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23. 주일예배설교(요한복음 강해 67)
요한복음 19장 17~30절
빌라도의 낙장불입(落張不入)보다는 낫게
■ 화투판에서만 사용하는 전문용어들이 있습니다. ‘못 먹어도 고’ ‘죽어’ ‘쌌다’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좀 거칠죠? 그런데 아주 고상한(?) 전문용어도 있습니다. ‘낙장불입’입니다. 한번 내놓은 패는 바꾸거나 거둬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낙장불입이란 말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냉정하게 만듭니다. ‘법’이기 때문입니다.
회의에서 어떤 의견들이 오가다 ‘법이요!’라는 외침이 들리면 진행자든 참석자든 꼼짝 못 합니다. ‘법’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반항할 수 없는 현재 최고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도 무시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을 무시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힘에 굴복하거나 타협하는 힘이 있습니다. 험한 고스톱판에서 ‘낙장불입’을 굴복시키고 타협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법’ 위의 ‘법’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 결국 빌라도는 사법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판단에 의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내 주었습니다. 법을 무시하는 힘에 굴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빌라도의 최종 판결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단 세 절(19장 16~18절)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나와 골고다에 이르기까지 겪으신 수모의 내용을 세세히 기록한 반면, 요한복음은 간단한 설명뿐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데 모든 관심을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19~22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한복음은 다른 것은 상세하지 않아도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인 패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기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실을 알아낸 사람은 빌라도였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이 사실을 알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것입니다. 물론 정치적 압박에 타협하고 굴복했지만, 빌라도의 진심은 예수 방면이었습니다.
이 진심은 십자가에 단 패를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이 글귀는 빌라도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 아닌, 글자 그대로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글귀를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유월절을 맞아 전세계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든 모든 유대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 전략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외국에 나가 산 유대인 2세대, 3세대는 히브리어보다는 당시 국제적 언어인 로마어와 헬라어에 익숙해 있었기에, 이를 의도한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난리를 치며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매우 권위 있게 이를 맞받아쳤습니다. “내가 쓸 것을 썼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죠? 그런데 다른 번역본을 보면 당연함에 당당함이 같이 읽힙니다. “What is written will not be change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쓴 것은 바꿀 수 없다!” 한마디로, ‘낙장불입’이라고 맞받아친 것입니다. 대단하죠?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참 대단했습니다. 비록 정치적 타협을 했지만, 마지막에서라도 진리를 만난 사람의 태도를 보여 주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고를 한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최소한 이 정도보다는 좀 더 나은 결기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빌라도가 “쓴 것은 바꿀 수 없다!”고 했다면, 우리는 “예수님은 길과 진리요 생명이시다!” “예수님만이 구원이시다!”라는 정도는 맞받아쳐야 하지 않을까요? 진리에 도전하는 세상에 쭈뼜쭈뼜하지 말고, 진리를 붙잡고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소한 빌라도보다는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 그런데 빌라도의 진지함과는 달리 군인들에게 예수님은 놀잇감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비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아무런 맥도 못 추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어떤 위엄도 볼 수 없는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놀잇감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23~24절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그렇습니다. 생각 없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한낱 놀잇감에 불과합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를 놀잇감으로 여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지, 정의를 행하는지를 두고 쿡쿡 찌르며 놀려댑니다. 이때 우리의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꿋꿋하게 실천하면 됩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25~27절을 보시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이들의 행위에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시선은 인간을 동정하는 하나님의 시선이셨습니다. 25~27절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자신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고난에 혼이 다 빠진 마리아였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배려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인간을 동정하는 하나님의 행위이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이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시겠다는 약속 이행이십니다. 이는 세상 끝날까지 늘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 이행이십니다. 마리아에게 하신 행동이십니다만, 하나님의 자녀 모두에게 하시는 행동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진행되시듯, 성경의 약속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 오롯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요한처럼 말입니다. 27절입니다. “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서 “그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여기서처럼 자신을 늘 익명처리를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다고 보지만, 주님만 드러내고 싶어서였습니다.
여하튼 요한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신앙생활도 순종이 가장 중요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 순종에서 은혜와 축복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주변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챙기시고 난 다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30절) 이는 작가가 마지막 문장에 점을 찍고는 하는 말입니다. “끝!”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다 끝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다 끝내셨다는 말씀입니다. 더 정확히는 구원의 조건을 다 갖추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28~30절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민망하면서도 건방진 표현 같습니다만, 영혼이 떠나가시는 순간, 참 홀가분하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단한 인간의 삶을 마감하셨으니 말입니다. 그 갖은 수모와 모욕을 더이상 참지 않아도 되실 테니 얼마나 홀가분하셨겠습니까? 사실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은 후련함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가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겁낼 일은 아닙니다.
■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 모두 일곱 말씀입니다. 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④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⑤ “내가 목마르다”(요 19:28). ⑥ “다 이루었다”(요 19:30). ⑦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 일곱 말씀 중 요한은 세 개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⑤ “내가 목마르다.” ⑥ “다 이루었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말씀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구원자’이심을 확실히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를 챙기셨다는 것은, 어머니를 아픔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목마르셨다는 것은, 모든 영혼 구원에 목마르신 것입니다. 다 이루셨다는 것은, 인류 구원을 위한 모든 구원 조건을 구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내주셨습니다. 하실 수 있는 일을 다 하셨습니다.
■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다 내주신 하나님의 헌신입니다. 십자가는 다 하신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이 헌신과 눈물에 의해 우리가 구원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역사는 늘 헌신과 눈물로 이루어집니다. 헌신하는 삶 없이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물의 기도 없이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헌신의 크기만큼, 눈물의 양만큼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법’ 위의 ‘법’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바라기는 헌신이 있는 여러분의 삶이기를 소망합니다. 눈물이 있는 여러분의 기도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헌신과 기도가 쌓여있는 비전교회이길 소망합니다. 빌라도가 겨우 지켜낸 낙장불입보다는 더 나은 여러분과 비전교회의 믿음의 결기이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 “다 이루었구나! 애썼다.”라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