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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기 276 - 日本 오사카 ,四天王寺, 御幸通り(Korea Town)
3월22일 시텐노지(四天王寺)에 갔습니다.
시텐노지(四天王寺)는 오사카 텐노지구 시텐노지에 있는 절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이코천황 원년(593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남문, 중문, 5층탑, 금당(콘도), 강당(코도)을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하는 시텐노지 양식이라는
오래된 가람 배치 양식의 시초입니다. 안타깝게도 콘크리트로 복원하여 옛스런 맛을 느끼기
힘듭니다. 불교가 일본에 도입되자 불교 반대파와 불교 찬성파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쇼토쿠 (성덕)태자는 불교 반대파와의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절을 지어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전쟁에서 이기자 불법의 수호신인 시텐노(4천왕)을 기리는 시텐노지를 지었습니다
사천왕은 본래 고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方位神)이지만 불교에서
사천왕의 개념을 가져와 불법(佛法)과 가람 지키는 수호신으로 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천왕의 이름을 딴 절들은 불교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일본 아스카시대의 사찰, 호류지와 함께 백제의 건축 양식 영향을 받은 곳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주요 건축물들이 모두 파괴되어 복원하였습니다.
서기 578년에 쇼토쿠가 백제로 부터 장인 세 사람을 받아들여 절인 시텐노지를 건축하게
하였고 593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호류지보다 이른것입니다. 아스카테라가 역사상
일본의 최초의 절이지만 사라져서 시텐노지는 최초의 관사이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찰
입니다. 그러나 1576년에 있었던 화재로 전체 가람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건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건물 자체는 호류지가 더오래되었습니다.
매달 21일 오사카 시텐노지 벼룩시장은 매달 22일까지도 진행되기도하는 오사카에서 규모가 가장 큰 벼룩시장입니다, 프리마켓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곳의 특징은 다른 플리마켓들이
상업화되어 구제 빈티지 의류등등의 판매가 많다면 이 곳은 정말 오사카 시민들이 물건을
가지고 나와서 파는 경우가 많고 의류도 많지만 다양한 빈티지 물건들이 많은 벼룩시장입니다
여기서 만난 한국사람은 가끔 이곳에 와서 귀한 것을 헐값에 싸게 되기에 한국에서 온다고
합니다.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시텐노지 역시 계속 증축되었으며, 금당과 탑 등의 건축 양식 역시
바뀌었습니다. 사실상 사진으로 볼 수 있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공포의 형식이나 기둥의 배치
조차 바뀌어 지붕이나 하앙 정도만 옛 흔적이 남아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만 가람의 배치
만큼은 창건 그대로 입니다. 지금도 시텐노지식이라고 함은 강당과 금당, 탑, 정문이 일직선
으로 놓여져 있는 배치를 뜻하며, 백제식 가람배치라고 부릅니다
1934년에는 태풍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하였지만 결국 태평양 전쟁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탑과 정문, 금당, 남측 회랑이 완전히 불타버렸습니다.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셋 다 아스카시대 의 양식으로 고증하여 철근 콘크리트 로 복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
에서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는 주춧돌과 기단은 제거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는 별명이 있던 건축 업체 곤고구미 상징이 바로 이 시텐노지
입니다. 시텐노지를 건축한 세 명의 목수 중 한 명인 금강중광(金剛重光: 곤고 시게미츠)이
일본에 남아 대대손손 시텐노지의 증축과 유지보수를 하게 되었고, 이 것이 곤고구미의
시작됩니다
에도시대까지 곤고구미는 시텐노지의 유지보수를 전담해 왔기 때문에 시텐노지로부터 매년
정해진 돈을 받아 회사를 유지해왔습니다. 시텐노지의 완성 이후로도 계속 보수와 증축을
하였으며, 1576년에는 시텐노지 전체가 불에 탄 것을 재건한 기업도 곤고구미입니다.
곤고구미는 578년 일본 최초 불교 사찰 시텐노지(四天王寺) 건립을 위해 일본 쇼토쿠(聖德)
태자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곤고 시게 쓰미(金剛重光, 한국명 유중광)를 비롯한 3명의
백제 장인에 의해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였습니다. 곤고(金剛)는 당시 왕이
하사한 성이며, 이름은 그대로였습니다.
곤고구미의 후손이 오사카성(大阪城)과 호류지(法隆寺) 증개축 공사를 맡음으로써 명실공히
일본 대표 사찰 건축 보수업체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도 곤고구미가
건립한 사찰 가이 코인戒光院의 대웅전만큼은 멀쩡했을 만큼, 일본 및 백제의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부동산 사업영역 확장으로 2006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회사였던 곤고 구미는 파산했습니다.
오사카성과 시텐노지는 오사카 전통의 상징입니다. 시텐노지는 일본 최초의 사찰로 그
의미가 크고, 오사카성은 전국을 제패한 도요토미 가문의 가성으로 지금까지도 일본 대표
명성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속에 백제인의 장인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시텐노지의 벼룩시장입니다. 이곳에서 목각인형 두개를 싸게 구입하였습니다.
백제 영향을 받아 한 개의 5층 목탑과 금당을 가지고 있는 1탑 1금당식 가람 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호류지와 달리 모든 건물이 일직선으로 놓여있는 이러한 배치를
시텐노지식이라고 부르며,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로 추정합니다
쇼토쿠 태자
에도시대를 거친 근대의 시텐노지. 특히 지붕의 형태와 장식이 많이 변형되었습니다.
왓소축제(「四天王寺ワッソ」祭り)는 199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왕인박사를 비롯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한 고대 백제인들의 모습을 재현한 가장행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행렬이 오사카 번화가를 누비며 시텐노지(四天王寺)에 이르는 동안
'왓소, 왓소'하며 구호를 외치는 데서 '시텐노지 왓소'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후원자였던 칸사이코긴(関西興銀) 은행의 도산에 의해, 2001년부터 2년간 중지되었다가
2003년데 재개되었습니다.
축제는 철저히 고증된 의복과 장식을 하고 대악대의 음악에 따라 무희들이 화려하게 선도하는
가장행렬이 중심입니다. 축제는 고대에서 중세까지 한반도의 문화와 문명 즉 불교와 한자,
도예, 건축, 생활양식 등을 전한 왕인 박사를 비롯해 탐라,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 조선
등에서 도래한 사람들의 수행행렬과 사절단을 맞이하는 일본의 주요인물과의 교류내용을
표현한 가장행렬 축제입니다.
시텐노지의 야경입니다.
시텐노지에서 오사카 쓰루하시(鶴橋)에 있는 한인타운으로 갔습니다.
쓰루하시역에서 물어 한인타운 거리로 가는 도중에 한인 벧엘교회를 지나갑니다.
한국인들은 세계 어디가든지 교회를 세우며 믿음생활을 하는것을 봅니다.
게스트 하우스인 명동이 보입니다. 명동역의 표시로 꾸몃습니다.
자갈치 게스트 하우스도 있습니다. 도쿄에는 신오구보 한인타운이 있습니다.
일본 도쿄 신오쿠보에 있는 코리아타운이 유명하지만, 재일교포라 불리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바로 오사카입니다. 여기 오사카 이쿠노쿠(生野區)에도 코리아타운이 있다
이 주변은 원래 ‘이카이노(猪飼野)’라고 불렸다. 고대로부터 일본과 한반도 사람들이 교류해
왔던 땅이었다고 합니다. 쓰루하시(鶴橋)역 주변의 코리아타운과 모모다니(挑谷)역에서
조금 떨어진 미유키도오리(御幸通り)상가인 코리아타운 거리가 있습니다.
한인타운에 신사가 있습니다. 1,500년전에는 백제후예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일제강점기에는
슬픈역사를 버티면서 살아온 이민자들입니다.
한 500m 길에 130개 정도의 개인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곧장 뻗은 상가에는 한국식 2층으로
된 문(樓門)을 모방해서 만들어진 문이 4기(基) 있고 또 해태나 장승, 돌하루방의 상이
곳곳에 서 있습니다. 철도의 육교 아래 공간을 이용한 가게가 많은 쓰루하시역 주변의 코
리아타운과는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한국 식료품은 물론이고 정육점이나 과일가게, 음식점, 호떡 같은 간식을 파는 포장마차,
옷가게, 한복집, 이불집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여러 깔끔한 가게가 눈길을 끕니다.
한국 잡화나 인기 한류 스타의 상품, K팝 CD 등을 팔고 있는 가게입니다.
옛날에는 없었겠지만 한류 열풍을 의식해 생긴 것 같습니다.
코리아타운이라고 가다가나로 쓰여져 있으며 상점들 이름도 적어놨습니다.
저고리를 입어 볼 수 있는 가게나 김치 담그기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곳, 게다가 이 주변을
중심으로 ‘이쿠나비(生野區의 navigation)’라고 불리는 자원봉사 안내원들이 있어서 관광객
들을 데리고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기가 오사카의 명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사카하면 일본 진출 첫해 일본 퍼시픽리그를 강타한 한국인 거포 이대호가 생각납니다.
이대호의 야구생활이 처음부터 화려하지는 않았습니다. 2001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건 노력, 연습밖에 없었다"는 이대호 뒤에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가정 형편 속에서 이대호 형제를 키워낸
인물은 바로 할머니. 부산 팔도시장에서 된장을 팔며 이대호가 야구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뒷바라지한 할머니는 손자의 성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올 시즌 일본프로야구에서 91타점을 수확하며 퍼시픽리그 타점왕에 오른 이대호는 130kg
거구답지 않은 유연함과 시원한 장타를 자랑하며 한국식 야구로 일본도 점령했었습니다.
일본 재일교포로서 일본 야쿠자계의 전설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야쿠자는 지금은 숫자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초기에는 대부분이 한국계교포 였다 합니다. 굶주리며 차별이 심한
일본사회에서 악착같이 살려면 폭력에 의지해야만 했었습니다. 재일동포로서 야마구치구미의
명성을 극에 달하게한 가장 전설적인 실전 싸움꾼은 야나가와 지로(柳川次郞)입니다.
그가 재일동포 양원석(梁元錫.별명 호랑이)이 바로 전설의 주인공입니다.
한창 시절 최영의가 야나가와 지로와 밤길에서 시비가 붙었다가 양원석의 살기(殺氣)에
최영의가 먼저 통성명을 제의하며 사귀기를 청하는 바람에 양원석이 한국이름을 밝혔고,
이 사건이후 두사람이 친구가 되는데 양원석이 후일담에 최영의가 계속 덤볐다면 그의
손목이 남아있지 않았을거라는 섬칫한 말을 한적이 있고, 최영의는 어두운밤에 좁은 길에서
무도인의 싸움이 아니라는 판단에서 싸움을 회피했다는것입니다
양원석이야 말로 '야마구치(山口)파'를 고베의 군소 깡패 집단에서 10만명 이상의 세계 최대
의 폭력조직으로 성장시킨 주인공입니다. 양원석은 이 야마구치파의 가장 전투적인 조직
야나가와(柳川)구미의 초대 오야붕으로 당시 일본 전국의 군소 야쿠자 조직들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다른 조직을 박살내버리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태양이 비치지 않는 날은 있을지라도 야나가와의 피의 소나기가 내리지 않는날은 없다'
라는 말들이 생길 정도였고 특히 자신의 조직원 7명과 함께 100여명의 야쿠자(오사카의
오니아타마 조직)들을 상대로 벌인 사상 최악의 혈투(8:100의 신화로 불린다)는 그를
전일본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사카의 기타구(北區)에 사무실을 마련, 야나가와구미(柳川組)라는 간판을 내걸고 야쿠자
조직으로써 본격적인 행동을 시작했으며 당시에는 일본경찰도 조직폭력배 단속에 대한
완전한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오야붕이 된 양원석은 그때 35세의 나이
였습니다.나중에 그는 감옥에 있던 중, (자신의 딸과 동갑인)15세 동포 여학생의 편지를 받고
조직을 해체하는데..편지 내용은 "야나가와 씨, 우리 동포들의 이름에 먹칠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글을 읽고나서 무언가 가슴속에 결심한 양원석은 드디어 야나가와구미 해체
선언을 하게 되고 2대 회장이된 강동화(일본명 다니가와 고타로)가 처음엔 반발했지만
‘오야붕이 만든 조직이니 맘대로해..’ 하며 울면서 승복했다합니다.
대부분의 재일교포는 일본식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식 이름은 "니혼메이(일본이름)"
라고 하지만 교포사회에서는 "쓰메이(通名; 통칭명)"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한국
이름은 "혼묘(본명)"라고 합니다. "쓰메이(통칭명)"라는 명칭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일본식
이름은 "생활의 편의상 사용하는 딴 이름"이기 때문에 일본식 이름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가짜 이름"인 셈입니다
코리아타운에 있는 개천입니다.
교포들이 사용하는 "쓰메이"의 기원은 잘 알다시피 일제시대의 창씨개명에 거슬러 올라
갑니다. 특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본명으로 장사를 하면 일본인들의 차별대우를 받을
우려가 있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쓰메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만약에
본명으로 일본 학교에 다니면 이름이 이상하다고 이지매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본식
이름으로 다니게 하는 부모들이 대부분입니다.
한인타운에서 택시를 타니 운전수가 재일인3세였습니다. 택시타고 게스트 하우스에서 짐을
챙기고 구로몬시장에서 명치3년(1870년)에 창업한 노포(老鋪:시니세) 스미히로겐(末廣軒)
에서 스시를 먹고 공항으로 갓습니다. 일본에서는 100년 넘은 기업들을 일컬어 ‘시니세(노포,
老鋪)’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래 오래된 가게나 음식점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100년 기업에는
상장기업이나 대기업 등도 포함되어 있어 ‘시니세’는 오래된 기업 전반을 일컫스빈다.
우리나라의 개념으로는 ‘장수기업’인 셈입니다. 일본에는 100년 넘는 기업이 수만 개에
이르며 1000년 이상 된 기업도 21개가 있습니다. 이들 기업은 어떻게 오랜 세월 생존할 수
있었을까? 이에 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공통된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귀결됩니다
첫째, 창업자 후손들이 ‘가업의 계승’과 ‘기업이념의 실현’을 목표로 경영해왔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장수기업 4000개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이들은 성공의 제1조건으로 창업
시대부터 이어지는 가훈(사훈)의 계승을 꼽았습니다. 깃코만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간장
브랜드입니다. 깃코만(Kikkoman)은 일본 에도시대 때부터 간장을 제조하기 시작한 식품
회사입니다. 1630년에 자그마한 시골 간장 회사로 시작해 도쿠가와 시대, 메이지유신, 2차
세계대전을 지나 현재까지 약 380년 동안 설립자의 후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깃코만에서 깃(kik)은 장수와 행운을 의미하고. 코(ko)는 최고를, 만(man)은 영원을
의미합니다
둘째, ‘전통의 계승’과 동시에 ‘혁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셋째, 기업의 최고 가치를 기업의 존속(승계)에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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