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7]
정대화 (鄭大和) - 내조자로서의 한평생
2. 이화여대 퇴학 사건 - 1
1 그 해 이대 기숙사생들을 중심으로 연희대생들, 지식인들이 원리를 들으러 몰려왔다. 청년회도 조직되었다. 나도 건강이 회복되어 이대에 복교하여 공부할 당시였다.
2 최원복(崔元福) 선생, 김영운(金永雲) 선생, 한충화(韓忠嬅) 선생, 옥세현 (玉世賢) 할머니, 이득삼(李得三) 할머니, 이수경(李秀卿) 선생, 이정호 이대 국문과 교수, 김순화 보사부 부녀국장, 그 외 여러 식구들과 이대생, 연대생들로 예배당은 꽉 찼다.
3 예배 분위기는 찬송을 할 때부터 울음바다가 되었고 아버님께서 찬송을 인도할 때는 1절부터 4절까지 되풀이하고 되풀이했으며 영적 분위기가 최고로 고조된 다음에 설교 말씀을 하시면 은혜를 안 받는 사람이 없었다.
4 점점 이대 기숙사생을 중심하고 많은 학생들이 물밀듯이 원리 말씀을 들으러 왔다. 또 교내에서도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교수, 학생들이 열심히 전도를 했다.
5 이렇게 되자 캐나다 감리교 선교회의 원조를 받고 있던 이화여대에서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6 더욱이 원리를 들은 학생들은 성적이 우수하고 신앙이 돈독하고 품행이 단정한 모범생들이었기 때문이다.
7 겁이 난 학교 당국은 통일교회가 왜 이단인지 이론적으로 설득할 수 없자 그 시대의 권력을 독차지한 박마리아 등과 합세하여 10가지의 설문지만을 주고 학교 방침이니 학교와 교회 중 양자택일하라는 것이었다.
8 교회를 선택한 우리 14명은 학교 측에 항의를 하면서, 우리를 퇴학시키는 이유에 대해 이론적으로 말해달라고 총장 사택에 가서 2일간이나 밤을 새우며 간청했지만, 우리들과는 한 마디 대화도 없이 5월 11일부로 집으로 퇴학 통지서를 보내왔다.
9 이 사건을 두고 사회 각지에서는 우리 편을 들어주었다. 특히 동아일보 사설은 우리 편이었다.
첫댓글 통일교회 신앙 이유로 이화여대생 14명 퇴학, 신미식(申美植) 사길자(史吉子) 김정은(金正恩) 서명진(徐明鎭) 김경식(金卿植) 박승규(朴承圭) 지생련(池生蓮) 정대화(鄭大和) 박영숙(朴榮淑) 임승희(林承姬) 이계순(李桂淳) 강정원(姜貞遠) 최순화(崔淳嬅), 김숙자(金淑子)씨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