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22장 주석
혼인 잔치의 비유 (마태복음 22:1-14).
우리는 여기에서 "혼인 잔치"에 초청함을 받은 손님들에 관한 비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대적자들이 "말한 것"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왜냐하면 그들은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잡고자"(마 21:46) 기회를 노리는 그들의 "생각"에 대한 대답이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는 사람의 생각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 것인가를 알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통찰하시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답하신 것," 즉 그가 동일한 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하신 것은 이 비유가 전자와 같이 동일하면서도 이와는 다른 유사한 내용으로 복음적인 제언과 그로 말미암아 얻게 될 환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포도원의 비유는 선지자들을 박해하였던 통치자들의 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 비유는 지도자들이 파송된 심부름꾼을 박해하고 있을 때 보편적으로 복음을 무시해버린 백성들의 죄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Ⅰ. 복음적인 준비가 여기에서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느 노임금의 잔치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천국"을 말하며, 이와 같은 준비가 새로운 계약 안에서, 새로운 계약에 의해 고귀한 영혼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 이 "임금"은 "임금들 중의 임금" 이시며 "위대한 임금"이신 하나님이시다.
1. 여기에 보면 "자기 아들을 위해 베풀어진 혼인 잔치"가 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시며, 교회는 그 신부이다. 복음 시대는 "그의 혼례식 날"(아 3:11)이다. 믿음으로 "장자의 교회"를 바라보라. 그것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고," 그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 그 가운데서 여러분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계 21:9)를 볼 수 있다. 복음의 계약은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혼인 계약이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하신 혼인이다. 이 비유의 분지(分枝)는 다만 여기에 언급만 되어 있을 뿐 수행되지는 아니하였다.
2. 여기에서 보면 "이 잔치를 위해 마련된 오찬"(4절)이 있다. 교회원으로서 가지는 모든 특권들, 새 계약의 모든 축복들, 사죄, 하나님의 호의, 양심의 평화, 복음의 약속들, 그것들 속에 포함된 모든 부요함들, 은혜의 보좌에로의 접근, 성령의 위로들, 영생의 굳건한 소망 등, 이 모든 것들이 이 잔치, 즉 지상에 있는 하늘과 간단히 말해서 하늘 안에 있는 하늘을 위해 마련된 준비물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잔치를 그의 의도 속에, 그의 계약 속에 준비하셨다. 그것은 영광 중에서 가지게 될 저녁 식사 이외의 것으로써 낮 시간에 가지는 현재적인 특권들을 나타내어 주는 오찬이다.
(1) 그것은 "잔치"이다. 복음의 준비물들은 "잔치"(사 25:6), 즉 "살진 것들의 잔치"로써 예언되었으며 또한 의식적인 율법의 많은 명절들에 의해 예표되었다(고전 5:8). "우리가 명절을 지키자." "잔치날은 즐거운 날"(에 8:17)이며, 복음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복음의 계속적인 잔치이다. "송아지와 살진 것들이" 이 잔치를 위해 "도살된다." 이는 맛있는 음식(niceties)이 아니라 실속 있는(substantial) 음식이다. 잔치날은 "도살의 날" 또는 제삿날이다(약 5:5). 복음의 준비물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그 자신의 희생 제물에 모두 기초되어 있다. 잔치는 사랑 때문에 베풀어졌으며, 그것은 화목케 하는 잔치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의 표식이다. 그 잔치는 "웃는 자"(전 10:19)를 위해 배설되었으며, 그것은 즐겁게 하는 잔치이다. 그 잔치는 푸짐하게 베풀어졌다. 복음의 계획은 "모든 굶주린 영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우는 것이었다. 이 잔치는 교제를 위해 베풀어졌는데, 이는 하늘과 땅 사이의 교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포도주의 연회"에 보냄을 받았으며,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가 요구하고 청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다."
(2) 그 잔치는 "혼인 잔치"이다. 혼인 잔치는 대개 부요하고 무료이며 즐거운 법이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맨 처음 기적은 혼인 잔치를 위해 풍성한 준비를 해 주신 것이었다(요 2:7). 정녕 "어린양의 혼인의 기약이 이르고 그 아내가 예비 된"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 즉 승리하여 개선하는 잔치에는 모든 것이 궁핍하지 않고 풍족하게 마련될 것이다(계 19:7, 17, 18).
(3) 그 잔치는 "왕의 혼인 잔치"이다(삼상 25:36). 그것은 "왕의 잔치"(삼상 25:36)로써 종이 아닌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이다. 그 때에 만일 그가 잔치를 베푸셨다면, 그는 아하수에로 왕과 같이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에 1:4)을 나타내시려고 하실 것이다. 은혜의 계약 안에서 믿는 자들을 위해 마련된 음식물들은 기다려야만 하는 우리와 같이 무익한 벌레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 줄 수 있는 "영광의 왕"에 어울리는 것들이다. 그는 그 자신과 같이(like himself) 주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에게 "엘 솨다이"(충만하신 하나님)로서의 자신을 주시며, 영혼을 위한 참된 잔치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Ⅱ. 복음의 부르심과 제안은 이 잔치에로 부르신 초청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잔치를 베푼 자들은 그 잔치를 함께 빛내기 위하여 손님들을 부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손님들은 사람들의 자녀들이다. "주님이시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와 같이 존귀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처음으로 초청된 손님들"은 유대인들이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러한 초청이 주어지고 있다. 사역자들은 초청하러 파송된 "종들"이다(잠 9:4, 5).
1. 손님들은 잔치에 "초청"을 받고 있다. 복음이 기쁜 소리를 안에서 듣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이 초청의 말씀이 보내어지고 있다. 초청장을 가져 온 종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종이에 적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을 내어쫓는 사람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내어 쫓기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찬에 초대된 자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특권에 참예하고 있는 자들은 신랑의 절친한 친구와 겸손한 종들처럼 주 예수님을 당연히 존경하며 따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잔치에 초청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신랑을 맞으러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2. 손님들은 초청되고 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은혜스러운 청혼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스러운 설득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를 권면하며, 간구하노라"(고후 5:11, 20).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영혼들의 행복을 위하여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시는가를 보라! 그는 그들의 궁핍함을 아시고 그들을 위해 준비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과 건망증을 고려하시고 그들에게 보내시는 것이다. 초청된 손님들이 오는 것을 꾸물거릴 때 그 임금은 "다른 종들을 보내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효과를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잔치에 대해 말한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자신이 거의 준비를 다하였을 때("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었다."), 복음의 사도들과 사역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파송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초청을 수락할 것을 설득케 하도록 파송되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단지 그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고 와서 기쁨으로 참예하도록 암시를 주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엄숙한 잔치가 되는 동안 임금은 집을 개방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래 타고난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분별하지 못하며' 따라 이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매는 줄과 사랑의 족쇄를 가지고 끌어내는" 강력한 권유를 함으로써 초청을 수락하도록 강권해야만 하게 되어 있다. 만일 반복적인 초청이 우리를 감동시킨다면, "보라,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또한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오라 할 것이다"(계 22:17). 만일 초청의 이유가 우리에게 역사 한다면, "보라. 오찬이 준비되어 있고,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도다." 아버지는 우리를 맞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 있고, 성자는 우리를 위해 간구하며 성령은 우리를 성결케 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 죄사함이 준비되어 있고, 평화가 준비되어 있고, 위로가 준비되어 있다. 약속들이 "생수의 우물"처럼 공급할 준비가 다 되어 있다. 규례들이 운반시에 부는 황금 호각처럼 준비되어 있으며, 천사들이 우리를 시중들려고 준비하고 있으며, 피조물들이 연합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섭리들이 우리의 선을 위해 역사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하늘이 우리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 예비된 하늘 나라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를 차리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준비되었는데, 우리는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우리가 올바른 태도로 온다면 우리를 환영할 것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오라, "오! 결혼식에 오라. 너희를 권하노니 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Ⅲ. 그리스도의 복음이 종종 사람의 자녀들 가운데서 받는 냉대는 이 세시지가 받는 냉대와 이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이 받는 뜨거운 대우로 표현되어 있는데, 임금 자신과 왕적인 신랑은 이 둘 중에서 하나를 받게 되어 있다. 이 사실은 원래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한 유대인들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많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에 의하여 멸시와 반대를 받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1. 이 메시지는 매우 업신여김을 당하였다(3절). "그들이 오기를 싫어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죄인들이 그리스도와 또한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이"하지 않으려고"(요 5:40)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이 옴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해 버린 것은 그들 자신의 행동이었으며, 이것은 죄인들의 불행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나는 하려고 했지만 너희가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5절). "그들은 이를 업신여기었다." 그들은 여기에 오는 것이 그리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한 심부름꾼들이 필요 이상으로 법석을 떤다고 생각하였으며,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았지만 그들은 집에서도 이러한 것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와 또한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위대한 구원에 대해 경시하는 것은 세상의 저주스러운 죄악이라는 사실이다. VAmelh,santej ─즉 그들은 돌아보지도 아니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자신의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혐오감을 가지지는 않지만 그것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들은 단순한 부주의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혼인 잔치를 돌아보지도 않은" 이유는 그들이 더 마음을 두는 이 있었으며 또한 그것에 더욱 마음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세상적인 직무와 이익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하는 데 있어서 큰 장해물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누구도 잔치에 참예하기를 일체 사양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그럴 듯한 변명을 늘어놓았다(눅 14:18). 농촌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보아야 할 밭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게 마련이다. 도시에 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상점을 돌보며 계속적으로 장사해야만 한다 .그들은 "사고, 팔고, 이익을 얻어야만" 한다. 농부들과 상인들이 그들의 직무에 부지런해야만 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종교를 주요한 일로 만드는 일에서 벗어나게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Licitis perimus omnes─즉 이러한 합법적인 일들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은 그것들이 부당하게 운영될 때, 우리가 "필요한 한 가지 일"을 무시할 만큼 "많은 일에 염려하고 근심할" 때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도시와 농촌은 자기 나름대로의 유혹물들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상업, 하나는 밭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손에 가지고 있는 세상의 것들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세심한 마음의 배려를 해야만 한다.
2. 그 종들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 그 남은 자들" 또는 그들 중에서 남아 있는 자들, 다시 말하면 "밭"이나 "상업차"로 가지 않은 자들은 농부나 상인이 아닌 교회 지도자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었다. 이들은 박해자들이었으며,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 비유 중에 나타난 이 사실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써 누구든지 그들을 잔치에 오라고 초대하러온 자를 이와 같이 처참하고 야만적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유의 적용에 있어서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름다운 발"을 가진 자들이 "경건한 잔치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나 1:15)을 전하였기 때문에 "만물의 찌끼와 같이 취급받았다"(고전 4:15).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은 이미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사역자들도 동일하게 취급을 받아야만 하였다. 유대인들은 직접적이든지, 간접적이든지 처음 복음을 전파한 전파자들의 대부분을 박해한 장본인이며, "사도행전"의 역사, 즉 "사도들"의 고난을 증언하고 있다.
Ⅳ. 유대 교회와 백성에게 임한 완전한 멸망은 여기에서 분노한 임금이 이 무례히 명령한 거부자들에게 행한 보복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7절). "그는 노하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그의 진노와 저주의 자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살전 2:16).
이제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어떤 죄가 파멸을 초래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그들의 "살인죄"였다. 그는 자신의 부르심을 "업신여긴 자들"을 진멸시켰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의 종들을 죽인 자들"을 진멸시키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의 때보다는 그의 사역자들의 생활에 대해 더욱 마음을 쓰시는 것 같다. "그들을 건드리는"자는 "그의 눈동자"를 건드린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을 박해하는 것은 어떤 것보다도 더 큰 범죄의 분량을 채우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므낫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예루살렘에 가득 채우는" 죄를 범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하시려고 하지 않는 죄"이다(왕하 24:4).
2. 임박한 파멸, 그 자체는 어떤 것인가? "그는 자기 군대를 보내었다." 로마 군대는 그가 자신의 진노의 백성을 진멸시키기 위해 들어 올려 보낸 그의 군대였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그 백성들을 짓밟게 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사 10:6).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비록 그들이 "뜻하지 않거나 그 마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사 10:7)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마음대로 사용하신다. 미가서 4장 11, 12절을 보라. "그의 군대는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 이것은 이 일이 있은 뒤 40년 후에 로마 군대에 의하여 유대인들이 파멸되고 예루살렘이 불탈 것을 분명히 나타내어 준다. 일찍이 이 세대 중에 이보다 더 큰 파멸과 도한 불과 칼로 인한 비참한 멸망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기 위하여 택한 거룩한 도성"이요, "아름다운 곳이요, 온 땅의 기쁨"이었지만 이제는 "창기가 되었고 공평이 거기에 없으며, 이제는 살인자들만 모여 있도다"(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사 1:21). 그러므로 심판이 이곳에 이르러 다시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멸망하게 되었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반대하는 모든 자들에게 한 본보기로 제시되어 있다. 그의 언약에 대해 불평을 하는 자들을 복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다.
Ⅴ. 이방인들을 데려 옴으로써 교회를 다시 채우는 것은 여기에서 "큰길가에서" 손님들을 데려다가 잔치석을 메우는 일로 표현되고 있다(8-10절). 여기에서 보면,
1. 잔치의 주인이 처음에 초청되었던 자들에 관하여 불평하고 있다(8절). 즉 "혼인 잔치는 예비 되어 있다." 즉 은혜의 계약이 조인될 준비가 되어 있다. 교회가 설립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청함 받은 자들," 즉 "언약과 약속들이 속해 있으며" 옛날에 "살찐 것들로 마련된 잔치"에 초대되었던 유대인들은 "합당치 아니하였다." 즉 그들은 전혀 합당치 않았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멸시함으로써 초청 받은 모든 특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죄인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리나 그들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옛날 이스라엘이 가나안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을 때, 약속의 땅은 예비 되었으며, 젖과 꿀이 예비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과 또한 그 좋은 땅에 대한 멸시는 그들을 이곳에서 내쫓아 그 시체들이 광야에 늘어지도록 하였다. "이런 일들은 그들에게 한 본보기로 일어난 것들이다"(고전 10:11; 히 3:16-4:1 참조).
2. 그가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기 위해 종들에게 사명을 줌. "그 동네"(7절) 사람들은 거절하였다. 그러면 "사거리 길에 나가라." 즉 처음에는 사절되었던 "이방인의 길"(마 10:5)로 가라. 이와 같이 유대인이 넘어짐으로써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르게 되었다(롬 11:1, 12; 엡 3:8).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거절하고 그 나라의 능력에 저항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 그의 나라를" 가지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 모여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는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1)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이와 같은 놀라움은 길 가던 사람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고 놀라워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오래 전에 복음에 관심을 가졌으며, 또한 메시야와 그 왕국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이것은 그들이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이었으며(행 17:19, 20), 따라서 그들에게 속한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사 65:1, 2 참조).
(2) 그것은 보편적이고 구별이 없는 것이었다.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청하여 오너라." 사거리는 공공적인 장소로써, 거기에서 "지혜가 부르짖고 있다"(잠 1:20). "길로 나가서 누구에게든지 물으라(욥 21:29). 고귀한 자나 비천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 속박자나 자유자, 젊은이나 늙은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를 막론하고 초청하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때에 복음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올 것을 말하도록 하라. 누구든지 오려고 하면 예외 없이 오도록 하라."
3. 이 두 번째 초청의 성공.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오려고 한 것이다(10절). "종들이 나가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왔다." 그 종들은 명령에 순종하였다. 요나는 "사거리로 보냄을" 받았으나, 자기 나라의 명예를 소중히 한 나머지 그 심부름을 회피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비록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국가를 존경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봉사를 더 먼저 하려고 하였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들을 위해 근심하기는 했지만,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오히려 자랑하였다. "그들이 모두 함께 모였다." 복음의 목적은,
(1) 영혼들을 함께 모으는 것이다. 유대 백성들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요 11:52), 즉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요 10:16)을 함께 모으는 것이다. 그들은 한 지체로, 한 가족으로, 한 단체로 모여졌다.
(2)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존경을 바치고 새 계약의 특권에 참예 하도록 하기 위하여 혼인 잔치에 모으는 것이다. 의연금이 있는 곳에 가난한 자들이 모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함께 모여진 손님들은,
[1] 무리들이었다. 즉 "그들이 만나는 대로 데려 온 자들"이었다. 혼인자리가 가득 찰 만큼 많은 사람들이었다. 유대인의 표를 가진 사람들은 셀 수 있지만, 다른 나라의 표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였다'(계 7:9)(사 60:4, 8 참조).
[2] "악한 자나 선한 자"가 섞여 있는 무리들이었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헬라인들(행 17:4)이나 고넬료와 같이 회심하기 전에 착실하고 열심히 있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 사람들(고전 6:11)처럼 매우 방탕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너희 중에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들이 회심한 후에 "진심으로 주께 돌이키지 않고" 거짓으로 행함으로써 악한 것이 증명된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의롭고 성실하며 좋은 사람으로 입증된 일도 있었을 것이다. 사역자들은 복음의 그물을 던질때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함께" 들어올리게 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아신다."
Ⅵ. 위선자들, 즉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에 "속하지" 않고,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죽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위선자들의 경우는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으로 표시되고 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있던 악한 자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은 신앙 고백하기를 거절하는 자와 건전한 마음으로 신앙 고백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 위선자들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그의 발견. 그는 어떻게 발견되어졌는가?
(1) "임금이 손을 보러 왔다." 즉 준비하고 온 자들을 환영하고, 그렇지 않고 온 자들을 내어쫓기 위해 왔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늘의 하나님은 신앙을 고백하며 지상 교회에 출석하여 명부에 올린 자들에 대해 특별히 유의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금 촛대 사이로 걸어다니시며" 따라서 "그들의 행위를 아신다." 계시록 2장 1, 2절, 아가서 7장 12절을 보라. 모든 가면들이 곧 벗겨질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 나타날 것이라는 위선자에 대한 이 경고가 우리에게 대한 경고가 되도록 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성에 대한 증인이 되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격려가 되도록 하자.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 위선자가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오기 전"까지는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누가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지 않는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우리는 여러 모로 사람에게 속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속지 않는다. 심판의 날은 큰 심문의 날로써, 그때에는 모든 손님들이 임금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는 고귀한 것과 사악한 것"(마 25:32)을 구별하실 것이며, "마음의 은밀한 것들이 그때에 나타나게 될 것이며," 또한 지금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의인과 악인 사이"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손님들은 검사를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하며 또한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어떻게 지나갈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2) 그는 들어오자 즉시 위선자를 찾아내었다.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았다." 단지 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곧 그를 주시하였다. 신적인 공의로 말미암아 체포되는 것에서 피하여 군중 속에 숨으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다. 그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다. 그는 결혼식의 엄숙성에 어울릴 정도로 몸치장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옷을 입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복을 입지 않고 혼인 잔치에 참석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복음의 혼인 잔치라면 혼인 예복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빌 1:27)하고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한"(엡 4:1) 마음의 구조이며 또한 복음에 일치되는 생활의 진로이며, 그것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의 의로움," 즉 그들의 참된 거룩과 성결 그리고 "그들에게 의로움이 되신" 그리스도는 "깨끗한 세마포"(계 4:1)이다. 이 사람은 벌거벗었거나 헌 누더기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것은 혼인 예복이 아니었다. "주 예수로 옷 입는 자," 즉 기독자의 기질을 가지고 기독자의 은혜로 몸을 단장하는자, 즉 신앙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며 오직 주 예수만이 모든 것이 되는 자들만 혼인 예복을 가지고 있다.
2. 그의 시련(12절).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1) 그는 어떻게 심문을 받았는가?(12절)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잔치석에 안전하게 자리잡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자에게 주어진 놀라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친구여!" 이것은 살을 도려내는 듯한 말이다. 외관상의 친구, 그럴 듯하게 위장한 친구, 친구라고 하는 인연과 의무 때문에 형식적으로 친구임을 고백하는 친구여!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그와 함께 있지 않은 그의 거짓된 친구들이 교회에 많이 있다. "어찌하여 여기에 들어왔느냐?" 그는 그 위선자를 들여놓은 것 때문에 종들을 꾸중하시지 않았다(혼인 예복은 내적인 일이며, 사역자들은 그들의 인식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전파해야만 한다). 그러나 임금은 군중 속에 있는 그의 뻔뻔스러움을 점검하고 있으며, 그때에 그 위선자의 마음이 정진하지 못한 것을 알아 차렸다. "너는 어찌하여 복음의 규칙에 전혀 유의하지 않으면서 복음의 특권에 참예할 것을 감히 요구하였느냐?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였느냐?"(시 50:16, 17) 이와 같은 자는 잔치석의 오점으로써, 신랑을 모욕하고 친구를 욕되게 하고 그들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여기 들어왔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위선자들이 복음의 규칙에 대해 건방지게 참견하고 또한 복음의 특권을 강탈한 것에 대해 심문을 받기 위하여 호출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안식일을 멸시하고 성례들을 욕되게 한 것이 고려되어져야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모든 자들에게 그들의 헛된 낭비의 행동에 대하여 심판이 행해져야만 한다. "어찌하여 이러한 때에 거만하고 불결한 채로 주님의 상에 들어왔느냐? 네 마음이 탐심을 추구하면서도 백성들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지자 앞에 앉기 위하여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 어찌하여 여기 들어왔느냐?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도적과 같이 다른 길로 들어왔느냐? 이것은 불성실한 입장(entry)이며, 명찰이 붙어 있지 않은 소유물(possession)임에 틀림 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자들이 종종 자신에게 "어찌하여 내가 여기 들어왔느냐? 내가 혼인 예복을 입었는가?"라고 물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는 판단을 받게 되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어떻게 죄를 깨달았는가?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evfimw,qm─즉 그가 재갈을 물리게 되었다(그렇게도 사용됨, 고전 9:9). 그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의해 죄를 깨닫고 정죄하였으므로 자신의 공소 사실에 대하여 아무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 교회안에서 살다가 그리스도 없이 죽은 자들은 큰 심판날에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누가복음 13장 26절에서 한 것처럼 "우리가 당신 면전에서 먹고 마셨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한낮 범죄한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부과된 죄목은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 앞에 또한 그의 탁자에 감히 들어온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예함으로써 밝은 빛과 소중한 사랑을 거스려 범죄한 그 자신들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죄가 더 변명할 나위가 없으며 그들의 정죄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3. 그의 선고(13절).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1) 그는 범죄 받은 악행자처럼 결박하도록, 즉 수갑을 채우고 차꼬로 채우도록 분부되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지 않으려고 한 자들에게는 수족이 묶이는 것밖에 기대할 것이 없다. 이 세상에는 종들, 즉 사역자들에 의해 묶이게 되는 일이 있다. 종교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며 난잡하게 행동하는 자들을 제지시키는 일을 "그들을 묶는다"고 일컬어진다(마 18:18). "특별한 규칙이나 또는 교회원으로서의 특별한 특권에 참예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묶으라. 그들을 묶어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넘겨라." "심판 날에" 위선자들은 묶이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이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마 13:41). 저주받은 죄인들은 피할 수 없는 선고에 의해 수족을 결박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거대한 만(gulf)을 봉쇄시켜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형벌에 저항하거나 빠져 나올 수 없다.
(2) 그는 혼인 잔치에서 내어 던지도록 분부를 받고 있다. "그를 내어 던지라." 위선자의 악행이 드러나게 될 때 그들은 신실한 자의 모임에서 내어 던지게 된다. 즉, 메마른 가지처럼 잘리게 된다. 이것은 저 세상에서 버림받게 될 형벌을 나타낸다. 그들은 임금에게서, 왕국에서, 혼인 잔치에서 내어 던짐을 받게 될 것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불신하는 장관과 같이. 왕하 7:2)는 사실은 그들의 처참함을 더욱 가중시켜 줄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기독자로서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는 자는 그들이 뻔뻔스럽게 주장하지만 실상 전혀 근거 없는 기대에 불과한 모든 행복들을 상실하고 만다.
(3) 그는 비참한 감옥 속으로 들어가도록 분부를 받고 있다. "그를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이 비유를 통해 그것이 의미하는 바, 저 세상에서의 위선자들의 정죄에 대하여 은근히 언급하고 계시다. 지옥은 완전한 흑암이며 또한 하늘, 즉 빛의 땅에서 나온 흑암이다. 또한 그것은 애굽의 흡암과 같이 불빛이나 그 소망이 없는 완전한 극도의 흑암이다.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욥 10:22).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위선자들은 복음의 빛을 스쳐서 완전한 흑암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또한 지옥은 실로 이러한 자들에게 참을 수 없는 저주가 될 것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지옥의 고통에 대해 묘사하실 때 종종 사용하고 있는 구절로써, 여기에서는 비참한 상황 그 자체가 아닌, 분개한 죄인들이 취하게 될 태도로써 표현되고 있다. 거기에서 가장 큰 슬픔과 고뇌의 표현인 "우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는 한 줄기의 눈물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영구적인 흐느낌이 있게 될 것이다. "이를 간다는 것"은 가장 큰 분노와 성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들은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의 분노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사 51:20; 8:21, 22). 그러므로 듣고 두려워하자.
마지막으로, 이 비유는 전에 하셨던(마 20:16) 인상적인 말씀으로 결론이 맺어지고 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절). 혼인 잔치에 부름 받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것을 경시하고 오히려 다른 일을 더 좋아하는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제쳐놓는다면, 그 다음에 신앙고백을 하였으면서도 그 영혼의 기질과 그 회심의 경향이 그것과 정반대가 되는 자들을 제쳐놓는다면, 모독하는 자들과 위선자들을 모두 제쳐놓는다면, 실제로 택함 받은 자는 매우 적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은 많이 있지만, 혼인 예복 즉 "성령의 거룩케 하심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 선택받은 자들은 매우 적다. 이것이 곧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이다.
세금 문제에 관하여 (마태복음 22:15-22)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 중에서 "자신을 거스려 행하는 죄인들의 논박을 참으며" 어떤 구실을 삼아 자신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자들에 의해 놓여진 올무를 가진 것은 결코 가혹한 일은 아니었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그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에 의하여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일로 공격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들이 스스로 계획한 음모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들은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 까 상론하니." 지금까지 주님께서는 자신들의 정책보다는 세력을 더 믿고 그의 사명에 대해 의심을 제기하였던 권세가들, 즉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더불어 논쟁을 하였다(마 21:23). 그러나 지금 그는 다른 곳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즉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율법적인 학식과 궤변적인 신학 지식으로 그를 상대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시험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그에게 "새로운 시험"(tentamen novum)을 제기하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가장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이 자신들의 재간이나 관심이나 열심이나 또는 자신들의 결백이나 고결성에 의해 악인들의 미움이나 악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거나 또는 "말다툼"에서 자신을 두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얼마나 끈질기며 또한 그의 나라가 그들의 반대 속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 보라!
1. "그들은 상론을 하였다." "관원"들이 그에 대하여 "서로 꾀할 것"(시 2:2)이라는 사실은 미리 예언되었다. "그들은 그와 같이 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렘 18:18; 20:10).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죄에 대해 모의하고 의논하면 할수록 그것은 더욱 더 악해진다는 사실이다. "악을 꾀하는 자에게는 특별한 화(미 2:1)가 있다. 죄를 의논하는데 악한 꾀가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을 맡은 데 더욱 악의가 있게 마련이다.
2. 그들이 의도한 것은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담대히 그리고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어떤 훌륭하고 다루기 힘든 문제에로 이를 끌어 들여올 수만 있다면 그를 대항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릇되고 오해되는 말로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사탄의 하수인과 사자들이 옛날에 행했던 방법이었다. 즉 분명히 의도되기는 했지만 억지적인 해석에 의해 왜곡 된 말을 가지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성문에서 비난하는(사 29:21) 올무를 그에게 놓았으며 또한 가장 위대한 선생들을 이스라엘의 최대 분쟁자들로 묘사하였다. 이와 같이 "악인은 의인을 치려고 꾀하는 것이다"(시 37:12, 13).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에게 보복하고 또한 그를 제거시킬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있다. 즉 법적으로 하든지, 아니면 힘으로 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들이 그로 하여금 세상 정부에 미움을 받도록 하지 못한다면, 법적으로 이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요 18:31). 또한 로마의 권력은 "언어와 명칭과 그들의 법"(행 18:15)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반역자들을 치는 데 있어서 언제나 손(hand)의 역할을 했던 백성들에게 미움을 사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힘을 가지고 이 일을 할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선지자로 여겼으며, 따라서 그의 원수들은 그에 대하여 습격을 감행할 수 없었다. 이제(마치 옛 뱀이 태초에 "어떤 짐승들보다 더 간교"했던 것처럼), 그를 딜레마에 빠뜨리기 위하여 음모가 꾸며졌는데 그것은 곧 그 자신으로 하여금 유대 군중이나 로마 통치자들에게 불쾌한 존재가 되게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두 가지 중에서 택하도록 질문을 한다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함정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노린 핵심을 포착하게 될 것이며, 다라서 그의 입을 봉쇄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이 계획에 따라 그들이 그에게 던진 질문(16,17). 이러한 불법을 은밀하고 간사하게, 휘장 뒤에서 음모하고 난 후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들이 고용했던 사람.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탄로가 나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더욱 방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자신들이 가지 않고, 시험하는 자나 학자로 보여지지 않는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악한 음모를 수행하기 위해 고용되는 사악한 도구들에 대해 결코 궁핍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심부름을 가서 그들이 말하는 대로 말할 수 있는 제자들을 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바리새인들은 헤롯 당원들을 보내었는데, 이들은 유대인 가운데 있던 한 정당으로써 로마 황제와 도한 그의 대리인인 헤롯왕에 대해 온전히 그리고 기꺼이 복종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들의 주요한 임무는 백성들과 정부 사이를 화해시키고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세금을 내도록 독촉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헤롯 당원들은 세리가 관세를 거두는 자임과 같이 그들은 토지세를 거두는 자로서, 그들은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전혀 모르고 그들과 함께 그리스도에게 갔으며 또한 그 때에 헤롯 당원들은 세금을 요구하였고 바리새인들은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이 분쟁을 결말짓기 위하여 적당한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에게 그것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헤롯은 통치 헌장에 의해 세금에 대하여 관여할 책임이 주어져 있었으므로 이 헤롯 당원들은 이것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위대한 친구(헤롯)로 하여금 로마에 더욱 돋보이도록 하였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유대인의 해방에 대하여 열심히 있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로마의 명예를 참지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일들을 행하였다. 그런데 만일 그가 세금을 지불하는 것을 은근히 후원한다면, 바리새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그에 대하여 몹시 성을 내도록 충동질하였을 것이다. 만일 그가 세금 내는 일을 반대하거나 비난한다면 헤롯 당원들이 정부로 하여금 그에 대하여 분노하도록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서로의 입장이 반대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반대하는 일은 흔히 있다는 사실이다. 삼손이 불을 지른 여우들은 여러 갈래로 보여졌지만 실상은 한 횃불로 붙여진 것들이었다. 시편 83편 3,5,7,8절을 보라. 만일 그들이 복음의 중요성을 반대하는 데 만장일치가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2. 그들이 질문을 유도하기 위하여 그럴 듯하게 꾸며댄 서론. 그것은 우리 주님에 대한 과대 칭찬이었다(16절).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사악한 계획이 가장 특수한 허위 속에 감추어진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들이 매우 정직한 의도를 가지고 진지하게 질문하려고 왔더라면, 그들 스스로가 과장하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속임수로 가려진 마음"이며 "온유한 입술을 가진 악한 마음"이며 "온유한 입술을 가진 악한 마음"(잠 26:23)이다. 이는 마치 입을 맞추고 배신한 유다나 또는 입을 맞추고 죽여버린 요압과 같다.
(1) 그리스도에 대해 그들이 말한 것은 옳았으며, 그들이 그것을 알았든지 혹은 몰랐든지 간에 우리가 그것을 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신실하신 선생이었다.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왜냐하면 "그는 참되시고, 아멘이시요, 신실한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 그 자체이시다. 그의 교훈에 있어서 그의 가르침의 주제는 하나님의 도,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할 것을 요구하는 의무의 도였다. 이 도는 행복에로 인도하는 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인 것이다. 그 도의 방법은 참이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바른 길," 즉 "그들이 가야만 할 길"을 보여 주었다. 그는 노련한 선생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도를 아셨다. 또한 그는 신실하신 선생으로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알도록 하실 것이다(잠 8:6-9 참조). 좋은 선생의 특성은 온전한 진리, 즉 진리만을 유일하게 가르치며 또한 호의나 편견, 증오나 선의, 어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소원이나 그를 그릇되게 하려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든지 간에 이를 위하여 진리를 감추거나 왜곡하거나 남용하지 않는 것이다.
[2] 그는 담대한 책망자였다. 전파하는 데 있어서 그는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아니하셨다." 그는 사람의 찡그린 모습이나 또는 미소를 평가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위대한 사람이나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복음적인 심판에 있어서 얼굴들을 고려하지 않으셨다. "유다 지파의 사자는 아무 앞에서도 물러가지 않았다"(잠 30:30)즉, 가장 무서운 대적을 두려워하여 진리나 자신의 행위에서 발걸음을 돌리지 아니하였다. 그는 "정직"으로 판단하셨으며(사 11:4) 결코 편견으로 하시지는 않았다.
(2) 그들이 말한 것은 그 내용에 있어서 참된 것이었지만 그 의도는 아첨과 배반이었다. 그들은 그를 가장 나쁜 악행자로 취급하려고 애쓰면서도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에게 손해를 입히려고 계획하면서도 그를 존경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들은 그의 지혜를 사람의 것으로 멸시하였고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멸시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거짓 위선들을 그에게 부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그는 그들을 꿰뚫어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음을 살피시는(계 2:23) 그리스도를 속이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엄청난 무신론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은 스스로 속이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갈 6:7)
3. 이 경우의 제안.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마치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여러 갈래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실제적인 행동과 관련된 문제이며 또한 매일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한지 불가한지에 대하여 너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 해달라"고 말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질문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즉 가이사는 그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대 나라는 이일이 있기 약 100년 전에 로마의 칼에 의해 정복을 당하였으며, 따라서 다른 나라들과 같이 로마의 멍에 아래 예속되었으며, 또한 로마 제국의 한 영지가 되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들에게 통행세와 일반세와 관세를 내도록 요구하였으며 때로는 인두세를 낼 것을 강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간 것"(창 49:10)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때의 표적들을 알았더라면 마땅히 "오시리라고 한 실로"가 그인지 아니면 그와 더 흡사한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지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질문은, 이러한 세를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이 가한지 아니면 자기들 나라가 옛날에 자유스러웠다는 사실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압류 처분을 받는 고통을 겼어야만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 의심의 근거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였으며 또한 이의 없이 "어떤 사람에게도 속박을 받지" 않아야만 한다(요 8:33)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나그네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나라와 종교에 속하지 않은 어떤 군주나 장관이나 권력가에게 기꺼이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닌가? 이것은 "파멸과 멸망"을 초래한 "교만과 거만한 마음"에서 나온 예로부터의 오류(old mistake)였다. 예레미야는 그 당시에 비록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했지만 그것을 격퇴시킬 수 없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 왕에게 복종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다. 이 일에 있어서 그들의 완고함은 그 당시에 그들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렘 27:12, 13). 지금 또 다시 그들은 같은 돌에 걸려 넘어졌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몇 해 후에 로마인들에 의하여 마지막 멸망을 초래케 한 바로 그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교훈과 특권의 의미를 완전히 오해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구실 삼아 그의 섭리와 더불어 논쟁하였다. 그 때에 그들은 그 막대기(홀)에 입맞추어야 했으며 그들 자신의 불법으로 인한 형벌을 받아들여야만 하였다.
어쨌든 그들은 이러한 질문을 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올무에 걸리게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풀든지 간에 그를 열심 있는 유대인이나 혹은 열심 있는 로마인으로 나타나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했던 것처럼 개선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들은 "광야가 그들을 가지 못하게 가두어버릴 것이며" 그의 교훈이 교회의 권리를 해치고 왕과 군주에게 해로운 것이라고 결론을 지으려고 하였다.
Ⅲ. 주 예수님께서 그의 지혜로 이 함정을 깨뜨려 버리심.
1. 그는 이것을 아셨다(18절).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셨다." 왜냐하면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잠 1:17)이 되기 때문이다. 알아차린 시험은 반 정도가 이미 극복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푸른 초장 아래에 있는 독사에게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외식하는 자들이 아무리 가면을 쓴다고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외식하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사악함을 아시며,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수비사리 깨닫도록 하시며, 그것을 그들 앞에서 차례대로 열거하신다. 그는 우리가 종종 하는 것처럼 아첨이나 거짓 위선으로 속이실 수 없다. 마음을 살피시는 자는 위선자들을 그들의 이름대로 부르실 수 있다. 이는 마치 아히야가 여호보암의 처에게,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왕상 14:6)고 말했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위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고 있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속임수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하고 있다. 그는 그가 그들을 자신의 교회로 들어오도록 허락할 것인지, 즉 그의 거룩성과 진리를 시험하고 있다. 그러나 옛적에 "그리스도를 시험하였던 자들"(그때에 그리스도는 단지 어둡게 계시되었다)이 "뱀들로 말미암아 멸망되었다면", 지금 복음의 빛과 사랑 가운데서 그를 시험하는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은 얼마나 더 비참하고 쓰라린 것인가 !" 그리스도를 감히 시험하려고 하는 자는 정녕 그가 그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라는 사실과 또한 그는 자신의 의도를 깊숙이 숨기는 외식자들의 위장된 악함을 간과하시지 않는 불꽃같이 꿰뚫어 보시는 눈을 가지고 계시며 이러한 것을 미워하지 않는 깨끗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2. 그는 이것을 피하셨다. 그가 그들로 하여금 위선자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답변에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이렇게 헐뜯는 악의 적인 질문은 대답보다는 책망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완전하게 대답하셨으며 또한 그것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논법에 의해 이를 제시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 일에 있어서 그의 교회를 위한 규칙을 제정하셨으며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성나지 않게 하면서 그 올무를 깨뜨리셨다.
(1) 그는 그들로 하여금 미리 알아차리기 전에 그들에 대한 가이사의 권위를 고백하도록 하였다(19,20절). 헐뜯는 자들을 대할 때 우리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좋다. 만일 가능하다면, 명백한 설득력을 가진 이유들을 해답을 하기 전 제시하는 것이 좋다. 이와 같이 진리의 증거는 그들이 그 진리의 이유에 대항하는 것이 아닌, 진리 그 자체에 대항하여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주장하려고 할 때 그 반대자들로 하여금 놀라움으로 침묵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셋돈을 내게 보이라." 그는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할 수 있는 돈을 한 푼도 지니고 계시지 않았다. 그가 한 푼의 돈도 지니지 않으신 것은 우리를 인하여 자신을 비우시고 가난해지셨기 때문인 것처럼 보여진다. 그는 이 세상의 부귀를 멸시하셨으며 또한 이로써 우리들에게 그것들을 과대평가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그는 은과 금을 조금도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많은 진흙들로 자신들을 채우려고 욕심 부려야만 하는 것일까?
로마인들은 그들의 세금을 자신의 나라 돈으로 바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 가운데서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돈은 "셋돈"이라고 불리웠다. 주님께서는 그 자신이 이러한 성질의 것에는 마음이 없고 또한 그것들에 대하여 하등의 관심이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해 얼마 짜리 동전이라고 하시지 않고 다만 "셋돈"이라고 하셨다. 그의 마음은 더 나은 것들,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부요함과 의로움에 있었으며 또한 우리의 마음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즉시 "그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다." 한 데나리온은 은으로 된 로마 동전의 명칭으로써 그 당시에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동전이었다(역주:한 데나리온은 하루 노동자의 품삯이기도 하였다). 이 돈에는 황제의 초상과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돈의 가치에 대해 공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보증의 표식이었다. 대개의 국가들도 보다 안심하고 돈을 유통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하였다.
동전은 언제나 제왕의 특권의 한 가지(branch), 즉 면류관의 꽃, 즉 통치권에 속한 왕권으로 간주되어 왔다. 또한 이 돈을 그 나라의 합법적 돈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이 힘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며, 금전 문제에 있어서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제도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며,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 우리는 비록 그 인상과 글이 통치자의 것이기는 하지만 그 소유는 법의 보호를 받아 백성의 것이 되며 또한 우리가 내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이 형상이 뉘 것이냐?" 고 물으셨다. 그들은 그것이 가이사의 것임을 인정하였으며, 이로써 그들이 말한 "우리는 누구에게도 속박된 일이 없었다."는 거짓말에 대해 깨닫도록 하였으며, 또한 후에 그들이 말한 "우리에게는 가이사 이외에 왕이 없나이다"라는 사실이 옮음을 입증하셨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그 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화폐의 주인이 곧 그 나라의 왕이다"라는 규정이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 화폐 위에 새겨진 글을 로마인이 유대를 정복한 것을 기념하는 문구로써, anno post captam judaeam-즉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역시 이 사실도 인정하였다.
(2) 그때에 그는 가이사에게 새를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나타내셨다(21절). "그런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려라"(render). "그것을 그에게 바치라(give) "(그들은 17절에서 이 표현을 썼다)가 아니라 "그것을 돌려라"(render; 역주:우리말에는 둘 다 "바치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즉 "반환하라"또는 "그것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켜라. 만일 가이사가 돈주머니를 채우려고 한다면 그로 하여금 그것을 명하도록 하라.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은 너무도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너희는 황제의 한 영지가 되었으며, 한 번 조약이 맺어졌을 때 그 의무는 수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할당된 모든 것을 바치라. 특히 주어진 세금을 바치라." 그런데 이 대답은,
[1] 어떠한 위법 행위도 제시하지 않았다(결코 걸림이 되지 않았다). 그가 이러한 특징을 가진 일들에 있어서 심판자나 분리자로 나서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이 일을 판단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은 그 자신과 그의 교훈의 명예를 위해 퍽 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을 통하여 거룩한 일들을 다루는 그의 사역자 들에게 본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즉 세속적인 일들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에 쓸 데 없이 참견하거나 그것들에 대해 논쟁하는 것에 뛰어들지 말고 그것을 자신의 주임무로 삼는 사람에게 그 문제를 맡겨두라는 것이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자신의 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이 세상일에 얽매이지 말아야만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이 자신의 길을 벗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영의 보호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스도는 황제의 칭호에 대해 논쟁하시지 않고 "그 힘"에 기꺼이 순응할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정부는 그의 결정에 걸림이 될 만한 이유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해야만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을 선지자로 여긴 백성들에 대한 가이사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박해자들은 매우 파렴치하였기 때문에 그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를 고발할 때에 "그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였다"(눅 13:2)로 상반된 말을 하였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백성들에게 고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 자신이 이미 그 전제들에 대하여 수긍하였으며 또한 그때 그 결혼을 회피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진리는 부정한 은폐를 추구하지 않지만 이 진리에 대해 놓여질지 모르는 장해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종종 세심한 처리가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2] 그의 대적들은 책망을 받았다.
첫째,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그로 하여금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도록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돈을 절약할 수 있는 구실로 삼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이 일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논의함으로써 그들이 이 일을 꼭 해야만 한다고 자신들을 변명하고 있다.
둘째,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았으며, 이것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국가적인 권리에 대해 헛된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종교의 생명과 힘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또한 가이사에 대한 의무와 더불어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의무에 대하여 마음에 기억해 둘 필요가 있었다.
[3] 그의 제자들은 가르침을 받았으며, 변하지 않는 규칙이 교회에 남겨지게 되었다.
첫째, 기독교는 국가 정부에 대해 원수가 아니라 친구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 나라의 권한에 속한 일들에 있어서 그들과 충돌하거나 또는 그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왕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치하는 것이다.
둘째, 국법에 의해 통치자들에게 바쳐야 할 것을 마땅히 바치는 것이 국민들이 해야 할 의무이다. 공공의 부귀와 백성들의 보호와 평화의 보존을 위임받고 있는 높은 권세들은 이와 관련하여 공공의 부귀와 국가의 수입을 공평하게 분배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롬 13:6). 개인을 비방하는 것보다는 정부를 비방하는 것이 더 큰 죄악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이사의 것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제도이지만 그것이 결정되었을 때는 그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라는 그리스도께서는 분부하고 계시다. 사람의 법에 의한다면 내 옷은 내 옷이다. 그러나 그 옷을 내게서 가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의한다면 도적이다.
셋째,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금전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바치라"고 하셨다. 그는 거기에 가장 은밀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다하고 물질을 다하여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도록 해야만 한다. 가이사에게 몫을 나누어주신 것 같이 그들에게 자신의 몫을 나누어주실 것이다. 만일 가이사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을 방해한다면, "우리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순종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이 대답을 듣고 어떻게 난처하게 되었는지를 살펴 보라.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22절).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이 매우 치밀하게 놓았다고 생각한 올무를 미리 알아내시고 이를 피해버린 그 지혜에 탄복을 하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하는 친구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를 방해하는 원수들에게 대해서 기묘자(Wonder)가 되시며 또한 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기이히 여기고 그를 따라야만 하며, 기이히 여기고 그에게 순종해야만 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기이히 여기고 그를 떠나고 말았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의 지혜에 탄복을 하였지만 그것에 의해 인도함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의 능력에 탄복을 하면서도 그것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망신을 당한 사람처럼 "그를 떠나갔으며," 불명예스럽게 물러가고 말았다.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그들은 싸움을 그쳤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와 싸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결혼에 관하여 (마태복음 22:23-33)
우리는 여기에서 사두개인들과 더불어 부활에 관하여 다투신 그리스도의 논쟁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다. 이 날은 그가 납세 문제로 바리새인들에게 공격을 받았던 바로 같은 날이었다. 사탄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그를 시비하고 곤경에 빠지게 하는 데 더욱 분주하였다. 이 때는 "시험의 때"(계 3:10)였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는 그 어느 한 편에서 여전히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다음의 사실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Ⅰ. 사두개인들이 바로 위대한 진리에 대해 행하였던 반대.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들처럼 "부활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이단자들은 주님이 태어나시기 전 약 280년 동안 번창하였던 안티고누스 소케우스의 제자인 사독에서 비롯된 "사두개인"이라고 불리웠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작가들로부터 야비하고 퇴폐적인 말을 하는 자(그들의 주의주장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했다)라는 혹독한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모든 종파들 중에서 가장 적은 수효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개가 귀족의 신분에 있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과 엣세네파가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를 추종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사두개파는 에피큐리안의 정신을 많이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부활을 부정하였으며, 미래의 상태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후의 생명이 없다고 말하였다. 즉 육체가 죽을 때 영혼은 소멸되고 육체와 더불어 죽는다는 것이다. 사후에는 보상이나 형벌의 상태가 존재하지 않으며, 지옥이나 천국에서 심판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 외에는 영이 없으며(행 23:8)단지 물질과 운동만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거룩한 영감이나 하늘로부터의 어떤 계시를 인정하려하지 않으려 했으며 다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말씀하신 것만을 인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교훈은 부활에 대한 위대한 진리와 지금까지 나타난 것보다 더 많은 미래의 상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을 반대하였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로가 알력이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데는 서로 연합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편으로 미신적이고 의식적인 위선자들과 완고한 고집쟁이 사이에서, 또 한편으로는 모독적인 이신론자와 무신론자 사이에서 언제나 고난을 받아 왔다. 전자는 "경건의 모양"을 남용한 반면, 후자는 이를 업신여겼으며, 둘 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였다.
Ⅱ. 그들의 진리에 대해 행했던 반대. 이것은 계속적으로 일곱 남편을 거느렸던 여자에 대해 가상적으로 추리한 경우에 비롯되었다. 이제 그들은 만일 부활이 있다면, 가상적인 플라톤의 해(the imaginary Platonic year)와 같이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상태와 동일한 환경에로 돌이켜질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믿었다. 또한 만일 그렇다면, 미래의 상태에서 일곱 남편을 가진 이 여자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합리한 입장이 될 것이며 또는 그들 중에서 누구를 남편으로 택할 것인가. 처음 남편인가 아니면 나중 남편인가,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남편인가, 아니면 함께 가장 오래 살았던 남편 중 누구를 택할 것인가를 고심하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그 일에 있어서 모세의 율법을 제시하고 있는데(24절), 그것은 즉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를 들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신 25:5). 이러한 경우가 실제로 적용된 실례를 룻기 4장 5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정치적인 법으로써 가족과 기업의 구별을 보존하기 위한 유대 국가의 특별한 규약에 근거되어 있으며 가족과 기업에 대해서는 유대정부가 특별히 배려를 하였다.
2. 그들은 이 규칙에 의거하여 하나의 실례를 들었는데,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실례"인지 아니면 추상적인 실례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속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만일 이러한 일이 실제로 없었다고 한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일한 부인과 결혼했던 사람들은 일곱 형제였다(25-27절). 그런데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예상하고 있다.
(1) 죽음이 때로 어떠한 임무를 가지고 임할 때 가족들을 완전히 파멸시켜버림 . 죽음은 종종 모든 가족들을 삽시간에 전멸시켜 버린다. 종종 드물게(여기에 나온 경우와 같이)연장자의 차례대로 (흑암의 땅은 어떤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다)일어나지만, 대개는 점차적으로 "하나씩" 죽어 가는 것이다. 죽음은 크게 불어난 가족들을 축소시킨다(시 107:38, 39). 장성한 일곱 형제가 있을 때 그들은 그럴듯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가족이 "아들도 없고 조카도 없으며 그의 거하던 곳에 아무도 없게"(욥 18:19)된 것이다. 그 대에 우리는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죽음"과 더불어 평화의 "계약을 맺지" 못하거나 "무덤과 더불어 조약"을 체결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이름과 가족들의 진보나 영구성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확신하지 못하게 하라).
(2) 이 일곱 형제들은 비난의 형벌만을 받고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었지만 율법에 순종하였다(신 25:7 역주, 자기가 형의 아내와 결혼할 의사가 없으면 장로들에게 비난을 받고 결혼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실망을 주는 천재(天災)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규칙에 의해 지배되어야만 하며 사건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그 과부와 결혼하려고 했던 일곱째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만일 그가 순전히 하나님께 복종하려고 이 일을 행하였다면 그는 "선한" 사람이며 또한 자신의 의무를 깨달아 안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생존자권(SurvivorshipP)은 한낱 집행유예(reprieve)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오래 살면서 자기들의 친척들과 이웃들을 차례로 매장한 사람이 이로써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성을 얻지는 못한다. 아니, 그들이 몰락하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죽음의 쓴잔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며 또한 잠시 후에 우리도 그것을 마실 것이라는 서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렘 25:26).
3. 그들은 이 경우를 들어 의심을 제기하고 있다(28절). 즉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너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를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이 없다고 결론 짖지 않으면 안 된다." 부활을 믿노라고 고백했던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미래의 상태에 관하여 매우 잘못되고 세속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마치 터어키인들이 그들의 낙원에서 찾으려고 하듯이 동물적인 생의 즐거움과 쾌락들을 찾게 되기를 기대하였으며, 이것은 아마도 사두개인들로 하여금 사물 그 자체를 부인하도록 하게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종교들을 그 신앙 고백에 있어서나 그 기대에 있어서 그들의 감각적인 욕구나 세속적인 흥미에 대한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들이 세속성 보다 무신론과 불 신앙에 대해 더 큰 이익을 줄 수 있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는 진리를 반대하지만, 미신적인 자들은 그것을 배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육 적인 마음들은 영적이며 영원한 것들에 대해 매우 그릇된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래부터 타고 난 자연적인 인간은 이러한 것들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에게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2:14). 진리를 밝은 빛에 놓아 두라. 그러면 그 진리는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Ⅲ. 이 반론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그들의 무지함을 책망하고 그들의 오류를 교정해 주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 반론이 전혀 틀린 것이며 터무니없는 것임을 보여 주고 계시다.
1. 그는 그들의 무지함을 책망하고 계시다(29절). 너희가 "오해하였도다." 여기에서 유의할,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실 때 부활과 미래 상태를 부인하는 자는 크게 오해한 자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책망하고 계시며, 때로 그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대해 하신 것같이 그들에 대해 혹독하게 책망하고 계시지 않다(그 이유는 무엇이었던지 간에), "너희가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무지는 오해의 원인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는 자신의 길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오해의 단골손님(patron)은 빛을 거스리며, 될 수 있는 대로 지식의 열쇠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너희는" 이 일에 있어서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무지는 부활과 미래 상태에 대한 오해의 원인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지혜 있고 훌륭한 사람이 부활과 미래 상태가 특별한 실례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계시되는 것은 영광이다. 우리가 구별된 영들과 육체의 부활, 영원한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곧 당황하게 된다. 우리는 어두움 때문에 우리의 말을 잘 정돈할 수 없지만, 그것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어두움 속에 남겨져 있지 않다는 사항(thing)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우리는 어두움 속에 남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고의적이고 허식적인 무지의 죄를 짓는 자들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자들 가운데에도,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너희들 가운데에도"(고전 15:12), 이 사실을 우화로 여기면서 말하기를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며 실제로 이를 부인해 버린 자들 가운데에도 이러한 부류의 사악한 사람, 즉 사두개인들이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부활이나 미래 상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도록 이끌어 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 또는 연약한 믿음은 많은 오해들, 특별히 부활을 부인해 버리고 마는 자들의 밑바탕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몸에서 구별된 상태에 있어서 영혼의 존재와 작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 특히 오랜 세월 동안 무덤에 누워 있으면서 흔히 볼 수 있는 먼지가 되어버린 죽은 몸이 동일한 몸으로 살아나 또 다시 움직이고 행동한다는 사실에 대해 듣게 될 때에 우리는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하고 묻게 될 것이다. 자연은 이를 격언으로 인정하고 있다. A privatione ad habitum non datur regressus-즉 존재의 상태에 부착된 습관은 상태 그 자체와 더불어 돌이킬 수 없이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만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인가? 무익한 사람은 그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진리를 의문시한다. 만일 우리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면, 즉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면, 이 모든 난 문제는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만 한다. 그 때에 비로소 그는 자신이 약속하신 것은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는가?" 그의 능력은 자연의 힘을 훨씬 능가한다.
(2) 그들은 부활과 미래 상태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단호하게 확증시키는 "성경 말씀을 알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결정되고 예정된 그의 능력은 굳게 세우는 신앙에 대한 기초이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영혼은 썩지 않으며 사후에 다른 생명이 있다고 한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다"(행 24:14, 15)는 사실은 율법과 선지자의 의도이다. 욥은 그것을 알았으며(욥 9:26), 에스겔은 그것을 예견하였으며(겔 37:) 또한 다니엘은 분명히 그것을 예언하였다(단 12:2).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고전 15:3)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도 그와 같이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성경과 친숙하지 못하거나 그것들을 믿지 않거나 그것들의 참된 의미와 의도를 취하지 않는 자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는 많은 불행의 요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2. 그는 그들의 오류를 시정하시며 또한 그들이 부활과 미래상태에 대해 가졌던 그릇된 생각들을 교정하시며 더 나아가 이 교훈을 참되고 영원한 기초로 결정짓고 계시다. 이 상태에 관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상의 상태와 같지 않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느니라." 우리의 현재 상태는 결혼이 필수적이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제정되었다. 다른 제도들은 중지되거나 무시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제도는결코 폐기되지 않으며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옛날에도 그들은 "장가가고 시집을 갔다."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은 다른 규약들에서 끊어졌지만 "아내를 취하는 것"(렘 29:6)이 허용되었다. 문명 된 나라들은 모두 결혼 언약의 의무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결혼은 인간 본성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부활 때에는 결혼하는 일이 없다. 영화롭게 된 몸들에게 성(性)의 구별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어떤 사람들은 매우 심각하게 논쟁한다( 옛날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구별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나 확실한 것은 그들 사이의 결합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들 중의 모든 것"이 되시는 곳에는 또 다른 "배우자"가 필요 없다. 몸은 영적인 것이 될 것이며,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 그 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신비스러운 몸이 완성될 때 결혼제도의 한 목적인 "경건한 자손을 얻으려는"(말 2:15)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천국에서는 각 개인들이 쇠약해지는 일이 없는 것이며 따라서 먹는 일이나 마시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자손이 없어질 염려가 없기 때문에 결혼도 없게 될 것이다. "사망이 없는 곳"(계 21:4)에서는 더 이상 출생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결혼한 상태는 즐거움과 염려가 배합된 상태이다. 결혼을 하려는 자는 결혼을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행복하거나"의 변화적인 문제로 여기도록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결혼은 이 혼잡하고 변화하는 세상에 꼭 알맞은 제도이다. 그러나 지옥과 같이 즐거움이 없는 곳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을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즐거움만이 있고 염려나 근심이나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는 결혼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 상태의 즐거움은 순수하고 영적인 것이며, 또한 이러한 즐거움은 그들 모두가 서로 결혼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과 결혼한 것에서 비롯된다.
(2) 그 상태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들은 현재 "그러하며," 의심할 여지없이 장차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렇게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그들을 "자기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6). 이미 완전해진 의인의 영들은 수많은 천사들의 무리들과 더불어 동일한 연합을 하고 있다(히 12:22, 23). 그의 창조 시에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은 바 되었다"(시 8:5). 그러나 그의 완전한 구속과 회복시에 사람은 천사와 같이 될 것이다. 천사들과 같이 순수하고 영적으로 되며, 축복 받은 스랍들과 같이 알고 사랑하게 되며, 그들과 같이 또한 그들과 더불어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성도들의 몸은 순수하고 거룩한 영들의 순수한 매개체(고전 15:42 이하)와 같이 썩지 않고 영광스럽게 일으킴을 받게 될 것이며, 그들과 같이 빠르고 강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천사가 하늘에서 하는 것처럼 지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갈망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머지않아 항상 아버지를 뵈옵는 천사들과 같이 되기를 소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부활 시에 악한 자들의 상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이 그 욕망을 따라 반드시 행하였던 마귀들과 같이 될 것이다.
Ⅳ. 부활과 미래 상태에 대한 이 위대한 진리를 확증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그리스도는(다른 사람들이 논의하는 것처럼) 반대하는 것들의 궤변성을 찾아내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확고한 논증을 가지고 진리를 뒷받침하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와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해 심판하시며," 또한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그들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제시할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의 몇 가지에 대하여 살려보기로 하자.
1. 그는 어디에서부터 그의 논증을 꺼내셨는가? ─ 성경으로부터이다. 성경은 거대한 병기 창고 또는 병기실로써, 우리는 거기서부터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영적인 무기를 갖출 수가 있다. "기록되어으되"라는 구절은 골리앗의 검이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를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이다.
(2)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은 말씀되었고 "기록되었다."
(3)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읽고 들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말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맨 처음 유대인들에게 말씀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기 때문이다.
그 논증이 모세의 책에서 인용된 것은 사두개인들이 "그 책"만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며(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그 책들은 성경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증거를 가장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원에서 끄집어 내였다. 후대의 선지자들은 모세의 율법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미래상태에 대한 증거를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모세의 율법이 소위 자연 종교의 원리들과 같이 영혼과 미래 상태의 불멸성을 예측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뚜렷하게 계시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 율법의 대부분이 특별히 그 백성들에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일시적인 약속들과 위협들과 함께 사용된 국내법으로 보호되었으며 또한 미래 상태에 대한 보다 뚜렷한 계시는 후대에까지 보류되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모세의 글에서까지 부활에 대한 확고한 논증을 찾아내고 계신다. 많은 성경의 보화가 땅 속에 묻혀 있으며, 그것은 파헤쳐져야만 한다.
2. 그의 논증은 어떤 것이었는가?(32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것은 두드러진 증거는 못되며, "많은 말들 속에 있는"(totidem verbis)구절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실제적으로 결정적인 논증이 되었다. 성경에서부터 나온 결말들은 만일 그것이 올바르게 추론된 것이라면 성경 말씀으로 인정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을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논증의 경향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1) 즉 미래 상태, 다시 말하면 이후의 다른 생(life)이 있으며, 거기에서 의인은 참으로 그리고 영원히 행복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에서 입증되고 있다.
[1]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이 되시든지 간에 그는 최고의 특권과 행복을 예상하고 계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내가 너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즉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리라는 말씀의 부요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의(of Israel)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to Israel) 하나님(대상 17:24), 즉 영적인 은혜를 베푸는 자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영들의 아버지이시며 영적 축복으로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이 충만하신 은혜 베푸는 자이시며, 충족하신 하나님이시며, 온전하신 선(善)이시다. 그는 그 자신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은 자들에게 영원하신 선(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말씀을 종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자신의 고향을 버린 그들의 단순한 믿음과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의도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세 족장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최대한으로 확대하려고 하였다.
[2] 이 선한 세 족장이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리지 못한 것은 이와 같이 위대한 말씀에 대한 성취와 같은 어떤 일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로서 방황하며 기근에 시달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붙일 곳을 가지지 못하였고 다만 매장지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이생 저편에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도록 지시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 언약에 대해 나그네인 자들에게 보다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그들과 그들의 신앙의 상속자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약간이라도 있는가? 만일 죽음 저편에 이렇게 위대하고 선한 족장들을 위하여 행복이 예비 되어 있지 않다면, 불쌍한 야곱이 늙었을 때 한 처량한 말, 즉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라는 말은 종종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그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신실성에 대하여 영원히 비난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3] 그러므로 미래 상태가 정녕 있어야만 하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보상하시면서 사실 것이며 이와 같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보상을 받으며 영원히 살 것이다. 사도의 논증(히 11:16)은 이 논증에 대한 열쇠가 되며, 거기에서 사도는 그들의 나그네 된 땅에서의 족장들의 믿음과 순종에 대해 말하면서,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덧붙이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한 성," 즉 하늘의 도성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만일 그가 그들을 위하여 저 세상에 좋은 것을 예비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이 일을 추진시킨 것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 우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실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은 그가 참된 의도와 완전한 범위에 있어서 그것과 일치되는 것을 그들을 위해 행하셨기 때문이다.
(2) 영혼은 썩지 않으며, 몸은 다시 살아나 결합될 것이다. 만일 전자가 획득된다면 후자가 그 뒤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 장사 된지 오랜 후에 가시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그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 장사 된지 오랜 후에 가시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그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었었다"(I have been)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다"(I am ...)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가 하나님이 되시는 자들에게 지극히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만일 아브라함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끝장이 났더라면 그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과 그 사이에도 똑같이 끝장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그 때에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으며 따라서 아브라함은 그 때에 살아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무한한 행복의 상태에 있는 영혼의 불멸성을 입증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이것은 육체의 부활을 의미하고 있다.
사두개인들의 개념은 육체와 영혼 사이의 연합이 매우 밀접하기 때문에 육체가 죽을 때는 그 영혼도 그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다. 동일한 논법을 적용한다면, 만일 영혼이 살아난다면(이것은 확실히 그렇게 된다) 육체도 언젠가는 그것과 더불어 살아나야만 할 것이다. 더욱이 주님은 몸을 위하시며, 몸은 사람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사람과 더불어 맺은 언약이 있는데 이것은 기억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임종하는 족장들이 자신들의 뼈에 관하여 믿음으로 내린 분부는 그들이 자신들의 몸의 부활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 교훈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였던"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보다 완전한 계시로 보존되었다.
3.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논쟁의 결과에 대해 찾아 볼 수 있다. 사두 개인들은 "대답할 수 없게 되었고"(34절), 따라서 수치를 당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술책이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그것이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33절).
(1) 왜냐하면 그 가르치심은 그들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성경말씀이 그들 가운데서 얼마나 그릇되게 해석되었는가를 살펴 보라. 그 때에 백성들은 이 위대한 진리에 적용된 근본적인 약속을 듣고 그것을 이적처럼 놀라워하였다. 그들은 서투른 서기관들을 모시고 있었으며, 서기관들에게 이 사실은 결코 반가운 소식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2) 왜냐하면 그 가르치심은 그 속에 매우 좋고 위대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것이 반대를 받음으로 인하여 더욱 더 밝게 빛나며 더욱 더 찬란하게 된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이렇다 할 뚜렷한 회심없이 많은 반대자들이 잠잠하게 되었고 또한 많은 청중들이 놀라워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룩함을 받지 못한 영혼들의 침묵과 놀라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법과 복음을 위엄있게 나타내시며, 이 둘을 함께 존귀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계명의 본질 (마태복음 22:34-40)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 율법사와 더불어 가장 큰 계명에 대하여 담화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Ⅰ. 그리스도를 대항하기 위한 바리새인들의 모임(34절). 그들은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즉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모였다." 그들이 함께 모인 것은 그가 그들의 종교의 공동의 적인 사두개인들을 거스려 그 진리를 효과적으로 주장하고 확증한 것에 대하여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감사를 그에게 드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두개인들을 난처하게 만든 그를 또 다시 곤경에 빠뜨림으로써 명성을 얻으려고 "그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이 대답할 수 없게 된 것을 기뻐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오히려 더 분통이 터졌다. 그들은 사두개인들이 반대하였던 부활과 미래 상태에 대한 교리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반대하신 그들 자신의 폭력과 유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자들에 의해 행해질 때 그 명백한 진리를 주장하기를 꺼려하는 것이 바리새인적인 시기와 악의의 한 실례이다. 즉 공적인 선(善)도 개인적인 불쾌와 편견 때문에 희생시키는 것이 바리새적인 시기와 악의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는 정반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빌 1:18)/
Ⅱ. 율법사가 그리스도에게 한 질문. 율법사는 서기관과 같이 모세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들이 서기관과 다른 것은 그들(서기관들)보다 더 실제적인 질문들을 다루었다고 한다. 그들은 궤변적인 신학을 연구하고 주장하였다. 이 율법사는 "예수를 시험하려고 물었다." 마가복음의 병행 기절에 나타난 것처럼 이 사람은 그를 넘어뜨리기 위해 묻지는 않았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아니하도다"(막 12:34)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물은 것은 다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또한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즉 그 자신과 그의 친구들의 의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
1. 그 질문은,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였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질문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일들은 큰 것들이며(호 8:12), 또한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율법에 있어서 편파적이 아니며(말 2:9) 모두가 서로 관련성을 맺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것들보다 더 광범위하고 함축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되는 어떤 계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의 더 중한 바"(마 23:23)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2. 그 의도는 그를 시험하거나 그를 미혹케 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지식보다는 그의 판단력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율법 비평가들 사이에서 논란된 질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할례에 대한 율법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안식에 대한 율법, 또 어떤 사람은 제사에 대한 율법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각자가 영향을 받거나 또는 열심을 다하는 것을 따라 이같이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가 통속적인 견해를 따라 대답하지 못한다면 백성들로 하여금 그에 대하여 몹시 성을 내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가 이 질문에 대답하도록 시도하였다. 만일 그가 하나의 계명을 크다고 한다면 그들은 그가 다른 나머지 계명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그를 비난하려고 하였다. 이 질문은 악의 없는 질문이었다. 누가복음 10장 27,28절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과" 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며 다른 모든 계명들의 총합이라는 사실이 율법사들의 공통된 견해였으며 예수님께서도 이를 시인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질문을 그리스도에게 한 것은 대적자로서의 그와 더불어 논쟁을 하려는 악의적인 의도보다는 그를 어린아이처럼 심문하려는 멸시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Ⅲ.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그에게 이러한 질문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대답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매우 좋은 일이다. 명백한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은 위대한 사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은 아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 배타적인 것이 가장 큰 계명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포괄적인 것이 가장 큰 계명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몇 가지로 살펴보면,
1. 이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것인가?(37 - 29절) 사법적인 율법은 아니었다. 이 법이 가장 큰 계명이 될 수 없는 것은 이에 해당되는 유대 백성이 극히 소수였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율법들도 아니었다. 이 법이 가장 큰 계명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이 법들이 오래 되었으며 폐기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어떤 특별한 도덕 규범도 가장 큰 계명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모든 나머지 계명들의 셈과 근원이 되며, 그 밖의 것들은 자연히 이에 뒤따르게 된다.
(1) 모든 율법은 "사랑"이란 한 단어로 완성되었다. 로마서 13장 10절을 보라. 모든 순종은 애정에서 비롯되며, 사랑이 맨 처음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종교적으로 어떤 것도 올바르게 행해질 수 없다. 사랑은 주요한 애정으로써, 나머지 것에 대해 법을 제시하며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요한 요새(fort)로써 하나님을 위해 맨 먼저 굳게 지켜져야 하며 수비되어야만 한다. 사람은 사랑은 위해 준비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법"은 마음에 기록된 법이다. 사랑은 짧으면서도 달콤한 단어이다. 만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면 정녕 계명의 멍에는 매우 쉬운 것이다. 사랑은 영혼의 휴식이며 만족이다. 만일 우리가 이 좋은 옛길로 걸어간다면 우리는 휴식을 찾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계명들 중에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며, 첫 돌비의 모든 계명들의 총합이다. 사랑의 적절한 행동은 만족을 주기 때문에 선(善)은 그것의 적절한 대상이 된다. 무한히, 근원적으로, 영원히 선하신 하나님은 맨 처음으로 사랑을 받으셔야만 하며,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사랑을 받을 수 없고 오직 그만을 사랑하여야만 한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크고 첫째 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랑은 우리가 그에게 드려야 할 크고 첫째 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고 있다.
[1]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사랑할 것. "네 주 하나님"을 네 자신의 하나님으로 "사랑하라." 제 일 계명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아야 하며 우리의 사랑을 그에게 드려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해와 달을 자신들의 신으로 삼은 자들은 그들을 사랑하였다(렘 8:2; 삿 18:24).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창조자, 소유자, 지배자가 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그에게 순종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화목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것이 곧 "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의 근거이다.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 어떤 사람은 이것이 동일한 한 가지 뜻을 나타내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각각 다른 것으로 구별하고 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은 의지와 감정과 지식을 말한다. 또는 생동적이고 민감하고 지적인 기능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그에게서 먼 자와 같이 말이나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고 성실한 사랑이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강한 사랑이어야만 하며, 우리는 그를 최고로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그를 "찬양"해야 하는 것처럼(시 103:1), 또한 그와 같이 "사랑"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순하고 최상의 사랑이 되어야만 하며, 우리는 그를 그 어느 것보다 더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의 사랑의 샘은 이와 같이 온전히 흘러가야만 한다.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나누인 마음의 정반대인 연합된 마음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에게 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온 힘을 그에게 기울여야만 하며 그를 향해 드려져야만 한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왜냐하면 이것에 순종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순종하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순종은 사랑에서부터 흘러나올 때에만 받으실만한 것이 된다.
(3) "우리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둘째 되는" 가장 큰 계명이다(39절). "둘째는 그(첫째)와 같으니라." 그것은 첫째 계명과 같이 둘째 돌비에 새긴 모든 계명들을 총괄한 것이다. 둘째가 그와 같은 첫째 것에 근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이는 형제를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본보기와 증거가 된다(요일 4:20).
[1]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만 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부패하고 또한 가장 큰 죄의 뿌리가 되는 이기적인 사랑(자기사랑)이 있다. 이러한 사랑은 마땅히 제거되고 억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자연적이고 또한 가장 큰 의무의 규칙이 되는 자기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보존되고 성화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 즉 우리 자신의 본성의 고상함에 대한 당연한 배려와 또한 우리 자신의 마음과 몸의 부요 함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2]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명령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존경하여야 하며, 누구든지 그릇되게 하거나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선의를 가져야 하며, 선한 소원을 가져야만 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만 한다. 즉 우리가 우리의 몸을 사랑하듯이 참되고 성실하게 사랑해야만 한다. 아니, 여러 경우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부인해야만 하며, 다른 사람들이 참된 부요함을 이해 우리 자신을 종으로 만들어야만 하며, 또한 "그들을 위해 쓰며 쓰여지기를" 즐거워하며 "형제를 위해 우리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만 한다.
2. 이 계명의 중요성과 위대성은 무엇인가? (40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즉, 이것이 본래부터 사람의 마음에 기록되고 모세에 의해 재현되고 선지자들의 말과 기록에 의해 지지되고 강요된 실제적인 종교와 연관된 모든 규칙들의 총합이요 본질이다.
모든 것은 사랑의 법에 연결된다. 이것을 제거해 버리면 모든 것은 땅에 떨어져 버리게 되며 만사는 허사가 되고 만다. 의식과 예식은 모든 영적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사랑에 대해 자리를 내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것들보다 더 탁월한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정신으로써 그것을 생기 있게 해주며 율법의 시멘트로써 그것을 연결시켜 준다. 사랑은 다른 모든 의무들의 뿌리요 원천이며, 모든 성경, 즉 율법과 선지자와 역시 복음의 요약이며, 또한 이 사랑은 신앙의 열매로 간주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두 계명에 걸려있는데 그 결과는 모든 것으로 하여금 유효하게 하고 궁극적인 근거가 되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며, "율법의 마침"(딤 1:5)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법은 못이다. 즉 "회중의 스승에 잘 박힌 못"(전 12:11)으로써 이 못에 "율법과 선지자의 영광"(사 22:24)이 걸려 있다. 사랑은 결코 뽑아 낼 수 없는 못이다. 왜냐하면 이 못에 새 예루살렘의 모든 영광이 영원토록 걸려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두 계명에다 우리의 마음을 마치 틀 속에 집어넣듯이 집어넣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사랑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매달려 있는 위대한 일들로 알고 그 개념이나 명칭에 대해 열심히 논란할 것이 아니라 이를 변호하고 증거 하는데 온 힘을 다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한 사랑이 그것들에게 희생되어져야만 한다. 모든 것들로 하여금 사랑의 명령하는 힘에 굴복하도록 해야만 한다.
바리새인들이 잠잠케 됨 (마태복음 22:41-46)
바리새인들은 많은 질문을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괴롭힐 수 있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들 자신만을 노출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질문을 하셨다. 그는 이 질문을 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하려고 하셨다(41절). 그는 그들 중의 몇 사람을 택하시지 않고(ne Hercules contra duos─즉 허큘레스 그 자신이 압도될지 모른다), 그들로 하여금 더 수치를 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그를 대적하고 괴롭게 하려고 모의를 꾸밀 때 그들 전부를 상대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적들이 자신들을 강화하고 있을 때 그들을 좌절시키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시지만, 그들을 공략하신다. "네 자신이 연합하라. 그리하면 산산이 부서지게 되리라"(사 3:9, 10).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쉽사리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그들에게 하시고 계시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교리 문답집에 있는 질문이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조상들에게 약속한 메시야는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나겠느냐?" 이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메시야에 대해서는 흔히 그렇게 완곡(緩曲)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성경을 해석하였던 서기관들도 그와 같이 그들을 가르쳤다. 즉 시편 89편 35, 36절, "내가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위도 항상 있으리라." "그의 씨가 영구하게 될 것이라"(사 9:7). 또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사 11:1)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그렇게 가르쳤던 것이다. 다윗과 더불어 맺어진 왕위에 대한 언약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맺어진 구속의 언어 대한 모형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다윗과 같이 서원함으로써 와이 되었으며 처음에는 비천하게 되었으나 후에는 존귀하게 되셨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었다면 그는 실제로 참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우리는 다윗에게서 열 분깃을 가진다"고 하였고 유다는 말하기를 "그는 우리의 뼈와 우리의 살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신 다윗의 자손에게서 어떤 분깃을 가지는가?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들은 율법에서부터 그리스도로 차례로 질문을 하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에 대하여 질문하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차서 마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 없이도 율법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만다. 우리들도 진지하게 스스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 대하서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그리스도가 들어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그에 대하여 거의 생각하지 않거나 하찮게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주님은 참으로 고귀하시다." 또한 "주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가!" "예루살렘의 딸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른 애인"보다 더 생각하지 않을 때 술람미 여인은 그를 "수 천만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신 분"으로 생각하였다.
Ⅱ. 그는 그들의 대답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하고 계시는데, 그들은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43-45절). 많은 사람들은 흔히 진리에 대해 쉽게 확언하며 자랑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리에 확증하고 입증하며 변호하라는 요구를 받게 될 때에는 부끄러울 정도의 무지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그리스도께서 제기하신 반론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겠느냐?"이었다. 주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이 한 것과 같이 책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기를 싫어하는 진리 즉 기대하는 메시야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1. 다윗은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것은 성령에 감동되어 신적으로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며 또한 선지자의 영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 말씀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삼하 23:1, 2)이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특히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처럼" 말했던 "거룩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그 때도 지금과 같이(고전 12:3)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가 주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던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하고 계시다. 이 구절은 서기관들도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구절로 이해하였다. 확실한 것은 선지자는 거기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시편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예언적인 요약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비천과 승귀의 신분에 계실 때 선지자, 제사장, 왕의 세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승귀의 신분에서의 구속자를 보여 주는 모든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계시다.
(1)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그의 앉으심은 휴식과 통치를 나타낸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최상의 영예와 통치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8장 1절에 이 구절이 어떤 말로 표현되어 있는지를 살펴 보라. 즉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빌립보서 2장 9절, 에베소서 1장 20절을 보라. 그는 이 영예를 자신이 취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의 아버지와 언약에 의해 그러한 자격을 부여받았으며 그로부터 받은 사명에 의해 맡으셨으며 또한 이것이 그 사명인 것이다.
(2) 그의 대적자들을 굴복시키심.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친구들이 되거나 발등상이 될 때까지 거기에 앉으실 것이다. "세속적인(육적인) 마음"은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에게 악의"를 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은 "그의 발 아래로 불리워진 자발적인 백성들의 회심"(사 41:2 에 표현된 대로)으로 말미암아 굴복이 되며 또한 가나안 왕들이 여호수아의 발 아래 굴복된 것과 같이 그의 발 아래로 데려옴을 당하게 될 패역한 원수들의 혼란 상태로 말미암아 굴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이 인용된 것은 다윗이 메시야를 "자기의 주"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주(여호와)께서 내주께 이르시되"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암시는, 곧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 한 절의 의도와 뜻뿐만 아니라, 낱말과 구절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이 낱말들과 구절들을 선택하여 매우 유익하고 교훈적인 뜻을 가지는 의미를 나타낸다. "내 주'라는 말에 특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2.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메시야의 신성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분명히 일깨워 준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또는 선조가 후손에게 "주"라고 부르는 일은 합리적인 것이 못된다.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magis notum─즉 보다 명백한 진리로 규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비하(卑下)에 대해 말해진 것은 그의 신성과 통치의 진리와 조화시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다윗의 주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만 하며,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그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와 같이 성경의 외견적인 차이는 성경 전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적응되어야만 하며 또한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Amicae scripturam lites, utinam et nostrae─즉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차이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리들의 차이점이 동일한 종류의 것이 될 것이다 !
Ⅲ.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의 지식에 근거하여 고상하게 시험하신 것이 성취된 것을 두 가지 점에서 살펴 볼 수 있다.
1. 그것은 저들을 당황하게 하였다(46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저들이 메시야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거나, 또는 저들이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불경건 때문이었다. 메시야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는 이 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당시의 랍비들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을 평범한 기독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가 되고,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된다. 그리스도는 이 진리를 스스로 설명하지 않고 그 증거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될 때까지 이를 보류하셨다. 우리는 이것이 그의 영광 중에서 충분히 설명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계 22:16). 즉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이셨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히 축복 받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굳게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헤어날 수 없는 무수한 난제들 속에 빠져들고 말게 될 것이다. 그의 먼 조상인 다윗은 그를 "주"라고 불렀으며,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그리스도를 잉태한 후에 "그를 하나님 내 구주"(눅 1:46, 47)라고 불렀다.
2. 그것은 그들을 침묵케 하였다. 또한 그를 거스릴 기회를 찾던 모든 자들을 잠잠케 하였다.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책잡거나 시험하려거나 미혹하려는 질문을 하는 "자가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구속 사업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잠잠케 하신 것에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회개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말씀에 의해 깨닫게 된다. 이들이 회개했다면 그에게 더 많은 질문을 했을 것인데, 즉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노리는 이점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더 이상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선생과 더불어 논쟁하는 자는 여기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했던 것처럼 그와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