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사로잡은 이런 현실 참여적인 열정은 이내 “역사는 이데올로기이며, 그것은 곧 폭력”이라는 역사 허무주의로 대체된다. 전시인 1951년 그는 세 번째 시집 『기(旗)』를 ‘문예사’에서 펴낸다. 이 시집에서 그는 자신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내면 공간으로 돌아가 존재의 위치와 자세를 탐색해나간다. 1952년 김춘수는 진주에서 설창수 · 구상 · 이정호 · 김윤성 등과 함께 동인 ‘시와 시론’을 만들고, 동인지 『시와 시론』에 시 「꽃」과 산문 「시 스타일론」을 싣는다. 이어 1953년에는 네 번째 시집 『인인(隣人)』, 1954년에는 시선집 『제일시집(第一詩集)』과 시론집 『세계 근대시 감상』을 내놓는다.
1955년 그는 『현대공론』에 소설 「유다의 유서(遺書)」를 발표한다. 1956년에는 부산대 강사 시절의 제자인 고석규의 주선으로 유치환 · 김현승 · 송욱 · 고석규와 함께 동인지 『시 연구』를 내지만, 고석규의 죽음으로 더 이어가지 못한다. 1958년 그는 『문학예술』에 연재한 글을 엮은 첫 시론집 『한국 현대시 형태론』을 펴내 같은 해 12월에 제2회 ‘한국 시인 협회상’을 받는다.
김춘수는 이미 부산대학교와 해군사관학교 등에 출강한 바 있지만 일제 때의 갑작스런 피체와 감옥살이로 대학교를 중퇴한 이력 때문에 정식 교수로 인정받지 못한다. 1959년 4월, 그는 문교부 교수 자격 심사 규정에 의해 비로소 국어 국문학과 교수 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6월 들어 예전에 주조를 이루던 막연한 감상의 분출이나 상투적 수사 또는 비유는 많이 줄이면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존재의 탐구로 나아간 시집 『꽃의 소묘』를 펴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토록 열심히 찾아 헤맨 ‘존재’는 손에 닿는 순간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잦아들거나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지기만 할 뿐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 너는 이름도 없이 / 피었다 진다. //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 나는 한밤내 운다.”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일부, 『꽃의 소묘』(청자사, 1958)
「꽃」은 김춘수의 존재론적 추구가 가 닿은 절정에서 홀연히 피어난다. 이는 감각적인 실재라기보다는 불모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의미의 실재다. 평론가 신범순은 이 ‘꽃’에 대해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순결하게 자신의 의미를 아름답게 개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하나의 존재론적 기호”라고 말한다.3)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일부, 『꽃의 소묘』(청자사, 1958)
저 밑바닥에서 ‘하나의 몸짓’으로 세계 속에 존재하던 그 무엇은 이름이 불림으로써 하나의 의미 있는 존재로 끌어올려진다. 개체로서의 존재 양식 밑바탕에 있는 것은 고독이다. 관계 맺음 이전의 뜻없는 사물 일반은 그저 무의미한 ‘하나의 몸짓’일 뿐이다. 시인은 뜻없는 존재이던 그것(꽃)에 이름을 붙이고 호명함으로써 실존의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름’은 ‘언어’에 다름아니고, 언어는 곧 의미 부여 행위의 매개체다. 이 무렵 김춘수는 “시를 잉태한 언어는 피었다가 지는 꽃들의 뜻을 든든한 대지처럼 제 품에 그대로 안을 수가 있을까.”라며 언어가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품을 수 있을지, 또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에 붙은 이름들이 제대로 붙여진 것인지 의문을 품는다.
시집 『꽃의 소묘』를 내놓은 그는 곧 ‘시인협회’의 중앙 위원이 되며,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으로 제7회 ‘자유 아세아 문학상’을 받는다. 1960년에는 마산의 경남대학교4) 조교수로 임용된 데 이어 1961년에는 경북대학교 문리대 전임 강사를 맡는 한편 시론집 『시론』을 펴낸다. 1963년 그는 『현대문학』에 체험을 바탕으로 써낸 단편 소설 「처용」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64년에는 경북대학교 교수로 임명되고 1966년에는 ‘경상남도 문화상’을 받는다. 그는 1960년대를 이렇게 의욕적으로 보내지만, 정작 창작의 측면에서는 1959년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을 내놓은 뒤 별다른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꽤 긴 공백기를 갖는다. 그러나 이런 공백기 또한 결코 나태하게 보낸 시간이 아니라는 게 1969년에 이르러 여실히 입증된다.