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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소선방 원문보기 글쓴이: 梅君子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노닐던 나주호 -
일 시 : 2014년 1월 19일
장 소 : 전남 나주시 다도면 나주호산림욕장 일원
홀로 행하며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 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71
- 나주호산림욕장에 도착했다 -
2014년 정월도 벌써 절반이 훌쩍 넘어 섰으니, 과연 노년의 나이에 세월은 전광석화와 같음을 실감한다. 지난 갑오년 새해맞이를 장성 불태산에서 한지 근 20여일이 되어가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더니, 이번에는 호숫가에서 야영을 하자는 이야기가 떠올라 모두들 나주호산림욕장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지난해 담양호에서 야영을 한 이후로 호숫가 야영은 이번이 처음이니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나 보다.
법정 스님이 번역한 숫타니파아타에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마치 바람같이 여여로운 자를 성자라 부른다 이름하셨다. 성자는 고사하고라도 그물에 걸리지 않고 싶은 자유인의 의지는 과연 바람을 닮고 싶은 욕망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자! 바람처럼 영광된 자! 세속에 걸리지 않는 수도자와 일맥상통한다 하겠다. 마치 법정 스님과 같은 분...... 그러므로 마치 부처님과 같은 분! 그런 분을 닮고자 오늘도 일상의 그늘을 탈피하여 자연으로 향하는 이들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세속의 이전투구에는 관심이 없는 자! 우리는 그를 가리켜 욕심이 없는 무욕자!라 칭할 수 있다. 그러기가 쉽지 않은 무심무욕의 경지!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과연 욕망의 전철은 세속의 운송수단일뿐이라고 정의할 수 있게될 것이다.
무어라, 그 어지러운 전차를 탈 것인가?
말론 브랜도와 비비안 리가 1950년대에 열연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누군가 참 이름도 잘 지었구나......
- 일행들과 외따로 떨어진 곳을 일부러 찾아 나선다 -
- 7성급 호텔 부럽지 않은 Luxury Deck! -
- 무등산의 정기 또한 내리던 전망이라, 더욱 좋았다 -
- 개인 텐트를 완성하고 난 후에, 베이스 캠프쪽으로 다시 나가 본다 -
- 불놀이 중인 휴식의 시간들 -
- 이글거리는 장작은 오히려 평온함을 깃들게 해 준다 -
- 나주시에서 급수해 주는 시설은 꽤나 훌륭했다 -
- 겨울바람이 조금 불었지만, 좋은 날씨였다 -
- 호수는 담백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
- 담백하다...... 담백하다...... -
- 하늘도 역시 담백하고녀! -
- 그 담백함을 배우려고 일부러 찾아 들었다 -
- 맑음을 채워줄 녹차와 함께, 기억을 더듬어 줄 아이패드, 그리고 휴식을 취할 의자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라면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 물고기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을 동경할 수는 있으나 닮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바람은 물속에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물속에서는 무엇이 그물에 걸리지 않을까? 그것은...... 바로 물일 수 밖에 없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물처럼은 물고기의 소망이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은 바로 대웅이의 소망이다. 그렇게 반백년을 살아 냈으나, 결코 그물에 걸리지 않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마치 물고기가 공기로 숨을 쉴 수 없고, 마치 대웅이가 물로 숨을 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자기 본분을 잊지 않고서 생태계의 유일한 목표로 삶의 방향을 정립하고서 그에 맞게 진화하려는 자! 그를 가리켜 '올바른 수행의 길을 걷는 자!'라 부르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나주호에서의 명상은 마치 하늘을 유영하는 낙타처럼 그렇게 자유로웠다.
지금 배경음악으로 흐르고 있는 노래는 독일의 명상가수 데바 프리말이 부르는 '가테 가테'라는 곡이다. 이 곡은 산스크리트어語로 불리우고 있는데...... 가락을 조심스레 살펴 보면... '가테 가테 파아라 가테 파아라 상가테 보드히 스바하'라는 진언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사가 바로 반야심경의 핵심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의 태초 발음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즉 한글로 뜻을 풀이하자면, '가니 가니 건너가니, 피안이 저기 있네'라는 뜻으로서...... 이 진언을 세번 반복하여 외는 것으로 반야심경의 결미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저 피안의 언덕에 이르기 위한 불가의 고달픈 수행은 바로 대자유인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리니... 석가모니 부처는 이 진언이야말로 최고봉의 입멸까지도 타파시킬 수 있다 하셨으니... 바로 불가의 핵심요체라 할 수 있는 진언인 것이다.
필자의 기억으로 산스크리트어인 이 진언을 접할 때가 바로 이십대 후반 무렵이었으니, 생각해 보면 근 삼십여년이 넘었다. 그때 필자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아람코에서 근무하던 때인데...... 휴가를 받고 돌아와, 무등산 초입의 광륵사라는 절에서 친구랑 겨울 한 철을 난 적이 있는데......(뜨거운 열사의 사막에서 필자는 눈 내린 고국의 겨울 산사를 얼마나 동경했는지 모르겠고...... 삼개월의 휴가를 받고 귀국하자마자, 동안거에 들어가는 절박한 심정으로 산사를 찾았던 것이다) 그 절의 주인 되셨던 분이 바로 동국대에 소속을 둔 고익진 교수님이셨다.
고익진 교수님은 당시 한문이 아닌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의욕적으로 하고 계셨다. 지금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그 당시 광륵사에서 필자와 함께 기거했던 이중표 교수와 둘이서 귀감이 되는 좋은 가르침을 종종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바로 옆방에 기거하시면서 정말 건강도 챙기지 않고 번역 작업에 몰두하시던 고교수님은 바로 학인의 사표가 될만한 길을 걸어 오신 분이다. 또한 불교음악의 정립에도 많은 애정을 가지고 계셨던 분으로 기억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피안 건너에 가셨고...... 이곳에는 안 계시는 분이 되어서 이제도 무척이나 교수님이 그리웁다.
그래서 오늘의 테마음악도 바로 피안에 관한 주제가 선정되었던 것이다. 즉...... 피안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여미게 해주던 그런 멋스러운 가락으로 남았기 때문에 데바 프리말의 목소리가 아름다움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 그 담백한 터에 두루미도 계시었다 -
- 대웅아! 너 이렇게 날줄 알아? -
- 몰라! 그렇지만 생떽쥐뻬리가 조종사였음은 너도 모르지? -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나,
이미 태어난 것이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 숫타니파타 147
- 그렇게 명상에 빠져드는 동안 어둠은 이내 우리 곁에 다가 왔다 -
- 벼르고 별러(백패킹 때는 무거워서 짊어지지 못하니까), 회원님들에게 밀라노 수프식 미네스트로네도 선보였다 -
- 그리고 보름달과 함께 보금자리로 다시 돌아 왔다 -
- 달님이 '심심하다, 함께 놀자!' 하시었다 -
- 오늘의 바닥공사는 콜맨 매트까지 깔았으니, 꽤나 훌륭한 편이다 -
- 달님의 가호 속에 참 아늑한 잠자리에 들었다 -
달 님
달님 함께 계시니
겨울밤이 시리다 함은
가당치 않겠오
그대 마음 시리거든
겨울밤 달님에게
기대만 보오
몰라서 그렇지
겨울밤 내내
달님과 함께 하시면,
이승의 일은
과거의 일로 물러가고
천상의 즐거움만 찾아 온다오
그러니, 마음 먹기 나름!
그대 마음 속에
달님 모시겠다 떼를 써보시오
하여, 보채지 말고
차거운 겨울밤 내내
훈훈함만, 가득 채우시기를
- 소 향 권 대 웅
- 새벽 여명을 기다리는 자! 그는 새벽을 여는 자이다 -
- 드디어 일출이 함께 하시니, 환희심만 가득해 진다 -
- 그 일출을 바라 보는 자! 넋을 잃었다 -
- 해님, 해님! 오늘도 곱고 고운 생각만 여미게 해 주시어요 -
해 님
해님 나오신다
빼꼼히 문 열고 나오시니
어둠의 그늘, 사라지고
물안개 서둘러 피어 오른다
해님, 해님
어서 오시어요
천상의 소식 가져 오실 해님,
잔뜩 풀어보아 주시어요
숲에는 맑은 향기
들에는 깊은 자양분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게는
변치 않을 밝은 기운들
잔뜩 풀어 주시어요
그 기운 먹고
다시는
삿된 생각 않겠노라고
반성하는 이들에게
해님, 해님!
맑은 축복만 뿌려 주시어요
- 소 향 권 대 웅
- 북쪽으로 날아가는 일만이천피트 상공의 국제선 여객기 -
- 햇빛을 가득 품은 자! 그대는 충만한 자유를 한껏 누리는 자! -
- 영혼의 자유스러움은 이미 그 향기가 내밀하게 농익었다 -
- 그러니 겨울 서리의 맑음에도 환희심을 낼줄 아는 것이리라 -
- 이 서리를 보고 환희심을 낼만 하지 않겠는가 -
- 본부동에도 새벽이 깃들었다 -
필자와 함께 같은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는 광주비박 회원분들이 이번에는 나주호에서 뭉치자 하여 이루어진 주말의 야영은 매우 달콤하였다. 선남선녀들과 함께 어린천사인 도영이, 진원이, 라원이가 함께 해주니 또한 좋았다. 그런데 그렇게 반가운 친구들과 이번에는 명상을 핑계 대고 많이 놀아 주지 못해 그 점이 못내 서운하다. 그래도 사진은 많이 담아 두었으니까, 그렇게 이해를 해 주려무나, 응? 사실은...... 하하하, 그 사진들도 내가 보고 싶을 때 꺼내보려는 욕심으로 찍은 거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미안.
그래도 그렇지. 어린 천사들은 마치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들처럼 항상 맑은 생각만 일으키게 해주니 그 점이 특히 좋다. 필자는 어린이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 여긴다. 태어날 때 우리는 하얀 칠판처럼 백지의 상태를 안고서 태어난다. 거기에 칠해지는 부모의 서원들이 차곡차곡 쟁여지다가, 마침내는 세상에 나아가 상처받고 짓물러진 악습들도 원치 않게 찾아와 스르르 채워지게 된다. 그러니 그 악습들이 채워지기 이전의 순수 상태, 바로 불경에서 말씀하시던 무심의 경지가 바로 어린이들의 마음 상태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어린이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고 여기는 이유가 된다.
- 오누이간인 진원이, 라원이 -
- 그리고 도영이도 함께 했다 -
- 게임을 즐기는 어린이들의 천진한 모습을 보아라 -
-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며 함께 맛있는 조식을 나눈다 -
-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분들, 맑고 향기로운! 분들...... -
- 곡면의 부드러움을 배우라는 겁니까 -
- 다시 보금자리로 돌아와 명상에 든다 -
- 명상이 무언가? 그냥, 하염없이 자연을 바라보는 자세를 집중하여 유지하는 일!이다 (좌회전님 작품) -
- 그러면 자연은 하나로 귀일된다 -
- 솔잎 얹은 담백한 스카이 라인이거나 -
- 솔잎 풀어 헤친 담백한 수채화 호반이거나 -
- 갈대 흐드러진 하늘의 구름이거나 -
집착없이 세상을 걸어가고
아무것도 가진 것없이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
모든 속박을 끊고
괴로움과 욕망이 없는 사람
미움과 잡념의 번뇌를 벗어 던지고
맑게 살아가는 사람
거짓도 없고 자만심도 없고
어떤 것을 내것이라 집착하지도 않는 사람
이미 강을 건너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어떤 세상에 있어서도
삶과 죽음에 집착이 없는 사람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없이 다니며
다섯 가지 감각을 안정시켜
달이 월식에서 벗어나듯이 붙들리지 않는 사람
모든 의심을 넘어선 사람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세상을 다니고
모든 일로부터 벗어난 사람
이것이 마지막 생이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사람
고요한 마음을 즐기고
생각이 깊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는 사람
- 숫타니파타 490~503
*숫타니파타는 팔리어로 씌어진 최초의 불교경전을 말한다.
- 이제는 다시 세속으로 깨어 나온다 -
- 그리고 모두와 이별을 나눌 시간이 되었다 -
- 이쁜 여자와도 이별을 해야 한다 -
- 캠생캠사! (Camp 生 Camp 死!) : 캠핑에 살고 캠핑에 죽는다! -
- 그렇게 별리의 시간을 거친다 -
- 그리고는 차고픔을 해결하러 또다시 여행을 떠나, 나주호를 건너질러 녹야원으로 찾아 든다 -
- 이곳 녹야원은 친구 스님이 평생을 거쳐 일구신 곳이다 -
녹야원에서의 독백
이제 가을 물러가면 한설寒雪의 동장군 오리니
그대 무엇이 서러워 오늘 마음 헤매이는가
오고가는 세월이 정녕 서러움이 아닐진대
그대 무엇에 연연하여 마음의 그늘 짓는가
짓고 품이 마음의 작용이라 하나
온 우주의 조화로움 공명 되어
마음 함께 흔들리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어떻게 중용을 잡아 고요하게 할 것인가
이는 모두의 영원한 과제이기에
온 우주 숙연하게 이 법法 받아 들임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 小 鄕 권 대 웅
- 무설전 오르는 계단이 반갑다 하신다 -
녹야원은 인도의 사르나트를 부르는 또다른 이름이다. 부처께서 해탈하신 후,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 처음으로 불법의 바퀴를 굴려 그들을 제도했던 성스러운 인도불교의 4대성지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 초전법륜지라고도 부른다. 그 인도의 전설적인 녹야원을 꿈꾸며 이곳 원주 효공당 스님은 평생에 걸쳐서 가람을 일구어 냈다. 맑은 호수와 함께 바람과 노니는 왕대밭이 자리한 수승한 터에 자리를 잡은 효공당은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얻기 바라는 서원을 세웠을 게다. 그리고 필자처럼 차고픔에 목마른 나그네를 위한 차공양실 또한 만들었을 게다.
사르나트 [Sarnath]: 녹야원(鹿野園) ·선인론처(仙人論處) ·선인주처(仙人住處) ·선인원(仙人園) ·녹림(鹿林)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석가(釋迦)가 35세에 성도(成道)한 후 최초로 설법을 개시한 곳이며, 이때 아야다교진여(阿若多僑陳如) 등 5명의 비구(比丘)를 제도(濟度)하였다고 한다. 탄생(誕生:룸비니) ·성도(成道:부다가야) ·입멸(入滅:쿠시나가라)의 땅과 더불어 불교(佛敎) 4대 성지의 하나로 일컬어지며, 다메크탑(塔)을 비롯한 많은 불교 유적과 사원(寺院) ·박물관 등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박물관에는 아소카왕 석주두(石柱頭)를 비롯하여 많은 유품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특히 네 마리의 사자상(獅子像)으로 된 주두는 인도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마우리아기(期)에 속하는 가장 오래 된 유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르나트 [Sarnath] (두산백과, 두산백과)
- 오랫만에 참배 드리는 마음이 설타 -
- 무설전 본전 탱화 -
- 녹야원은 부처님께서 해탈하시고 처음으로 다섯 비구들에게 법의 바퀴를 전달하던 곳을 말한다 -
이 어찌 아름다운 무설전 본전 탱화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림으로 그려지는 탱화로서의 고정관념을 깨고
청동으로 만들어진 중부조 형식의 작품이 무설전에 걸린 것이다.
이것은 한국 불교미술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며
가히 처음이라 말할 수 있겠다.
파격의 미를 찾아서
그간 효공당 자신의 스승인 암도 큰스님과 불교계의 여러 전문가분들을
발품으로 만나고 지혜를 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간송 미술관 최완수 선생 및 우리들의 친구 정병삼 교수, 조명화 교수 등
여러 전문가들과 숙의하여 최고의 기술을 갖춘 어느 작가로부터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어서 더욱 값진 것이다.
뜻깊은 자 아니면 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알아야 한다.
- 녹야원 홈페이지에서 발췌
- 지난번 찾아 뵈었을 때, 주지 효공당 스님과 함께 무설전에서 -
- 박주관 시인과 김혁정 교수와 참배 드리던 날이었다 -
- 그날 박시인은 자신의 시집을 효공당에게 증정하면서, 녹야원의 감회를 담은 시를 즉석에서 낭송했었다 -
스님 앞에서 시를 낭송하다
- 우왕 박주관
친구같은 원진스님
친구였지
이제는 효공당으로 법력을 더 쌓으니
도반보다는 스승인 스님이시라
시집 출간 후 녹야원에 들른 그날
차 한잔 나누며 대화를 하던 중
이 절에 대한 기행시 있어
스님 앞에서
즉흥적으로 낭송하니
훈훈한 기운이 돌면서 연꽃이
배시시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 꽃 번짐으로 하여
우리들은 각자의 수처작주를 갖게 되었다.
- 수처작주를 새겼던 법당의 붉은 연꽃 -
그 녹야원이 한국에도 있으니, 바로 효공당 스님이 30여년의 혼을 담아 이룩한 이곳이다, 효공당 스님은 이전에 원진 스님이라 불리웠던 분인데, 고등학교 시절 출가를 해서 우리들의 놀람을 한 눈에 받았던 인물이다. 고등학교 시절 충장로 4가에 있던 관음사는 우리 계냥이모님의 큰집이었다. 많은 학생불자들이 모이던 곳이 관음사였으며, 원진 스님은 그곳에서부터 불문에 눈을 뜨게 되어 어려운 고행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그 각오가 대단했던 분이라 할 수 있겠다. 대장부의 기개가 하늘 같았던 그 분이 어찌 스스로 나주호의 숲속에 찾아들어와, 거의 은자적인 삶을 선택하면서 스스로 녹야원이라는 절이름으로 눌러 앉았던 것일까.
어느날 '수처작주隨處作主'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서 '바로 우리가 서있는 이곳에서 주인 의식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시간의 노예, 인생의 노예, 욕망의 노예가 될 뿐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으니, 실로 그 의미가 대단하다 하겠다. 맞다! 우리가 바로 주인!이란 의식이 없다면 어찌 노예가 아닐 수 있겠는가. 매사 빠르게 물상이 변해가는 현대에 있어서 수처작주라는 말은 우리에게 더욱더 깊이 새겨들어야 할 좌우명이 된다할 수 있을 것이다.
청명한 겨울이 코발트빛으로 하늘에 걸려있던 날, 찾아들었던 녹야원에 그러나 효공당은 아니 계시었다. 젊은 비구가 스님께서는 마침 순창에 볼 일 보러 출타하셨다 하면서, '차공양하게 올라 오시라.'는 권유도 사양하고서, 발걸음을 무설전으로 옮겼다. 녹야원의 대웅전 격인 무설전에는 불상 대신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중부조 형식의 본존 탱화가 걸려 있었는데, 불교미술사적으로는 이곳이 아마 최초라고 했다. 효공당의 친구이신 간송 미술관의 정병삼 교수, 조명화 교수 등의 자문으로 이루어진 불교미술의 걸작인 셈이다.
특히 무설전 본전 탱화는 부처님의 미소가 모나리자의 미소와 닮아 있어 누구에게나 매우 친근한 감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니, 그 점에 있어서도 가히 파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초전법륜의 말씀을 누운 듯, 만 듯 듣고 있는 사자의 동화스러운 모습 또한 효공당 스님의 천진무구한 마음과도 똑 닮았다 하겠으니, 어찌 조화롭지 않다 할 수 있으랴. 그러니 이곳에 와서 맑은 차 한 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어찌 아니 일어 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스님께서 이곳의 감잎을 따서 직접 덖으신 감잎차 또한 일품으로 소문이 나 있으니, 어찌 차고픔의 미련 또한 안 일어 나겠는가.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항상 부르짖으면서도, '맑은 책 한 권과, 향기로운 차 한 잔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소유의 욕심'이라 고백하시었으니, 그로 미루어도 어찌 은자들의 귀한 향유물이라는 생각이 아니 나올 수 있겠는가.
唐나라의 선승 임제선사의 임제록臨濟錄을 보면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이라는 말이 나온다.
- 풍경에 매달린 붕어의 눈처럼 결코 잠들지 않는 혜안을 얻고 싶구나 -
- 그 혜안의 눈으로 바라보면, 바로 이곳이 극락! 아니겠는가 -
- 그러니, 청정법신인 왕대의 노래를 들어 보아라! -
- 효공당 스님의 무설설無說設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수처작주만큼이나 큰 감동으로 밀려 온다 (김혁정 화백 작품) -
어제 저녁에 야영에 든 블랙 다이아몬드사의 하이 라이트 텐트 사진을 (백패커들은 텐트가 있는 풍경이라 하여 줄여서 '텐풍'이라 부른다)
카카오 톡으로 김혁정 교수에게 보냈더니, 건너 온 답신이 이렇다.
<흐미!
못말리겄네.
춥고 물안개 일어나 으시시할건디.
암튼 잘 주무시고, 나올 적에 녹야원에 들러 차공양이라도하고 나오시죠.>
그래서 또 밤의 월광에 찍은 텐풍을 보내 드렸더니 답신이 왔다.
<아~
시간 속에 머무는 당신은 진정 아름다움을 아는 자! 가는 길이 멋스럽도다.
대단하십니다, 그려.>
<텐트의 불빛과 달빛,
그 사이에 대웅이 있습니다.
이불 차지 말고 잘 주무세요.>라는 답신이 왔다.
이불 차지 말고 잘 주무시라는 걱정이 어찌 아름다운 마음씨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랴.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김혁정 교수와 시를 쓰는 박주관 시인과 종종 이곳을 찾고는 했었는데, 박주관 시인께서는 지금 이곳에 아니 계시다. 아니...... 영원히 아니 계시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랴. 그 분은 시가 되어 이렇듯 절절히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계시는데 존재의 유무, 형상의 유무가 그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보고 싶다는 어린 양은 이제 자제하기로 하자. 너나 없이 어른스러움은 과연 무엇에 있던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는 마음을 아니 일으키는, 그리고 우주 일체가 바로 하나로 귀결 된다.'는 바로 이 깨달음을 향한 마음에 있다 한다면 틀린 말이 될까.
간혹 사모치게 보고 싶은 그리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의 영혼은 정말 쓸만하겠다 싶다.
"가니, 가니, 건너 가니, 피안이 저기 있네......"
- 녹야원과 별리하는 마음에 애착은 이미 끊어지고 없다 -
- 나주호의 깊은 골에 은은하게 묻혀있는 녹야원은 비은秘隱 터라 아니할 수 없다 -
- 누군가 트리 하우스를 해학적으로 올려 놓았다 -
- 수백년 고목이 군계일학으로 앉아 계시다 -
- 예전에는 못 보았던 저 두 개의 동굴은 무엇이던가 -
- 나주호는 곳곳에 비경을 숨겨 놓았다 -
- 나주평야와는 또다른 형식인 비산비야의 경계를 보여 주는 곳이 바로 나주호라 할 수 있겠다 -
- 드들강에 이르러 철새탐조에 빠졌다 -
- 청둥오리는 시베리아의 진객이랄 수 있다 -
- 날으는 비상에서 삶의 역동성을 강하게 느낀다 -
- 시인 이상은 왜 다시한번 날고 싶어, 애닯은 노래를 각혈로 토해 냈을까 -
- 새들이 어우러진 곳에서 함께 한가한 오후를 즐긴다 -
- 이승이 아름답다 칭송하는 자! 그는 이미 세상 밖에 있다 -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땅! 나주호에서 세외세내世外世內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세상 밖과 세상 안은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내내, 이제는 섣부른 결론에 젖지는 않으려 한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깊은 습習의 세계에서는 결코 비산비야와 세외세내를 명쾌하게 구분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살아있으면서도 살지 못해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푸념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까닭이다. 살고 싶으면서 죽고 싶다는 말은 언어의 늬앙스가 완전히 다른 표현이니까,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마치 물속에 있으면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되고자' 하는 잉어와 별반 다름이 없는 부질없는 욕망이라 하겠다. 물속의 잉어는 결코 바람을 닮을 수 없다. 물속에서는 바람이 아니 일어나는 까닭이다. 그러니 부질없는 욕망을 꿈꾸는 자! 있다면, 그는 자신이 잉어가 품었던 꿈과 별반 다름없는 허욕에 젖어있다는 사실을 얼른 깨달아야 한다. 그러고서 옷깃을 여미고, 자신의 꿈이 과연 이룰 수 있는 꿈인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다듬어 보아야 한다.
과연 저 장엄한 일출과 숭고한 월몰月沒을 보았으면 되었지, 또 그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미 얻은 자!
그는 이제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질문으로 호기심을 채울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해답은 자기 체험 없는 노력으로는 완성이 아니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길을 나서려는 자! 새벽에 깨인 눈으로 해를 기다리기를 게을리 하지 말았으면 싶다.
해님 떠오르시거든...... 오늘 하루도 해님이 보살펴 주시어 함께 맑은 생각의 정점에 도달하게 해 주시라고 떼를 써보시기 바란다. 그렇게 사는게 보다 더 순수하지 않겠는가 싶다. 그러지 않은가? 무엇이 두려워 해님에게 떼도 못 써 보고 살려 하시는가.
그렇게 해보고 싶은 자!
당장, 보따리를 싸들고서 바로 길을 떠나거라.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운 길!
바로 해배解配의 길!
과연 무엇이 두려워 해님에게 떼도 못 써 보고 살려 하시는가.
- 2014년 1월 21일 완성하다 -
小鄕 權大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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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 돋움체-필자 글(녹색), 궁서체-인용 글(검은 회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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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르는 음악 -
"Gate Gate" - song by Deva Premal
Gate 가니
Gate 가니
Pa Ara Gate 건너 가니
Pa Ara Sang Gate 피안이
Bo Dhi Sba Ha 저기 있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 사바하"의 산스크리트語입니다.>
데바 프리말은 독일 태생이며... 인도 명상순례 중에 이 곡을 떠 올렸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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