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여 대한민국을 기억하소서!
성경본문 : 잠언 14: 34
34.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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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호 목사
우리 옛 선인들의 말에 ‘감어수’(鑑於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물에 자기의 얼굴을 비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감어인’(鑑於人), 즉 가족이나 이웃과 같은 주위 사람들에게 비추어지는 모습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차원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감어신’(鑑於神), 하나님께 비추어지는 모습과 ‘감어도’(鑑於道), 말씀앞에 비추어지는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비추어 보며 믿음의 길을 달려나갔습니다.
이처럼 ‘의(義)’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윤리적인 차원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의롭다 인정해줄 때 의로운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곧은 자세를 말합니다.
본문에서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한다”(높인다, 진흥시킨다)고 했습니다(34절). 하나님앞에 올바로 서있는 백성들이 나라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의’란 개인을 영광스럽게 하며, 가정과 한 국가의 기강을 올바르게 세웁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
죄’란 하나님과 등진 왜곡된 상태,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 자리를 이탈한 상태를 말합니다. 죄는 개인을 수치스럽게 하고, 가정을 무너뜨리며, 나라를 욕되게(Disgrace) 합니다. 의가 빠진 과학이나 문명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시대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죄를 짓는데도 더 빨라졌습니다. 대량살상무기의 개발로 남을 해하는데도 얼마나 지능적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은 계약결혼이나 다름이 없듯이 '의'가 빠져 형식만 남은 신앙생활은 우상숭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의가 빠진 가정, 국가 이 모든 것이 사상누각입니다. 우리 인생이 가장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데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의를 행하는 것에는 점점 둔감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4.13총선과 구제역, 산불등 이러한 어수선한 시국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세가지 자세를 본문을 통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선지자의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의를 열망하는 사람입니다. 온 백성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것이 선지자의 임무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한 후에 가족과 친척, 그리고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시대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갈망해야 합니다.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선지자의 분별력과 의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개인의 인격과 삶, 그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선지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나사렛 신학대학의 백위열 총장은 한 신문칼럼에서 “한국은 극적인 것, 큰것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삶의 모든 것이 특별할 수는 없다. 중소기업이 있어야 대기업이 있는 것처럼 한국은 한번에 한걸음씩이라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 한국 사람들이 큰 것, 이름내는 것에 그토록 관심이 많을까요? 이는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배운 가치관이 돈과 출세와 명예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치관 안에는 ‘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의가 뒷받침되지 않을 때 인간의 삶에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깨뜨리더라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더 높아질 수 있다. 더 많이 누릴수 있다, 더 많이 소유할 수 있다”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을 때 인간에게 불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에덴동산의 속삭임은 지금도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대해 배우는데 그치지 말고 역사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을 탈피하기 위한 경제개발과 민주화와 세계화에 이르기까지 숨가쁜 역사의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가 설 자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가 상실된 가운데서 누리는 물질적인 풍요는 결코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곳입니다.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만 더욱더 의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963년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타계했을 때 존.F케네디의 연설 중에 “아메리카는 그 무력 때문이 아니라 그 문명의 탁월성 때문에 전세계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숫자적인 규모 이전에 윤리적인 탁월성과 의가 있기에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2.제사장의 축복권을 사용해야 합니다(11:11).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祝願)을 인하여 진흥합니다(11절). ‘축원’은 ‘경배하다, 무릎꿇다, 찬양하다’의 의미입니다. 정직한자의 축원은 올바른 예배와 기도생활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성읍이 부흥한다(고상하게 된다, 가치가 높아진다, 이름이 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백성을 축복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이 민족의 축복의 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족의 정신과 양심을 새롭게 하는데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민족에게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제사장으로서 축복권을 사용해야 합니다. 절망하는 자, 빈익빈 부익부로 상처받은 자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가치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낙심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우는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성도와 교회가 할 일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따뜻한 주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애국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올바른 삶이야말로 이 나라를 부흥시키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축복권을 사용하십시오. 내가 축복을 받았다면 그것을 확산시키고 나누어주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선지자의 분별력과 제사장의 축복권이 균형을 이룰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나라를 진흥시키는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3. 왕으로서 섬기는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16:12).
우리는 지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장으로서, 학교에서 교사로서, 직장에서는 중견사원으로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왕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왕의 담대함과 권세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합니까?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왕의 보좌는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서게 됩니다(16:12). 이는 성도들의 삶이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선다는 것입니다.
왕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공의로 재판합니다(잠31:9).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합니다(잠29:4). 왕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로 인하여 살아야 합니다(잠8;15). 공의가 사라진 사회는 주님이 심판하십니다(미가서3:9-12).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경제적인 빈익빈 부익부, 성적타락, 가정의 파괴, 사치, 쾌락추구, 권력자들의 강포, 무너지는 교육현장등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 선지자의 분별력과 제사장의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왕으로서 의를 행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의로 죄를 다스리십시오.
공의와 죄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죄에 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자랑하며 악하게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전8:11). 죄는 방치하면 더 커집니다. 따라서 의로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둘째, 공의를 행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십시오.
공의를 행하는 것은 의인에게 즐거움입니다(잠21:15). 의를 실천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십시다. 이는 우리를 선한일에 열심을 내는 친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셋째, 의를 전염시키십시오.
우리 모두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읍시다. 좋은 것을 전염시키는 사람과 악한 것을 전염시키는 두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좋은 것을 전염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의를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선지자의 분별력과 제사장의 축복권, 그리고 왕의 권위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합니다(잠14:34).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주어진 의가 우리의 순종과 충성과 헌신을 통해 아름답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주에는 4.13 총선이 있습니다. 책임있는 선택과 결정으로 이 나라를 세우며 영화롭게 하는 일에 마음껏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