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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_옹기
세월의 맛, 옹기의 멋
간장, 된장, 고추장을 보관하던 뒤뜰의 정겨운 장독,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승헌 스타일리스트 양은숙 어시스턴트 김소혜, 주민영
발효 문화의 밑천, 옹기
흔히 중국의 문화를 ‘장독 문화’라 말하기도 한다.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선종(禪宗)’으로 발전한 것이 대표적이다. <타이거 마더>라는 교육서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국 예일대 법학과 교수 에이미 추아(Amy Chua)는 <제국의 미래>라는 세계적 명저를 썼다. 추아는 그 책에서 역사 속 모든 제국은 포용을 근원으로 탄생했으며, 배척의 기운과 함께 그 지위를 상실했음을 파헤쳤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국 당나라 역사만 보아도 그렇다. 당은 개국과 더불어 서역을 비롯한 사방의 인종과 문화, 종교까지 모두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제국의 성세(盛世)를 구가했다. 칭기즈 칸이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들 때도 가장 먼저 갈라진 몽골의 여러 동족을 하나로 아울렀고, 드넓은 세상으로 뻗어가면서는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복속한 땅의 사람과 문화, 종교를 껴안았다. 그저 껴안은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위구르어를 차용한 몽골 문자가 그것이다.
과학적으로는 쉽게 발효라 하지만 옹기 속에서 벌어지는 한바탕 요지경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중 백미는 옹기의 마술. 내용물은 배어나오지 않으면서 숨 쉬게 하는 그것이다.
섬이 편협해지기 쉬운 것은 외부로부터의 유입에 먼저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데다, 스스로 나아가 선택하기보다 들어온 것 중에 골라야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까닭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고, 이제 우리도 그들만큼 진취적이니 크게 염려할 바는 아니다. 문제는 다문화 가정 문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아직 남아있는 편협함의 인자(因子)다.
촬영협조 중요무형문화재 제 96호 옹기장 이수자 김창호
신윤복 ‘정변야화’(28.2x35.6cm,조선 후기, 간송미술관 소장).
손길과 숨길로 완성되는 그릇, 옹기
‘담는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따뜻하다. 음식을 담는 그릇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이유다. 특히 옹기는 흙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 색, 풍만한 곡선미와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형태, 투박함이 살아 있는 거친 질감 등 자연 친화적인 우리 선조의 일상과 가장 많이 닮았다. 오로지 흙과 불로 완성되는 옹기는 만들고 사용하는 이의 삶과 정신이 담긴 위대한 유산이다.
잿물을 입힌 오지그릇과 입히지 않은 질그릇을 아울러 옹기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들어도 옹기가 어떤 그릇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누군가 종이 한 장을 주고 옹기를 그려보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그릴 수 있을까. 대부분 장독대를 그리다 포기할 것이다. 그만큼 옹기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어왔다.
‘발효 음식을 완성시키는 숨 쉬는 도자기’라는 특징과 장인의 기나긴 수고는 옹기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지금은 옹기장이가 거의 사라졌지만 지난 시대 우리네 전통 옹기는 장인의 손길과 숨길로 완성됐다. 평범한 흙이 옹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눈물겨울 정도다. 생질꾼이 흙을 채굴하고 흙밭에 널어놓으면 수비꾼이 흙탕을 만들어 잡물을 제거하고 수비탕에서 물을 뺀 흙을 건조한다. 건아꾼이 깨끼질(철사나 낫처럼 날카로운 장비로 흙을 자르면서 흙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과 곧매질(흙의 점력을 높이기 위해 방망이로 흙을 내리쳐 곱게 다지는 일)을 통해 흙을 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흙덩이를 바닥에 쳐서 길게 늘이면 그제야 비로소 옹기의 재료가 된다. 이 흙은 가마에서 소성될 때 미세한 구멍을 형성하면서 온도와 습도를 스스로 조절하는 그릇으로 다시 태어난다.
빗살무늬 토기(38.1x26.6cm, 신석기,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국인의 삶과 함께해온 옹기의 역사
옹기의 발생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 유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 시대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릇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자기가 크게 발전했는데, 이때에도 옹기는 일상생활에 중요한 그릇으로 사용됐다.
장인이 전통 방식으로 만든 옹기는 팔리지 않았고, 대량 생산으로 찍어내 값싸게 파는 옹기만 유통됐다. 다행히 현재는 옹기의 뛰어난 과학성과 투박한 아름다움이 그 가치를 새롭게 인정받으면서 전국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김준근 ‘물쟝사’(23.2x16cm, 조선 후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우리 선조는 가뭄이 닥치는 여름이면 우물 대 부분이 고갈되어 계곡이나 하천 물을 길어 먹 어야 했다. 물장수들이 물의 신선도를 유지하 기 위해 옹기에 물을 지고 다녔다.
김준근 ‘독만들고’(23.2x16cm, 조선 후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발로 물레를 차면서 도개와 수레를 가지고 커 다란 독을 만들고 있는 옹기 장인의 모습이다.
풍속화 속에 나타난 옹기
16세기에 제작된 명종조 ‘궁중숭불도’는 궁중에서 행하는 불교 행사를 그린 것인데, 행사에 쓸 음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항아리와 자배기수십 개가 그려져 있다. 19세기로 넘어가면 많은 작품에 장독대가 등장하는데 그 장독대는 수백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처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우리 문화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에 활동한 기산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에는 ‘독점’과 ‘독 만드는 사람’이 실려 있다. ‘독점’은 옹기를 만드는 작업장을 그린 것으로, 산등성이를 따라 긴 가마가 있는데 앞뒤가 뻥 뚫린 뺄불통가마다. 가마 앞에는 불 때는 일을 담당하는 불대장이 앉아 있고, 가마 옆에는 물레를 차면서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대장과 지게를 세워놓고 옹기를 담는 옹기 장수가 있다. 19세기 옹기와 관련된 직업군이 망라된 그림이다.
‘독 만드는 사람’에는 옹기장이의 작업 모습이 담겨 있다. 한 장인이 발로 물레를 차면서 도개와 수레를 가지고 커다란 독을 만들고 있는데, 독 안의 긴 줄은 커다란 독을 만들 때 질을 말리기 위해 숯을 넣은 부드레 장치다. 숯은 독 내부를 말리면서 흙에 남아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기능을 해서 큰 독을 만들 때 빠지지 않는 재료로 사용됐다. 이 모습은 1970년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식초병(29.5x25cm, 옹기민속박물관 소장).
음식만큼 중요한 옹기의 문화적 가치
전통 장은 현대에 와서는 흔한 존재가 됐지만 우리 선조는 장 담그는 것을 하나의 의식처럼 여겼다.
무우 배추 캐어들어
겨울에는 큰 독에 김치를 담아 땅속에 묻어두고 1년 내내 먹고 여름에는 작은 단지에 열무김치를 담아 개울에 두고 시원하게 먹었다고 하니, 김치를 완성하는 최후의 역할이 옹기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당이나 담장에 김장독이 있었다면 부엌에는 물두멍이 있었다. 아무리 큰 대갓집이라도 우물은 담 밖에 두는 것이 보통인데, 이는 물을 귀하게 사용한 풍습 때문이다. 정성껏 우물을 길어 부엌으로 가져오면 물두멍에 담아 음식을 할 때나 식재료를 씻을 때 쓴다. 물두멍에 물을 담아 쓰는 건 물을 아끼려는 검약 정신과 불순물을 가라앉혀 정수하려는 지혜에서 비롯됐다. 물두멍은 다른 독보다 크고 운두가 넓으며 독 외부에 물고기를 그려 넣어 장식했다.
독 중에는 술독도 있다. 곡식을 발효해 만드는 우리 술은 독에서 만들어야 제 맛이 난다. 곡식을 숙성하는 데도 옹기가 제격인데, 온돌방 한쪽에 옹기를 두고 누룩을 발효시켜 술을 만들고 제사상에 올리는 것은 우리의 고유 문화 중 하나였다.
“고려에는 찹쌀은 없고 멥쌀에 누룩을 섞어서 술을 만드는데 빛깔이 짙고 맛이 독해 쉽게 취하고 속히 깬다.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맛있는 술)이라 하는데 좌고의 맑은 법주다. 거기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와준(질그릇으로 만든 술병)에 담아서 황견으로 봉해둔다.”
고려 때도 주조 시 옹기를 썼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술을 더 발효하면 식초가 된다. 이때에는 ‘병’이라는 옹기가 사용됐다. 부뚜막 따뜻한 곳에 초병을 두고 그 안에 막걸리를 담아 더 시게 하면 맛있는 식초가 되는 것이다. 부엌에는 초병 말고 젓독도 있었다. 다른 항아리에 비해 입이 넓은 젓독에는 새우젓이나 멸치젓, 조기젓 등을 담았다. 큰 독 말고 찬장에 놓이는 아주 작은 독도 있다. 바로 고춧가루나 깨소금 등이 들어가는 양념독이다. 커봐야 가로 20cm 크기인 양념독은 부엌 살림에서 빠질 수 없는 도구였다. 플라스틱 통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고춧가루나 소금은 플라스틱보다 옹기에 담아 쓰면 신선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4호 제주옹기장 고원수선생 ‘허벅방춘이’ (36x35cm, 1960, 제주옹기박물관 소장). 제주 옹기의 가장 큰 특징은 유약을 칠하지 않고 굽는다는 것이다. 옹기의 몸뚱이에 불길의 흔적이 그대로 살아 있다. 허벅방춘이는 씨앗이나 술 등을 보관하는 역할을 한다.
각양각색 팔도 옹기 매력 엿보기
“울산시 울주군 온양면 서종열 옹기 장인이 작업하던 과정을 토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옹기 장인은 먼저 물레에 백토가루를 뿌리고 방망이로 흙을 두드려 둥근 옹기바닥을 만듭니다. 바닥 가장자리를 따라 지름이 10cm쯤 되는 긴 흙가래를 붙여가며 기벽을 쌓아갑니다. 기벽을 만들 때는 흙가래를 어깨에 걸치고 두 손으로 흙을 비틀어가며 기벽을 붙여갑니다. 이런 과정을 타래질 또는 타래 기법이라고 부릅니다.
수레질은 도개와 수레라는 두 도구를 이용해 안팎으로 두드리는 행위입니다.
읽기만 해도 힘든 이 과정이 끝나면 명주 천으로 옹기를 옮겨 그늘에서 보름 정도 말린다.
경기도에서 사용하는 써리 기법은 흙뭉치를 만드는 과정에서 타래 기법과 조금 다르다. 타래 기법이 흙뭉치를 전라도의 쳇바퀴 타래 기법은 흙가래 대신 가로가 긴 널빤지처럼 생긴 판장을 사용한다. 판장은 흙뭉치를 땅바닥에 내리쳐서 길이와 넓이를 늘여서 만든다. 옹기 제작법 중 작업 속도가 가장 빠르다고 한다.
지역별로 옹기 모양이 다른 까닭은 바로 이 타래질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서울에는 푸레독을 제작하는 배요섭 옹기장이 있다. 푸레독은 유약을 묻히지 않는 대신 소성 중에 천일염을 뿌린다. 서울 일원에서 발달한 경기도의 옹기는 높이보다 너비가 좁은 날씬한 형태가 기본이다. 또 연꽃 봉오리 형태의 꼭지가 달린 뚜껑으로 덮어놓고 전돌이 있어 모양새를 더 돋보이게 한다. 전라도의 장독은 배가 불룩하고 크며 투구 모양과 비슷한 삼층 둥근 탑 모양의 꼭지가 있는 뚜껑이나 소래라 불리는 큰 자배기 형태의 뚜껑이 있다. 충청도 독은 목 부분이 높고 밖으로 약간 벌려진 형태가 많고 전체적으로 투박하다.
제주의 옹기는 제작 방식뿐 아니라 재료부터 다르다. 제주의 흙은 구멍이 많은 화산토다. 화산토는 이미 한차례 고열에 구워진 흙인 까닭에 유약을 바르지 않는다. 가마도 육지와는 사뭇 다른데, 일반 진흙이 아닌 현무암을 쌓아 가마를 만들고 틈새는 진흙으로 메운다. 이런 독특한 방식 때문에 제주 옹기는 세계적으로 주목받았지만, 플라스틱 그릇에 밀려 1960년대 말 생산이 중단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제주도예촌 강창언 촌장이 1980년부터 제주 전역을 돌며 옹기장이들을 설득했고, 2000년에 그 복원에 성공했다.
세계가 놀라는 옹기의 과학성
옹기는 구워질 때 150~300℃에 수분이 제거되고, 300~400℃에 유기 물질이 타며 500~800℃에 결정수가 빠져나간다고 한다. 옹기 내부에 있던 결정수가 높은 온도로 가열됨에 따라 증발되는데, 이때 생긴 증발 통로가 옹기 기벽에 생기며 공기가 순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벽에 생기는 통로를 기공이라고 하는데, 기공의 크기는 1~20마이크로다. 산소는 쉽게 드나들 수 있지만 빗방울은 침투할 수 없는 크기다. 그래서 음식의 부패를 막아주는 미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김치에는 류코노스톡이라는 유산균이 있어 톡 쏘는 맛이 나는데, 영하 1℃가 되면 이 균이 활발히 움직여 김치를 숙성시킨다. 땅속에 묻은 옹기 속 온도가 류코노스톡이 살기 좋은 온도다. 그리고 김장독 뚜껑이 위에 달려 여닫을 때의 온도 변화를 최소화하는데 이것 역시 맛있는 김치에 필요한 부분이다. 김치냉장고는 이런 옹기의 특징을 그대로 접목해 탄생한 가전이다.
전통 옹기와 현대 옹기, 어떻게 구별할까
그런데 소비자는 어떤 것이 전통 옹기인지 외관만으로 구별해낼 수 없다.
첫째는 이음새. 현대 옹기는 반씩 따로 만들어 이어 붙이기 때문에 중간에 이음새가 보이는 것이 많다. 이음새가 잘 보이는 것은 현대 옹기 중에서도 질이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바닥에 이음새가 보이는 것은 전통 옹기 쪽이다. 현대 옹기는 석고 틀에서 찍어내 전통 옹기보다 바닥 이음새가 더 깔끔하다.
두 번째는 빛깔이다. 현대 방식에서는 석고 틀의 한계 때문에 대형 옹기를 만들지 못하고 만든다 하더라도 불량률이 높다.
에디터 김선미 자료협조 간송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옹기민속박물관, 제주옹기박물관 참고도서 <옹기>(정양모, 이훈석, 정명호 지음, 대원사 펴냄), <옹기>(이영자, 배도식 지음, 열화당 펴냄), <숨 쉬는 도자기 옹기>(홍상순 지음, 서해문집 펴냄), <전통 속에 살아 숨 쉬는 첨단 과학 이야기>(윤용현 지음, 교학사 펴냄)
자연을 닮고 삶이 묻어나는 옹기에 담긴 이야기
고향의 서정을 담뿍 간직하다
장독대 옆에는 우물이 있고, 그 주변에는 앵두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포도덩굴이 가지를 뻗고 있어 철마다 그늘을 만들고 열매를 매단다. 놀이장이 따로 없던 시절에 아이들은 줄곧 이 장독대 주변에 모여 들어 놀고, 봄이면 감꽃을 줍고, 여름에는 앵두를 따 먹으며 자랐고, 가을에는 익어서 떨어진 대추를 주워 먹고, 겨울에는 독에 넣어둔 홍시를 꺼내 먹고 자랐다. 가을볕이 좋으면 할머니가 장독 위 채반에 붉은 고추와 호박고지를 널어 말리곤 하셨다.
무엇보다 장독대에는 먹을 것이 있어서 애어른 할 것 없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먹을 것이 별로 없던 옛 시절, 밤중에 어른들 몰래 장독대로 나가 장독대 옆에 둔 고구마나 배추뿌리 같은 걸 갖다 먹는 재미도 쏠쏠했는데, 가을에 따서 독안에 넣어 보관해둔 홍시나 곶감이 손에 잡히면 더없는 행운이었다.
또 그곳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며 정화수를 떠놓고 빌고 또 빌었던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의 소박한 신앙심이 신선한 새벽 향기 속에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바람과 햇빛을 품어 곰삭은 맛을 내다
“장은 모든 음식 맛의 으뜸이다. 설혹 산간의 사람들이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없어도 맛이 좋은 장만 여럿 있으면 반찬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그러기에 우선 장 담그기에 유의하고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게 함이 도리다.”
고기는 없어도 고기에 버금가는 영양 덩어리가 장이니 장을 소중히 다뤄 사람에게 더욱 이로운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정성을 다하라는 것이다. 옛말에 ‘장 맛이 독 맛이다’ 라고 하여, 지방마다 집집마다 맛있고 특색 있는 음식 맛을 장독에서 찾았다. 그래서 우리네 할머니와 어머니는 맛나고 좋은 장을 얻기 위해 좋은 독을 고르는 데 각별히 정성을 다했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장을 익히고 곰삭히는 역할을 하는 장독은 바람과 햇빛, 즉 자연에 의지해 장을 소중한 영양 덩어리로 완성시키는 생명의 그릇인 셈이다.
구수한 된장 뚝배기에 담긴 어머니의 손맛
‘장맛은 뚝배기’라는 말이 있듯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는 입에 넣기도 전에 그 구수함으로 마음을 먼저 편안하게 해준다. 마땅한 찬거리가 없던 시절, 장독대에서 몇 수저 푹푹 퍼온 된장을 풀고 두부와 애호박만 넣어 끓인 된장찌개의 맛은 단연 으뜸이었다.
손마디 굵은 어머니가 정성껏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시골집 아랫목에 앉아 있는 감상에 빠져들고 싶다. 우리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뚝배기찌개는 뚝배기 그대로 밥상에 올리는 것이 우리의 풍속이다. 밥상에 올린 뚝배기찌개는 반드시 어른이 먼저 수저를 댄 뒤에 먹어야 하며 동시에 한꺼번에 두 수저가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손윗사람이 먼저 찌개를 뜰 수 있게 손 아랫사람이 잠시 멈추는 것이 예의요 미풍이다. 뚝배기는 이렇듯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식기로 남아 있다.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이 머무는 자리, 우물가
아무리 큰 대갓집이라도 우물은 담 밖에 두는 것이 보통인데, 모든 절약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물의 절약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물가의 물긷는 아낙네의 모습과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동네 어귀로 접어드는 여인네의 모습은 우리나라 옛 풍경에서도 가장 정겨운 고향의 모습이다.
이렇게 길어온 물은 다시 물두멍에 담아 쓰는데 첫째는 물을 아끼려는 선조의 검약 정신이요, 둘째는 물을 가라 앉혀 정수해 먹으려는 지혜의 두 가지 효과를 노렸다. 물두멍과 우물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우물가에는 그 옛날 곤궁하지만 순수했던 삶의 풍경이 오롯이 담겨 있다.
스타일리스트 양은숙 어시스턴트 김소혜, 주민영 참고문헌
울주군 외고산 옹기마을
울주군 옹기마을에 가면 정겨운 가을을 만날 수 있다. 둥글둥글한 옹기들이 가을볕 아래 모여 여행자를 반긴다. 옹기를 구경하다 보면 절로 옹기에 손길이 간다. 거친 듯하면서도 매끈한 촉감이 왠지 어머니 손등을 만지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해진다.
볕이 참 좋다. 여름의 사납고 맹렬한 기세는 시나브로 사라졌다. 요즘 어깨에 닿는 볕은 꼭 잠자리 날개 같 숨 쉬는 그릇이라 불리고, 찬란한 볕과 부드러운 바람을 고스란히 품은 우리네 그릇이다.
우리네 모습과 꼭 닮은 모습, 옹기
어느 것 하나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한 옹기를 보면서 ‘이렇게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외고산 옹기마을의 탄생은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북 영덕에서 옹기를 만들던 고 허덕만 씨가 이주하면서부터다. 부산으로 피란을 떠난 길에 만난 이곳의 풍부하고 질 좋은 점토에 반해 허씨는 이곳에 정착했다. 따뜻한 기온과 마을의 완만한 구릉도 가마를 만들기에 적격이었다. 운도 따랐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옹기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옹기 기술을 배우려는 이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1960~70년대에는 이곳에 머무는 옹기 장인과 도공이 350명을 훌쩍 넘었다고 한다. 정부의 노력도 뒷받침됐다. 1990년에는 옹기장을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했다. 외고산 옹기마을 역시 2000년에는 옹기 보존 마을로, 지금은 전통 옹기 체험 마을로 지정되었다. 마을에는 옹기장 8명을 비롯해 총 128가구 중 40여 가구가 옹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옹기회관, 옹기전시관, 상설판매장, 체험실습장 등도 들어섰다. 옹기는 한민족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저장 용기다. 우리나라의 옹기 사용은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오르는데, 삼국시대 토기 항아리에 ‘옹’자를 표기한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1 외고산 옹기마을에는 옹기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판매장이 많다. 여행도 하고 쇼핑도 즐길 수 있어 일석이조. 2 꽃밭 사이에 숨은 옹기.옹기는 부엌뿐 아니라 정원에도 잘 어울린다.
3 외고산 옹기마을을 다니다 보면 집 곳곳을 다양한 모습으로 장식한 옹기를 만날 수 있다.
옹기마을엔 아기자기한 재미가 가득
옹기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다양한 옹기를 만날 수 있다. 옹기의 모양이 지역별로 다르다는 것도 흥미롭다. 따뜻한 남부 지방의 옹기는 항아리의 통과 폭을 넓게 만들어 빛의 투과율을 낮췄고, 북부 지방은 옹기의 폭을 좁게 만들어 빛을 많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는 데서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관광객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다. 옹기아카데미관에서는 옹기의 제작 과정과 쓰임새를 배울 수 있고, 옹기 만들기를 직접 체험할 수도 있다. 옹기마을을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옹기 제작장에서는 전통 방식으로 옹기를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다. 큰 독 대부분은 장인의 손을 거친다. 나이 든 사람은 힘이 부쳐서, 젊은 사람은 기술이 부족해서 쉽게 덤벼들지 못하는 작업이 큰 독 만드는 작업이다. 아무래도 사람의 손을 거치다 보니 옹기의 모양이 약간 비뚤어지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오히려 옹기의 매력이다. 옹기마을의 집들은 담장부터 지붕까지 모두 옹기로 꾸몄다. 옹기 파편으로 토담을 만들었고, 지붕에는 커다란 옹기 항아리를 올려놓았다. 마을 고샅길을 걷다 보면 옹기에 유약 바르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마을은 아담해서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상설판매장이 있어 마음에 드는 옹기를 살 수도 있다. 물론 시중보다 훨씬 저렴하다.
4 장생포 풍경. 외고산 옹기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래포구로 유명했던 장생포가 있다.
5 외고산 옹기마을에 장식된 옹기.
일본 성의 원형을 엿보다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과 진주성 전투에 패한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쫓기게 되고, 결국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군 철수를 명령한다. 당시 왜군 일부는 경상도 해변에 20여 기의 성을 쌓고 농성에 들어간다. 서생포왜성은 그때 지은 것으로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하다. 성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산정을 향하는 성벽은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다. 다양한 출입구와 석루 등도 잔존하고 가토가 기거한 천수각 자리의 돌계단도 비교적 선명하다. 성을 둘러싼 네모진 공간과 위장된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 것도 서생포왜성의 특징이다. 성에서 왜군이 물러간 것은 선조 31년(1598)인 정유재란 때.
왜군은 퇴각하면서 성을 쌓는 데 동원된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들은 일본의 3대 성으로 꼽히는 가토의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는데 동원됐고, 그 후손은 ‘서생’이라는 성씨로 구마모토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1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때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이 쌓은 성이다. 당시 지은 성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지금도 그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2 간절곶 조각공원에 놓인 벤치. 상쾌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
울산 지역 읍지에도 ‘울산 간절곶에 해가 떠야 한반도의 새벽이 온다’는 기록이 있다. 간절곶 언덕배기에는 등대가 서 있다. 간절곶은 지형상으로 태평양을 향해 열려 있는 중요한 뱃길이었다. 한때 장생포의 포경선들이 태평양의 고래 떼를 쫓았고, 지금도 원유를 실은 유조선과 자동차를 싣고 가는 컨테이너선 등 수많은 화물선과 어선이 오간다.
울산 앞바다는 석유나 가스 등 액체 화물 수송량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곳이다. 그런 까닭에 등대도 일찍 들어섰다. 지금 서 있는 등대는 밀레니엄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몰리자 2001년 새로 세운 것이다. 지면으로부터 17m, 해수면으로부터는 35m 높이에 있다. 불빛이 밝다. 무려 양초 180만 개를 모아놓은 것과 같은 밝기다. 불빛은 50km 밖까지 닿는다고 한다. 가격도 비싸다. 우리 기술로 개발한 등명기는 하나에 4억원에 달한다. 전구 하나가 무려 30만~40만원이다. 새 등대 옆에는 1979년에 세워 20년 동안 바다를 밝힌 꼬마 등대가 서 있다. 물론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간절곶에 놓인 소망우체통. 사람 키 2배를 훌쩍 넘는 높이다.
고래박물관에 전시된 포경선 모형.
간절곶은 자그마한 공원처럼 꾸며놓았다. 제법 거센 파도가 쉴 새 없이 부딪치는 바다 끝자락 해안엔 운치 있게 벤치도 보인다.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됐다는 신라 충신 박제상 부인 석상도 보인다. 간절곶을 찾는 여행객이 기념사진을 찍는 곳이 있다.
‘소망 우체통’이다. 사람 키보다 훨씬 커서 높이가 무려 5m에 가로 2.4m, 세로 2m, 무게는 7톤이나 된다. 그냥 형식적으로 세운 게 아니라 남울산우체국에서 관리하는 진짜 우체통이다. 매일 오후 1시에 우편물을 거둬 간다.
간절곶 북쪽으로는 드라마 하우스가 자리하고 있다. 드라마 MBC <메이퀸>에서 해주의 아버지를 죽이고 조선소를 집어삼킨 장도현의 저택으로 나온다. 드라마 <욕망의 불꽃>과 영화 <한반도>의 촬영지로도 쓰였다. 바다를 바라보며 선 이국적인 건물들이 연인의 발걸음을 불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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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