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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12(부활7주일. 승천주일)/ 사도1:1-11, 에페1:15-23, 루가24:44-53
이유 있는 이별
삶을 살아가노라면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헤어짐은 새로운 삶의 전환을 주기도합니다. 졸업을 해서 교정을 떠날 때도, 그리고 결혼을 해서 부모의 곁을 떠날 때도 그 이별을 통해 더 성숙한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이 지상에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40일째 되는 날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장엄하게 하늘로 오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오르셨다 함은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요, 또한 그를 믿는 모든 성도가 함께 누릴 영광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주님과의 의미 있는 이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떠나셨을까요, 주님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요한16:7)라고 하셨습니다. 왜 더 유익할까요? 주님은 이 이별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무엇을 바랄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릴 영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먼저 우리가 바라 보아야할 곳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미사 때마다 “마음을 드높이” “주님께 올립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전에는 “마음을 드높이 주를 향하여”라고 고백했지요. 저는 “마음을 드높이 주를 향하여” 이 고백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향하는 곳은 언제나 하늘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하늘’이란 장소가 아닙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죽으면 가는 그러한 극락이나 천당도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입니다. 때문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이 하느님의 뜻을 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품으면 하느님의 나라,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도 이 하늘을 보는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명심보감 천명편 을 보면 “하늘은 푸르고 푸르기만 하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하늘을 찾을 길이 없다. 그렇다면 하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늘은 곧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있습니다. 내 마음에 하늘을 품으면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때문에 주님은 “하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너희의 마음속에 있고, 너희들 가운데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오르신 하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이 아니라 바로 마음으로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는 하늘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로 세상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하늘이 진짜 하늘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육체적인 욕망을 죽이고 하느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 때 볼 수 있는 하늘, 이것이 진정한 하늘나라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마음은 내가 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열어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늘을 볼 수 있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때문에 성령께서 오실 관문인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어디일까요? 바로 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세워주신 새 예루살렘입니다. 성례전이 이루어지고 말씀이 선포되는 곳, 기도하는 집인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하느님은 이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의 눈과 마음을 그 곳에 두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 문을 열수 있는 열쇠를 주셨습니다. 이곳에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이 곳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권세의 천신과 세력의 천신들까지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알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교회를 통하여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갖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또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가 무엇을 바랄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고, 우리 믿은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게 되기”(에페1:17-19)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승천의 핵심은 교회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시기 위해 당신의 핏 값을 치르고 세우신 이 성전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가를 깨닫고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성전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느끼고, 하늘나라의 소망을 키워 가야 합니다.
둘째, 십자가를 지고 따른 자들이 받을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승천을 통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하느님의 영광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이 받을 영광을 모르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 요한은 7교회에 대하여 말하면서 언제나 끝마무리는 성도가 누리게 될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페소 교회를 향해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미르나 교회를 향해서는 고통을 당해도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월계관을 너에게 씌어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르가모 교회를 향해서는 우상을 섬기던 삶을 버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감추어 두었던 만나를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티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는 사랑과 믿음과 봉사와 인내의 짐을 지라고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각각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며 또한 샛별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지금 이들은 믿음을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기도 하고,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믿음을 지켰고, 그 믿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그 박해를 견디어 냈으며, 그 믿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받을 영광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낙원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리라는 확신을 가졌고, 생명의 월계관을 쓰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기가 받을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을 영광을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가 이 십자가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운동선수가 왜 고된 훈련을 견디어 냅니까? 그것은 승리의 영광과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차지할 영광을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부활과 생명을 은혜와 축복으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는 죽어도 사는 축복이 있습니다. 주님의 강한 힘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의 모든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때문에 바울로도 우리가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고, 우리 믿은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기”(에페1:17-19)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영생의 축복이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주십니다. 묵시록의 교회들에게 약속했던 그 영광을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도 먹습니다. 만나를 먹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교인들이 그 영광을 보고 담대하게 십자가를 졌듯이 우리도 담대하게 나를 죽이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주님은 승천을 통해 제자들을 통하여 시작될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요한17:17-18)
이처럼 승천은 주님의 사역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소명을 주신 자리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주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1:8)
이처럼 승천은 선교의 비전을 보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처럼”(요한17:5)우리도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다 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존 레논이 부른 이메이진 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상상”이란 뜻입니다.
상상해 봐, 어떤 국가도 없다고
그건 어렵지 않아
누구도 그 때문에 죽거나 죽이지 않고
또 어떤 종교도 없다고
상상해 봐,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산다고 ......
상상해 봐, 어떤 소유도 없다고
너는 상상할 수 있을 거야
탐욕도 굶주림도 없다고
모두가 형제라고
상상해 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간다고
너는 나를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 지 몰라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언제가 네가 우리와 함께 하길 바래
그러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상상을 했으면 합니다. 상상은 현실을 만들어 내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상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 서로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서로 용서하며 서로 자신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고난과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이런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비전을 봅니다. 세상의 명예, 부귀영화, 권세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생명과 평화, 그리고 정의, 행복한 삶을 꿈꾸는 우리에게 그 열매를 어떻게 차지할 수 있는지 그 비전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이 비전을 꿈꾸며 그 십자가의 진리를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소명입니다.
존 레논은 평화를 상상하며 노래했지만 우리는 그 상상을 지금, 오늘 실현하기 위하여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활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소명입니다.
마지막으로 승천하신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서의 핵심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꼭 기억해야 할 것, 그것은 전도서 11장 14절 말씀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심지어 남몰래 한 일까지 심판에 붙이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가릴 것입니다. 그래서 쭉정이와 알곡을 가려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화덕에 넣을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판은 좋은 것입니다. 심판 받을 자에게는 두려운 일이지만 준비된 우리에게는 영광에 참여할 기쁨을 안고 기다릴 날입니다.
참된 믿음의 길을 가려면 영광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닐 때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승천의 영광을 바라보며 세상과의 싸움에서 결코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고 마침과 주님과 함께 아버지의 영광을 차지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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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상을 통해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지금 십자기를 져야 한다...
아멘
좋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