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김종서 아들과 수양대군
곧 세조의 딸이 서로 좋아한다고 한다.
난 사극(史劇) 잘 보지 않는다.
워낙 엉터리가 많은데, 요즘은 완전 황당무계 쪽으로 흘러
나도 모르게 ‘하아 저거 아닌데…’ 하는 소리 나오고,
그럴라치면 마누라가 ‘됐으니 그냥 좀 보자, 응’ 하는 통에
기가 죽어 볼 수가 없다.
이건 통째로 꾸며 낸 이야기 인데 이왕지사 꾸밀 것 같으면,
다음과 같이 꽤 근거 있는 소재는 어떨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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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세조의 장남은 왕 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는데,
나중에 추숭(追崇)하여 덕종(德宗)이라고 한다.
이렇게 맏아들 덕종(德宗)이 세자로 있다가 죽자
세조의 차남-덕종의 동생, 예종(睿宗)이 뒤를 잇는다.
그러나 예종 또한 일찍 죽어,
결국 덕종과 인수대비 한씨 사이의 둘째 아들
잘산군(者乙山君)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성종(成宗)이다.
이어지는 성종, 인수대비 한씨, 연산군 이야기야 너무나 유명하고….
그런데 세조가 죽은 아들 덕종의 후궁을 집적거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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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귀인과 윤소훈은 세조 의 장남 덕종의 후궁들이었다.
김일손은 이 사실을 그대로 사초에 실었다가
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김일손 자신도 희생되었다.
김일손은 귀인권씨의 조카이자 양자 허반(許磐)에게서
들은 것을 사초에 기록하였는데, 연산군은 사초 기사 중
‘권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구절과
'세조는 소훈 윤씨(昭訓 尹氏)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의 내용을 구실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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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와 그의 아들 덕종의 후궁 사이는
그냥 뜬소문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다.
당 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 !
당 현종이 며느리를 후궁으로 삼은 것 같은 일이
조선 초기에도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야기의 구조가 불륜(不倫)이긴 한데
요새 또 불륜이 뜬다는 거 아닌가?
(팁);
놀라운 것은 이 사초(史草) 때문에 김일손이 참살 당하지만
그 내용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연산군 일기에 올라가 있는 점이다.
(실록) 연산 4년(1498 무오) 7월 12일(병오) 2번째기사
김일손,허반을 잡아들여 《성종실록》의 권 귀인과 윤 소훈의 일을 캐묻다.
전교하기를, (* 연산군 일기니 ‘전교하기를’ 의 주어는 연산군이다)
“네가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세조 조의 일을 기록했다는데,
바른 대로 말하라.” 하니,
일손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숨기오리까. 신이 듣자오니
‘권 귀인(權貴人)은 바로 덕종(德宗)의 후궁(後宮)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
하옵기로, 신은 이 사실을 썼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어떤 사람에게 들었느냐?” 하니,
일손이 아뢰기를,
“전해 들은 일은 사관(史官)이 모두 기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 역시 쓴 것입니다. -그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실록》은 마땅히 직필(直筆)이라야 하는데, 어찌 망령되게
헛된 사실을 쓴단 말이냐. 들은 곳을 어서 바른 대로 말하라.” 하니,
일손이 아뢰기를,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그 쓴 것도 반드시 사정이 있을 것이고
소문 역시 들은 곳이 꼭 있을 것이니, 어서 빨리 말하라.”하니,
일손이 아뢰기를,
“옛 역사에 ‘이에 앞서[先是]라는 말도 있고, 처음에[初]’라는 말이 있으므로,
신이 또한 감히 전조(前朝)의 일을 쓴 것이오면, 그 들은 곳은
바로 귀인(貴人)의 조카 허반(許磐)이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네가 출신(出身)한 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세조의 일을 《성종실록》에 쓰려는 의도는 무엇이냐?” 하니,
일손이 아뢰기를,
“전해 들은 일을 좌구명(左丘明) 이 모두 썼으므로 신도 또한 썼습니다.”
하였다…..
아무리 임금이 화를 내도 기록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실록은 정말 대단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