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인형
김남희
유치원 잔디마당에 아이들을 위해 네 쌍의 마블 인형을 데려왔다. 절구 방아를 들고 있는 토끼 한 쌍과 지게를 메고 항아리를이고 있는 농부 부부, 전통 혼례복을 입은 신혼부부, 푸른색 멜빵바지를 입은 남녀 한 쌍이다. 석회암이 높은 열과 강한 압력을 받아 변질한 돌을 마블이라고 하는데 도자기보다는 단단한 것이라 여겨 인형의 재료로 많이 사용한다. 여덟 명의 마블 인형을 짝을 지어 잔디밭에 세워두니 녹색의 잔디와 어울려 제법 그럴싸하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놀며 자신들보다 조금 작은 인형들에게 말을 건넨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쁘다고 하자, 마치 살아있는 인형처럼 웃는다. 그 모습에 인형을 데려온 일이 잘한 일이다 싶어 기분이 좋아진다. 저녁이 되자 벌써 제집처럼 자리를 잡은 인형들에게 퇴근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이튿날 아침 유치원 마당에 들어섰다. 간밤에 인형들이 바람에 넘어지기라도 했을까 봐 제일 먼저 눈이 간다. 왠지 허전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잔디마당에 세워둔 인형 한 쌍이 없지 않은가. 전통 혼례복을 입은 신혼부부 한 쌍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쓰러졌나? 꽃들과 나무를 헤집어 보고 쓰레기통까지 뒤져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 교실로 가져갔나 싶어 물어보았다. 아무도 어제 이후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신혼부부가 데이트하려 외출을 했나 라며 혼잣말을 하니 선생님이 피식 웃는다. 아이들과 함께 있다 보니 생각하는 것이 아이들 수준이라며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난다.
아니다. 인형들은 마블 인형이다. 코가 길어지는 피노키오도 아니고 제 발로 집을 나갈 수는 없다며 교무실에서 방송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아아. 가출한 신혼부부 인형을 찾고 있습니다. 잔디밭에 어제 이사 온 신혼부부 한 쌍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이나 교직원 중에 본적이 있는 분은 교무실로 연락을 주세요.’
방송까지 하며 기다려도 신혼부부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들도 집에 가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도둑의 소행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분명 도둑은 인형 전부를 가져가지 한 쌍만 챙겨 가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추측과 상상을해보니 이웃 사람이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잠시 들고 갔다가 다시 가져다 두는 걸 깜빡했을 거란 생각에 도달했다. 내일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며 퇴근길에 올랐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출근을 했다. 신혼부부가 돌아와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제일 먼저 잔디밭으로 달려갔다. 앗!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이 딱 벌어졌다. 신혼부부는커녕 멜빵바지 한 쌍도 없지 않는가.
‘인형들이 정말 집단 가출을 했나? 살아 숨 쉬는 진짜 인형도 아닌 것이 이틀 사이 두 쌍이나 집을 나갈 수는 없다. 아무리 아이들이 생활하는 동화 같은 유치원이지만 무슨 마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흥분을 가라앉히며 인형들의 정체를 밝히기로 했다. 교무실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와 CCTV를 돌려 보았다. 퇴근 후부터 다음날 출근 때까지 인형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CCTV 속 잔디밭의 하룻밤은 꽤 길었다.
몇 마리의 고양이들이 잔디밭을 누비며 놀고 있었다. 연인인 듯 남녀가 잔디밭 모퉁이 벤치에 앉았다 갔다. 대문이 없는 탓이다. 잔디밭은 대문이 없다. 굳이 대문이 없어도 될 것 같아 여태 대문을 달지 않았다. 바리케이드 정도 만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가끔 동네 아이들도 놀다 가곤 하는 놀이터다. 가로등 불빛에 벌레들만 날갯짓할 뿐 밤새 인형들은 자는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새벽이 되자 잔디가 촉촉이 젖어왔다. 그때였다. 손수레를 끌며 할아버지 한 분이 골목을 지나간다. 다리를 절룩이며 모자를 푹 눌러쓴 할아버지가 손수레를 입구에다 세우더니 잔디밭으로 들어온다. 잔디밭을 한 바퀴 휘 돌아보더니 인형 한 쌍을 번쩍 집어 든다. 할아버지의 양손에 인형이 맥없이 끌려간다. 인형들은 고물이 실린 손수레에 깊숙이 박힌다. 할아버지는 아픈 다리를 끌며 천천히 CCTV 화면 속에서 사라진다.
전전날에도 똑같은 할아버지가 인형을 들고 손수레에 싣는 모습을 보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잔디밭에 세워 두어서 고물이라고 생각했나? 고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새것인데. 이 일을 어쩌지? 며칠이 지나면 인형들이 전부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신고를 해야 할까? 그냥 모른 척 해야 할까?'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듯했다. 영화 속 레미제라블의 장 발장이 스친다. 하필이면 할아버지가 장 발장을 닮았다. 배고픈 조카들을 위해 훔친 빵 한 조각에 꼬여 버린 인생. 허름한 옷차림에 다리를 절며 손수레를 끌며 고물을 줍는 장 발장. 레미제라블을 보며 자베르 경감을 얼마나 싫어했던가? 평생을 장 발장을 쫓아다니며 괴롭힌다며 보는 내내 그를 얼마나 미워했던가? 그 자베르의 역할을 내가 해야만 하다니.
한참을 고민하다 경찰서에 전화를 했다. 아이들을 위해 자베르가 되기로 한 것이다. 경찰은 CCTV를 보더니, 인근 고물상에 가보겠노라 한다.
반나절이 지났을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인형을 찾았으니 직접 와 확인해 달라고 한다. 경찰서 문을 여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결국 자베르가 될 수밖에 없겠구나.
신혼부부와 멜빵 인형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환히 웃으며 책상 옆에서 나를 반긴다. 그 모습을 보니 자베르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아무런 죄도 묻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몇 가지 서류에 사인을 했다. 경찰도 선처하겠노라 한다. 인형들을 덥석 품에 안았다. 두 쌍의 인형들을 한꺼번에 안으니 몸이 휘청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않겠다는 듯 있는 힘을 다해 인형들을 끌어안았다.
뒤뚱거리며 차 문을 연다. 얘들아, 이제 집에 가자.
첫댓글 마블인형을 잃어버린 이야기가 진지해 숨도 안쉬고 읽었습니다.
그 영감님은 고물이라고 가져가셨을까. 그게 돈 된다고 훔쳐간 것은 아니겠지요.ㅎ
글쎄요. 그 인형들은 이미 팔려가 대구역까지 가서 경찰이 찾아왔다고 하더라구요. ㅎㅎ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동화 같기도 한 따뜻한 수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