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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차가 떠난 것은 늦가을의
저녁이었다.
플랫폼 끝 은행나무들은 이미 절반쯤
잎을 떨군 뒤였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노란
잎들이 철길 위로 낮게 굴러갔다.
몇 장은 레일 사이에 끼었고,
몇 장은 오래 망설이다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승강장에 내려앉았다.
역장 한도윤은 낡은 역사 처마 아래
서 있었다.
검은 제복 위로 저녁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선로 저편에서 막 기차가 멀어지고
있었다.
붉은 후미등 두 개가 어둠 속에서
점점 작아졌다.
그날,
두 사람이 내리고 세 사람이 탔다.
차장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윤은 말없이 손을 들었다.
기적이 한 번 울렸다.
그 소리는 오래된 역의 창문과 기둥,
먼 산자락까지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기차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윤은 한참 동안 철길 끝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평생 지키던 자리를
잃는 데에는,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그때 처음 알았다.
울음도 없었다.
박수도 없었다.
그저 기차 한 대가 떠났을 뿐이었다.
도윤은 서른두 해 동안 그 역에서
일했다.
봄이면 학생들이 도시로 떠났다.
명절이면 양손에 선물 꾸러미를
든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군에 가는 아들을 배웅하던 어머니는
플랫폼 기둥 뒤에서 몰래 눈물을
훔겼고,
서울의 대학에 합격한 딸을 보내던
아버지는 기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래 손을 흔들었다.
도윤은 수많은 떠남과 돌아옴을 보았다.
그는 사람은 떠나도 길은 남는다고
믿었다.
철길은 계절이 바뀌어도 제자리에
있었고,
눈이 오면 눈을 이고,
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내며,
늘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그런데 먼저 사라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길이었다.
폐선이 결정된 뒤에도 도윤은 한동안
아침이면 습관처럼 역으로 걸어갔다.
역사 문을 열 필요는 없었다.
집에만 있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어느 겨울 아침,
그는 낡은 나무의자에 앉아
빈 선로를 바라보았다.
젖은 낙엽들이 플랫폼 가장자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오면,
그는 순간 기차가 오는 줄 알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혼자 웃었다.
"이제 안 오는데."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기차에게 하는 말인지,
오래된 습관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겨울이 깊어질 무렵,
군청에서 전화가 왔다.
폐역을 작은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일을 검토 중인데,
역사에 남은 물건들을 정리해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다.
도윤은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떠난 자리에서 다시 일을 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처럼 느껴졌다.
이미 끝난 일에 무슨 뜻이 있겠는가
싶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는 결국 오래된 열쇠 꾸러미를
들고 역으로 갔다.
매표소 서랍에서는 누렇게 바랜
승차권 몇 장이 나왔다.
벽장 안에서는 정지 신호용 깃발과
손전등이 발견되었다.
창고 깊숙한 곳에는 녹슨 역명판
하나가 기대어 있었다.
도윤은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어
먼지를 닦았다.
그날 오후,
역사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서른 즈음 되어 보이는 여자가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메고 들어왔다.
그녀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그녀의 이름은 서하린이었다.
오래된 철도 건축과 사라져 가는
장소들을 기록하는 사진가라고 했다.
도윤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은 오래 머물렀다.
매표창구를 찍고,
낡은 나무의자를 찍고,
창문 틈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만든 사각형을 찍었다.
플랫폼에 떨어진 은행잎과 녹슨 철길도 오래 바라보았다.
도윤이 물었다.
"사람도 없는데 뭘 그렇게 오래
찍습니까?"
하린은 카메라를 내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람이 없어서요."
"그게 사진이 됩니까?"
"사람이 떠난 자리에도,
사람이 남아 있잖아요."
도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철길에 사람이 남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며칠 뒤 하린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키가 큰 젊은 남자가 낡은 스케치북과 도면 뭉치를 들고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도시재생을 공부한 건축가,
정우진이었다.
하린은 이 역을 보존할 방법을 찾다가
우진을 소개받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대합실 한가운데 놓인 낡은 탁자에 마주 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엇을 바꿀 것인가.
사람이 다시 찾아오게 하려면
어디까지 새로워져야 하는가.
그러나 새로워지는 순간,
이곳이 더는 이곳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린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그대로 두고 싶어 했다.
"이 낡음도 이 역의 얼굴이에요."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두기만 하면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아요.
사람이 다시 와야 공간도 살아납니다."
"사람을 오게 하려고 너무 많이 바꾸면,
여기가 여기일 이유가 없어지잖아요."
도윤은 창고에서 먼지를 털며
속으로 생각했다.
싸우러 왔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다음 날에도 함께 왔다.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창문 밖의 계절은 겨울을 건너
봄으로 기울었다.
봄이 오자 폐역 주변에는
민들레가 피었다.
도윤은 더 이상 매일 역에 가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린은 사진을 정리했고,
우진은 스케치북에 역의 새로운 시간을 그렸다.
어느 날,
우진이 도윤의 집을 찾아왔다.
"역장님."
도윤은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난 이제 역장이 아닌데."
"그래도 저한테는 역장님입니다."
우진은 웃었지만,
찻잔을 쥔 손은 조금 어색해 보였다.
잠시 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린 씨는…
어떤 사람 같으세요?"
도윤은 대답 대신 차를 따랐다.
그때 그는 처음 알아차렸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오래 역에 계셨으니까,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실 것 같아서요."
도윤은 피식 웃었다.
"나는 기차 시간은 좀 봤어도,
사람 마음 시간표는 몰라."
우진은 한동안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창밖에서 봄바람이 담장 너머의 꽃잎을 흔들었다.
그해 여름, 하린은 프랑스로 떠났다.
사진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고 했다.
우진은 서울의 설계사무소에 취직했다.
폐역 문화공간 사업은 예산 문제로
중단되었다.
역은 다시 조용해졌다.
도윤은 가끔 플랫폼에 나가
잡초를 뽑았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다만 철길이 풀에 덮이는 것을
보고 있기가 싫었다.
한때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길이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였다.
하린에게서는 가끔 엽서가 왔다.
파리의 오래된 기차역.
프로방스의 작은 간이역.
눈이 내린 어느 시골 플랫폼.
엽서 뒤에는 늘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여기에도 기차가 서지 않는
역이 있어요.
우진에게서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겨울밤,
전화가 왔다.
"역장님, 잘 지내세요?"
"그럭저럭."
"하린 씨 소식은 받으세요?"
"가끔."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했다.
도윤은 창밖의 어두운 마당을 보며
말했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우진이 작게 웃었다.
"그러려고요."
그 뒤로 도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에는,
떠나는 열차처럼 떠밀어 보내야만 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세월은 생각보다 빨랐다.
도윤은 일흔을 넘겼고,
무릎은 폐역까지 걸어가는 일을
조금씩 줄이라고 말했다.
역 주변에는 새 아파트가 들어섰고,
철길 일부는 산책로가 되었다.
어느 날 우편함에 두툼한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보낸 사람 이름을 본 도윤은 한참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정우진 · 서하린
봉투 안에는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바닷가에 가까운 어느 도시의
오래된 역 앞.
우진과 하린이 서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어린 여자아이가
양쪽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사진 뒤에는 짧게 적혀 있었다.
저희 셋이 되었습니다.
도윤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날 저녁,
그는 오랜만에 폐역으로 갔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철길은 붉은빛을 받아 멀리까지
뻗어 있었다.
예전에는 저 철길 끝에서 반드시
기차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알았다.
어떤 길은 더 이상 아무것도
데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길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십여 년이 더 흘렀다.
도윤은 여든을 바라보게 되었다.
가을의 어느 오후,
군청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폐역 복원 사업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번에는 기차역으로 되돌리는 일이
아니었다.
오래된 역사를 보존해 여행자와 지역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작은 도서관과 공연장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도윤은 웃었다.
정우진.
공간 기록 사진을 맡은 사람은
서하린이었다.
개관식 날,
도윤은 아주 천천히 역으로 걸어갔다.
역명판은 예전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매표창구도 남아 있었고,
대합실의 나무의자도 몇 개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플랫폼 끝에는
작은 공연장이 생겨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녔고,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된 역사 안에는 따뜻한 불빛이
켜져 있었다.
한때 너무 조용해서 자신의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역장님."
누군가 뒤에서 불렀다.
돌아보니 우진이었다.
머리에는 희끗한 시간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하린이 서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도윤은 사진 속의 어린아이를 기억했다.
"우리 딸이에요."
하린이 말했다.
"오늘 여기서 연주해요."
잠시 뒤, 작은 공연이 시작되었다.
젊은 여자가 첼로를 들고
무대 중앙에 앉았다.
활이 현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첫 음이 울렸다.
낮고 깊은 소리가 오래된 역사 안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매표소를 지나고,
대합실을 지나고,
낡은 나무의자를 지나,
열린 문 밖으로 흘러나갔다.
선율은 마치 오래된 벽과 창문,
레일과 은행나무에게도 한 사람씩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도윤은 천천히 플랫폼 쪽을 바라보았다.
철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위로 기차는 오지 않았다.
오래전 마지막 기차가 떠난 뒤,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처음으로 철길이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도윤은 바로 일어서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공연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플랫폼 위로 긴 그림자가 생겼다.
도윤은 혼자 철길 쪽으로 걸어갔다.
레일 위에 손을 올려보았다.
차가웠다.
오래전에는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한동안 따뜻했던 철이었다.
이제 다시 뜨거워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모든 길이 처음 모습 그대로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길은 사람을 실어 나르다가
멈춘다.
어떤 문은 닫힌다.
어떤 역할은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
다시 돌아보면,
그 자리에 전혀 다른 것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날도 있다.
도윤은 철길 끝을 바라보았다.
해가 산 너머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 기차도 없었다.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 역사 안에서 다시 첼로 소리가
들려왔다.
연주자가 혼자 한 구절을 연습하는
모양이었다.
짧은 선율이 바람을 타고
플랫폼까지 흘러왔다.
도윤은 가만히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떠난 기차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는 소리
같았다.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길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시간에도
삶은 멈추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는 만나고,
누군가는 기다리고,
누군가는 결심하고,
누군가는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는 것을.
도윤은 천천히 역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평생 시간표를 보며 살았던 사람이
마지막에야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다음에 무엇이 올지 모른다고 해서,
지금의 한 걸음까지 멈출 필요는
없다는 것.
플랫폼 위로 저녁빛이 길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기차가 서지 않는 역에서,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