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기도, 부처님이 다 들어주셨다”200여년의 명맥불교를 잇다가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다시 중창된 제주불교. 불교의 불모지 제주땅에 100여년 만에 뿌리 깊은 부처님 법이 굳건할 수 있었던 것은 스님들이 불법을 펼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묵묵히 소임을 다했던 ‘화주(化主) 보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화주란 의미를 사전에서 살펴보면 ‘사람들로 하여금 법연(法緣)을 맺게 하고, 시주를 받아 절의 불사를 일으키는 이’를 말한다.
본지는 불기 2558년 갑오년 새해를 맞아 제주불교 100여년 역사 속에 숨은 대화주(大化主)의 삶을 통해 제주불교의 역사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제주불교의 불사 산파 역할을 했던 임덕희 보살의 이야기를 싣는다. 이 내용은 1990년 후반 임덕희 보살의 본지와 인터뷰했던 육성자료를 토대로 작성됐다. <편집자 주>
|
▶ 사진설명 : 임덕희 보살 영정 사진 |
임덕희(만덕행) 보살의 아버지는 스님이었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며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로 참가한 백용성 스님이 임덕희 보살의 아버지의 출가 은사이다.
임덕희 보살의 어머니 팔자에는 아기의 운이 없었다고 한다. 오빠 둘을 낳았지만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정성껏 기도해 1923년 음력 6월 14일 낳은 딸이 바로 임덕희 보살이다. 임 보살의 심신이 굳건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머금고 자라난 임 보살은 19세에 결혼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편을 본 순간 “단명할 운명”이라며 “칠성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임 보살에게 당부한다. 진정 임 보살이 결혼을 한 후 남편은 누워만 지냈다. 처음에는 10년도 못 산다는 의사에 말에 1년에 3번은 정성껏 칠성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는 “남편이 39세면 명을 다할 것”이라고 말하자 임 보살이 “그럼 어떻게 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냐”는 물음에 아버지는 “스님들에게 가사불사를 하면 부처님의 무량공덕으로 남편의 명을 이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임 보살이 결혼 후 10년 만인 29세에 당시 재적 사찰이었던 제주시 도남동 제석사에서 스님 25분을 모시고 보름동안 가사불사 법회를 봉행한다. 임 보살은 당시 법당 소임을 맡으면서 남편이 39세를 넘어 장수하길 기원하며 일념으로 정성껏 부처님께 기도했다.
당시 제석당에서 열심히 기도할 무렵 광주에서 오신 덕명 스님이 임 보살의 손을 꼭 잡으며 “보살의 남편의 명은 걱정을 하지 말라. 당신이 살게 만들 것이다. 당신이 관세음보살로 화현해 이제부터 소원이 이뤄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임 보살의 지극한 정성에 부처님도 감동 받았으리라 믿었다. 이 같은 금강석 같은 신심으로 다음해에도 가사불사를 봉행한다.
임 보살, 부모의 간절한 기원으로 태어난 불제자제석사․불탑사․보림사 등 화주로 불사 중추역할그 무렵 아버지가 원당봉 정상과 불탑사 5층 석탑에서 기도를 해서 자신을 낳았다는 원당봉과 불탑사를 찾아가 볼 것을 권한다. 불탑사는 1948년 4․3으로 인해 소실돼 스님과 신도들은 삼양마을로 내려가 있는 상황이었다. 5층석탑 주변으로는 관리가 허술해 마․소들의 배설물 등으로 지저분해 있는 모습을 보고 임 보살은 “돈이 없었지만 5층석탑 주변만큼은 깨끗이 하고 싶었다”고 발원을 세웠다.
당시 불탑사 주지 덕성화 스님과 논의한 끝에 화주가 된 임 보살은 스님 5분을 모시고 일주일 동안 기도를 봉행, 그 시줏돈으로 불탑사 주변에 마․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산담을 쌓은 후부터 불탑사는 본격적인 불사에 돌입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임덕희 보살의 재적사찰인 제석사 창건주 고자선화 보살이 “자기 절은 놔두고 남의 절에 가서 불사를 한다”고 역정을 냈던 것. 이에 임덕희 보살은 당시 초가집 법당이었던 제석사 대웅전을 헐고 화주로 나서 신도마다 1인당 300원 씩 시주를 받아 새롭게 법당을 짓고, 요사채 등을 조성하게 된다.
불사를 마친 후 1950년 중반 조계종․태고종단 간의 분규(조계종에서는 이를 ‘정화’라고 하고, 태고종에서는 ‘법난’이라고 함)가 일어난다. 전남 장성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한국불교 청정성 회복에 힘쓰셨던 송만암 스님은 분규가 치열하게 전개될 무렵 조계종단이 종조를 태고보우에서 보조지눌로 바꾸는데 거부, 태고종 전신인 불교조계종 종정을 역임한다. 송만암 스님은 1957년 1월 열반에 드셨는데 사리 8과가 나왔다. 제주불자들이 스님의 사리 1과를 제주에 모시겠다는 의견이 모이면서 제주시 건입동 보림사 창건 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한다.
당시 조계․태고종 스님 간 반목이 심해질 무렵 임덕희 보살은 불자들을 정광사(당시 코리아 극장 인근)에서 ‘불교친목회’를 조직해 한달에 정기법회를 봉행하고 기도비를 적립해 나간다. 당시 불교친목회에 100만원이 조성됐는데 이에 임 보살이 보림사의 터를 시주한 후 친목회비로 요사채를 짓고 3년 동안 송만암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봉안하게 된다. 이어 당시만 해도 여법한 대웅전을 짓고, 그 옆으로 시왕전을 임덕희 보살과 고정삼 보살의 시주로 불사를 완성하게 된다. 보림사를 장엄하게 낙성하고 임덕희 보살은 남편이 있는 일본으로 밀항을 하게 된다.
남편의 단명을 부처님께 간절한 기도로써 극복일본 밀항 등 어려운 환경 속 오로지 ‘부처님’이에 앞서 임덕희 보살은 제석사와 불탑사 중창불사를 마치고 일본으로 밀항하는 쪽배를 타게 된다. 32살에 처음 일본으로 밀항한다. 70여명이 쪽배 밑에 숨어 그야말로 숨 쉴 틈만 남겨놓은 공간이었다. 갑자기 풍파를 만나 쪽배에서 “빠지직”하는 소리에 밀항자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지만 임덕희 보살은 ‘부처님이 우리를 살려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관세음보살”만 죽기 살기로 염했다고 한다. 임덕희 보살의 갸륵한 정성이 부처님에게 전해졌는지 그 쪽배는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닿자마자 파산되고 만 것이다. 하지만 밀항으로 걸려, 일본 수용소에서 1년 동안 생활하는 등 모진 고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임덕희 보살은 수용소에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절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밀항으로 수용소에 함께했던 제주도민들에게도 임덕희 보살의 불심에 감화되어 많은 이들이 불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음 下편에는 임덕희 보살이 일본에서의 관음사 시주, 덕흥사․용화정사․군법당 해봉사 부설 해봉유치원․삼광사 창건화주의 역할을 통해 제주불교 불사의 산파 역할을 했던 이야기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