양에는 북쪽에서 내려온 피란민만 약 20만 명이 있었다. 그러나 미 8군은 피란민 이동이 유엔군의 군사작전과 철수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피란민과 평양 시민을 소개하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한국군도 마찬가지였다. 김종원 평양지구 헌병사령관은 아예 소개와 피난 자체를 막았다. 그런데도 대동강 이남 지역 주민은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 피란을 떠났다. 대동강철교는 반파된 채 끊어져 강을 건너기 쉽지 않았지만, 12월4~5일 이틀간 약 5만 명의 피란민이 강을 건넜다. 12월5일부터 유엔군은 평양을 적성지대로 선포했고, 이후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해 폭격과 기총소사를 가했다.
피란 무대책으로 일관한 정부
이 난리 통에 부모가 죽거나 부모를 잃어버려서 생이별을 하는 아이가 많았다. 헬름스 병장은 대동강변의 피란민 인파 속에서 한 작은 여자아이를 포착한다(사진❸). 옷으로 꽁꽁 싸맨 아이의 표정을 한동안 응시한다. 아이가 혼자 되었다는 것을 시각화하려는 의도가 있었을까? 아이 뒤에 있는 피란민들이 흐릿하게 포착돼 더욱 혼자가 된 아이의 시선에 눈이 간다.
1951년으로 넘어가는 한겨울에도 미군(유엔군)은 1950년 여름 한국 정부와 미군의 피란민 인식과 대책을 다시 반복했다.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겠지만, 한국 정부는 개전 초기 피란민 대책이 전무했다. 대전에서 녹음한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 방송으로 서울 시민에게 가만히 있으라 해놓고 6월28일 새벽에 한강교를 폭파했다. 서울 시민을 소개하기는커녕 대부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피란 무대책으로 일관하던 한국 정부는 7월10일에야 피란민 분산 대책을 내놓았지만, 새빨간 색안경을 쓴 관리 대책이었다. 피란민 구호·구제가 아니라 피란민 대열 속 적 ‘오열’ 침투와 불순분자를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이럴진대 미군의 피란민 인식과 대책은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인종주의적 시선이 더해졌고, 적에게 정신없이 깨지고 피아 식별이 어려워지자 ‘흰옷 입은 피란민’을 적으로 적대하는 인식과 대책을 수립했다. 7월25일 이후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어떤 피란민도 전선을 통과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피란민에 대한 무력 사용을 승인했다.
사진❹는 당시 미군의 피란민 인식, 즉 적이 흰옷을 입고 변장해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할 것이라는 생각을 잘 드러낸다. 이 사진은 1950년 7월21일 롱 병장이 찍었다.
롱 병장의 사진 설명과 달리 미군 병사의 총구가 아이를 업은 여성의 봇짐을 향했고,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뒤에서 한 병사가 젊은 남성을 꼼꼼히 검색하며 무기 등을 숨겼는지 확인하고 있다. 전형적인 피란민 가족의 모습이지만, 미군은 이들이 후방을 침투하는 ‘적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실제 7월19일 25사단 작전 부참모관실은 “적이 여성과 아이를 동반해 아군의 후방을 침투하기 때문에 전투 지역에 있는 모든 한국인을 적으로 간주해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25사단장 킨 소장은 전투 지역 내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해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노근리 피란민 학살의 원죄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피란민 학살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다. 미군은 작전지역 내 피란민을 검문소까지 통제된 이동으로 소개한답시고 사람들을 마을에서 전쟁터 한복판으로 끌어냈다. 그 직후 미군은 사라졌고, 남겨진 피란민들은 황간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피란민들은 미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았고,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정신없이 깨진 7기병연대 소속 병사들을 만났다. 곧 노근리 쌍굴 다리 밑에 피신한 피란민에게 무차별적으로 발포했고, 학살했다.
피란민에 대한 사살 지시와 발포는 1949년 제네바협약은 물론 통례의 전쟁법을 위반했다. 피란민은 동맹국 국민이었고, 비전투원인 민간인이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임을 당시 미군이 인지했다는 증거가 있다. 7월25일 미 5공군의 대구 전방지휘본부 작전참모부장 로저스(C. Rogers) 대령은 5공군 사령관 팀버레이크 준장에게 “민간인, 피란민 기총공격에 대한 정책”이라는 메모를 보냈다. “육군이 아군 위치로 접근하는 모든 민간인과 피란민들을 향해 기총소사할 것을 공군에 요청했고, 지금까지 공군은 이 요청에 응했다”고 보고하면서 “이 문제는 미 공군과 미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할 소지가 크기 때문에 북한군이 피란민 행렬에 포함됐거나 피란민이 적대 행위를 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피란민에 대한 공중공격을 금지하는 정책을 수립”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사진❺는 낙동강 전선 영산 근처에서 소로를 따라 피란민들이 학살되는 모습을 잉그램 상병이 포착했다. 그의 사진 설명대로라면, 피란민은 한국 정부와 미군(유엔군)뿐 아니라 북한군(빨치산)의 공격으로도 죽임을 당했다. 사진 왼쪽 위를 보면, 이러한 학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남은 피란민들은 ‘살길’을 찾아 계속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동안 피란민은 국가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버림받은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대통령의 말에 피란 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3개월 동안 적 치하에 있었고, ‘역도들을 도운 자’(부역자)라는 천형이 내려졌다. 적을 피해 피란했던 사람들이라고 크게 처지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피란민들 속 ‘오열’, 불순분자, 흰옷을 입고 변장한 적이 아님을 입증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골’로 갔다. 미군 전선에는 얼씬대지도 말아야 했다. 미군은 ‘살길’을 찾아 이동 제한을 위반한 피란민들에게 하늘과 땅에서 무차별 발포했다.
왜곡된 자유피란민 서사
어김없이 찾아온 ‘호국의 달’ 6월이지만, 올해는 다르다. 4·27 남북 판문점회의에서 급진전한 종전과 평화의 분위기는 기존 국가주의적 반공 서사를 극복하고 국가와 국민의 관계, 군과 민간(인)의 관계를 민주적·평화적으로 재정립하도록 요청한다. 구체적으로 서울 한복판에 있는 용산 전쟁기념관 곳곳에 새겨진 자유피란민 서사, 즉 반공과 자유를 찾아 공산당 마굴에서 탈출한 이야기를 ‘우리’는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