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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아들 디모데(행 16:1-5)
바울은 이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1차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일행이 두 팀으로 나누어 졌습니다. 1차 때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다녔습니다마는 2차 때에는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따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은 1차때 전도했던 루스드라와 더베로 먼저 갑니다. 시간적으로 계산해보면 1,2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1차 전도여행 마지막코스인 더베와 루스드라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이적도 있었지만 핍박을 받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가장 먼저 다시 찾아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바울은 훌륭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1절,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여기서는 기독교인을 가리켜 제자라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제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라고 하면 12제자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사도행전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들,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제자'라 표현합니다.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디모데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뜻입니다.
디모데는 아마도 1,2년 전에 바울 사도의 제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같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이곳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는데 나면서부터 일어서지 못하는 장애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보는데 그 마음에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향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외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몰려와서 바울과 바나바가 신의 현현이라고 믿고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 때 바나바는 극구 말리고 우리는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천지와 만물의 창조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 왔습니다. 아마 그중에 디모데가 들어 있었던 것같습니다. 1,2년 전에 믿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그 믿음이 많이 자랐습니다.
이제 바울이 와서 보니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지 얼마되지 않은 초신자입니다. 사실 당시에 예수믿는 것은 지금처럼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많은 환란과 핍박이 있던 시대이기 때문에 1,2년이라 할지라도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제대로 지키려고 하면 말씀과 기도훈련이 없으면 불가능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되지 않는 초신자와 같은 디모데가 지금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이 전에 이곳에 와 전도하고 떠날 때에는 바울에게 얼마나 걱정이 많았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믿음생활을 잘 해줄 것인지, 앞으로 있을 숱한 핍박을 어떻게 견딜는지,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급하게 어렵고 힘든 선교의 길이지만 다시 와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한 디모데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젊고 유능한 청년이 성숙한 신앙으로 세워져 있을 때 얼마나 흐믓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너무 좋아서 그를 지금 자기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합니다. 특별히 지금 자기 함께 동행하면서 동역하는 동역자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 뒤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마다 '내 참 믿음의 아들 디모데' '내 아들 디모데'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디모데를 사랑했고, 그만큼 디모데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에 디모데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디모데'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이같은 신앙적 이름을 지어준 것 같습니다. 1절에 디모데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후서 1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딤후 1:3-5)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이 말씀속에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이라는 말의 시제는 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그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만났을 때에는 디모데 아버지는 생존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하게 됩니다. 결국은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사이에서 자라고 오늘의 믿음을 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튼 디모데의 어머니는 이방 땅에 살면서 헬라사람과 결혼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보듯이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수행원으로 데리고 다니려 할 때에 그에게 할례를 베풀게 됩니다. 사실 예루살렘교회에서 이방 사람은 할례받을 필요 없다고 이미 규정하였지만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베풉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이는 유대인을 상대로 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에 거치는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말하자면 디모데는 반은 유대인이고 반은 헬라인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해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가 할례를 받아서 온전한 유대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 3-5절로 보면 바울은 또다른 믿음의 아들인 디도에게는 사도 바울이 할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사람으로서 앞으로 이방사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원해서 할례를 베풀지 않은 것입니다.
디모데는 절반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베풀어 온전한 유대사람으로 행세하게 하고, 디도는 온전한 헬라사람이므로 할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본래 종교 문제나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가 없는 사람이 바울입니다마는 습관이나 관례, 그리고 정책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듯 너그럽게 양보를 해서 사람에 따라 할례를 줄 수도 있고 안줄 수도 있다고 융통성있게 대처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1. 바울은 디모데를 신앙의 계보를 잇는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전도하면서부터 후계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동반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후계자입니다. 그냥 따라다니는 단순한 수행원이 아닙니다. 적어도 바울의 일을 장차 계승해 나갈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계승자가 바울에게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바나바, 실라라고 하는 동반자가 있었습니다. 동역자들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젊은 마가를 수행케 한 것은 장차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에서였습니다. 실제로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해서 바울 이후에도 선교 사업을 이어가게 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마가가 도중 하차했을 때에 몹시도 섭섭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마가를 잃은 자리에 바울은 이제 디모데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바울의 후계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일은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떠난 자리를 채워주는, 대를 이어서 신앙을 이어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주는 일군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뒤를 이어서 신앙을 지키고 가문을 지킬 신앙의 후계자가 있습니까? 복있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뿌리깊은 나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적어도 신앙의 3대를 이어갈 때 뿌리깊은 나무와 같은 신앙의 명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바로 이처럼 신앙의 명가를 이루시고 뿌리깊은 나무와 같은 복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신앙과 사역의 후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가계입니다.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자세히 보시면 바울에 이어서 디모데, 그리고 디모데에 이어서 충성된 사람들, 그리고 충성된 사람들에 이어서 다른 사람들, 따지고 보면 신앙의 4대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런 신앙의 계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계보는 어떻게 쓰여지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계보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라 하면서 예수님까지 계보가 이루어진 것처럼 여러분도 신앙의 계보를 이루셔서 하나님 나라의 명가를 이루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은 오고 가겠지만 하나님의 사업은 영원토록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대를 이어 계승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와 동시에 후계자며 귀한 일꾼들을 주위에 세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는 일꾼 양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후계자를 양성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바울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그의 선교 사역은 중단없이 더 크게 더 넓게 확장되어 나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인 이렇게 후계자를 세우지 못했었다면 바울의 순교와 함께 그 사역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은 어느 길로든 통하여 이어지겠지마는 바울의 책임감은 그렇게 투철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후계자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또 하나 있습니다.
그는 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종말론적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다 하면 으레 한번씩은 얻어맞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핍박을 당하는 것이고 보니 어느 때 어디서 어떻게 죽을는지 모르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후계자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아무 때에 죽더라도 하나님의 사업, 바울의 그 귀한 정신은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가르칠 뿐만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의 일을 실제로 다 보고, 본받는 제자이어야 합니다.
디모데서에 보면 여러 차례 그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너는 나를 본받아라, 내가 네게 본을 보였다, 철저하게 본받는 제자, 자기의 일을 중단없이 이어갈 제자로서 디모데를 택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디모데의 신앙은 전통적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어렸을 때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입니다. 그야말로 모태신앙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라고 디모데후서 1장 5절에서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지적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배운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디모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의 아들이요 영적인 후계자였습니다.
2. 디모데는 교회안에서 칭찬받는 자였습니다.
2절,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합니다. 칭찬받는다는 것, 이게 중요합니다. 칭찬받는 사람이라야 지도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비난받는 사람,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안에서 오래 신앙생활하다 보면 누가 어떤 사람인지 거의 다 압니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인정받고 칭찬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정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안에서 인정받고 칭찬받습니까? 저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지식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안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실함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요즘 묵상하는 열왕기상을 보면 열왕기상에서 왕들의 신앙적 모델은 바로 다윗입니다. 열왕기상 14:8절에서 다윗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인정하십니다.
1)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2)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인정으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모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지켜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말씀을 잘 듣고 행함으로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예배생활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이 예배입니다. 예배에 생명을 걸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주일낮예배 , 주일 찬양예배,수용예배, 금요기도회, 목장예배, 예배가 곧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렇게 예배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모델링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뿐 만 아니라 기도생활입니다.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새벽기도가 어려우면 금요기도회라도 나와야 기도생활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하지않으면서 교회일을 한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아무리 일을 잘 한다 하여도 하나님과의 관계인 기도생활을 소홀이 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기도생활을 회복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생활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뿐 만 아니라 십일조 생활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물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물질적인 삶에 대한 약속을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 모든 물질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 바로 십일조생활입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해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여러분의 물질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기본적인 신앙생활의 모범이 될 때 교회의 모델링이 되고 지도자로 쓰임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칭찬받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교회 진정한 일군이라 믿습니다.
양문교회하면 이 분, 이 집사님, 이 권사님, 이 장로님하고 인정받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인정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모데는 교회안에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느 직장에 나가 일을 한다고 합시다. 다 안 믿는 사람이고 자기만 믿는 사람입니다. 이 경우, 적어도 믿는 사람은 모든 사람 중에 특별히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직장에 있건 간에 남의 입에 오르내리거나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심지어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전도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어느 직장에서든지 가장 신임을 받고 가장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잠시 오해는 받을 수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오늘 양문교회 성도들이 바로 이처럼 하나님앞에서 칭찬받을 뿐 만 아니라 직장이나 어디에 가도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디모데는 섬김의 삶을 살았던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섬기는 자가 진정한 주인이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디모데 역시 철저하게 종의 심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섬김의 자세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영적인 아버지였던 사도 바울에 대해서 그는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하고 주로 섬깁니다. 그는 '왜'라고 묻는 법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머물라 하면 머물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편지를 써주면서 전달하라 하면 전달합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차례 가고 오는 문제가 나오는데, 참 대단합니다. 어디에 교회를 하나 세워놓고, 바울 자기는 훌쩍 떠나면서 "머물러 있어"하면 디모데는 군말 없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얼마가 되든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오라"하면 와요. "가라"하면 가요. 이것이 디모데의 모습입니다. 바울의 명령에 대해서, 바울의 뜻에 대해서 바울이 하고있는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섬기는 자세입니다. 왜 여기에 있어야 합니까, 왜 가야 합니까, 왜 와야 합니까? 일체의 반문이 없습니다. 그렇듯 충성되게 섬겼습니다.
왜 이렇게 디모데가 순종합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분명하게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마치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신 것처럼 온전하게 주님의 권위에 순복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빌립보서 2:5-8을 생각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입니다. 이러한 섬김의 자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과 교회 속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자가 있습니다.
그래야 혼돈이 없습니다. 사탄의 공격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디모데가 바울을 영적인 아버지로 섬기고 그 권위앞에 순복하면 섬김의 삶을 산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디모데는 그의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과 함께 하면 바울의 손발역할을 제대로 해서 바울에게 그야말로 돕는 베필과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돕는 베필은 가정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도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사랑하며 함께 도우며 온전함을 이룰 때 하나님의 역사를 이땅에 펼쳐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함께 했습니다.
감옥에도 같이 가게 되고, 때로는 매도 같이 맞은 것 같습니다. 숱한 고생을 하면서 따라다닙니다. 정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탈무드에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기형아가 태어났는데 머리가 둘이요 몸은 하나입니다. 손, 발도 넷입니다. 등이 붙었습니다. 이제 이 아이가 하나냐 둘이냐 하는 문제가 나오는데 탈무드의 지혜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쪽 어린아이를 때려서 울 때에 저쪽도 울면 하나고, 이쪽은 우는데 저쪽은 울지 않으면 둘이다, 뭡니까? 아픔이 통해야 하나되는 것입니다. 아픔과 기쁨이 하나되어야 하나이지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기쁨도 고통도 그 평생을 함께 합니다. 끝까지 함께 합니다. 심지어는 전설에 따르면 그의 무덤도 사도 바울의 무덤 밑에 있습니다. 그 시체가 밑에 있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바울과 같이했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를 보내어 수습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디모데의 진실도 믿었고, 디모데의 능력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 전도 있어서도 많은 영혼을 구원할 자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디모데는 바울에게 있어서 철저하게 중요한 후계자의 체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설에 따르면 뒷날 에베소에서 감독으로 일한 적도 있고, 마지막에는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제 바울의 디모데를 향한 마지막 말씀을 들어봅시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에 보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하고 말씀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믿음의 아들로 그를 불렀고, 수행했지마는 이제는 편지 속에서 말씀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그만큼 확실하게 디모데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바울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초대교회시대에 정말 힘들고 어려운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바울에게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계보를 이어가는 믿음의 아들입니다. 디모데는 교회안에서 칭찬받는 일꾼이었습니다. 끝까지 사도바울과 함께 교회를 지키며 섬김을 살았던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는 충성된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똑똑하고 돈많고 세상적으로 힘있는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앞에 충성된 사람, 하나님앞에서 인정받는 사람, 끝까지 교회를 섬기며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고치고 생명을 세우는 생명의 사역에 힘쓰는 사람, 섬김이 전부인 것처럼 교회앞에 섬김의 본을 보이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충성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저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충성된 삶을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