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 장궤 그리고 동북공정 |
[이영성 칼럼] 고조선, 고구려, 발해 뺏으려는 역사왜곡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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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華僑)란 중국 국적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정착하여 그 나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동남아 국가에서 활동하는 화교들은 왕성한 활동력으로 그 나라 자본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등 현지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화교의 역사는 약 120년에 달한다. 광복 전에는 최대 10만 명에 달했으나 그 이후 서서히 줄기 시작하여 지금은 2만 여명 정도가 남아 있다.
1949년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화교의 상당수가 아예 우리나라에 귀화했거나 아니면 우리 정부가 정책적으로 화교의 경제활동을 제한하면서 제3국으로 떠났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우리나라는 화교가 경제적인 실권을 쥐는 것을 경계하여 지속적으로 견제해 왔는데 1961년에는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 소유를 제한했고 1963년에는 화폐개혁으로 화교들이 모은 돈을 강제로 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화교들은 요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것 역시 상술이 출중한 화교들에 대한 정부의 견제정책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의 유년기는 군가로 점철된 시기였다. 군부대가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군부대의 기상나팔 소리에 잠을 깼고 군부대에서 점호 취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리고 군인들이 때도 없이 불러대는 군가는 너무 귀에 익어 일부러 배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곧잘 흥얼거릴 수 있었다. 특히 <승리의 노래>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계집애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의 하나였다. 노래의 가사는 이랬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물론 가사가 짧은 만큼 2절과 3절까지 있는 노래였다. 사실 어릴 땐 ‘오랑캐’의 의미도 모른 채 행군하는 군인들의 행렬을 뒤쫓으며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그리고 ‘‘대한 남아 가는데 저기로구나’로 잘못 부르다가 ‘저기’가 아니라 ‘초개’였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우리가 어릴 때 중국(中國)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통치하던 지금의 대만 정부를 가리켰다. 그리고 중공(中共)은 중국공산당의 약칭으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중공은 우리나라의 철천지원수였다. 6.25 동란 때 아군이 압록강까지 진군하여 승전을 눈앞에 두었으나 중공군의 개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으니 어찌 원수가 아닐 수 있으랴. 적어도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그래서일까 지방 소도시에 사는 화교들은 공연히 주눅이 들어 생활했다. 장개석 총통이 대만으로 쫓겨 간 것도 그러할 진데 본의와는 달리 오랑캐라며 손가락질을 받았으니 그 서러움이 오죽 컸으랴.
어릴 때 읍내에 조그만 중국음식점이 하나 있었다. 그 음식점 주인의 가족들은 늘 검은 옷을 입고 다녔으며 생활 또한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읍내 사람들은 그 화교를 비하하여 ‘짱께’라 불렀다. 짱께(짱꾸이)라는 말은 장궤(掌櫃), 즉 ‘손금고를 지키는 주인장’의 뜻으로 본시 재력가를 뜻하는 의미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구두쇠라는 의미가 훨씬 더 강했다. 타국에서 생활하며 믿을 것은 돈밖에 없었을 터이니 화교들의 검소함과 축재는 어쩔 수 없는 생활방편이었으리라.
나는 아버님이 중국요리를 좋아하여 가끔 그 음식점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벽에 청천백일기와 장개석 총통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주인 부부가 두 손을 포갠 채 언제나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곤 했다. 그리고 그 주인 부부는 추석 때마다 조그만 상자에 월병 몇 개를 넣어 이웃에 돌리곤 했다. 꽤나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추석 때마다 그 중국음식점에서 이웃에 돌리던 월병의 맛을 잊지 못한다.
그 중국집 주인에겐 아들이 둘 있었다. 당시 큰 아들은 중학교에 다녔고 막내아들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학교에서 그 막내아들을 보면 ‘짱꼴라’라고 부르며 놀리곤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중국음식점 앞을 지나칠 때마다 목청을 높여 당시 유행했던 ‘비단장사 왕서방’이라는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래서 그랬던지 그 중국집 아이는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늘 외롭게 지냈다.
그런데 언젠가 화폐개혁을 할 때 중국음식점 주인이 화폐를 교환하기 위해 집안에 숨겨뒀던 구권화폐를 군용 더플백 두 개에 꾹꾹 눌러 담아 들고 왔더라는 소문이 돌았다. 또한 아이들 사이에서는 그 중국요리집 주인이 도둑이 들까봐 건물 벽돌 속에 금덩어리를 몰래 감춰뒀다는 얘기가 돌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으니 어린 나이에 얼마나 호기심이 많았겠는가. 나는 몇 몇 동리아이들과 함께 금덩어리를 찾을 요량으로 저녁나절이면 중국집 벽에 귀를 대고 조그만 돌멩이로 두드려보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빈 소리가 나는 벽돌을 쇠꼬챙이로 후벼 파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실없는 장난이 오래 갈 리가 있겠는가. 벽돌 하나하나에 표시를 해가며 돌멩이로 두들기던 우리는 금덩어리를 찾기는커녕 며칠 되지 않아 중학교에 다니던 중국집 큰아들에게 붙잡혀 호되게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 큰아들은 중국말로 뭐라 소리치며 우리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따귀를 마구 때렸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마도 아이들로부터 놀림당한 울분을 우리에게 풀어버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요즈음 중국이 자국의 국경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 불리는 중국의 역사왜곡 시도가 韓中 외교문제로 비화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의도대로라면 우리의 웅혼했던 고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역사는 중국역사에 편입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반발을 고려하여 이를 당장 정치쟁점화하지 않고 연구에 맡기겠다며 한 발을 뺌으로써 갈등은 일시 봉합된 상황이다. 그러나 중국이 언제 이 문제를 들고 나올지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그동안 韓中관계도 많이 바뀌었다. 중국은 그동안 북한 위주의 한반도 정책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적국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말처럼 중국은 대외개방정책을 쓰면서 우리나라와 반세기에 걸친 반목의 역사를 끝내고 우호적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중국은 개혁실용주의 노선을 펴면서 우리나라 주요 교역대상국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많이 경험했듯 중국의 태도가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중국의 역사왜곡 시도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잠시라도 방심을 하면 엄연한 우리의 역사를 한순간에 빼앗기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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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06일 09:12분 17초 | | |
첫댓글 박정희의 국내 화교들에대한 견제정책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