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풀어나가는 것이 복이죠
법회 시간이 가까워지자 큰방에 용학스님께 인사하러 들어오신 스님들이 많았다.
그중에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며칠 전 큰스님을 찾아뵈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스님 참회하십시오 했습니다. 너무 쎈 말이 아니었을까요?”
“맞습니다. 스님 아프신 것은 공금횡령에 가깝습니다. 스님 몸은 공공재에 가까운데 혼자 마음껏 막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하고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
쉬는 시간에 큰스님의 상좌이신 중원스님이 용학스님에게 다가와 어깨를 톡톡 두드리셨다.
두 분은 선원 뒤편 창가에 서서 말씀을 나누었는데, 용학스님이 중원스님의 얼굴을 보고 ‘살이 찌셨나 얼굴이 부으셨다’고 했다. 중원스님은 눈에 뭔가가 떨어져서 부상을 입은 거라고 하셨다.
“안전사고는 항상 조심해야 돼요.”
하고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두 분이서 큰스님 이야기를 나눴다. 큰스님은 병원 옥상에서 보행 보조기구인 워커를 짚고 걸으시는데 ‘축지법을 쓰면서 다니신다’고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요즘 문병을 가면 웃음이 날 거예요.”
빠르게 나아지시는 모습이 신기해서 문안 간 사람들이 웃음이 날 거라고 하셨다.
“의지의 한국인입니다.” 하셨다.
*
고관절 재활운동이 보통 어렵지 않은데 큰스님은 잘해나가고 계신다고 했다.
*
이번 법회 전에 큰스님이 오시느냐고 전화로 질문하시는 스님들이 많았다고 했다.
다음 달에는 큰스님이 오셔서 30분이라도 법문하셨으면 좋겠다고 학무거사님도 말씀하셨다.
스님들이 지난달보다 많이 오신 것 같았다. 법회가 끝나고 내려오는 길에 법련화 보살님이 ‘오늘 혜일성 보살님이 세어 봤는데 비구 스님은 아홉 분만 오셨다’고 전해주셨다. 혜일성 보살님은 스님들 법명과 얼굴까지 매칭해서 다 외우고 계셔서, 항상 ‘어느 스님을 찾아달라’고 하면 앉은 자리까지 일러주시곤 했다.
문수선원의 책상들 중에 왼쪽은 비고 오른쪽은 꽉 찼었는데 그 자리가 비구스님들의 자리였던 모양이다.
*
새로 오신 젊은 스님들이 운문사 스님들인지 용학스님께 여쭤봤더니 아니라고 하셨다.
운문사에 가면 별 우스운 이야기가 아닌데도 까르르 웃고 ‘자기들이 재밌게 만든다’고 말씀하셨다.
봄학기 종강하고 나올 때는 계단 밑에 몇이 서더니 포위를 해서 ‘와이러노’ 했더니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르더라고 했다.
“즉석연주를 했죠. 나오다가 또 뭔가 싶어서 궁금해서 쪼르르 와서 동참하고 동참하고 자기들이 좋지. 운문사 같은 데는 사람들이 스트레스 얼마나 받는데. 스스로 풀어나가는 게 복이죠.”
하고 용학스님이 말씀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양력으로 오월 초하루다. 법정휴일 같은데 많은 분들이 참석해 주셨다.
오늘 여러분들께 법공양 올린 책이 한 권 있다.
<불교의 비전>이라는 정목스님의 책이다.
우리 어른스님께서 늘 ‘범어사에서 공부하는 중 하나 있다’라고 하신 분이 바로 이 정목스님이다. 금강암의 벽(碧)자 파(坡)자 어른스님, 벽파스님의 시봉이신데, 개인적으로는 저하고 도반이시기도 하다.
오랫동안 텔레비전이라든지 지면을 통해서 여러분들도 이 스님의 열정적인 강의나 책 내용을 많이 접했을 것이다. 나이가 70을 목전에 두고 있으니까 ‘이걸로 이제 내 회향이다’ 라고 하시면서 어른스님께도 전화를 드리고 저에게도 전화가 왔다.
‘이제 스님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강당은 거의 사라지고 없고, 문수강당이 유일한 것 같은데 부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하면서 여기 우리가 공부하는 강당에 책을 드리면 당신이 좀 보람이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법보시를 해주셨다.
다 같이 오룡골에 사시는 정목(正牧)스님께 찬탄 박수를 보내드리겠다.
이 스님은 원효광이라고 할 정도로 원효스님에 관한 책은 거의 다 번역을 하셨다. 이 스님은 저하고도 토론하다가 저녁에 토론이 안 끝나면 자고 일어나 아침 먹기 전에 전화가 와서 한 시간 두 시간 ‘그게 그거 맞냐? 이게 아니냐? 저게 아니냐?’ 하고 토론을 이어가신다. 저는 전라도 사투리를 잘 못 알아듣는데 그렇게 악착같이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고 존경하는 도반이기도 하다.
<불교의 비전> 부제가 ‘염불문의 완성’이라고 해놓았다.
스님은 항상 저에게 ‘니는 화엄종해라, 나는 염불종할게’ 할 정도로 서로가 다독거려주고 모자라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도반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저는 이런 책이 나올 때마다 환희찬탄하고 책다운 책이 나와서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이 스님은 수행도 실제적으로 거기에 맞춰서, 지식적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걸고 하시는 것 같다.
이 책 앞의 네 구절만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다.
“교학이 없는 신행은 맹종하기 쉽고
신행이 없는 교학은 체득하기 어렵다.
불교철학은 마음과 행위의 과학이며
수학과 같아서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여기까지 읽겠다.
스님께서 이제까지 <아미타경종요> 라든지 <무량수경종요> 내지는 <기신론> 같은 데 대해서 당신의 소견을 피를 토하듯 역설하셨다.
“이제 니하고 내하고 우리 세대 밑에는 공부 끝난 것 같다. 아무도 안 할 것 같다.” 이런 말도 하면서 우리 불교를 염려하신다.
우리가 같이 읽은 이 네 구절을 화엄경에 견주어서 말씀드리자면 청량국사께서 믿음 없는 이해력과 맹신에 대해서 말씀하신 부분이 있다.
믿음은 없는데 지식적으로 잘 분석하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믿음 없이 불교를 잘 분석하고 파악해 내는 능력만 있는 사람들을 청량스님은 삿되다고 하였다.
이해는 잘하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삿된 소갈딱지를 가진 사람이다. 요즘은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많다.
그 반대로 경전에 나온 대로 그렇다고 하고, 무조건 믿기는 믿는데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맹신이라고 한다.
‘맹신이 되어서는 도대체 선근의 종자가 싹트지 않고 부처님의 태양을 볼 길이 없다’라고 청량국사가 소초에서 언급하셨다.
문득 <불교의 비전> 앞 부분을 읽으니까 생각이 났다.
믿음을 갖추고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 몸에 무르녹아지도록 행으로 옮기면서, 그것이 언젠가는 마음에 한 소식 깨달음이 되도록 해야 된다.
불교라는 것은 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지해야 된다.
*
의일심법(依一心法)하야 유이종문(有二種門)하니 하나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하나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라.
이 생멸문은 어디서 일어나는가?
의여래장(依如來藏)하야 유생멸심(有生滅心)이라.
여래장을 의지해서 생멸심이 일으켜진다.
중생은 어떠냐?
유념을 의지하여 유위법을 의지해서 중생이라고 하는 유분별심을 의지하여 생멸의 문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사람은 어떠냐?
일체현성(一切賢聖)은 개이무위법(皆以無爲法)으로 이유차별(而有差別)이다. 말을 의지하지 않고 마음을 의지한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잡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잡념이 다 끊어진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사람의 인연에 의지하지 않고 법에 의지한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능엄경 같은 데는 아예 급남스님의 서문 첫 구절부터 나온다.
*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더러 있는데 젊은 스님들이어서 상당히 기분 좋은 현상이다. 물갈이가 확 된 것 같다.
처음 온 스님들, 젊은 스님들에게 기댄다.
우리 어른 스님께서 화엄경을 한 50권까지 강의하시고 조금 편찮으셔서 쉬고 계신다. 화엄경이 앞으로 30권쯤 남았다.
원래는 한 스무 권쯤 남았을 때 어른스님이 저에게 토스해서 ‘강의를 이어갈 생각을 해야된다’고 말씀하셨었다.
저로서는 외람된 말씀이다.
어른스님이 다음달에 오셔서 법문을 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화엄경이 30권 남았다.
그런데 스님들은 부디 어른스님께도 의지하지 마시고 여러분들 자신에 의지해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하시기 바란다.
망망대해에서 자기의 섬에 안주해서 경전을 보시기 바란다.
지금 우리가 화엄경 50권째 해오고 있고 오늘은 50권이 마무리 되는 날이다.
51권, 52권까지가 여래출현품이다.
*
교학적으로 볼 때 화엄경은 수행을 해서 실제적으로 여래가 출현하는 경지까지 가게 된다.
여래출현품 대목은 어느 대목과 가장 영향이 있는가? 화엄경은 품끼리 서로 다 연관이 있지만 여래출현품과 가장 연관되는 한 품을 꼭 꼽으라고 한다면 범행품이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유인물을 한 장씩 나눠드렸다.
범행품 중에서 여러분들께서 반드시 숙지하셔야 할 대목이다.
지금 우리가 여래출현품을 하는 가운데서 여래가 출현하는 법은 어떻게 되느냐?
모든 격식과 의식이 화엄경에서 갖춰져 나온다.
‘사람이 화를 내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나온 보현행품 있지 않은가. 보현행품 다음에 여래출현품 이 두 품은 7회차 법문의 마지막 두 품이다.
*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화엄경 처음에는 소신인과(所信因果)라고 해서 1회차 설법 여섯 개가 있다.
2회차부터 7회차까지 삼십 한 품은 차별인과(差別因果)와 평등인과(平等因果)로서 차별과 평등을 이야기한다.
차별은 수행하는 것에 그 수준이 있다는 말씀이다.
평등에 와서는 어떻게 수행해왔든지 간에 바다에 들어오면 모든 강물이 이름을 잃어버리듯이 평등하게 모든 사람은 보현행원으로써 그 수행이 귀결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보현행품으로 평등인을 맺음하고 여래출현품에 와서 평등과로서 드디어 부처님을 탄생시킨다.
이렇게 여래출현을 통해 부처님을 탄생시킨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세간품 내지는 입법계품을 통해서 실천궁행을 하는 것이다.
이세간품은 화엄경을 분차로 나눌 때 탁법진수성행분(托法進修成行分)이라고 한다. 탁법(托法) 법을 의지해서 진수(進修) 수행해서 성행((成行) 수행을 완성해 나간다.
이것을 세간의 탐진치를 다 떠난다고 해서 이세간품(二世間品)이라고 한다.
거기에서 다시 한번 더 뜸을 들여서 완전한 수행을 취득하는 것이 입법계품이다.
곶감을 예로 들면 홍시가 다 익었는데 그것을 다시 한번 다른 제품으로 묘각단계에서 만든다면 그것이 화엄경에서는 입법계품이다.
입법계품에서 법계로 들어간다. 법계에 자성이 없는 줄을 알고 법계로 들어가서 완전히 부처님과 동급이 된다.
화엄경의 궁극 마지막 목표는 보현행원품인데 입법계품 제일 마지막 게송인 ‘찰진신념가수지(刹塵信念可數知)’가 끝나고 난 뒤에 보현행원품으로 나온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대목은 수행의 점차인 신해행증(信解行證)중에 신해(信解)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에게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대목이 어떤 부분인가 하는 것을 정리해 드리는 것이다. 계속 공부하신 분들은 다시 한번 점검하시기 바란다.
*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백호미간(白毫眉間)과 구중(口中) 두 군데서밖에 방광을 안 한다.
화엄경 1회차에서는 구중방광을 먼저 하시고 미간방광을 나중에 하신다.
7회차에 와서는 미간방광을 먼저 하시고 구중방광을 두 번째로 하신다.
7회차 여래출현품에서 처음에는 부처님께서 미간백호상에서 대광명을 발했는데 그때의 광명 이름은 여래출현(如來出現)이다.
이것을 야무지게 알아야 된다.
대강 아는 것이 아니고, 어름하게 해서 결석하고 이러면 안 된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을 지금 우리는 공부하고 있다.
미간에서 방광하신 이가 누구인가? 여래다.
여래가 출현하셨다.
여래출현방광이 온 세계 중생을 다 제도하고 난 뒤에 우요삼잡이 아니라 부처님을 오른쪽으로 열 바퀴 돈다. 우요십잡(右繞十匝)하고 다시 어디로 들어가는가?
여래성기묘덕보살의 정수리로 간다.
여래성기(如來性起) 여래의 성품이 일어났다.
연기(緣起)와 성기(性起)는 다르다.
여래의 마음이 일어난 것을 성기라 한다.
여래성기묘덕보살이 문수보살이다.
여래의 성품은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해서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가 없는 부동(不動)이다. 그런데 여래가 일어났다.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 됐다.
여래의 성품에서 일어나 수연성이 되는 것을 우리는 보현보살이라고 한다.
*
미간백호에서 나온 방광이 온 불사를 하고 난 뒤에 부처님의 오른쪽으로 열 바퀴 돌고 난 뒤에 어디에 쏟아붓느냐?
여래성기묘덕보살의 정수리로 들어간다.
여래성기보살은 문수보살이다.
문수보살을 과거 칠불의 스승이라고 한다.
‘나무(南無) 칠불조사(七佛祖師) 오봉성주(五峰聖主) 문수보살(文殊菩薩)’
부처님이 스승은 누구인가? 문수보살이다.
부처님을 탄생시키는 사람은 문수보살이다.
문수보살은 반야낭지(般若朗智) 근본지혜(根本智慧)에서 탄생하시기 때문이다.
미간백호에서 나온 방광이 문수보살의 어디에 쏟아부어 버리는가? 정수리에 여래출현방광을 넣었다.
다음으로 문수보살이 충분히 근본지를 갖추고 난 다음에 부처님께서 구중(口中), 입에서 방광을 한다.
입에서 방광하실 때 그 방광 이름이 무엇인가? 무애무외(無礙無畏)다. 장애 되는 것 없고 두려움도 없는 방광이다. 만행무궁할 수 있는, 입으로 변설무애자재해서 법문할 수 있는, 그런 모든 만행 바라밀행을 실천할 수 있는 보현보살의 입에다가 쏟아부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입보현보살구중(入普賢菩薩口中) 광명이다.
*
이렇게 해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나란히 갖추어지면서 여래출현이 예고가 되고, 문수보살이 여법하게 찬탄을 한다.
일체 대지를 진동시키고 한량없는 물음의 광명을 출현시켜서 문수보살인 여래성기묘덕보살이 누구에게 질문하는가? 보현보살께 질문한다. 어떤 질문을 하는가?
‘여래의 출현은 뭡니까?’
‘보현보살이시여, 여래의 출현하는 법은 도대체 뭡니까?’
*
그리고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게송을 세 꼭지 하다가 마쳤지 않은가? 그 내용은 부처님의 신상(身相)은, 여래의 몸의 모습은 어떠냐?
여래의 몸은 어떠냐 묻고 나서, 그다음 대목은 무엇이 나오겠는가? 말, 신구의(身口意)로 나갈 것이다.
그다음 여래의 언설은 어떠할 것이냐?
그다음에 우리는 안 배웠지만 저 뒤에 가면 무엇이 나오겠는가? 여래의 뜻은 어떨 것이냐? 하는 대목이 나올 것이다.
경전은 치밀하게 순서대로 되어있기 때문에 영리한 사람들은 ‘아 부처님의 몸이 나왔구나. 몸은 거친 것이라서 수행하는 입장에서 먼저 이야기하겠구나’ 하는 것을 짐작한다.
몸을 먼저 닦고 거친 것부터 끊어야 된다.
그다음에 말을 끊고 다음으로 생각을 끊고 다음으로 마음 없는 마음을 끊어서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로 우리 자신을 몰아가는 것이다.
*
어떤 데는 화엄경 속에서 의업이 먼저 등장한다. 그다음에는 무엇이 등장하겠는가? 구업이 등장한다. 그다음에는 신업이 등장한다. ‘아 이것은 마음이 유전연기로 일어나는 순서, 미세한 것부터 말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짐작해야 한다.
신업부터 이야기하면 ‘거친 것부터 이야기하고 있구나’ 알아야 된다.
그래서 여래의 신상은 어떠냐?
부처님의 언음은 어떠냐?
부처님의 마음의 경계는 어떠냐?
부처님의 행은 어떠냐? 소행지행(所行之行), 행하신 바는 어떠냐? 부처님의 성도하시고 전법하신 것은 어떠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것은 어떠냐?
흔히 팔상성도가 있지 않은가. 거기에 대해서 쭈욱 이야기 한다. 성도하셨으니까 전법하시고 전법하셨으니까 열반하신다.
신상이라든지 여래 출현은 부처님의 탄생이지 않은가, 부처님의 탄생은 어떻게 탄생하실 것이냐?
부처님의 출가는 어떻게 하실 것이냐?
수도는 어떻게 하실 것이냐?
성도는 어떻게 하실 것이냐?
전법은 어떻게 하실 것이냐?
열반은 어떻게 하실 것이냐?
이런 순서는 여래출현품 뿐만 아니라 화엄경 전체, 내지는 다른 경전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순서로 아주 조목조목 되어있다.
부처님을 염불하는 사람이 견불하게 되어있고, 부처님을 보게 되어있다.
부처님을 삼매속에서 본 사람은 그대로 곧 당장 그 자리에서 정직하게 선근공덕을 심게 될 것이고, 선근공덕(善根功德), 씨앗을 심으면, 씨앗은 싹을 틔우고 자라다가 성숙될 것이고, 성숙 되면 무엇이 달리겠는가? 결과물인 열매가 달려서 자기가 증득의 세계로 득입해서 들어갈 것이다.
나무라든지 씨앗을 심어서 가꾸는 과정을 우리는 흔히 바라밀행이라고 이야기한다.
보시하지 않는 사람들은 계율이라든지 이런 것을 잘 안 지킨다. 또 계율 같은 것에 대해, 준법정신이 없는 사람은 인욕심이 잘 없다. 인욕심이 잘 없는 사람들은 정진바라밀이 없다. 게으르고 시시비비가 많다.
부지런히 정진해서 하루종일 정진하고 이런 사람들은 고요가 찾아온다. 거기에서 삼매를 얻게 되고 지관(止觀) 정혜동시 정혜쌍수가 이루어 지면서 그 뒤로부터 방편이라든지 원력이라든지 이와 같은 갖가지 일체종지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문수보살이 보현보살께 부처님의 출현하시는 모습과 부처님의 몸과 음성,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저 뒤에 가면
‘부처님의 음성은 어떻습니까?’
‘부처님의 음성은 몸에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의 음성은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야마천궁게찬품에서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고 하는 화엄경 제 19권에 나오는 유명한 유심게인데 그 구절 바로 앞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심(心)은 부주어신(不住於身)이라 마음은 몸에 있지 않고 신역부주심(身亦不住心)이라. 몸도 또한 마음에 있지 않다.
마음은 몸에 있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있지 않은데 이능작불사(而能作佛事)로다. 이렇게 말도 잘하고 보고 듣기도 잘한다. 불사를 잘 짓는다.
자재(自在)가 미증유(未曾有)로다.
같이 있지도 않은데 자유자재한 것이 참 신기하다.
이 이야기가 여래출현품에도 고대로 나오고 화엄경 십인품에도 고대로 나온다.
그것을 잘 이해하시려면 여러분들께서 이제까지 배워오신 범행품에 대해서 치밀하게 연구가 되어야 한다.
범행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무엇인가?
제일 마지막 구절인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다.
그 부분을 여러분들 빨리 보시라고 제가 빨간 글씨로 줄 그어 놓았다.
초발심시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변성정각이다.
그 다음 구절 또 새파랗게 해놓은 것도 너무 좋은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오늘 공부 중간쯤 하다가 같이 보겠다.
문수보살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보현보살이 대답하기를 ‘모기 한 마리가 생기려고 해도 그 인연은 보통인연이 아닌데 부처님께서 탄생하시는 것은 비일인연(非一因緣)이다. 인연이 하나도 아니고 비일사(非一事)라 하나의 일도 아니고 여래출현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십무량백천이라,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공덕의 선근공덕을 심은 것이다. 하물며 시시비비 속에 있는 우리가 화엄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러면 부처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래 여기서 문수보살이 ‘어떻게 해서 부처님은 곳곳에서 중생들이 다 그렇게 천강유수천강월처럼 다 만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래서 보현보살이 대답을 한다.
*
서두에서 말씀드렸지만 문수보살은 부처님께 미간백호로부터 정수리에 가피를 받았기 때문에 질문할만한 사람이 질문을 한 것이다.
또 아무나 대답해서 어름한 사람이 대답하는 것이 아니고 문수보살이 육종진동을 일으키면서 대단한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질문을 하는 것이다.
지축이 흔들려도 업보중생은 업어가도 모른다. 캄캄해서 안 깨어난다. 눈 코 입 귀가 떠지지도 않는다. 엔간한 사람은 쾅쾅쾅 천둥이 치고 번개가 쳐도 코를 골며 잘 잔다.
깊은 무명장야(無明長夜) 생사의 무명장야에 자게 되어있다.
영리한 사람은 뽀시락거리는 소리에도 금방 일어나서 자기 살 길, 살 도리를 챙긴다.
그래서 ‘부처님의 몸은 무량한 곳에서 본다’ 대답하실만한 보현보살께서 철저히 대답하시는 대목 중에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뭘 배웠는가?
여래 몸은 허공과 같다, 태양과 같다, 달처럼 무증무감(無增無減)이다, 마니보배와 같다, 하는 여러 가지 대목들이 나왔다.
지금 하는 시간은 그것을 한 번씩 살살 읽어가는 중이다.
지금 게송은 어떤 것인가?
앞의 장문에서 나온 부처님의 신상 몸에 대해서 이야기한 내용이다.
이해가 안 가신다면 살짝 컨닝해 보겠다. 오늘 드린 유인물이 있다. 제가 여러분들이 빨리 보라고 빨갛게 해놓았다.
<유인물>
爾時에 正念天子가 白法慧菩薩言호대 佛子야 一切世界諸菩薩衆이 依如來敎하야 染衣出家인댄 云何而得梵行淸淨하야 從菩薩位로 逮於無上菩提之道이닛고
이때 정념천자(正念天子)가 법혜보살에게 여쭈었다. “불자여, 온 세계의 모든 보살들이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물든 옷을 입고 출가하였으면, 어떻게 하여야 범행(梵行)이 청정하게 되오며, 보살의 지위로부터 위없는 보리의 도(道)에 이르리이까.”
*
이시(爾時)에 :이때
정념천자(正念天子)가 :정념천자가
백법혜보살언(白法慧菩薩言)호대 :법혜보살에게 여쭈었다.
불자(佛子)야 : 불자여
일체세계제보살중(一切世界諸菩薩衆)이 :온 세계의 모든 보살들이
의여래교(依如來敎)하야 :여래의 가르침을 의지해서
염의출가(染衣出家)인댄 : 먹물 옷을 입고 물든 옷을 입고 삭발하고 출가하였으면
운하이득범행청정(云何而得梵行淸淨)하야 :어떻게 해야 부처님의 범행(梵行)을, 범행 모든 행이 청정하게 되며
종보살위(從菩薩位)로 : 보살의 지위로부터, 보살행을 닦아서
체어무상보리지도(逮於無上菩提之道)이닛고 :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부처님에 이를 수 있습니까.
가슴이 쿵 하는 소리, 출가 수행자인 우리에게 쿵하는 소리가 전해지지 않는가?
화엄경은 세속에 있는 재가신도나 출가신도나 공히 공부할 요량을 화엄경 제 14권 정행품에 정리해 놓았다.
그런데 이 17권에 나오는 범행품은 출가수행자를 위한 특별법문이다. ‘출가수행자는 이렇게 관해야 된다’ 하는 대목이다.
<유인물>
法慧菩薩이 言하사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修梵行時에 應以十法으로 而爲所緣하야 作意觀察이니 所謂身과 身業과 語와 語業과 意와 意業과 佛과 法과 僧과 戒니라 應如是觀호대 爲身是梵行耶아 乃至戒是梵行耶아
법혜보살이 말하였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범행을 닦을 때에는 마땅히 열 가지 법으로 반연을 삼고 뜻을 내어 관찰하여야 하나니, 이른바 몸과 몸의 업과, 말과 말의 업과, 뜻과 뜻의 업과, 부처님과 교법과 스님과 계율이니라. 마땅히 관찰하기를 몸이 범행인가, 내지 계율이 범행인가 할 것이니라”
*
법혜보살(法慧菩薩)이 : 법혜보살이
언(言)하사대 : 말하였다.
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수범행시(修梵行時)에 : 범행을 닦을 때에
응이십법(應以十法)으로: 마땅히 열 가지 법으로
이위소연(而爲所緣)하야 : 반연을 삼고
작의관찰(作意觀察)이니 : 뜻을 내어 관찰하여야 하느니
소위신(所謂身)과 : 이른바 열 가지 법은 무엇이냐. 빨간 글을 보겠다. 소위 몸과
신업(身業)과 : 몸의 업과
어(語)와 : 말과
어업(語業)과 : 말의 업과
의(意)와 : 뜻과
의업(意業)과 : 뜻의 업과
불(佛)과 : 부처님과
법(法)과 : 법과
승(僧)과 : 승, 삼보와
계(戒)니라: 계니라.
응지시관(應如是觀)호대 : 마땅히
위신시범행야(爲身是梵行耶)아 : 관찰하기를 몸이 범행인가,
내지계시범행야(乃至戒是梵行耶)아 :내지 계율이 범행인가 할 것이니라.
신구의 삼업 중에서 업까지 붙이면 여섯 개다. 그다음 불법승 삼보를 합치면 9개다.
마지막에는 불법승이 됐든 어찌 됐든 우리가 이 승단에서 지켜나가야 할 규율은 무엇인가? 계율에 대해서 나온다.
계율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서, 오계를 받았느냐 안 받아느냐에 따라서, 불자인가 아닌가가 나눠진다.
보시는 바깥의 사람도 행해야 하는 일이다.
보시 이후에 지계바라밀부터는 출가 재가 불자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범주다.
보시는 출가를 했든지 안 했든지, 불교를 믿든지 안 믿든지 종교 안팎을 상관없이 무조건 보시를 해야 되는 것이고 인간이 가야될 가장 근본적인 길이다.
보시바라밀 위쪽에 있는 지계는 불자가 행해야 될 지계바라밀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불자냐 아니냐 이것을 나누는 경계선은 좁은 의미에서는 계율을 중심으로 한다.
삼취정계(三聚淨戒)가 됐든 보살계가 됐든 비구계가 됐든 세속오계가 됐든 딱 그렇게 되어있다.
하여튼 여기 범행품의 이 부분을 나중에 시간이 되면 51권에 넘어가서 보겠지만 여래의 신업과 구업과 의업에 대해서 ‘부처님의 신구의 삼업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알면 부처님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지 않겠는가.
인생도 신구의 삼업 빼고는 인생이라고 할 것이 없다.
몸이 있고 말이 있고 생각이 있고, 이것이 우리 전체 인생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신구의 삼업이 없다.
부처님의 신구의 삼업이 허공처럼 모습이 없기때문에, 무상지법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신구의 삼업을 우리는 삼업(三業)이라 하지 않고 삼밀(三密)이라고 한다.
비밀스럽다고 해서 삼밀이라고 한다.
*
자 그러면 오늘 할 대목 258페이지(민족사刊 제3권) 제 네 번째 게송 한 번 보겠다. 앞에 했던 것을 다시 게송으로, 중송으로 하는 것을 보도록 하겠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
[平等因果中 明果]
如來出現品 第三十七之一
三. 普賢菩薩의 說法
2. 如來의 身業
(4)十種譬喩의 重頌
비여일광출현시(譬如日光出現時)에 :비유컨대 태양이 처음 뜰 적에
선조산왕차여산(先照山王次餘山)하며 :먼저 높은 산을 비추고
후조고원급대지(後照高原及大地)호대 : 다음에는 낮은 산 또 다음에 더 낮은 산 태양이 높은 데서부터 비춰서 낮은 데 낮은 데로 비추지만
이일미시유분별(而日未始有分別)인달하야 : 그러나 태양은 분별하지 않고 비추고, 산이 저절로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해서 평지이기도 하고 계곡이기도 해서 해가 늦게 비출 따름이다. 모든 것은 동일법성이고 다 부처님이다. 불성이 있다.
그러나 업장이 두꺼운 사람이 있고 업장이 가벼운 사람이 있다. 그렇기때문에 악독한 사람은 안 비출 것이고, 악독한 사람에게 화엄경이 들어갈 리가 없다.
그러나 사와 정을 불구하고 부처님의 몸은 무분별심으로 비춘다. 이런 뜻이다.
*
선서광명역여시(善逝光明亦如是)하사 : 선서(善逝)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광명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선조보살차연각(先照菩薩次緣覺)하며 : 먼저 보살을 비추는 이유는 무엇인가? 알아들을 만한 사람한테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중승(中乘)이라고 하는 연각(緣覺)에게 하고 그다음에 성문에게 비추어 든다.
태양은 늘 비추고 있지만 자기가 받아들이는 속도가 그렇게 다르다는 것이다. 눈 밝은 사람이 제일 먼저 돈을 줍는 것이다.
후조성문급중생(後照聲聞及衆生)호대 : 성문과 다른 중생을, 보살이 나왔으니까 그다음 뭐가 나오겠는가? 연각이 나온다. 연각 나왔으니까 그다음에는 성문, 성문 나왔으니까 범부중생이 나온다. 경전은 치밀하게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희론이 아니다.
이불본래무동념(而佛本來無動念)이로다 : 그러나 불은 본래무동념이다.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다.
부처님께서는 분별심이 없다. 본래부터 흔들리는 생각이 없다. 그다음 대목 넘어가겠다.
*
비여생맹불견일(譬如生盲不見日)호대 : 비유컨대 생맹 선천적으로 한 번도 눈을 떠본 적이 없고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못 보는 사람은 불견일이다. 태양을 볼 수가 없다. 태양만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못 본다.
일광역위작요익(日光亦爲作饒益)하야 : 그래도 햇빛은 그에게 또 이익을 입혀서
영지시절수음식(令知時節受飮食)하야 : 밤낮의 때를 알게 하고 때에 맞춰서 음식도 먹게 하고 해가 지고 해가 떠서 밤에 자기도 한다. 눈 어두운 사람도 남 잘 때 같이 자고 남 일어날 때 똑같이 일어난다.
영리중환신안은(永離衆患身安隱)인달하야 : 온갖 걱정을 여의고 몸을 편안하게 한다. 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인다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무슨 의미냐?
실제로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은 신안이 없다, 믿음의 눈, 안목이 없다, 화엄경에 대한 안목이 없다는 말이다.
화엄경에 대한 안목이 없으면 부처님을 못 보는 것이다.
*
무신중생불견불(無信衆生不見佛)호대 : 앞엣것은 비유고 뒤의 것은 회통을 치는 것이다.
앞에는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전생부터 선근공덕이 없어서 신심이 없다. 악독하다. 그러다 보니 무신중생은 불견불이다. 믿음 없는 중생들은 부처님을 볼 수 없다.
이불역위흥의리(而佛亦爲興義利)하시니 : 부처님께서도 그러한 이치를 알려서
문명급이촉광명(聞名及以觸光明)에 : 이름을 듣거나 광명을 받게 되어서
인차내지득보리(因此乃至得菩提)로다 : 그로 인해서 보리를 얻게 된다. 도저히 우리가 지은 선근은 없는데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어쩌다가 여러가지로 혜택을 입게 되는 수가 있다.
예를 들어서 문수선원 오는 입구에 범어사 올라가는 입구에는 찐빵집이 있다.
범어사에 올라가면 땜빵이 유명하다.
제가 땜빵 법사를 많이 했다. 누구 없으면 땜빵이다. 오늘도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것이 땜빵 강사 아닌가?
저 밑에는 찐빵이 유명하고 올라오면 땜빵이 있다. 제가 이름이 땜빵인데 얼마나 빵을 많이 먹어놓았는지 빵빵해져 버렸다.
그런데 방금처럼 저 집에는 부처님에 대해서 알고 모르고가 없다. 오직 무슨 생각뿐인가? 진빵, 만두 생각뿐이다. 얼마나 큰지 빵빵하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서 제주도에서 일부러 비행기 타고 사러 오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먹을 만큼 맛있지는 않다.
제가 하도 범어사 법문할 때 그 빵집 선전을 많이 해놓았더니 빵집이 너무 잘 됐다. 잘 된 것은 좋다. 그런데 저한테 뭐가 좀 떨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안 떨어진다. 그래 그 뒤부터는 별 광고 안 한다.
그런데 저 집뿐만 아니고 그 옆집에 튀김과자집이라든지 중국집 청룡반점이나 주차장이나 이런 데는 어떨 것 같은가?
불심이 전혀 없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다.
택시기사도 그렇다.
그래도 다들 누구 덕에 먹고 산다?
부처님의 수양산 그늘이 팔십 리요 은사 스님의 공덕이 강동십만리 라고 하듯이 통도사 그 밑에 가면 뽕짝집도 먹고 살고 시장도 먹고 살고 경기식당도 먹고 살고 버스 기사고 뭐고 전부 다 먹고 사는데 부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부처님이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심으로 해서 다들 먹고 산다.
대충 이해가 가셨는가?
그런 뜻으로 써놓은 것이다.
부처님의 공덕으로 산다.
스님들이 입는 가사를 잘 떨어지게 만들어 놓았다.
참 잘 떨어지게 잘 만들었다.
빨리빨리 떨어져야 가사원에 돈이 많이 들어온다.
한 번 입어 십년을 안 떨어지면 가사원은 쫄딱 망할 것이 아닌가. 한 일년 입고 막 떨어지도록 해서 계속 가사원도 먹고 살고, 이 직물 만드는 사람도 먹고 살고, 운반하는 사람도 먹고 살고, 바느질하는 사람도 먹고 산다. 그러니까 가사를 잘 떨어지게 만들어야 여러 사람이 먹고 살 수가 있다.
화엄경을 읽다 보면 정반대의 그런 소견이 조금씩 나오게 된다. 그런 것을 모르면 가사를 왜 이렇게 빨리 떨어지게 만들어놨느냐고 짜증을 낸다. 가사 이것은 생비단이다.
*
그다음 구절들은 세종대왕 덕분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 월인천강지곡(月印千 江之曲)이라.
소동파의 누이 소소매가 지은 글귀처럼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이요
소면서광조대천(素面舒光照大千)이라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이나
고륜(孤輪)은 본불낙청천(本不落靑天)이라
화엄사에 가도 그 구절이 있고, 통도사에 가도 그 구절이 있다.
비여정월재허공(譬如淨月在虛空)에 : 비유컨대 깨끗한 밝은 보름달이 저 허공에 후욱 떠버리면 삼국지에 나오듯이 월명성희(月明星希)라, 달이 떠버리니까 별빛이 희미해져 버린다.
능폐중성시영결(能蔽衆星示盈缺)하며 :모든 별빛을 가리며 달은 일월영측이라 천자문에 나온다. 달은 차기도 하고 기울기도 하고
일체수중개현영(一切水中皆現影)이어든 : 저 하늘의 달이 물이 있는 곳마다 다 달그림자가 비추지만 그러니까
제유관첨실대전(諸有觀瞻悉對前)인달하야 : 보는 사람마다 관첨하되 모두가 다 내 앞에 있는 듯이 한다. 그러나 고륜은 불낙청천이라. 하늘의 달은 저 하늘에서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
금강경 야부송에도 그렇게 나온다. 달이 풍덩하고 강물에 떨어졌는데 수무흔(水無痕)이라. 물은 흔적도 없다. 강물에 떨어진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몸이다.
부처님의 몸은 무거무래(無去無來)라. 와도 온 바가 없고, 가도 간 바가 없다.
아까 뭐라고 했는가?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나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 불수자성수연성이라고 했다. 문수보살의 머리에, 정수리에 들어갔다고 할 때부터 알아봐야 된다. 문수보살의 정수리라면 뿌리라, 근본은 한 발짝도 움직인 적이 없다. 그러나 보현보살로 갔을 때는 만행이 무궁하기 때문에 모세혈관이 되어서 가지 않는 바가 없다. 모든 곳에 다 간다.
여래정월역부연(如來淨月亦復然)하사 : 부처님의 밝은 달도 또한 그와 같아서
능폐여승시수단(能蔽餘乘示修短)하며 :능히 부처님의 달빛은 일승(一乘), 불승(佛乘)이라고 하는 것은 소승 중승 이런 것, 대승을 다 가려버린다. 시수단이라. 길고 짧음을 본다.
삼승(三乘)을 다 가려버리고, 대승 위에 일승이 있다.
여래출현품에 자세하게 나온다.
원효스님께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 아주 장쾌하게 설명해 놓으셨다. 대승하고 불승, 일승은 다르다. 삼승을 가리고 길고 짧음을 보이고 길 수(修) 짧을 단(短)이다.
보현천인정심수(普現天人淨心水)하시니 : 널리 천상과 인간 의 정심수, 맑은 마음의 물에, 정심수 맑은 물이라고 하는 것은 즉사표법(卽事表法)이라. 사에 즉해서 이치를 나타냈다.
일체개위대기전(一切皆謂對其前)이로다 : 모두 일체가 개위(皆謂) 모두 다 뭐뭐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대기전이라. 자기 앞에 다 있다고 말을 한다. 달은 한 번도 간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다 달이 나에게 왔다고 한다. 비유는 비슷하다 그다음 빨리 읽고 넘어가겠다.
|
첫댓글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
_()()()_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