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 여행2 - 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씨가 만든 스이젠지를 구경하다!
2025년 12월 규슈 여행은 구마모토 공항에 내려 시계 방향으로 한바퀴 원을 그리며 돌아
다시 구마모토 공항에서 귀국하는 7박 8일 여행으로..... 12월 4일
부산에서 11시 55분에 출발한 이스타 항공기는 13 시 25분에 구마모토 공항에 도착합니다.
구마모토 공항 청사에 비치된 입국신고서를 작성한 후에 입국 심사대를 거쳐 다시 세관 신고서를
작성해 제출하고 입국해서는..... 매표기 기계에서 1,200엔 버스표를 구입해 4번
승차장에서 구미모토역행 리무진 버스에 오르는데, 요금은 내릴 때 현금 천이백엔을 내도 됩니다.
1시간만에 도리초스지 (通町筋 통정근) 에 도착해 토요코인 구마모토조 도오리초스지 호텔에 체크인
후에 배낭만 넣고 나와 전철 스이도쵸에키 (水道町駅) 에서 켄쿤마치健軍町
(건군정) 행 전차를 타는데 요금은 200엔으로 6정거장 스이젠지코엔역 (水前寺 公園駅) 에 내립니다.
3~4분을 걸어서 스이젠지 공원 (水前寺 公園) 에 들어가는데.... 일명 조쥬엔 (成趣園 성취원)
이라고 하는 번주의 정원으로 동해도 (東海道) 53차를 본 떠 만들었으니 1636년
3대 번주 타다토시공이 다실과 라칸지(나한사) 절 주지인 겐타쿠 스님을 위해 절을 건립했습니다.
스이젠지 (水前寺) 의 모모야마 양식의 정원은 4대와 5대 번주에 의해 80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죠주엔 (成趣園) 은 도엔메이 (陶淵明 도연명) 의 시에서 유래되고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호소카와 타다요시는 가토 가문에 이어 두번째로 들어와 3대 80년에 걸쳐서 만들었답니다.
호소카와씨는 원래 북규슈의 15만석 고쿠라성 성주였는데 이곳으로 옮겨오니
고쿠라는 교통의 요지로 중요한 번이라.... 에도 막부는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에게 주니 후다이 다이묘로 메이지 유신까지 10대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1600년에 교토 동북쪽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18만을 비롯 일본 전국에서 30만이 동서 양군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여 승리한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에 에도(도쿄) 에
막부를 수립하고는 쇼군은 600만석을 직할령으로 차지하고 나머지는 270개 번으로 나눕니다.
번주는 크게 3가지로 나뉘니..... 먼저 도쿠가와씨와 친족인 마쓰다이라씨들은 신판 (親藩 친번) 다이묘로
요지를 차지했고, 두 번째로 이에야스의 할아버지 이래 가신들은 후다이 (譜代 보대) 다이묘로
중앙을 차지했으며, 도쿠가와씨와 관련이 없는 자들은 도야마 (外樣 외양) 다이묘로 외곽에 위치했습니다.
도야마 다이묘는 다시 2가지로 나뉘니..... 하나는 1600년 전쟁에서 도쿠가와의 동군에 속한 자들로
자기 영지를 지키면서조금 늘렸으며 반면에 중립이나 반대편인 서군에 속한 자들은 절반은
죽여서 영지를 몰수했고, 나머지 조슈번이나 사쓰마번등은 영지를 삭감당하고 간신히 존속 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도야마 다이묘로 이시다 미쓰나리와 사이가 나빴던 탓에 1600년 전쟁에서
후쿠시마 마사요리등과 동군에 가담했으니..... 기존 구마모토의 북부와 중부 영토를
지킨 외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마모토 남부 우토성을 쳐서 구마모토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에도 막부 입장에서 보면 가토 기요마사는 그후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치는 1614년의 오사카 전투
에서도 에도 막부측으로 참전했으니 가이에키(개역) 할 명분이 없었을뿐더러 또 기요마사
가 대단한 맹장이니 영지를 몰수하려 했다가는 반란을 일으킬 염려도 있는지라 일단은 두고 봅니다.
굳게 뿌리를 내린 막부는 드디어 1632년에 들어 유력 다이묘들을 숙청하는 2차 개역 작업에서
기요마사의 아들로 2대 번주인 가토 타다히로는 모든 영지를 몰수당했고.... 가토 가문은
동북지방 데와 마루오카번 1만석을 받았지만 쇼나이번의 간접 지배를 받는 영지에 불과했습니다.
21년 뒤 가토 타다히로가 사망하자 영지를 몰수해 쇼나이번에 정식 편입시켜 가토 가문
의 개역을 완료하였는데..... 그래도 자손들은 더 이상 숙청당하지 않은채 가문을
유지할수 있었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지나 현재도 가문의 대가 이어지고 있답니다.
번주는 옛날에는 다이묘라고 불리었으니, 본래 '오나누시' (大おお名な主ぬし) 라는 단어가 변화하여
생겼는데.... 영지 규모는 쌀 생산량 '고쿠다카' (石高, 석고) 로 분류하니 1만석 이상은 다이묘 입니다.
그 미만은 고묘 또는 하타모토 (旗本) 로 분류했는데, 1석은 쌀 150 kg 으로 통상 성인 1인
의 연간 쌀 소비량으로 여겨지며..... 영주가 농민으로 부터 징수하는 세율은 센고쿠
시대에는 1/3 ~ 2/3 (67%) 로 지역 별 · 계층 별로 편차가 있지만 세율이 대단히 높았습니다.
번주는 자기 번에서는 사실상 "왕" 이었으니.....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과 군대를 운용했으며 주민들을
재판했고, 이웃 번과의 경계는 소설 설국에서 보듯 “국경” 으로 부르며 관소를 설치하니 사람들은
이웃 번에 여행하려면 번주에게 청원하여 통행 허가서를 발급받아야 했고 상인들은 관세를 물어야 했습니다.
번주는 대대로 섬기는 가신들과 사무라이들을 거느리며 연봉(월급) 을 지급했고
치수사업과 건설 사업을 벌였으며..... 저택은 어전 (御殿) 이고
번주가 참석하는 회의는 어전회의 이며 아들은 세자이고 딸은 공주로 불렸습니다.
번의 신민들은 가신이나 사무라이에 농민을 불구하고 모두 일왕(천황) 이나 막부 쇼군이 아닌 번주를
“주공” 이라 부르며 섬겼으니.....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진주로 내려가면 귀향이지만, 일본의 도쿄
에서 구마모토로 내려가면 "귀국“ 이라고 불렀으니, 지방색이 강한지라 마쓰리가 수백년을 이어 옵니다!
임진왜란때 조선 병사들은 왕의 군사라 대장이 죽거나 파면되면 왕이 임명한 새 대장의 지휘를 받지만,
일본군은 다이묘 개인이 자기 돈으로 육성해 데려온 병사들인지라 병사가 전투로 줄어들면
머나먼 일본의 자기 영지에서 새로 사람을 모아 와야 하고... 다이묘가 죽으면 가신과 병사들은
실업자 낭인이 될 수도 있었으니, 결사 옹위하는지라 임진왜란때 전투로 죽은 큰 다이묘는 전무합니다.
히고국 구마모토번 번주 호소카와씨의 정원 이었던 스이젠지 공원은 정원석과
소나무 의 빼어난 조화가 훌륭하며..... 8월 13~14일에 인근 옥명군
국수정 (玉名郡 菊水町) 고분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한자 (漢字)
가 쓰여진 "검" 이 출토된걸 기념해 “에다후나야마 고분축제” 도 매년 열립니다.
스이젠지 공원으로 들어서면 먼저 호수가 나오고 돌다리가 보이는데, 오늘은 신혼
부부가 일본 전통 복장을 한 채 웨딩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는데..... 건너편
에는 봉긋 봉긋한 마치 신라 왕릉 처럼 생긴 산 들이 나타나니 후지산 을 본떴다나요?
그리고 오른쪽에는 메이지왕(천황) 이 다녀간 듯 기념비 가 보이는데..... 왼쪽
으로 발길을 돌리면 넓고 크지만 잔잔한 호수에는 수많은 철새들이 보입니다.
또 스이젠지 공원 호수의 아치교 다리 밑에는 잉어가 한가로이 노는 모습을 보노라니
너무나도 평화 스러운 것이...... 방문한 사람의 마음을 참으로 편안하게 해줍니다!
다리를 건너니 왼쪽으로 신수 (神水: 長壽の水 장수노수) 라는 히고국 구마모토번의 첫번째
번주인 호소카와 타다토시 가 지었다는 茶室 (다실) 이 보이는데 고킨덴쥬노마
(古今伝授の間) 방의 명장지에는 가이호 유쇼가 그린 “죽림의 7현" 그림이 볼만 합니다.
타다토시의 아버지 호소카와 타다오키 는 단고국 미야즈성주로 있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편에 참전해 공을 세워 부젠국 (오이타현) 으로 전봉된후 고쿠라성 을 쌓고는
나카스에서 고쿠라로 번청을 옮겼다는데, 타다오키는 일본 다도의 개조 센노 리큐의
일곱명 제자 중에 하나로...... 다도의 유파인 산자이류의 개조가 된 풍류인 이었다고 합니다.
타다오키 는 16세에 오다 노부나가 명으로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로 절세가인인 가라샤와
결혼했는데, 4년후 1582년 아케치 미쓰히데가 모반해 교토 혼노지에서 노부나가를
죽이자, 아내를 절에 유폐 시키고 장인 미쓰히데의 영지를 공격한 전공 던분에......
아케치 미쓰히데군을 토벌한 하시바 히데요시 에게서 용서를 받아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그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자 후시미에서 서군에 인질로 잡힌 가라샤는.... 또 다시
남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가노에게 칼로 목을 찔러 달라 부탁해서 죽는데, 독실한
크리스챤이라 자결을 할수 없었기 때문이니 뮤지컬과 영화나 연속극으로 많이 만들어 졌습니다!
셋째 아들에 불과한 타다토시가 후계자가 될수 있었던 것은 타다오키의 부인 가라샤가
집에 불을 지르고 죽을 때, 함께 있던 장남 타다타카의 부인 마에다 도시이에의
딸인 큰며느리 치요가 불타는 집을 탈출해 언니 집으로 피신하자 시어머니가
죽었는데도, 며느리가 도망쳤다며 분노한 타다오키는 장남에게 이혼하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정략결혼" 임에도 아버지를 닮아 끔찍하게 부인을 사랑했던 장남은 차마
이혼하지 못해 가문에서 쫃겨난 때문 입니다! 사랑 때문에
영광스러운 번주가 되는 길을 마다하고 추방된 남자는 일본에서는 드문 일인가요?
여기 공원에는 이즈미 진자 出水神社 (출수신사) 가 자리를 잡았는데, 일본의 성 안에는
반드시 신사 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여기서도 봅니다? 아담한 것이 위압감을
주지 않아서 좋은데 신사에서는 번주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위패 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행 가이드북 책에는 “出水 神社(출수신사)” 를 소리 나는 대로 “데미즈 신사”
라고 해서 그런줄 잘못 알고 왔었는데.... 팜프렛을 받아 보니.....
이런? “이즈미 신사” 이네요? 영어 로는 Izumi Shinto Shrine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옛날에 倭國 (왜국) 에서는 百濟 (백제) 를 소리나는 대로 “햐쿠사이” 라고 읽는 대신에
그 뜻을 취해서 조선이 중국의 명나라나 청나라를 "대국" 이라고 불렀듯이
백제 를 당시에 大國(대국) 이라는 뜻으로..... “구다라” 라고 읽은 것과 같은 것일까요?
조금 다른 예이지만, 일본인들은 규슈 서북쪽 무역항을 唐津 (당진) 이라고 쓰고는
도우쓰가 아니라 "가라쓰” 라고 읽으며.... 규슈 남쪽에 산을
韓國岳 (한국악) 이라고 쓰고 '강고쿠다케' 가 아니라 “가라쿠니다케” 라 읽습니다!
이는 옛날에 선진 문명을 지닌 가야인 들이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오면서 “가야” 를 “가라”
라고도 쓴데서, 일본 중세에는 “한국을 가라” 라고 했으며 가라는 후일 '외국' 을
뜻하는 말로 바뀌니..... 외국인 당나라도 가라가 되어 唐津 (당진) 을 "가라쓰" 로 부릅니다.
한국인들은 고대에 문자가 없었으니 훗날 중국에서 한자 가 들어오자 말로만 전해지던 지명을
한자어로 옮기는데.... 가야 는 가야 (加耶·伽耶·伽倻)· 가라 (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 금관 · 임나(任那) · 한(韓) 으로 옮기니 모두 같은 뜻 입니다.
가라쓰 는 "가라 즉 한국" 으로, 무역선이 김해 금관가야(임나) 로 다니던 것이 세월이 흘러 중국(唐) 양자강
이남 영파로 무역선 목적지가 변경됨으로써.... 도시 이름도 韓津(한진,가라쓰) 에서 唐津(당진,가라쓰)
으로 바뀐 것일까요? 이후 일본에서 "가야" 를 뜻하던 "가라" 가 "외국" 을 뜻하는 말로 바뀌게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