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일야구도하기 / 박지원
(나) 차마설 / 이곡
[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가) 이제 나는 한밤중에 한 줄기 황하를 아홉 번 건넜다. 황하는 장성 밖에서 나와 장성을 뚫고서 유하와 조하, 황화와 진천 등 여러 물줄기를 한데 모아, 밀운성 아래를 지나면서는 백하가 된다. 나는 어제 배를 타고서 백하를 건넜는데, 이곳의 하류이다.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서지 않았을 때 바야흐로 한여름 불볕 속에 길을 가다가 갑자기 큰 강물이 앞에 나오는데, 붉은 파도가 산처럼 일어서며 그 끝 간 데가 보이지 않았다. 이는 대개 천 리 밖에 폭우가 내린 때문이었다.
물을 건널 때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길래, 혼자 생각에 사람들이 고개를 우러러 하늘에 묵묵히 기도를 드리는가 싶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물을 건너는 사람이 물이 세차게 거슬러 올라가며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제 몸조차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고, 눈은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것만 같아 문득 어찔해지며 빙글 돌아 물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니, 그 머리를 우러름은 하늘에 기도하자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경각에 달린 목숨을 묵묵히 빌 것이랴.
그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도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요동 평야는 평평하고 광활하기 때문에 물줄기가 성내 울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모르고서 하는 소리다. 요하(遼河)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밤중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낮에는 능히 물을 볼 수 있는 까닭에 눈이 온통 위험한 데로만 쏠려서 바야흐로 부들부들 떨려 도리어 그 눈이 있음을 근심해야 할 판인데 ㉡어찌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한밤중에 강물을 건너매, 눈에 위태로움이 보이지 않자 위태로움이 온통 듣는 데로만 쏠려서 귀가 바야흐로 덜덜 떨려 그 걱정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이제야 도 를 알았다. 마음이 텅 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을 밟혀 뒷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으자, 한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음에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 나자 ⓑ내 귓속에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앉은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았다.
예전 우임금이 황하를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등에 져 지극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살고 죽는 판가름이 먼저 마음에 분명하고 보니 용이고 도마뱀이고 그 앞에서 크고 작은 것을 헤아릴 것이 없었다. 소리와 빛깔은 바깥 사물인데 바깥 사물이 항상 눈과 귀에 탈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바르게 보고 듣는 것을 잃게 만듦이 이와 같다. 그러니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 그 험하고 위태로움이 황하보다 심하여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통이 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 장차 산중에 돌아가 다시 앞 시내의 물소리를 듣고 이를 징험하여, 장차 몸놀림에 교묘하여 스스로 총명하다고 믿는 자를 경계하리라.
(나) ⓒ나는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간혹 남의 말을 빌려서 탔다. 그런데 노둔하고* 야윈 말을 얻었을 경우에는 일이 아무리 급해도 감히 채찍을 대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넘어질 것처럼 전전긍긍하기 일쑤요, 개천이나 도랑이라도 만나면 또 말에서 내리곤 한다. 그래서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에 발굽이 높고 귀가 쫑긋하며 잘 달리는 준마*를 얻었을 경우에는 의기양양하여 방자하게 채찍을 갈기기도 하고 고삐를 놓기도 하면서 언덕과 골짜기를 모두 평지로 간주한 채 매우 유쾌하게 질주하곤 한다. ㉣그러나 간혹 위험하게 말에서 떨어지는 환란을 면하지 못한다.
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달라지고 뒤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남의 물건을 빌려서 잠깐 동안 쓸 때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진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지 않은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이 생기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백승(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인데, 더군다나 미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노라.
*노둔(老鈍)하고: 늙어서 재빠르지 못하며 둔하고.
*준마(駿馬): 빠르게 잘 달리는 말.
*비복: 계집종과 사내종을 아울러 이르는 말.
01. ㉠〜㉤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글쓴이는 사람들이 현상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② ㉡: 낮에 물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이유는 시각에 정신이 팔려 물소리를 들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③ ㉢: 글쓴이는 한번 떨어질 각오를 함으로써 감각에서 오는 공포를 극복하고 있다.
④ ㉣: 글쓴이는 말을 고를 때 말을 선택하는 목적을 고려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⑤ ㉤: 빌린 물건일 때보다 자신이 소유한 물건일 때 심리 변화가 더 클 것이라는 의미이다.
02. <보기>를 바탕으로 윗글을 이해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경험적 자아는 글쓴이가 경험을 하는 시점에서 존재하는 자아를 의미하고, 서술적 자아는 글을 쓰는 시점에 존재하는 자아를 의미한다. 경험은 글 속에서 무질서하게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의도에 따라 구성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경험적 자아와 서술적 자아가 일치할 수도 있지만, 시간적 거리를 두고 분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경험적 자아와 서술적 자아 사이의 시간적 거리는 자신의 경험에 대한 반성적 거리로 작용함으로써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기도 한다.
① (가): ⓐ는 과거 요하를 건넜던 경험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이때의 ‘나’는 경험적 자아라고 볼 수 있군.
② (가): ⓑ에서 ‘나’는 황하를 건너는 시점에 존재하는 경험적 자아로서, 경험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고 있군.
③ (가): 글쓴이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과거 경험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구성하여 제시하고 있군.
④ (나): ⓓ에서 ‘나’는 현재 「차마설」을 짓는 시점의 자아이므로 ⓒ의 경험적 자아인 ‘나’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군.
⑤ (나): 글쓴이는 말을 빌린 자신의 경험에 대해 반성적 거리를 가짐으로써 소유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을 얻고 있군.
03. (가)의 도와 (나)의 뜻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가)의 ‘도’와 달리 (나)의 ‘뜻’은 감각에 현혹되지 않고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② (나)의 ‘뜻’과 달리 (가)의 ‘도’는 이성보다는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이 참된 지식임을 강조하고 있다.
③ (나)의 ‘뜻’과 달리 (가)의 ‘도’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매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④ (가)의 ‘도’와 (나)의 ‘뜻’은 모두 소유한 바에 따라 인간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⑤ (가)의 ‘도’와 (나)의 ‘뜻’은 모두 외물(外物)에 영향을 받기 쉬운 인간 마음을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