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교부들의 가르침: 테르툴리아누스
그리스도교 수호 앞장 '하느님의 전사'
광주가톨릭대 교수 노성기 신부
오늘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로 여행을 떠나자. 지금의 리비아 북부에 위치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가까운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일찍부터 교통과 무역이 발달한 도시로 그곳에는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원형극장이 있었다. 자부심이 강한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인들을
살인과 강도질로 제국을 세운 악당들이라고 멸시했다. 오늘 우리가 만날 인물은
테르툴리아누스이다.
그의 아버지는 총독 관저의 백인대장이었다. 155년경에 카르타고의 이교 가정에서 태어난
테르툴리아누스는 법률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어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장래가 보장된
출세를 포기하고 195년경에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 혹독한 박해 중에도 신앙을 지킨 채
피를 흘리며 순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적인 행동이 그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평신도였던
그는 그 어떤 사제나 주교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교를 수호한
불같은 열정을 지닌 하느님의 전사(戰士)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중상모략과 박해에 대해 반박한다. "테베레
강이 범람하거나 나일강 물이 마른다면, 날씨가 변하지 않거나 지진이 일어난다면, 행여
기근이나 페스트가 발생한다면, 사람들은 즉시 '그리스도인들을 사자의 밥으로 내던져라'
하고 소리칠 것이다. 맹수 한 마리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호교론" 40,
2).
수사학과 고급 라틴어에 능통한 테르툴리아누스는 변호사 출신답게 명쾌한 논리와 간결한
문체로 상대를 제압한다.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고, 고문하고, 저주하고, 파괴시켜
보아라! 너희의 사악함이 우리의 무죄를 증명할 뿐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것이다"("호교론" 50, 12). "우리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더 늘어난다.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기 때문이다"("호교론"
50, 13).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방인들의 축제에 참여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방인들의 축제는 우상숭배의 온상이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이방인들과 함께 세상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들의 오류까지 함께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호교론" 42 참조). 또한 그는 우상을 조각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직업에 종사하지 말고, 돈을 적게 벌더라도 다른 일을 하라고 충고한다. "마르스
신(軍神)을 조각하는 자는 찬장도 쉽게 만들 수 있지 않는가!("우상숭배론" 8장).
예리한 판단력과 통찰력을 지닌 테르툴리아누스는 성격이 불같았다. 뜨거운 열정과 엄격한
도덕성을 지닌 그에게 적당한 타협이란 없었다. 그의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말이 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으며, 아테네 학파와 그리스도교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이단자 규정" 7).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단에 맞서 정의의 펜을 들고 이단자들과 불같은 논쟁을 벌였다. 그는
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마르치온이 생각하는 십자가의 수치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지혜와 희망과
구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너는 신앙에 필수적인 이 수치를 없애려드느냐? 네가 하느님께 부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나에게는 유익한 것이다"("그리스도의 육신론" 5, 3).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은 부끄러워할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하느님의 아들이 죽으셨다는 사실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다. 묻히신 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다"("그리스도의 육신론" 5, 4).
초대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라틴 신학의
창시자였다. 그는 교회 안에서 최초로 라틴어로 작품을 썼다. '한 본체 안에 세
위격'이라는 삼위일체 정식을 만드는 등 수많은 라틴어 신학용어를 만들어냈다. 그가 만든
라틴어 신조어가 무려 982개나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가 그리스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면, 테르툴리아누스는 라틴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치프리아누스 주교는
테르툴리아누스의 글을 매일 읽으면서 '스승'으로 존경했다.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생활을 강조한 그는 배우자가 죽은 후에 재혼하는 것도 간음이며,
박해를 피해 피신하는 것도 배교라고 주장했다. 그는 배교, 살인, 간음과 같은 대죄는
교회도 사해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교를 온몸으로 수호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206년경부터 가톨릭 교회를 맹렬히
비난하고 성령의 교회를 강조하면서, 초대교회의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몬타니즘
이단에 빠져들었다. 가톨릭 교회의 교계 제도를 비난하면서 보편 사제직을 주장했다.
성령의 교회와 주교들의 교회, 의인들의 교회와 죄인들의 교회를 비교하면서, 성령의
교회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참된 교회이지만, 주교들의 교회는 멸망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가 정통 교회를 등지고 이단에 빠진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당시 카르타고 교회는 신자 수는 증가했지만, 신앙의 질은 떨어지고 있었다.
배교자들과 죄인들이 많았고, 행실이 나쁜 성직자들도 있었다.
박해가 끝나자 배교자처리 문제로 극한 대립을 보였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처럼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한다고 굳게 믿었다. 주님을 열렬히 사랑한 나머지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그는, 끝내 교회가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그의 불같은 사랑 앞에 벅찬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부부란 고난과 기쁨을 함께 하며, 시편과 영가를
함께 부르고, 서로 경쟁하다 시피 하느님을 찬양해야 한다던 그의 말처럼("부인에게"
II. 8, 8 참조), 신자 부부들도 서로 앞다투어 하느님을 찬양하고 가족기도를
즐겨바치는 성가정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가톨릭신문, 2003년 4월
1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